174화 제국의 계승자
광무 16년 8월 14일.
조선 개국 520주년을 기념하는 개국기원절 행사가 거행되었다. 개국기원절은 매년 있었지만, 10년 주기로 큰 행사를 치르도록 했다.
먼저 황제의 조령이 반포되었다.
"짐이 생각건대, 하늘이 우리 종묘사직을 도운 결과 나라의 운수가 장구하여 경사스러운 개국기원 520년을 맞이했으니, 짐의 기쁨과 축하하는 마음은 여느 해보다 특별하다. 이에 문무신료와 국민들과 이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한다."
개국기원절 당일, 이선은 종친 및 칙임관들과 함께 종묘에 가서 서고(誓誥)하였다.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이선은 황제의 면복을 입고 종묘에 고하였다.
「황조(皇祖, 태조)와 열성(列聖)의 신위 앞에 삼가 고합니다. 생각건대 짐은 우리 조종(祖宗)의 큰 왕업을 이어, 위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며 조종의 위업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태조 고황제께옵서 왕조를 세우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지도 520년이 되었으니, 짐의 대에 이르러 시운(時運)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개화하였으며, 조정과 백성의 의견이 일치하고 우방과 연대하여,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국운이 융성해져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만방에 빛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삼가 하늘에 계신 조종의 신령께 고하노니, 조종이 남긴 업적을 우러러 능히 공적을 이룩하도록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제가 서고를 마치자, 종친과 칙임관의 만세삼창이 쏟아졌다.
올해 개국기원절은 더욱 특별했다. 단순히 520주년을 맞이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변동 직후라 그랬다.
유림들은 마침내 대한이 중화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가뜩이나 고깝게 생각하던 만주족의 청조가 중국에서 물러난 순간, 더 이상 중화가 아니었다. 이들에게 있어 공화국인 중화민국도 정통 중화라 할 수 없었다.
유림들은 이제 조선 소중화론을 넘어 대한이 정통 중화가 되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개국기원절에 맞춰 유림들은 황성으로 상경하여, 입을 모아 외쳤다.
"아! 대한이 마침내 중화의 정통을 계승하기에 이르렀도다!"
"그간 만청 오랑캐가 중화의 정통을 빼앗아 참칭하였으나, 이제 바른 길을 찾게 되었도다!"
"공화를 자처하는 자들이 어찌 중화를 이름에 담는가?"
"중화의 계보는 한·당·송·명에서 조선으로 이르렀으니, 대한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겠는가?"
유림들에게 ‘중화’란 ‘중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보편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대청제국이 붕괴한 1912년에 이르러, 대한제국이 보편 문명의 계승자로서 천하의 중심임을 선언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태조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왕조를 개창하시고, 금상(今上)께서 천명을 받아 제국을 개창하셨으니, 감히 만청과 민국이 따를 수가 있겠는가!"
"황제 폐하야말로 천명을 계승한 분이시니, 누가 감히 천명에 맞서겠는가?"
"그렇다! 천하를 다스릴 권리는 참칭자가 아니라 우리 성상께 있지 않겠는가!"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이선이 이끈 급진 개화정책에 유림들은 오랫동안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 반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독립전쟁과 북벌의 성공은 이미 유림들의 마음을 돌려놨고, 대청제국의 붕괴로 정점을 찍었다.
이제 유림에게 있어 이선은 ‘서양에 홀려 전통을 파괴한 패도(覇道)적 군주’에서 ‘천명을 받아 선견지명의 혜안을 갖춘 성군’으로 격상되었다.
"이는 서양으로 비유하자면 로마입니다. 로마의 정통은 동로마가 계승하였고, 동로마는 튀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정통은 살아남아 제3의 로마가 계승하였지요."
"과연.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인 것처럼, 서울은 동양의 제3로마인 것이군요."
동서양의 역사에 두루 밝은 학무대신 이상설이 주한 서양 사절들에게 로마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특히 한국의 우방인 러시아의 ‘제3로마’에 빗대는 설명에, 주한 러시아 공사는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저 케케묵은 유림 놈들은 아직도 죽은 중화의 시체를 더듬으며 정통 중화 타령을 하는구려!"
"이미 대한은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후계이거늘, 무슨 놈의 중화를 계승했단 말이냐?"
"대한은 대고구려의 후예로 충분하다!"
서울 황성부에서 개국기원절 행사가 성대히 개최되는 동안, 서경 평양부에서도 같은 행사가 열렸다.
평양은 여기에 독특한 성격을 하나 더 부과했는데, 바로 고구려-수나라 전쟁 승전 13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정복 야욕은 평양성과 살수에서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는 평양 사람들로서는 이보다 더 위대한 역사는 없었다.
살수대첩이 발생한 612년 7월을 기념해, 음력 7월 1일인 8월 13일에 승전 1300주년 행사가 개최되었다. 행사는 조청일전쟁의 평양 전투 승전을 기념하는 10월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고구려의 위대한 승리, 1300주년을 기념하며!"
"대한은 고구려의 후예로 부족함이 없으니, 개국 503년(1894) 평양 전투는 1300년 전 고구려의 승리에 빗댈 수 있는 위대한 승리였다!"
"평양 전투의 승리를 이끌고, 북벌을 이룩한 황제 폐하는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의 재래(再來)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대한제국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니, 정통 중화 계승론은 무의미했다.
1912년 대청제국의 붕괴는 중화의 천명이 교체된 게 아니라, 북방 민족이 조상의 땅으로 되돌아온 원년이었다. 대한제국이 바로 이들 북방 민족의 형제이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대한은 북방 민족의 동맹이자 보호자이다!"
"고조선-예맥-고구려-발해, 숙신-말갈-여진-만주, 동호-선비-거란-몽골, 돌궐-튀르크는 모두 형제가 아니겠는가?"
"대한과 만주, 몽골, 튀르크의 연합을 추구하자!"
"서로는 핀란드와 헝가리에서, 동으로는 대한에 이르는 유라시아 민족의 연합!"
때마침 헝가리와 오스만에서 온 투란주의, 핀란드에서 온 우랄-알타이 이론이 한국에 전파되면서, 단순히 한국 민족주의가 아닌 범민족주의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북방 민족의 세계도(世系圖)가 신채호를 위시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다. 이 계보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은 북방 제민족의 역사적 복원을 위한 사명이 있었다.
바야흐로 대청제국의 붕괴는, 대한제국에 있어 국가진로의 방향을 두고 백가쟁명의 장을 열고 있었다.
* * *
8월 15일, 태자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황제 즉위식과 개국기념일 의식이 전통적인 의례를 갖추어 행해졌다면,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계승자인 태자 책봉식은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십이장면복을 입은 황제 이선과 구장면복을 입은 황태자 이진은, 종친 및 문무백관과 함께 경복궁 근정전으로 나아가 의례를 행하였다.
이선은 단 위에서 책봉문을 선포하였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을 내린다. 황자 진은 총명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보통을 뛰어넘었고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으며, 착한 것을 선택하는 지혜가 이미 열렸고 얻은 것이 있으면 베풀기 좋아하니 백성들을 구제하는 도량을 알 수 있다.
…… 이에 오늘 황자 진을 황태자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니, 온 세상이 칭송하고 만년토록 복을 받게 되었으며 나라가 반석처럼 안전해졌다. 이미 종묘에 경건하게 고하였고 만방에 재차 경사를 반포한다.
아! 만대토록 끝없는 왕업을 이어 갈 것이니, 앞날의 백성들은 큰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온 세상에 포고하여 모두 다 듣고서 알게 하라.」
황제의 낭독이 끝나자, 태자 이진은 그 자리에서 국궁사배하였다.
"황태자 전하의 총명함은 어려서부터 나타난바, 개국기원절의 길한 날을 맞이하여 영광스럽게 동궁에 오르시니, 실로 국가의 크나큰 경사이자 홍복입니다!"
총리대신 박영효가 문무백관을 대표하여 찬사를 올렸다. 이윽고 산호(山呼)와 함께 만세삼창이 쏟아졌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천세!"
대례복 차림의 신료들은 홀(笏)을 들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그날 오후, 대원수 예복을 입은 황제 이선과 원수 예복을 입은 황태자 이진은 근위사단 제1연대 제1대대를 이끌고 경운궁을 나가 환구단으로 향했다.
이는 책봉에서 전례가 없는 일로, 서양식 의례였다. 국민의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의식이었다.
8월 중순의 무더운 날씨에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환호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천세!"
올해 16세인 이진은 미래의 군주이자 통수권자로서 첫 대면을 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하듯, 군모를 벗고 손을 들어 화답하였다.
"진아, 국민이 너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너는 대한의 황태자이자 계승자로서 막중한 책무를 지니고 있다. 네게는 언제나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보우할 책무가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예, 폐하! 진은 위로는 부황을 높이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을 넓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너에게 번영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물려주고자 한다. 너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헌법과 의회를 존중하고 군민공치(君民共治)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예! 진은 언제나 부황을 모범으로 삼아,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이진은 아버지를 존경과 숭앙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선은 격려의 뜻으로 아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는 입헌군주가 되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아니하고,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국가의 대표자로 남길 바란다.’
이선은 아직 아들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군주제의 변화를 염두에 두었다. 군주가 사실상의 전권을 행사하는 건 자신이 마지막이었다.
‘다만 이 아이의 기질이 조금 걱정되지만, 교육으로서 바른 방향을 이끌 수 있겠지.’
이진은 문자 그대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배했다. 이진에게 있어 이선은 위대한 군주의 표상이었다. 군주의 모범이란 곧 아버지였고, 아버지처럼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이선은 국가의 존립이라는 막중한 위기에 부딪혀 비상대권이 필요했던 자신의 시대와, 평화롭고 번영할 아들의 시대를 구분시키려고 했다.
‘세계사의 전개도 국민주권의 시대로 나아가겠지. 대한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
이선이 설정한 비상시국은 1910년대까지였다.
입헌제도와 의회정치가 궤도에 올랐고, 정치발전과 국민의식도 크게 함양되었다. 보편적 국민교육을 받은 세대가 주류를 이룰 1920년대가 되면,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고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선은 뒤로 물러나 아들의 후견인이 되어 국민국가의 완성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황태자 책봉 이틀 후, 친왕 책봉이 거행되었다.
「봉천승운황제는 다음과 같이 조령을 내린다. 옛 황제들이 천명을 받아 여러 아들을 책봉한 것은, 자손을 융성하게 하고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황자 이안과 셋째 황자 이은은 모두 황가의 귀중한 사람들로서 마땅히 높은 칭호를 주어야 한다.
이에 종묘에 삼가 고하노니, 황자를 친왕으로 책봉한다. 이안은 정왕으로 봉하고, 이은은 예왕으로 봉하였으며 금책(金冊)과 금인(金印), 칠장복(七章服)을 하사하였다. ……」
이안은 정왕(靖王)에 봉해지고, 이은은 예왕(叡王)에 봉해졌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은 대원왕의 장남이자 황실 의친(懿親)으로 처지가 특별하니, 응당 진봉(進封)의 거조(擧措)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흥왕으로 봉하고 완흥군부인 이씨는 흥왕비에 봉하라.」
종친의 우두머리이자 태상황의 형인 이재면에게도 특별히 친왕의 자리가 주어졌다. 이재면은 흥왕(興王)에 봉해졌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제국 선포 이후, 종친과 훈척들(勳戚)로부터 왕작과 오등작을 실시해달라는 청원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일부 대신들도 일본식 화족제를 참고하여 제국의 격에 맞는 귀족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했으니, 이선은 무시했다.
‘기껏 있는 신분제도 폐지하는데, 제국의 특권계급을 만들어 주자고? 내가 군주로 있는 이상 어림도 없다.’
이선은 왕작을 받을 수 있는 이를 4대조인 ‘정조 선황제의 직계 후손’으로 한정했다.
정조 선황제의 직계 후손은 3대조 순조, 조부 문조(효명세자), 황백(皇伯) 헌종, 그리고 문조를 계승한 부친 태상황의 후손들뿐이었다. 즉 순친왕 이척,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영, 정친왕 이안, 예친왕 이은이었다.
이재면은 예외적으로, 왕으로 추봉된 대원군을 계승할 장남으로서 인정받아 친왕 작위를 받은 것이었다. 친왕에 봉해진 이재면은 크게 기뻐하며 종친들에게서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단속했다.
"작위를 계승할 친왕의 장남은 공(公)으로 우대하며, 차남 이하는 작위는 없으나 황실의 일원으로 예우를 받는다. 친왕의 직계 증손자까지만 황족 예우를 받는다."
황족 예우도 증손자까지만 한정하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대한국에서는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과 공훈만 있으면 누구나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이선은 세습 귀족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대신 상훈을 세분화하고 대우를 높여, 공훈을 세운 문무관들에게 수여했다. 최하급 관료, 일개 사병 출신일지라도 공훈을 세우면 얼마든지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8월 17일, 친왕 책봉식은 경운궁 중화전에서 간략히 이루어졌다. 칠장복을 입은 두 소년이 국궁사배하였다.
혼혈아 이안은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갈색머리에 갈색눈, 새하얀 피부에 동년배들보다 큰 키. 색다르지만 빼어난 용모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정친왕의 용모가 범상치 않네그려. 훤칠하니 제왕의 상이야. 성상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네."
"어허, 경칠 소리를! 태자 전하가 계시는데 어디 감히……."
"아니, 누가 뭐랬나? 외모만 그렇다고."
어느덧 11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이안은 처신을 배웠다. 안은 자신의 외모가 다른 한국인들과 달리 독특하다는 것,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특이한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르가리타가 가르쳐 준 대로, 아버지뿐만 아니라 법적인 모친인 황후에게 효성을 갖췄다. 황태자 이진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 동생이지만 계승서열은 더 높은 이은보다 뒤에 섰다.
"안아, 너는 내 아들이다. 너를 친왕에 봉하였지만, 황실의 예법에 얽매일 생각은 없다. 너는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네, 아바마마."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안은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법적 모친인 황후도 안을 친아들처럼 아꼈고, 이복동생인 희와 은도 안을 곧잘 따랐다. 이복형과는 특별한 우애가 없었지만, 서로 예의를 갖추며 존중했다. 이진에게는 아버지가 원하는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으므로, 안에게도 형제의 우애를 따랐다.
광무 16년 여름, 태자와 친왕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국민들은 국가의 경사에 기뻐하면서도, 젊은 군주였던 이선이 어느덧 후계자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음을 인지하였다.
동시에, 대청제국의 붕괴 이후 대한제국이 어떤 제국의 계승자가 되어야 할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어느 쪽이 되었건, 현재의 틀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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