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99화 (498/812)

180화 땅과 바다를 넘어 하늘까지

1913년 3월 28일(율리우스력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서 역사적인 실험이 있었다.

24세의 항공 엔지니어 이고르 시코르스키(Igor I. Sikorsky)가 개발한 복엽항공기 <루스키 비탸지(Русский витязь, 러시아 기사)>, 일명 ‘르 그랑(Le Grand, 거대한)’.

루스키 비탸지는 비행기 역사상 최초로 4개의 엔진을 사용했다. 길이는 20m, 무게는 4,000kg로 600kg의 하중을 감당할 수 있었다. 조종석과 객실을 분리시켜 3명의 승무원 외에도 4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어, 시코르스키는 세계 최초의 여객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러시아 기사, 하늘을 날다! 세계 최대의 크기, 최고의 기록!」

3월 28일의 초도비행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러시아 언론은 속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세계에서는 믿지 않았다.

"그렇게 큰 비행기가 멀쩡히 날 수 있다고?"

"다른 나라도 못 하는 걸, 러시아 공업 수준으로 그게 말이 되냐?"

세계에서 결과를 믿지 않자, 시코르스키는 5월에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귀빈들을 초청하여 공개적인 비행에 나섰다.

귀빈 중에는 대한제국 황태자 이진과 영친왕 이영도 있었다.

시코르스키를 채용하여 후원한 기업은 러시아-발트 운송공사(Russo-Balt)로, 러시아-아시아 은행이 기업을 지배했다.

1910년 아시아 투자를 담당할 목적으로 설립된 러시아-아시아 은행은, 단기간에 주요 대기업들을 거느리는 러시아 최대의 자본으로 성장했다.

러시아-아시아 은행의 최대주주는 프랑스 신디케이트였고, 러시아 황실에 이어 3대주주가 바로 대한제국 황실이었다. 이선은 러시아에 투자한 자본 대부분을 스웨덴으로 옮겼지만, 브라노벨과 러시아-아시아 은행만큼은 지분을 유지했다. 이선의 대리인은 러시아-발트 운송공사의 비행기 제작에도 관여했다.

"폐하,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오오, 대단하군!"

시코르스키가 직접 운행하는 루스키 비탸지가 하늘을 날자, 차르는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근대 기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차르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 대해선 찬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비행시간은 1시간 54분으로, 당시까지는 최고 기록이었다. 차르가 친견한 이상 시코르스키의 성공을 더 이상 폄훼할 사람은 해외에도 없었다.

"황성에서 봤을 때보다 더 엄청난데요. 대한에서도 곧 저런 비행기가 날 수 있겠죠?"

이진은 특히 더 기뻐했다. 부황이 항공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진도 자연히 비행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 항공만큼은 대한이 동양에서 최고니까요."

대한제국에서는 이미 1908년에 라이트 형제가 방한하여 비행을 시연했다.

이때부터 한국의 항공 개발은 본격화되었으니, 그 결실이 마침내 맺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 * *

광무 17년 5월 31일.

황제 이선의 46번째 탄일을 축하하는 건원절이었다.

작년에 개국 52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국경일 행사가 있었기에, 올해는 국경일을 간소하게 치르겠다고 결정한 바였다. 분명 행사 규모는 작년보다 작았지만, 올해는 특별한 행사가 준비되었다.

"유 정위, 준비됐나?"

"하늘은 맑고 바람도 적당합니다. 비행하기 딱 좋은 날이군요."

"대한 항공대의 역사적인 첫 출발일세. 대원수 폐하께서 친견하고 계시니, 절대 실수는 없어야 하네."

"대한 항공대의 출발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단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귀관을 믿겠네."

대한제국 원수부 항공국 초대 국장 노백린 참장은 비행에 나선 편대장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라이트 형제의 세계 최초 비행을 직접 지켜본 노백린은, 태극을 새긴 대한의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날을 고대해 왔다.

‘마침내 이 순간이 왔구나.’

대한제국 최초의 군용 항공기 편대를 이끄는 27세의 유왈보(劉曰甫) 정위는 한국 최초의 비행사이기도 했다. 평안도 사람인 유왈보는 부모님을 잃고 이웃집에 양자로 들어간 이후 양부의 성을 따라 서왈보로 불렸지만, 양부가 돌아가신 후 본래 성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대한의 청년들이여, 조국을 사랑하고 지킵시다! 새로운 시대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를 다니며 진취적인 민족의식을 함양한 유왈보는 조국 수호의 간성이 되기로 결심했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참위로 임관한 직후, 라이트 형제의 방한 비행을 지켜본 유왈보는 일찌감치 군대의 미래가 하늘에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대단해! 지금은 비행시간이 짧아 정찰기가 한계이긴 하겠지만, 언젠가 궁극적으로 하늘을 제압하는 자가 전장을 지배하게 되는 게 아닐까?’

때마침 대한제국 군부에서는 비행사 양성에 나섰다. 아직 국내에는 비행사 학교가 없었으므로, 이선이 라이트 형제와 손잡고 설립한 미국 항공학교에 유학을 가서 조종사 과정을 이수했다.

조종사 자격을 받고 귀국한 유왈보는, 1910년 8월 한국인 최초로 한국의 하늘을 날았다.

일본의 초도비행은 도쿠가와 요시토시(徳川好敏) 대위가 비행한 1910년 12월이었으니, 유왈보의 비행은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이기도 했다.

「대한국인 유왈보, 대한의 하늘을 날다!」

「대한의 자랑, 아시아의 자랑, 세계의 자랑!」

유왈보는 20대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 각계의 환호가 쏟아졌지만, 그는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광무 15년에 새로 설립된 대한 항공학교의 교관을 맡아 후학을 양성하고, 틈틈이 전국 각지를 돌며 청년들에게 창공의 꿈을 품으라고 강연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유왈보에게, 원수부의 고급 장교가 찾아왔다. 그는 바로 노백린 정령이었다.

"나는 이번에 새로 설립되는 원수부 항공국의 초대 국장을 맡게 되었네. 대원수 폐하께서는 독립된 항공대의 창설을 계획하고 계시지. 독립 항공대의 지휘관으로 귀관만 한 인재가 없다고 생각하네. 함께하겠나?"

"예! 삼가 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광무 16년, 원수부 항공국이 설립됐다. 편제상으로 항공대는 육군 산하였지만, 항공국은 독립된 기관으로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노백린과 유왈보는 육군 항공대의 출범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0년에 출범한 프랑스 군사항공대(Aviation Militaire)가 세계 최초의 항공부대였고, 열강들은 이때부터 항공부대 편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11년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에서 이탈리아 항공대가 최초로 적군에게 감행한 공중폭격, 1912년 발칸전쟁에서 불가리아 항공대가 아드리아노플 요새를 향해 감행한 최초의 전술폭격은 모두 참고사례가 되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관전무관으로 참관한 유동열은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전술폭격의 유용에 대해 설명했다. 기술의 한계로 인해 조종사가 손으로 폭탄을 떨어트리는 수준이었지만, 지금까지 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하늘에서 공격이 이뤄진다는 심리적 충격은 상당했다.

"후발주자인 대한이 빠르게 선취해 나갈 수 있는 게 바로 이 항공대입니다. 현재 대한의 군비는 9할이 육군에 투입됩니다. 그렇다고 바다와 하늘을 방기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은 신흥국이지만, 열강과 군비경쟁을 벌일 재정이 없습니다. 특히 건함경쟁에 뛰어들 능력이 없지요. 항공대야말로 가장 적은 경비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게 할 겁니다."

"항공기가 잠재력이 있다는 걸 알겠네. 하지만 당장의 전투에 유용할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이야 그렇지요. 하지만 19세기에 제해권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것처럼, 20세기에는 제공권이 중요해질 겁니다."

노백린과 유왈보는 확고한 제공권 지지파가 되었다. 아직 비행기를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군부 수뇌부는 항공대의 전략적 유용성에 비관적이었다.

이는 딱히 대한제국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에서 대부분 다 그러했다. 아직 독립적인 항공대를 보유한 나라는 일부 열강을 제외하면 드물었다.

세계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미국조차도 항공기는 군용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1913년 3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용작전에 도입, 제1항공정찰대대가 출범했다.

통수권자인 대원수 이선의 확고한 지지를 받은 덕에, 항공대는 계획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라이트 형제와 맺은 계약으로, 용산 조병창에는 한미합작으로 비행기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본래 라이트 형제는 조국인 미국과 계약을 맺길 원했으나, 미군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트 형제가 기술을 도용했다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나타나 지루한 소송전이 벌어졌다.

결국 프랑스가 막대한 자본을 지불하여 라이트 형제를 초청했고, 프랑스와의 자본 경쟁에서 밀린 한국은 일단 한발 물러섰다. 1908년 프랑스에 세계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이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이 유출됐고,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생산체계를 갖춘 프랑스는 라이트 형제와 결별했다.

미국에 이어 프랑스에서도 뒤통수를 맞은 라이트 형제는 한국과 다시 손을 맞잡았다. 1912년, 마침내 아시아 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이 건립되었다.

심혈 어린 준비 끝에, 대한제국 항공대는 마침내 광무 17년 건원절에 첫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출발!"

"편대, 비행 개시!"

유왈보가 이끄는 3대의 복엽기 비행편대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 날을 맞이하여, 무수히 많은 황성 주민들이 여의도 비행장에 운집해 있었다. 비행장뿐만 아니라, 비행일정에 예정된 곳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황성주민 60만 대부분이 나와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수한 인파였다.

"난다! 3대 모두 하늘을 난다!"

"와아아아!"

"저 날틀이 정말로 하늘을 날다니, 대단해!"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한 3대의 비행기는 남산을 돌아 종로에 진입, 이윽고 경운궁·경복궁·창덕궁의 상공을 수놓았다. 일부 종친과 궁내부 관료들은 ‘신하된 도리로 어찌 감히 하늘에서 황궁을 내려다보느냐’고 반대했지만, 이선은 일축했다.

"이는 대원수인 짐이 직접 명령한 바이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황실 가족들, 대신들, 군부 장성들을 대동하고 기다리던 이선은, 마침내 경복궁 상공에 진입한 복엽기 편대를 발견하고 거수경례했다.

마치 하늘에서 이를 알아본 것처럼, 편대는 통수권자인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듯 잠시 고도를 낮췄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섰다.

"오오!"

"마치 인사를 하는 것 같군요, 하하!"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초기의 우려와 달리, 경복궁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만세를 외쳤다.

서양을 따라잡고자 개혁에 나선지 30년, 마침내 한국은 땅과 바다에 이어 하늘까지 영역을 넓혔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선 바다조차 미지의 영역이었는데, 꿈속에서나 상상하던 하늘을 정복하는 꿈을 이룩하고 있었다.

근대 기술의 최첨단으로 여겨지는 항공기가 하늘을 수놓고, 아시아 최초로 항공대까지 구축하게 되었다.

갑신경장 이전의 절망적인 조선을 기억하고 있는 개화 1세대들로선 실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일본을 앞지르는 순간이 오는구려. 먼저 근대화에 돌입했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수십 년을 봐 왔는데."

"이제 대한이 앞서는 분야가 등장했으니, 다른 영역에서도 따라잡게 될 겁니다."

"기쁜 일이지만,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이르오. 아직 대한의 기술력은 부족한 점이 많아요. 일본은 거대한 전함을 스스로 건조할 공업력도 있지만, 대한은 저 복엽기도 해외에서 기술을 들여와 겨우 만드는 정도요."

김옥균은 태극 문양을 달고 하늘을 나는 대한의 비행기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펄쩍 뛰고 싶었다. 최고 원로라는 지위를 감안해 가까스로 눌러 세우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정진하여, 진정 동양의 최강으로 우뚝 설 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오."

말은 그렇게 해도, 올해 63세인 김옥균의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촉촉하게 눈물이 젖었다. 불현듯 그는 10년 전 황제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입니다. 강산이 몇 번은 바뀌었지요. 그게 폐하의 공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소소한 업적이 좀 있기는 했지.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는 육지를 정복하셨고, 이제 대한제국이라는 배를 이끌고 바다로도 나가셔야지요.」

「아니, 이왕이면 저 하늘까지.」

「하하! 바다를 넘어 하늘까지? 폐하께서는 저보다 더 높은 야망을 갖고 계십니다.」

「아니, 정말로 이제 인간은 하늘까지 정복하게 될 것이오. 20세기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되겠지.」

과연 이선의 말은 모두 현실이 되었다.

1851년생인 김옥균은 자신의 평생을 반추했다. 인생의 절반, 1882년까지의 31년간은 사회적으로 볼 때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후 31년은 놀라운 변화의 연속이었다. 조선 역사 500년, 아니 한민족 역사상 가장 중요한 30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일본이 동양의 영국 노릇을 하려하니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한다는 김옥균의 꿈은, 이선이라는 지도자를 만나 마침내 현실로 이룩했다.

왕년의 종주국 청나라를 무찌른 육군에 이어, 근대적 해군이 출범하여 군함을 보유하고, 이제는 하늘로까지 나아가려 한다.

‘지난 30년간 이렇게까지 발전을 이룩한 나라가 있었나? 일본이 있다곤 하지만,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이었다. 그 열악한 환경을 딛고,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다니.’

"고균의 말이 옳소. 이 정도로 안주해서는 아니 되오. 아직 갈 길이 멀지."

"성상의 혜안이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신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이선의 눈빛은, 여전히 더 먼 미래를 염두에 바라보고 있었다.

「원수부 포고. 광무 17년 6월 1일 자로 육군항공대 출범을 포고함!」

1913년 6월 1일, 정식으로 대한제국 육군항공대가 출범했다.

조선의 근대적 육해군 출범이 서양보다 수십 년 뒤진 것과 달리, 공군은 시차가 거의 없었다.

아시아에선 물론 최초였고, 항공 종주국인 미국과 불과 3개월 차이, 세계 최초의 군사항공대를 편성한 프랑스와도 불과 3년 차이였다.

건원절에 대형 태극기가 내걸린 경복궁 근정전 상공을 나는 비행편대 사진은, 한국 항공사의 상징이 되었다.

실제 역사를 생각하면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1913년 8월에 일제가 ‘병합 3주년’을 기념하여 일장기가 내걸린 궁궐의 상공을 일본 군인이 최초로 날았던 굴욕적인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바뀐 역사에서 한국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창공을 나는 꿈을 이뤘다.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땅과 바다를 넘어 하늘까지 정복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진보의 극한이었다. 한국은 진보의 대열 선두에 서 있었다.

- 18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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