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00화 (499/812)

181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신해혁명 이후, 동아시아에는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신생 중화민국에서는 여전히 18성 실력자 간의 갈등이 잔존했지만, 표면적으로는 통일을 유지한 채 민주주의 실험이 이뤄졌다.

민국 2년(1913), 소학을 익히고 일정 금액의 세금을 내는 21세 이상의 성년 남성들 4천만 명에게 투표권이 주어져, 당시로는 세계 최대 수준의 선거가 예정되었다.

지역별로 온갖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불법이 자행됐고, 중국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가 뭔지 이해도 하지 못했지만, 용케 전국선거가 실시되었다.

1월에 초선, 2월에 결선이 진행되었다. 투표율은 50%를 넘겨 2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여했다. 1912년 미국 대선에 참여한 미국 유권자가 1,500만 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였다.

"국민 여러분, 국민당은 헌법 제정, 정당중심 내각책임제, 연성자치를 실시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겠습니다!"

선거 결과는 중국동맹회가 재편된 중국국민당의 압승이었다. 중의원(하원) 의석 600석 중 국민당은 270석을 차지했고, 참의원(상원)에서도 과반을 차지했다.

국민당 이사장(대표)은 대총통 손문이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이사장 대리 송교인이었다. 국민당의 승리를 이끈 송교인은 32세의 나이로 국무총리로 선출, 일약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되었다.

중화민국의 민주주의는 마침내 첫발을 뗐다. 총선 결과는 곧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을 대표하는 정당이 국민당임을 국민에게 인정받은 것이었다.

"내각제에 연성자치라고? 국민당 놈들, 중국을 산산조각 내려고 작정했나?"

"국가 운영이 뭔지도 모르는 얼치기 혁명가 놈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니, 나라가 어디로 가려는지."

"만약 남경이 지방의 권익을 침해하려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지."

하지만 모두가 결과에 만족하는 건 아니었다. 군부, 관료, 지방 실력자들은 국민당의 독주에 불만을 가졌다.

"국민당이 결국 중국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말 거요. 남방 놈들이 더 이상 중국을 망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오."

"만약 북양파가 집권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국민당이 계속 정권을 잡는 게 낫소. 북방 놈들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는 꼴은 못 보지."

현재의 중화민국은 18성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국민당이 일종의 연방제인 ‘연성자치’를 내세워 전국적 지지를 고르게 얻을 수 있었지만, 각성을 장악하고 있는 실력자들이 원하는 건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당면한 문제는 재정이오. 세수(稅收)가 걷히지를 않으니……."

남경 국민당 정부의 가장 큰 고민은 돈이었다.

1911년도 청국 1년 예산 1억 8천만 냥 중 지방에서 걷혀서 수도로 보내지는 각종 세금이 90%에 달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 혼란을 거듭하고, 지방 행정을 장악한 각성 도독부에서 중앙정부에 세금을 보내는 데 지극히 인색했다. 1913년도 지방에서 보낸 세금은 혁명 이전 5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러니 재정이 제대로 운용될 리가 없었다.

빈약한 재정, 통제되지 않는 군부 파벌들, 심화되는 지역갈등.

신생 중화민국의 민주주의는 지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 *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였다지만, 러일전쟁 이후 한창 민주화의 요구가 강해진 일본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중국에서는 무려 4천만 명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더군. 도대체 일본은 언제까지 인구의 극소수만 참정권을 갖는지?"

"5천만 일본국민 중에 투표권을 갖고 있는 건 겨우 200만이야. 일본 인구의 4할인 한국과 투표권자가 비슷하다는 게 말이 되나?"

"일본은 동양 최초로 헌법을 제정하고 선거를 실시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한국도 모자라 중국에까지 밀린단 말인가!"

"참정권을 보장하라! 보통선거 실시하라!"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 이후, 일본에서는 참정권 확대 운동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메이지(明治) 시대가 끝나고, 다이쇼(大正) 시대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메이지 시대가 서양 열강으로부터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이라는 근대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다이쇼 시대에는 민권의 확대와 민본주의 확립이 목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번역어로 ‘민본주의(民本主義)’가 제안되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메이지 헌법의 ‘천황 주권론’을 부정하는 단어처럼 보였기에, ‘인민이 근본’이라는 의미의 민본주의가 채택되었다.

다이쇼 시대에 민본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더욱 강해졌으니,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열렸다.

"정부는 완전한 관세자주권을 회복하고, 전쟁 이후의 경제 위기를 극복했음을 선언한다."

1911년, 3차 사이온지 내각은 일본의 오랜 숙원이었던 관세자주권을 회복했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이래 53년 만에 관세자주권을 회복했다는 소식에 일본은 조야를 막론하고 모두 기뻐했다.

일본의 관세자주권 회복은 한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대일 관세자주권만 회복한 상황이었는데, 서양 열강에도 일본의 선례를 따라 완전한 관세자주권 회복을 요구하여 협상에 들어갔다.

"대만과 가라후토(사할린)는 제국을 지키는 남북의 울타리가 되었으며, 복주와 아모이는 대륙으로 향하는 전초기지다."

러일전쟁 이후 북수남진 해주육종 정책을 취한 일본은, 육군을 감축하고 해군력 강화에 나섰다. 육군은 만주 전선에서 참패하고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으나, 해군은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한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았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민절(閩浙, 복건·절강) 이권은 제국의 이익선이다. 대만을 기반으로 중국 남부로 침투한다."

모험적인 대외강경파들이 전부 실각하는 바람에, 일본 외교는 영일동맹의 하위 파트너 역할에 만족했다. 열강으로부터 복건의 세력권을 인정받고, 인접한 절강으로 침투해 나가는 데 만족했다.

한국이 ‘만몽(滿蒙, 만주·몽골) 이권’에 매진한다면, 일본은 ‘민절 이권’에 매진했다.

신생 중화민국 정부가 남경을 수도로 정함에 따라, 중국 남부를 향한 일본의 야망과 충돌할 가능성이 생겼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일본은 모험주의를 포기하고 온건해졌을지언정 제국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국가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이라 믿는 시대는 지났다. 국권의 확장보다 더 중요한 건 민권의 확장이다!"

"상처뿐인 승리인 일로전쟁을 잊었는가? 수십만의 청년들이 피를 흘리고 얻은 건, 가라후토와 파탄 난 재정뿐이다!"

"우리는 대일본제국이 아닌, 민본주의 일본을 원한다!"

민중운동과 재야세력은, 여전히 제국 확장에 몰두하는 주류 세력을 비판했다.

조슈-육군이 몰락하기는 했지만, 전후 정국을 주도하는 건 입헌정우회-귀족원-사쓰마-해군이었다.

입헌정우회-귀족원을 대표하는 사이온지 긴모치와 사쓰마-해군을 대표하는 야마모토 곤노효에가 돌려 막기 하듯이 총리직을 수행했다. 사이온지는 13대(2차), 15대(3차) 총리로 재임했고, 야마모토는 14대(1차), 16대(2차) 총리로 재임했다.

1913년 초에 사이온지가 물러나고 야마모토 2차 내각이 수립되자, 재야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또 사쓰마, 또 해군이냐?"

"메이지 시대도 끝나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번벌 정권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냐?"

그나마 야마모토는 군인치고는 정치 감각이 있었으므로, 과반을 차지한 1당인 입헌정우회와 연합하여 안정적인 의회 기반을 만들어 냈다. 야마모토 본인은 무소속이지만, 내각의 상당수는 입헌정우회 인사로 채워져 정당 내각에 근접했다. 정국을 주도하는 건 내무대신에 유임된 하라 다카시였다.

"재야세력이 참정권 확대에 치중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사회당도 견실한 노동운동을 대표한다면 용인할 수 있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하라는 야권의 분열과 포섭에 나섰다. 참정권 확대를 미끼로 내걸어 제1야당인 입헌국민당을 친정부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원외 세력을 분열시켰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엄금했던 러일전쟁 이전과 달리, ‘합법적인’ 운동을 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용인하여 사회당 창당을 허용했다. 불평등한 선거구조로 인해 사회당이 원내에 진입할 일은 없었으나, 산업화로 인해 늘어나는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성장해 나갔다.

총리와 내무대신의 적절한 정치적 수완으로 인해, 다이쇼 시대에도 입헌정우회-귀족원-사쓰마-해군 연립정부는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해군의 과도한 욕망이 이들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제국 해군은 세계 4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니, 일본은 당당한 열강의 일원이다!"

전후 정국을 주도하게 된 해군은 세계 4위의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 건함 계획에 착수했다.

무려 7년 치 예산을 소모한 러일전쟁의 전비로 인한 채무는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는데, 해군은 열강으로서의 위신을 내세워 건함에 나섰다.

"이미 세계 전함의 대세는 노급(드레드노트) 전함이오. 세계 4위의 해군력을 유지하려면 8척은 있어야 합니다, 8척!"

"아니, 그 막대한 비용은 대체 어떻게……."

"육군 사단을 감축하고, 전쟁 이전의 건함비를 세금으로 적용하면 됩니다. 영업세, 직물세, 소비세, 통행세의 세율을 올립시다."

일본 해군은 전후에도 전 드레드노트급인 사쓰마(薩摩)급 전함 2척,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가와치(河内)급 전함 2척, 공고(金剛)급 순양전함 4척을 건조에 나섰다.

일본이 파산지경이었기 때문에, 동맹인 영국이 굉장한 호의를 베풀어 대규모 기술이전에 나섰다. 그 덕택에 일본은 1번함인 공고를 제외한 나머지 3척을 자국에서 건조, 마침내 자체적인 전함 건조가 가능해졌다.

이 정도면 만족할 법한데, 일본 해군은 추가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후소(扶桑)형 전함 4척의 예산을 요구했다.

채무불이행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경제상황에, 팔은 안으로 기운다고 총리인 야마모토는 해군만 감싸고 들었다. 막무가내로 해군의 요구만 내세워 중의원에서 건함 예산을 관철시켰다.

"결국 해군이 국가를 파탄으로 몰아넣겠군."

"제 놈들만 천황의 군대냐? 어디 두고 보자."

야당도 불만을 품었지만, 이제 완전히 서자 취급을 받게 된 육군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육군은 과거의 적인 러시아나 영일동맹의 가상적국인 독일보다 해군을 더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영국의 하수인에 불과하니, 결국 일본의 건함계획은 독일을 겨냥한 게 아닌가?"

황화론자인 카이저는 일본의 건함계획이 독일 동양함대를 겨냥하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영국이 일본의 건함을 지원해 주는 걸 보면 충분히 의심이 갈 만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독일 유학파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육군과 독일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으니, 양국 합작의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1913년 12월, 독일 언론에서 기묘한 보도가 흘러나왔다.

「지멘스사 도쿄 지점장을 협박한 사원 카를 리히티가 공갈미수 혐의로 기소. 피의자가 훔친 서류들에 따르면……. 지멘스사는 일본 해군의 전함 장비 입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담당 장교에게 이익의 15%를 리베이트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킴.」

일본 해군과 독일 대기업 지멘스(Siemens)가 연루된 대형 비리 사건이 터졌다. 초기에는 지멘스 내부에서 직원을 매수해 묻어 버리려 했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이 사실이 독일 경찰에 알려졌다.

공개적으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육군 수뇌부의 밀명을 받은 주독 일본 육군 무관이 독일 경찰과 언론에 슬쩍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독일에서 이뤄진 재판은 국제적 관례를 깨고 해군 장교의 실명을 거론하고, 이 사실은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일본은 발칵 뒤집혀 졌다.

「제국 해군, 유신 이래 최대의 대규모 비리 사건!」

뇌물 수수가 관행적으로 여겨져 묻혔던 과거와 달리, 다이쇼 시대의 일본 언론들은 매일같이 맹포화를 쏟아 냈다. 해군 장교의 내부 고발까지 속출했고, 조사가 진행되어 사건을 파면 팔수록 스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군 비리,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공고급 순양전함의 입찰 과정에서도 대규모 비리 발생! 영국 빅커스 사는 조선소 총감 마쓰모토 중장을 수수료 5%를 조건으로 매수했다. 그 결과 빅커스가 공고급 전함의 건조를 맡았고, 마쓰모토 중장은 그 대가로 40만 엔을 수수…….」

관행처럼 이뤄진 해군의 뇌물 수수에 일본 여론은 격분했다.

"국민은 증세로 쥐어짜면서, 자신들은 외국 회사들과 짜고 거액의 뇌물을 수수!"

"국민은 세금으로 고통받는데, 해군 장성들은 차명계좌로 뇌물을 받아 호의호식!"

분노한 여론은 해군을 넘어 정부에까지 쏟아졌다.

1914년 2월 10일, 내각 불신임안이 중의원에 상정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입헌정우회의 다수가 총리 보호에 나섬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불신임안이 부결되었다.

이는 불난 데 기름을 부운 지경이었다. 불신임안 부결 소식에, 히비야 공원에 운집해있던 시위대의 분노가 쏟아졌다. 시위대는 의사당으로 진입하여 의회 경비원들과 충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헤쳐 먹고도 내각 불신임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냐?"

"의원 놈들도 부패한 해군과 한패다!"

"저들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다!"

가쓰라 내각을 실각시킨 호헌운동의 핵심인물들이 재결합한 데 이어, 재야세력과 사회당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단순한 부패 사건이 아니다. 일본의 현실을 똑똑히 보여 주는 것이다. 유신 이래 정부는 언제나 국민에게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라고 강요하면서, 뒤로는 사익을 채워 왔다. 건함에 쓰이는 저 막대한 예산, 장성들의 입으로 들어간 뇌물들이 가난한 노동자의 복지 예산으로 쓰였다면, 고통받는 인민의 구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지멘스 사건은 민중운동, 제2차 호헌운동으로 이어졌다.

"야마모토 내각은 물러나라!"

"사쓰마-해군 독재 타도하자!"

거세지는 투쟁에 결국 입헌정우회도 내각 보호를 포기했고, 2월 24일 야마모토 내각은 총사퇴했다.

쓰시마 해전의 승리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야마모토와 해군 수뇌부도 쓴맛을 보고 물러나야 했다. 건함 계획은 대대적인 손질이 이루어졌고, 후소형 전함 3번함과 4번함은 건함이 취소되었다.

조슈-육군이 파멸적인 전쟁과 쿠데타 기도로 실각했다면, 사쓰마-해군은 뇌물 스캔들로 실각하게 되었다.

국민은 일본 정치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고, 원로와 전임 총리가 후임 총리를 추천하는 관행적인 구조를 탈피하고자 했다.

오래전부터 영국식 정당정치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해 오던, 이토 히로부미의 옛 라이벌인 77세의 전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새 내각은 번벌 정치의 종료를 선언하고, 정당정치에 입각한 입헌정치를 실시하겠다. 참정권을 확대하여 민의를 최대한 보장하겠다."

야마모토의 실각과 오쿠마의 취임은, 그동안 일본에서 철저하게 부속품으로 여겨졌던 ‘국민’이 주요한 정치 참여자가 되었음을 상징했다.

‘동양의 영국’을 향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 18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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