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사라예보 사건
한국에 이영이 보낸 극비전문이 도착했을 무렵, 이선은 평양에서 스톨리핀과 회견하고 있었다.
작년에 총리 겸 내무대신에서 물러난 후, 스톨리핀에게는 극동 총독의 지위가 주어졌다.
프리모리예(연해주)·아무르·자바이칼 등의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는 극동 총독은, 만주·몽골의 이권을 관리하고 북청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경은 언제나 극동과 시베리아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었지. 경에게 극동의 전권을 맡기겠으니, 발전을 이끌어 주시오."
그렇다할지라도 최고 권력에 있었던 스톨리핀에게는 오지로의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스톨리핀은 극동 총독직을 수락하여 관저가 있는 하바롭스크로 부임했다.
어찌 보면 목숨을 구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스톨리핀은 재임기간 동안 사회주의자와 인민주의자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고, 수천 명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로 인해 인민주의 테러리스트들은 거듭 스톨리핀의 암살을 노렸다. 악명 높은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수장인 보리스 사빈코프는 스톨리핀의 암살을 노리고 거듭 암살단을 파견했다. 그를 노린 시도만 10여 차례였다. 언제나 암살의 위협 속에 있었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에 부임하자, 비로소 스톨리핀을 향하는 총탄의 수도 줄어들었다.
"경과도 같은 고명한 정치가께서 극동으로 오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웃나라 입장에서는 참으로 마음이 든든합니다."
"러시아의 상징은 쌍두독수리입니다. 머리 한쪽은 유럽으로, 한쪽은 아시아를 향하고 있지요. 20세기는 적극적으로 극동 개발을 해야 할 때입니다. 폐하께서 이를 이해해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스톨리핀은 총리 재임기간 동안 적극적인 극동 이주 정책을 썼고, 불과 7년 사이에 300만 명이 극동과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여전히 러시아제국에서 우랄산맥 이동(以東)의 인구나 생산력 비중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나, 스톨리핀은 진작부터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유능한 관료는 어느 자리에 놓아도 제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스톨리핀은 좌천에 굴하지 않고 극동 개발에 열성을 다했다.
근린이자 우방인 대한제국이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다. 한러 양국은 협약으로 만주와 몽골 이권을 나누고 있었고, 북청국의 공동 후견국이기도 했다.
한반도-만주-러시아 극동을 잇는 ‘북방경제계획’이 이선과 스톨리핀 사이에서 논의되었다.
"근래 발칸과 터키 해협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는데,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총독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은 러시아 대외무역의 40%를 책임지기 때문에, 해협이 막히는 상황은 절대 용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외교적으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합니다."
스톨리핀이 퇴임한 이후에도, 여전히 외무대신은 그의 처남 사조노프가 수행했다. 하지만 매부가 실각하는 걸 지켜본 사조노프는, 갑자기 매파로 변신했다. 1913년부터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강경으로 전환됐다.
"제가 페테르부르크에 있을 때 누누이 한 말이지만, 러시아에 필요한 건 전쟁이 아니라 20년간의 평화입니다. 전쟁에 쓰일 자원을 개혁과 개발에 쓴다면 러시아는 반석의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외부환경이 워낙 급변하고 있어서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으로 인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더 조급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발칸에서 세 번째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만약 세르비아가 위기에 처한다면, 러시아에서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겠지요."
스톨리핀은 세르비아를 포기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자는 쪽이었으나, 바로 그게 경질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을 대비할 필요가 있지요. 만약을 대비해 극동에도 조속히 산업시설을 확충하려 합니다."
"그럴 일은 없길 바라지만, 만약 우방국 러시아제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면, 대한제국도 결코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귀국의 승리를 위하여 한국은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이선은 스톨리핀에게 유사시 도움을 암시하며 회견을 마쳤다.
회견을 마친 이선은 이영이 보낸 극비전문을 확인했다.
‘영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막고 싶어 하는가? 하긴, 내가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은 것처럼, 영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따지고 보면, 오늘 만난 스톨리핀도 실제 역사에서는 이미 1911년에 암살되었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신의 등장과 개입으로 분명 역사는 변했지만, 세계사의 큰 틀에서는 변화가 오지 않았다. 그만큼 조선이란 나라가 세계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에는 아직 미미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국의 국력과 발언권이 크게 신장했기 때문에, 이선의 선택에 세계사도 영향을 받았다. 북방에 살아남은 북청국의 존재만 해도, 이선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이선이 이영을 주 오스트리아 공사로 보낸 건, 역사가 변화했음에도 사라예보 사건과 1차 세계대전이 역사대로 발발할지 빠르게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영의 역할은 신속한 ‘관찰’과 ‘보고’였다.
이영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인간적 신뢰관계를 맺고, 암살을 막으려 한다는 건 당초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이라.’
이선은 문득 21세기의 사학도 시절을 떠올렸다. 하도 오래전의 기억이라 꿈처럼 가물가물하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주제였다.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역사학계에서 100년 동안 다룬 소재였기에 참고문헌도 엄청나게 많았고, 그 주제만으로 대학원에서 한 학기 수업을 할 정도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은 명분에 불과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유럽의 불안한 세력균형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독일은 ‘세계제국’을 원하며,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는 발칸을 세력권으로 충돌하고 있다. 발칸전쟁은 세계대전의 전주곡이었다.
1914년에 각국의 군사화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독오동맹과 노불동맹의 대립은 전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은 이미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에 불씨가 떨어진 것이었다.
‘유럽에는 안 된 일이지만, 일어날 전쟁은 일어나야 해. 대한의 국익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선의 생각은 언제나 대한제국의 국익과 관계가 있었다.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수천만이 죽을지도 모를 전쟁을 원한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꺼림칙하고 자기혐오를 느낄 때도 있었다.
"마르가리타, 당신은 여전히 폴란드의 독립을 꿈꾸고 있소?"
"당연한 말씀을. 그건 내게 있어 신앙이자 종교와도 같은 거예요."
유럽을 떠나 한국에 온 지 근 20년이지만, 마르가리타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열정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폴란드가 독립하려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가 동시에 몰락해야 하오. 그러려면 열강이 모두 뒤엉키는 세계대전 외에는 대안이 없지."
"음……."
"만약 유럽인 1천만 명이 죽더라도, 제국들이 몰락하고 폴란드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면 세계대전에 동의하겠소?"
이선은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역사를 말한 것이지만, 마르가리타에게는 극단적인 가정으로 들렸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였지만 의사이기도 했고, 근본적으로 휴머니스트였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외면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보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할 길이 있을 거예요. 세 제국의 인민이 각성하여 언젠가 제국을 무너트릴 날이."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전쟁만큼 인민이 확실하게 각성하는 길이 없지."
이선은 마르가리타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다. 다만 수단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선은 ‘역사의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피를 흘려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가권력을 맡게 된 지 어언 30년, 이선은 국가의 지도자로서 냉정한 국가이성(raison d’Etat)을 선택했다.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특명전권공사에게. 대한국은 발칸 문제의 국외자이므로, 국익과 무관한 제3국의 사안에 개입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 발칸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간의 일이니, 대한의 전권공사로서는 관여하지 않기를 명하는 바이다.
단, 황태자의 보스니아 순행에는 동행해도 좋다. 공사 개인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재량껏 행동할 여지는 부여한다.」
* * *
황제의 전문을 받은 빈의 이영은 당혹스러웠다.
‘황형께서는 러시아 황제를 두 번이나 암살에서 살리지 않으셨는가? 어째서 이번에는……?’
전문처럼, 분명 한국은 발칸 문제의 국외자였고, 오스트리아와도 중요한 관계는 아니었다. 동아시아 문제에 깊게 관여한 러시아하고는 존재감이 달랐다. 알렉산드르 2세와 니콜라이 2세의 암살을 막은 건 한국에 큰 이득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안이 아닌가. 만약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독일과 러시아로도 확대될 지도 모른다. 그럼 세계대전이 아닌가?’
이영은 세계대전으로 평화로운 세상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미래가 상상되지 않았다.
‘개인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재량껏 행동할 여지는 부여한다. 외교관으로서는 아니어도, 개인으로서는 재량이 있다는 말인가.’
이영은 모호하게 느껴지는 마지막 문단을 그렇게 해석했다.
"대한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수교 25주년을 기념하여, 양국의 우호가 영원하길 기원하며……."
1914년 6월 20일, 조오수호통상조약 25주년을 맞이하여 빈 한국 공사관에서 행사가 개최되었다.
1889년 수교한 오스트리아는 한국의 8번째 수교국으로, 당시 군주였던 태상황은 전통적인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를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선물한 바 있었다. 1896년에 이선이 빈을 방문하면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도 왕실용 갑옷과 투구를 선물했다.
25주년 기념행사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이선에게 선물 받은 조선 갑옷을 입고 공사관에 깜짝 방문을 했다.
"황태자 전하! 감격할 따름입니다."
"이거 예전에 비하면 살이 쪄서, 사이즈가 안 맞아 조이는군. 여름이라 그런지 꽤나 덥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입는 게 맞소?"
"예,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유럽 군주들이 대한제국 명예정령이 되어 근위대 제복을 입은 사례는 수차례 있었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처럼 전통적인 갑옷을 입은 건 처음이었다. 조선 갑옷을 입은 황태자는 꽤나 화젯거리가 되었다.
"조피가 대공 부부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더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순방이 기대가 되오."
"예, 영광입니다.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한국에 보이는 호의는, 이영 개인에 대한 호의에 더 가까웠다. 이영은 부부동반으로 황태자의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순행에 동참하기로 확정했다.
6월 23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일행은 사라예보 인근의 온천마을인 일리자에 도착했다.
황태자는 명예육군원수이자 군사총감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보스니아에서 이틀간 진행되는 하계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그동안 조피 여공작은 학교와 고아원을 방문했고, 이영과 아나스타샤 부부도 여공작과 동행했다.
"대공 부부께서 함께해 주셔서 기뻐요. 젊은 신혼부부가 있으니까 분위기도 훨씬 좋은 것 같고."
"저희도 두 분과 함께하여 영광이고 기쁩니다."
조피는 아나스타샤를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백작가의 여식으로, 보수적인 왕실에서 반대하는 귀천상혼을 사랑으로 쟁취했다는 공통점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보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두 분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신분 때문에 차별하는 합스부르크 황실이 너무하네요."
"그만큼 예법이 엄격하니까 그렇겠지요."
"황태자비께서는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저런 분이 황후가 되신다면, 분명 국민에게도 훌륭한 황후가 되시겠지요."
"아아, 그렇지요. 황태자께서도 훌륭한 황제가 되리라 생각해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이영은 공감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겉보기에는 무뚝뚝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을 진정한 다민족 연방국가로 재편하겠다는 장대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극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죽어 마땅한 침략자일지 몰라도, 제국의 슬라브인들 상당수는 황태자에게 기대를 걸기에 충분했다.
조피는 따뜻한 성품에 훌륭한 인격을 갖고 있었다. 백작의 딸이라는 건 큰 흠이 아니었고, 왜 황태자가 귀천상혼을 택한 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분이 암살을 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암살에 대한 경고가 없는 게 아니었다. 황태자가 사라예보를 방문할 6월 28일은 세르비아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날이었기에, 현지 상황을 잘 아는 유력자들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세르비아인들이 격앙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르비아에서 암살자를 파견했다는 소문도 돕니다. 황공하오나 방문을 취소하는 것이……."
"아시다시피 저는 세르비아 주재 공사를 겸임합니다만, 베오그라드에서 비슷한 소문을 들은 바 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세르비아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황태자 전하를 노리고 있습니다."
유력자들의 우려에 이영도 재빨리 끼어들었다. 정보원을 공개할 수 없으므로 ‘소문’이라고는 했지만, 이영은 현지에서 얻어온 정보임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나를 노린 암살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신의 은총으로 모두 실패했지.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소. 오직 신의 은총만 믿고 전진할 뿐이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우려를 가볍게 넘겼다. 암살에 대한 경고는 육군정보국을 통해서도 들어왔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는 조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곳에 와서 보니, 우려와 달리 보스니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더군요. 세르비아계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을 의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황태자 부부는 사라예보 방문을 예정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경호원을 늘리라는 요청에도, 번거로운 절차를 싫어하는 황태자는 예정대로 하라고 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황태자 일행을 태운 무개차가 사라예보 시가지를 지났다. 시내 곳곳에는 노란색과 검정색의 제국기가 휘날렸고, 합스부르크의 독수리도 함께 휘날렸다.
황태자 부부는 보스니아 총독 및 경호원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 타고, 이영과 아나스타샤 부부는 후열에 차를 타고 뒤따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거리에 도열하여 열렬하게 환호하는 사람들을 본 황태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손을 흔들며 답례했다.
"거 보게나. 별일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저들은 충성스러운 오스트리아 국민이야."
바로 그때, 군중들 사이에서 누군가 매서운 눈빛으로 황태자의 자동차를 쫓는 이가 있었다.
사내의 품속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다. 마침내 결심을 한 사내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폭탄을 꺼내 가로등 기둥에 뇌관을 부딪쳤다.
뇌관이 터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황태자의 자동차를 향해 폭탄이 날아갔다.
- 18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