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09화 (508/812)

190화 평화에서 전쟁으로

1914년 9월. 세르비아 민족방위정부의 최후통첩 파기는 전쟁명분이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결정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전쟁에 동의함에 따라, 주화파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전쟁 발발을 막을 길이 없어졌다. 대신 전쟁목표를 완화하여 러시아의 개입을 막는 걸 목표로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러시아의 개입 없이 발칸 문제를 끝내는 겁니다. 조속히 베오그라드를 점령해 세르비아의 항복을 받아 내고, 친오스트리아 정권을 세우되 영토는 요구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합시다."

"세르비아가 아드리아 해안으로 진출하려는 걸 막으려면, 몬테네그로까지는 요구해야지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오스트리아의 괴뢰정권을 세우는 조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영토 병합 없는 전쟁목표를 결정했다.

이제 빈은 베를린을 바라보았다. 독일이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 주면, 조속히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세르비아의 무례함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독일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9월 초,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개전에 ‘백지수표’를 건넸다. 이제 베를린은 빈의 모든 행동을 지지한다고 공인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카이저는 여전히 발칸의 국지적인 분쟁으로 끝나리라는 기대를 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르비아의 명분이 옹색해졌으니, 러시아가 개입하기 곤란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로이센 군부가 국지적 분쟁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소."

"발칸에서 결국 불이 붙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라면, 정부는 결국 개전에 동의할 거요."

"음, 드디어 슐리펜 계획을 발동할 때가 왔군요."

겉으로 보이는 허세와 달리, 카이저는 전쟁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프로이센 군부는 달랐다. 이들은 러시아의 인구와 병력규모에 대해 과도한 불안감을 느꼈다. 러시아는 1918년을 목표로 새로운 군제개혁에 나섰고, 1억 7천만 인구가 프랑스 자본의 지원을 받아 강대한 군대를 보유하는 미래를 두려워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났듯이, 막상 러시아군의 후진성은 겉보기와 달리 심각한 수준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대대적인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프로이센 군부는 러시아군 편제상의 규모에 집착했다.

"문제는 제국의회인데, 원내 1당인 사회민주당이 전쟁을 반대하니……."

"사회민주당도 러시아에 대한 방어 전쟁이라면 동의할 겁니다. 어떻게든 러시아가 먼저 동원령을 선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하면, 결국 러시아도 동원령을 선포하겠지."

"러시아가 동원령 취소를 거부하면, 이를 전쟁명분으로 삼고 우리도 동원령을 내리는 겁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사회민주주의의 확산이었다.

1912년 독일 총선에서 사회민주당(SPD)은 무려 35%를 득표했고,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 만약 독일이 영국과 같은 정당내각제였다면,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의회 진출을 통한 정권 획득을 지향하는 온건한 개량주의 정당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정당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프로이센 융커와 군부를 두렵게 했다. 사회민주당의 집권은 곧 융커-군부의 특권을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8월 15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낼 무렵. 공교롭게도 빈에서는 제2인터내셔널 25주년을 기념하는 국제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취소된 대회였다.

유럽 각국을 대표하는 노동자 정당들의 대표가 속속들이 빈으로 모여들었다. 빈에는 사회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도처에서 휘날렸다.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 반대와 군비 축소를 촉구하는 성명을 결의했다.

"전쟁은 탐욕스러운 귀족, 부르주아지, 군부를 위한 사업이다. 이들의 탐욕에 피를 흘리는 이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다. 우리 프롤레타리아는, 지배계급의 탐욕을 위해 형제인 노동자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전쟁 반대! 군비 축소! 병역연장 반대! 문민 통제! 평화 만세!"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Jean Jaures), 독일 사회민주당의 후고 하제(Hugo Haase), 오스트리아 사회노동당의 빅토어 아들러(Victor Adler),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가 각국 노동자를 대표해 단상에 올라 서로를 껴안고 악수했다.

비록 그들의 조국은 대립할지라도, 노동자들은 전쟁 반대와 평화를 외친다는 상징적인 퍼포먼스였다.

때마침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서, 전쟁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25주년 기념행사는 평화의 승리를 외치면서 종료되었다.

노동자들이 부르는 승리의 개가는, 지배계급에게는 불안스러운 공포로 다가왔다.

세르비아 위기가 극대화될 때 빈에서는 붉은 깃발이 휘날렸고, 노동자들의 평화 행진이 있었다.

10만이 넘는 군중의 행렬에, 지배계급은 전율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저, 저런 조국도 없는 빨갱이 놈들. 저놈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될지, 앞날이 개탄스럽소."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내주지 않으려면, 국민을 전쟁으로 단결시키는 수밖에 없소."

"암, 혁명보다는 전쟁이 낫지!"

1차 러시아혁명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이야말로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지만, ‘단기간의 전쟁’과 ‘신속한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지배계층들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보불전쟁 이래 40년 넘게 유럽에 지속된 평화를 지루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보불전쟁처럼, 단기간의 신속한 승리는 국가를 단결시킬 것이다.

결국 전쟁이 일어나면, 혁명을 부르짖던 사회민주주의자들도 호전적인 여론에 떠밀려 국가의 이익에 복속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반동적인 러시아 차리즘’에 반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차리즘에 맞서는 방어전쟁’에 기꺼이 찬성표를 던져 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지배계층은 전쟁으로 인해서 애국주의와 징고이즘이 폭발하고, 승리는 국가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했다.

전쟁은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 모두를 충족시켰다. 이제 전쟁을 피할 길은 극도로 좁아져 있었다.

9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두 번째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파시치 정권이 합의한 예전의 최후통첩을 48시간 내에 부활시키라는 요구에, 세르비아 민족방위정부는 예상대로 거부했다.

9월 11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의 외교관계를 즉각 단절한다는 선언을 하고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폐하, 동원령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스트리아가 며칠 내로 세르비아를 공격할 게 분명해 보입니다."

"단교가 꼭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9년 전 일본의 공격을 기억해 보십시오. 일본의 일방적인 단교 선언에 선전포고는 아니라고 받아들였다가, 기습공격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일방적으로 단교를 선언하고 사흘 후, 기습공격이 개시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이 니콜라이 2세에게 불쾌한 기억인 러일전쟁의 발발을 상기시키자, 차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한다면, 우리도 동원령을 내려야 합니다."

"으으음……."

러시아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흑수단의 쿠데타와 ‘민족방위정부’ 수립은 러시아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리스 방문 중에 쿠데타를 당한 총리 파시치는 그대로 망명하여, 러시아에게 정권 회복을 읍소했다.

러시아는 민족방위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을 방관할 생각도 없었다.

"도대체 세르비아를 위해 전쟁까지 각오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슬라브 정교회 형제국가를 저버릴 순 없지요."

"수틀린다고 쿠데타 일으키는 개자식들이 뭐가 예쁘다고 보호해 주냔 말입니다!"

"분명 세르비아는 개자식일 수는 있지요. 하지만 우리 개자식입니다. 발칸에 남은 유일한 친러국가를 오스트리아가 멸망시키게 놔두란 말입니까?"

쿠데타에 대한 러시아 보수주의자들의 거부감과 불쾌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부는 세르비아 보호를 외쳤다. 진심으로 범슬라브주의에 공명했다기보다는, 전형적인 진영논리였다.

2차 발칸전쟁으로 전통적인 친러국가였던 불가리아가 러시아와 멀어졌고, 그리스 새 국왕 콘스탄티노스는 카이저의 처남으로 친독적인 성향을 보였다.

루마니아와는 근래 관계가 개선되었지만, 국왕 카롤 1세 역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답게 친독 성향이었다.

이제 발칸에 확고한 친러국가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뿐이었다. 몬테네그로는 워낙 소국이라 실질적으로 세르비아뿐이니,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세르비아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점을 믿고 무작정 강경책으로 나서고 있었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형태로 러시아가 끌려다니는 꼴이었다.

"일단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하지 않도록 외교적 해결책을 찾아봅시다. 만약 그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우리도 대응하는 수밖에."

* * *

「나의 민족들이여! …… 나는 나의 제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제국의 위엄과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수호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오랜 평화의 시절 끝에 칼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섭리로 우리는 악한 적을 무찌르고 승리할 것입니다!」

1914년 9월 14일(율리우스력 9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명의로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오후 4시, 도나우강을 항행하던 오스트리아 포함이 상징적인 의미로 베오그라드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게 전쟁의 시작이었다.

오스트리아 군부는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느려터진 행정과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신속한 결전’이 불가능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느려터진 속도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래도 세르비아와 단독으로 맞붙으면 오스트리아의 압승이 예상됐다.

1912년과 13년에 이어 3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발칸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할지 여부는, 이제 차르와 카이저에게 달려 있었다.

"폐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으으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니콜라이 2세는 극도로 심란해 보였다. 육군대신 수호믈리노프 대장과 참모총장 야누시케비치 대장은 동원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차르를 설득했다. 동원령은 오직 차르의 재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독일과 타협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독일은 오스트리아에 백지수표를 내밀었고,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막기 위한 우리의 모든 유화적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제 평화를 지킬 희망은 없습니다."

외무대신 사조노프는 강경론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경의 말이 옳다. 우리 스스로 공격에 대비하는 수밖에. 동원령을 선포하라."

9월 15일(율리우스력 2일) 오후, 차르는 마침내 동원령에 동의했다. 총동원이 아닌, 부분동원이라는 애매한 형태였다. 전시에 오스트리아를 상대하기로 되어 있는 키예프, 오데사, 모스크바, 카잔 군관구에만 동원령이 선포됐다. 이는 독일을 자극하기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니콜라이 본인의 속내는, 여전히 전쟁을 원치 않았다. 그는 전쟁이 가져올 불확실할 미래에 도박을 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대국 러시아’의 위신에 집착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고, 1908년 보스니아 합병처럼 또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원령이 꼭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압력을 줄 수 있을 거야.’

차르의 생각과 달리, 독일은 동원령을 독일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육군대신 팔켄하인은 즉각 전시상황을 선포하여 동원령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재상 베트만은 신중론을 기하도록 카이저를 설득했다. 군부와 정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카이저는, 일단 차르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친애하는 짐의 형제 니키! 독일 정부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 중재가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 러시아의 군사적 조치는 오스트리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여 우리 둘 다 피하고 싶은 참화를 촉발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폐하와 짐의 우정을 고려하여 동원령을 취소해 주십시오. 짐이 기꺼이 받아들인 중재자 입장을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카이저의 전보를 받은 차르는 동요했다. 가뜩이나 우유부단하고 귀가 얇은 니콜라이는 자신이 제대로 된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친애하는 형제 빌리’의 선의를 믿어 보기로 했다.

차르는 카이저에게 답신을 보내고, 동원령 취소 명령을 내렸다.

"동원령을 취소하라. 짐은 장차 벌어질 끔찍한 살육을 원치 않는다."

차르의 동원령 취소 명령은 러시아 군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동원령 취소는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대로 동원령을 취소했다가, 독일이 동원령을 내리면 어쩌시렵니까?"

"빌헬름은 중재할 의사가 있네. 평화적인 해결책을 도모함이 우선일세."

"카이저는 그럴지 몰라도, 군부는 아닐 겁니다. 우리 스스로 무장을 해제할 수는 없습니다. 폐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으음. 그렇다면 부분동원령을 유지하되, 일단 하루만 더 독일의 반응을 기다려 보세."

대한제국, 황성.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은 멀리 한국에도 전해졌다.

‘역사보다 겨우 7주를 늦췄을 뿐, 일어날 전쟁은 일어나는군.’

이미 예상했던 사안이라, 이선은 놀랍지 않았다.

후속 대응을 기다리던 이선에게, 9월 16일 차르의 전문이 도착했다.

이선이 언제나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듯이,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리던 차르는 최후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선에게 연락했다.

이선은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니콜라이의 운명을 생각하면, 러시아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게 좋겠지.’

러일전쟁의 지상전 승리로 인한 무승부, 스톨리핀 개혁의 성과로 인한 러시아 국력의 상승은 실제 역사보다 러시아 군부를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지닌 근본적인 후진성이 해결된 게 아닌 이상, 러시아가 전쟁에 뛰어들었다가는 실제 역사처럼 독일에게 참패를 당하고 혁명에 직면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은 대한의 국익을 위해선 필요하다. 동아시아에서 열강의 영향력을 줄이고, 대한의 국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고심하던 이선은, 마침내 답신을 준비했다.

「친애하는 짐의 좋은 형제 황제 폐하! 러시아의 결단은 오직 폐하께 달려있습니다. 폐하께서 어떤 결단을 내리시건, 짐과 대한제국은 폐하와 러시아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겁니다. 외교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러시아의 승리를 위하여 한국은 도움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동양의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러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가지 않도록, 러시아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짐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폐하의 현명한 결단을 바랍니다. 폐하의 좋은 형제, 이선.」

이선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의사만 밝혔을 뿐이었다. 일종의 대한제국판 ‘백지수표’였고, 차르의 결단에 모든 걸 맡겼다.

전제군주인 차르에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미 그는 자국 내의 강경론에 이끌려 전쟁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고, 이선의 전문은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했다.

‘음, 극동의 일은 이선에게 맡겨도 좋겠군. 지금은 오직 유럽 문제에만 집중하자.’

차르는 결단을 내렸다. 평화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이었다.

- 19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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