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10화 (509/812)

191화 세계대전 발발

사실, 이선의 전보가 러시아의 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이미 차르는 군부의 강경론에 이끌리고 있었고, 이선의 답신은 확증편향에 확신을 더해 줬을 뿐이었다. 니콜라이는 우유부단하고 귀가 얇았기에, 최종결단을 내리기 전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한 번 더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동원은 중단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라. 독일과는 협의를 이어 가겠다."

차르는 카이저와 최후의 협의에 돌입했다. 이른바 ‘빌리-니키 전보’라고 알려질 논의였다.

국지전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결정적인 순간, 수억 명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 단 두 사람에게 결단이 달려 있었다.

‘빌리’와 ‘니키’에게 최종결정권이 주어졌지만, 황제이자 군통수권자인 이들도 군부에게 휘둘렸다. 그들은 평화를 원했을지 몰라도, 군부는 이미 전쟁을 결심했다.

「친애하는 니키. 부디 짐을 믿고 동원령을 취소해 주길 바란다. 짐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친애하는 빌리. 동원이 전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중재를 요청하는 건 어떻겠는가? 오스트리아가 타협에 응하도록 독일이 길을 열어 달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한 이상, 독일은 강제할 수 없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유지한다면 독일 역시 부득이하게 동원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한 이상, 동원령을 해제할 수 없다. 짐도 진심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 오스트리아가 후퇴하면 되는 일이다.」

「러시아가 무법적인 행각을 저지르는 세르비아만 포기하면 되는 일이다.」

하루 동안 베를린과 페테르부르크 사이에 전보가 계속 오고 갔지만, 결국 두 군주는 상반된 입장을 지닌 두 정부를 대표할 뿐이었다.

카이저와 차르의 최후 노력에도, 논의는 끝내 결렬됐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은 만큼, 동원에 타국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부분동원을 총동원령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총동원령을 재가한다. 하느님께서 러시아를 보우해 주시길."

9월 17일 오후. 군부의 압력을 받아들인 차르는 마침내 총동원령에 동의했다.

총동원령이 선포되자, 러시아 전역에서 병력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지속되었던 페테르부르크의 파업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중지되었다. 차리즘을 격렬히 비판하던 야당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갑자기 충실한 차르의 신민이 되었다.

"게르만 침략자에 맞서 슬라브-정교회 형제를 돕자!"

"Боже, Царя храни(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

갑자기 애국적인 분위기로 단결되자, 차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확신을 얻었다.

"총동원령은 전쟁을 의미한다. 24시간 이내로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으로 받아들이겠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은 독일의 전쟁을 정당화했다. 독일은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낸 뒤, 전시상황을 선포하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9월 18일 오후.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자, 독일은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선전포고 소식이 전해지자, 베를린 시내에 환호가 쏟아지고, ‘독일인의 노래’가 제창되었다.

"Deutschland, Deutschland uber alles, uber alles in der Welt(도이칠란트, 무엇보다도 도이칠란트, 세상 모든 것 위에 있는 도이칠란트)!"

호전적인 독일 여론은 이번에도 전쟁이 제국을 위대하게 해 주리라 믿었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1871년에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이번에는 세계강국으로 올라갈 기회라고 믿었다.

"이제 독일 민족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구분도 없습니다!"

"Gott mit uns! Vorwarts mit Gott(신은 우리와 함께한다! 신과 함께 전진하라)!"

반전평화를 부르짖었지만, ‘반동적인 러시아 차리즘’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민주당조차도 선전포고와 전시 특별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불과 한 달 전에 만국의 노동자들과 함께 전쟁을 막겠다고 한 독일 사회민주당이, 유럽 최대의 노동자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계급보다 국가를 더 중요시함을 분명히 했다.

독일은 이른바 ‘성내평화정책(Burgfriedenspolitik)’에 들어섰고, 노동조합들은 파업을 중단하고 사회민주당은 제국정부에 적극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자, 이제 시작이다! 벨기에를 넘어 파리로 진격한다!"

독일이 선전포고한 대상은 러시아였지만, 독일군은 서쪽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의 전쟁기계가 정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목표는 벨기에를 횡단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할 시, 중립을 보장한 영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맺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고립주의를 유지해 온 영국이, 겨우 세르비아와 벨기에 문제로 독일과의 전쟁까지 각오하지 않을 겁니다."

독일 군부는 이상할 정도로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영국의 첫 반응은, 독일이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킨 직후에 도착했다. 런던 주재 독일 대사가 보내온 급전이었다.

「프랑스 국경을 침범하는 일은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은 만약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이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하겠다고 함.」

카이저는 영국의 의사에 깜짝 놀랐다. 서부의 전쟁을 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카이저는 즉흥적으로 참모총장 몰트케를 불러 즉각 서부로의 진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와의 전쟁에만 집중할 수 있다! 즉시 서부 공격을 중단하라!"

"폐하! 이미 선발대가 룩셈부르크로 진입했고, 벨기에를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격을 중단한다는 건 프랑스에 무방비로 배후를 노출해 주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거대한 전쟁기계는 한 번 움직이면 멈출 수가 없었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 전역에 동원계획과 촘촘한 철도배치가 짜여 있었고, 정해진 계획을 뒤집기는 너무 어려웠다.

카이저의 거듭된 요구에도, 몰트케는 아연한 표정으로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경의 위대한 삼촌이었다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안 했겠지! 짐이 명령하면 반드시 수행했을 거야!"

프로이센을 연전연승으로 이끈 위대한 장군 대(大)몰트케와의 비교에, 가뜩이나 삼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참모총장을 발끈하게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빠진 참모총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미 카이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의 진행을 군부에 넘겨준 상황이었다. 군부는 정해진 계획을 고집하는 극도의 경직성을 보였고, 확전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이미 카이저에게도 없었다.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한 이상, 프랑스는 중립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레이의 제안은 프랑스의 동의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 의무를 충실히 지키려 했다. 러시아가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총동원령을 내렸다.

"마침내 1871년의 치욕을 씻고, 알자스-로렌을 수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윽고 12시간 이내로 프랑스의 총동원령을 해제하라는 독일의 최후통첩이 도착한 9월 20일은, 공교롭게도 프랑스 혁명의 상징적인 날인 발미 전투 기념일이었다.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혁명군은 발미에서 파리로 향하는 프로이센 군대의 진격을 저지했고, 이는 혁명군 최초의 승리였다. 기세가 오른 혁명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랑스 혁명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최초로 불린 전장이기도 했다.

"프랑스 공화국은 독일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Allons enfants de la Patrie, Le jour de gloire est arrive(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프랑스는 단호하게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고, 애초에 최후통첩이 요식절차에 불과했던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발미 전투를 참관한 괴테는 ‘1792년 9월 20일에 세계사는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렀다’라고 평가했다.

122년이 지나, 역시 세계는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렀다. 열강들의 전쟁, ‘대전쟁(Great war)’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의 분쟁이 확대되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잇달아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100년 전 나폴레옹 전쟁 이래 이렇게까지 유럽 열강들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사례가 없었다. 크림 전쟁도 열강 간의 전쟁이었으나 국지적인 분쟁이었다.

세계는 알 수 없는 미래로 접어들었다.

영국, 런던.

전쟁을 선택한 다른 열강들과 달리, 영국은 격렬한 논쟁에 빠져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 및 러시아와 협약을 맺긴 했지만, 구속적인 군사적 의무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대륙의 분쟁에 참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다면, 대륙의 균형은 무너지는 겁니다!"

"프랑스는 그렇다 치고, 불과 10년 전만 해도 대립하던 러시아를 위해서 피를 흘려 줄 이유가 있습니까?"

9월 19일 독일이 벨기에를 향해 최후통첩을 보내고, 20일 프랑스를 향해서도 선전포고를 날리자 영국의 여론도 변화했다.

"함께 협력하겠다는 협약을 맺어 놓고서, 독일의 침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프랑스를 내버려 둔다면, 대영제국의 명예는 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명예란 단어가 영어사전에서 지워지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주영 프랑스 대사 캉봉은 영국 정치인들과 여론에 참전을 호소했다.

야당인 보수당 계열의 언론들이 대륙 전쟁에 참전하자고 요구하는 반면, 여당인 자유당 계열의 언론은 여전히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자유당 내각 인사 중 개입에 찬성하는 이는, ‘자유당 제국주의’ 파벌, 즉 총리 애스퀴스, 외무장관 그레이, 육군장관 홀데인, 해군장관 처칠뿐이었다.

프랑스의 거듭된 참전 요청에도, 자유당 내각의 대다수는 유럽의 전쟁에 뛰어드는 걸 거부했다.

중립을 고수하려는 내각과 달리, 육군과 해군은 전쟁에 찬성했다. 특히 해군장관 처칠이 가장 강경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1839년 조약을 위반한 겁니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즉각 동원령을 내려야 합니다."

"벨기에 중립 침해가 반드시 군사적 개입을 보장한다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카이저의 독일은 100년 전 나폴레옹이나 60년 전 차르보다 더 위험합니다! 독일이 유럽 패권을 장악하는 순간, 영국의 위치도 무너지는 겁니다!"

여전히 내각의 과반수는 참전에 반대했지만, 처칠은 내각의 동의를 받지 않았음에도 총리의 암묵적인 승인을 받아 함대를 동원하여 영국 해협에 배치했다.

"생각해 봅시다. 영국이 전쟁을 방관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승리하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패배할 경우. 우방이 사라지고 고립된 영국의 위치는 어떻게 될까요? 반대로, 프랑스와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그들은 영국의 방관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인도와 지중해의 안보는 삼국협상 이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외무장관 그레이의 설명은 결국 영국이 전쟁이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각이 끝내 중립을 결의한다면, 우리는 사임하겠습니다."

참전파들은 승부수를 던졌다. 총리 이하 핵심각료 4인의 사임 위협에 자유당은 움찔했다.

애스퀴스와 그레이가 사임한다면, 가까스로 과반을 유지하고 있는 자유당 정부가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의혹이 지배했다. 만약 보수당 정부가 들어선다면, 시일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영국은 참전할 터였다.

내각은 참전으로 기울어졌다. 이윽고 그레이는 참전에 반대하던 의회도 설득에 나섰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도, 국익으로도 프랑스를 저버리면 안 됩니다. 프랑스는 영국을 믿고 모든 함대를 지중해에 배치했습니다. 두 나라 간의 협약으로 우정이 싹트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프랑스 북부 해안은 무방비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원 연설에서 그레이는 영국의 참전을 정당화했다.

"프랑스의 안보가 위태로워졌습니다. 벨기에의 독립이 침해되고 있습니다. 만약 프랑스가 무너진다면, 중립을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도 독일의 동맹으로 전쟁에 뛰어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영국의 안보는 더욱 위태로워집니다. 의원 동지 여러분, 유럽의 위기를 남의 일처럼 방기해서는 안 됩니다!"

"옳소!"

"유럽의 자유와 대영제국을 위하여!"

외무장관의 연설은 효과적이었다. 참전에 반대한 자유당 의원들, 반전평화를 외치던 노동당 의원들, 심지어 아일랜드 자치주의자 의원들까지도 영국의 전쟁에 협력하여 거국일치 태세에 합류할 의사를 보였다.

「유럽 시각으로 9월 22일 0시까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영국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중대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국의 최후통첩을 독일이 묵살하고, 벨기에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자, 마침내 영국도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선전포고문을 작성한 그레이는 자신이 영국의 참전을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영국이 참전하는 바로 그날 밤, 정부청사의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유럽 전체에서 램프 불이 꺼지고 있군. 어쩌면 우리 생애 동안, 다시는 저 불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과연 유럽 전역에서 평화와 진보를 상징하는 ‘벨 에포크’의 불이 꺼지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 비스마르크는 이런 말을 했다.

「작금의 유럽은 지도자들이 화약고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다. 단 하나의 불씨가 우리 모두를 태워 버릴 만한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폭발은 발칸반도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면서 시작되리라.」

과연 ‘발칸반도의 불씨’는 대폭발로 연결됐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한 지 단 1주일 만에, 전쟁은 유례없는 ‘대전쟁’으로 확대됐다.

전쟁의 원인이 된 세르비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어느 미국 외교관의 말처럼,

「며칠 전만 해도 이 무대에서 세르비아가 주연이었음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세르비아는 무대 뒤로 사라진 듯하다.」

군사적 승리와 세계패권을 향한 독일의 열망, 범슬라브주의를 향한 러시아의 열망, 복수와 알자스-로렌을 향한 프랑스의 열망, 세계패권을 유지하길 바라는 영국의 열망이 대전쟁으로 이끌었다.

화약고는 언제든지 터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영제국은 1914년 9월 22일을 기해 독일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차후에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에도 참전을 요청하는 정식 국서를 보내겠습니다."

"즉시 본국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의 참전은, 유럽의 대전쟁을 진정한 세계대전으로 이끌었다. 한국 및 일본은 영국과 동맹이었으므로, 1912년에 개정된 3차 동맹조약에 따라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유럽의 전쟁이 아시아로 확대되는 순간, 진정한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 19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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