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대한제국 참전
1914년 9월, 마침내 대전쟁이 발발했다.
당장은 아시아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다.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이었기에, 아시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9월 22일, 영국의 참전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영국의 자치령인 캐나다·오스트랄라시아(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 최대 식민지인 인도제국에서도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참전은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이 미쳤다. 한국은 러시아 및 프랑스와 우방이기는 하나, 상호의무가 있는 군사동맹은 아니었다. 만약 노불동맹만 참전했다면, 한국은 개입할 의무가 없었다.
영국과 한국·일본은 군사동맹이었고,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칭다오의 독일군과 동양함대의 존재가 홍콩과 웨이하이, 중국 내 영국 이권을 침탈할 수 있습니다."
"극동의 친구들에게 처리를 요청해야겠군."
9월 23일, 영국 외무부는 한국과 일본에 참전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다.
「대영제국은 1914년 9월 22일을 기해 독일과 전쟁상태에 돌입하였습니다. 독일의 공격적인 정책은 세계의 평화를 깨트리고, 동맹국 공동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는바…… 상호방위조약에 의거, 대한제국에 참전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음, 드디어 시작인가."
참전 요청을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즉각 논의에 들어갔다.
"광무 16년(1912)에 개정된 제3차 한영일동맹에 따르면, 동맹국의 일방이 공격을 당하면 나머지 국가들도 참전하는 게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영국이 공격을 당한 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참전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독일의 벨기에 침공으로 영국의 안보가 위협을 당했으니, 공격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지요."
"근래 독일하고 관계가 소원(疏遠)해졌다고는 하지만, 본래 독일도 우리의 우방입니다. 굳이 대한과 독일이 전쟁까지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영국과의 동맹을 준수해야지요.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도 우리의 우방이 아닙니까? 마땅히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합니다."
"그러다가 만약 독일이 승리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일단 중립을 지키며 사세를 살펴야 합니다."
박영효 내각의 의견이 갈렸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12명의 대신(총리·참정·외무·내무·탁지·군무·사법·학무·농림·상공·교통·궁내)은, 8대 4로 중립이 우세를 보였다.
"참전은 만주에서 대한의 위치를 확실히 굳힐 수 있습니다. 참전에 대한 대가로 영국과 러시아에 만주에서의 재량권을 얻어 내도록 하지요."
얼마 전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이완용과 군무대신 박유굉이 가장 적극적인 참전파였다.
이완용은 마지막 북경 주재 주청공사이자 첫 성경 주재 주청 공사를 역임했다.
명목상 북청은 만주-몽골-신강-티베트를 모두 지배했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역은 만주뿐이었다. 이미 몽골과 티베트에는 독자정권이 들어선 상태였다.
다른 지역은 러시아에 양보하더라도, 만주 전역은 대한제국의 독점적인 세력권을 추진하던 이완용과 군부에 유럽의 전쟁은 절호의 기회였다.
"굳이 참전하지 않더라도, 이미 남만주는 대한의 세력권으로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만주 전역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이지요."
"러시아가 아무리 우방이라지만, 퍽이나 북만주를 양보하겠소이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장기전으로 접어든다면 만주를 신경 쓸 수 있겠습니까?"
열강 대부분이 단기전을 예상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전쟁이 길지 않으리라는 의견이 주류였다. 길어야 1, 2년 정도일 터였다.
하지만 군무대신 박유굉은 장기전을 예측했다. 본래 독일 유학파인 그는 친독 성향이었으나, 국익 앞에서는 냉정했다. 근래 프랑스와 군사교류를 늘려 왔던 한국 군부는, 프랑스군의 저력을 높이 평가했다.
"독일은 어떻게든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겠지만, 프랑스와 러시아의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전쟁은 막상막하로 장기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이선의 생각과 일치했다. 이선은 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었지만, 이미 참전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경들의 고견은 잘 들었소. 짐의 생각을 이야기해 볼까 하오만."
"예, 폐하."
"짐은 명분과 실리의 측면을 고려해 볼 때, 대한이 참전을 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판단하오."
황제의 말에 대신들 대부분은 놀랐다. 러일전쟁에서도 중립을 고수했듯이, 세계대전에서도 중립을 지키리라 예상했었다.
"첫째, 영국과 대한은 동맹이기에 명분은 충분하오. 러시아와 프랑스도 대한의 우방이오. 국제정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삼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참전은 필요하오. 둘째, 군무대신의 말처럼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농후하오. 막대한 군수품 수요가 발생하게 될 것이며, 아시아에서 유럽을 잇는 육로와 해상 교통을 장악한 협상국과 거래를 이어 나가는 게 타당하오."
전쟁이 4년 이상 장기화될 경우, 군수품 수요가 폭증하게 될 터였다. 실제 역사에선 일본이 누린 전시호황을 한국도 누릴 수 있었다.
"셋째, 산동 이권. 독일은 대한에서 지척인 산동에 이권을 지니고 있소. 이 지역에서 독일을 몰아내고, 가능하다면 대한이 그 이권을 계승한다면 좋겠지. 넷째, 만주 세력권. 알다시피 러시아와 대한은 만주 세력권을 양분하고 있소.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러시아는 만주 문제에 대해 한국에 더 많은 양해를 부여하게 될 것이오."
이선은 그동안 열강을 고려해 세력권 확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나, 대륙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섯째, 중국 시장의 접근.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유럽 열강들은 중국에 관여할 수 없게 될 것이오. 지금까지 중국 시장에 지배적인 위치로 있었던 영국의 점유율도 떨어지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 막 발전하게 된 대한의 산업에는 광대한 인구를 지닌 중국 시장이 필요하오. 열강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강남은 무리더라도, 만주와 황하 이북에는 대한의 이권을 확대해야 하오."
이 모든 논리의 귀결은 하나였다.
"만약 중립을 유지하면서 이익만 챙기려 한다면, 열강이 대한에게 순순히 양보하려 하겠소? 우리가 그들의 전쟁에 피를 흘릴 이유는 없지만, 그들을 지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소. 대한의 이익을 위하여, 참전하도록 합시다."
황제의 논리적인 설명에, 내각의 대부분도 참전으로 돌아섰다. 국무회의는 대한제국의 참전을 결정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참전함을 결의합니다."
"중추원과 민의원에 의결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전포고는 헌법상 황제의 권한이었지만, 정부의 결정과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아니, 참전 결정은 잠시 기밀을 유지하도록 합시다."
"언제까지 기밀로 하면 되겠습니까?"
"영국이 관세자주권 협정에 동의할 때까지."
"아아, 그렇군요."
관세자주권 완전회복을 위한 한국의 노력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미 대일 관세자주권은 회복했고, 러시아와 미국, 프랑스도 동의했다. 그런데 정작 동맹인 영국이 마지막 걸림돌이었다.
영국은 한국의 ‘근대적 상법 미비’를 운운하며 관세자주권 회복에 반대했지만, 이는 얼토당토 않는 명분이었다. 이미 한국은 프랑스 상법과 매우 유사한 근대적 상법을 도입한 상태였다.
만약 한국이 완전한 관세자주권을 쟁취하면, 영국은 가뜩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신생 중화민국 정부가 한국 사례를 내세워 관세자주권을 요구할지 우려했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의 관세자주권 회복은 늦춰지고 있었다.
‘참전까지 요구했다면,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겠지.’
개항 이래 최초로, 한국이 영국을 상대로 협상의 우위를 점하는 순간이었다.
* * *
"대한제국은 대영제국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칭다오의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오오,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본국의 훈령을 받은 주영 한국대사 이한응은, 영국 외무부를 찾아 참전의사를 밝혔다.
"단, 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릴 동맹국으로서 적합한 대우를 받길 원합니다."
"적합한 대우라고 하시면?"
"대한제국에는 관세자주권 문제가 중요합니다. 관세 협약을 조속히 마무리 짓기를 바랍니다."
외무장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관세자주권 문제로 동맹국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상무부에 새 관세 협정에 대해 신속히 동의를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 협정이 마련되는 즉시, 한국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낼 예정입니다."
자유당 내각 일각에서는 한국에 관세자주권을 내주면 중국도 요구하지 않겠냐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전 상무장관이자 현 해군장관인 처칠은 한국의 참전을 적극 지지했다.
"중국은 영국의 동맹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요구해 봤자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한국에 관세자주권을 참전 선물로 안겨 주고, 조속히 중국의 독일 기지들을 공격하게 만듭시다."
독일 동양함대의 본거지인 칭다오를 점령하려면 일본 해군 못지않게 한국 육군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선 관세자주권 정도는 선물로 안겨 줄 수 있었다.
처칠에게는 한국의 호의를 사야 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사, 이번에 귀국에 인도하게 된 전함 이순신 말입니다만……."
1914년 9월, 영국이 건조한 전함 충무공 이순신은 마침내 대한제국 해군에 인도되었다. 영국에 도착한 대한제국 해군 장교들이 전함을 인수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해상이 전시상황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전함 충무공 이순신의 귀국은 일단 지연되었다.
전쟁 발발로 인해 최신 전함이 한 척이라도 더 필요했던 해군장관 처칠은, 한국이 인수한 충무공 이순신과 오스만이 건조를 의뢰하여 얼마 전에 인수한 <레샤디에>에 눈독을 들였다.
해군력 강화가 시급했던 오스만은 영국의 요청을 거부했지만, 한국은 동맹을 도우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귀국에서 전함을 영국에 임대해 주었으면 합니다."
"한국이 곧 참전한다면, 동맹의 일원으로서 귀국 함대와 연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타당한 의견이었으나, 영국 해군은 한국 해군의 실전 능력을 의심했다. 한국 육군과 달리 해군은 실전 경험이 없다시피 했다.
영국 해군은 자국 장교와 수병이 운용해야 전함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 해군이 직접 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임대료는 넉넉히 드리지요. 하루에 1천 파운드, 어떻습니까?"
"한국은 이미 275만 파운드에 계약을 했고, 첫해 분인 55만 파운드를 이미 납부했습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산 한국 해군의 유일한 전함입니다. 만약 작전 중에 침몰하거나 대파당하면 어떡합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동형급 전함으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본국에 보고를 하지요."
이한응의 보고를 받은 이선은 자신의 예상대로다 싶었다.
‘일 1천 파운드면 연간 36만 5천 파운드. 매년 납부해야할 할부금의 3분의 2가 되는군. 전쟁이 4년 이상 지속된다고 가정하면, 본래 비용의 3분의 1로 구매 가능. 만약 침몰해도 동형급 전함으로 보상해준다는 약속을 받았고. 영국 해군에 도움을 베풀어 두면, 전후 패전국 전함 분배에 참여할 수도 있겠지. 이래저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선은 처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 조건이 있었다.
"첫째, 임대료는 종전 후 인도가 완료될 시까지 일 1천 파운드로 한다. 둘째, 한국의 전함 할부금 납부는 종전 후로 연기한다. 셋째, 작전 중 파손되면 수리를 모두 완료하고 인도 지연에 대한 보상금이 있어야 한다. 넷째, 작전 중 침몰하면 영국은 동형급 전함으로 보상한다. 다섯째, 영국에 임대를 하되 한국 해군 장교들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탑승과 참관을 허용한다."
"음, 좋습니다."
처칠도 전쟁이 장기화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한국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함 충무공 이순신은 명목상 대한제국 해군 소속에서 영국 왕립해군으로 임대되었고, 영국 장교와 수병이 운용하게 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대한제국 해군 장교단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탑승을 하여, 영국 해군과 같은 훈련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IKS Yi Sun-sin’은 영국 왕립해군의 일원으로 함대에 배치되었다.
한국과 영국의 관세협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영국으로선 전쟁에 모든 정신이 쏠려 있어서, 한국의 요구사항을 영국이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10월 5일, 관세자주권 회복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한영통상항해조약>이 체결되었다. 발효는 1915년 1월 1일이었다.
「대한국, 광무 19년 1월 1일을 기해 완전한 관세자주권 완전 회복!」
「불평등 조약의 시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다!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대한국!」
이로써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82년 서양 열강과의 수교조약 이래, 마지막 남아 있었던 불평등조약의 요소인 관세자주권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마침내 열강과 완전히 동등한 나라가 되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한국 여론은 열광했다. 비서양 국가가 서양 열강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받은 건, 제국주의 시대에 실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1858년에 불평등조약을 맺은 일본이 1911년에야 완전자주권을 회복했는데, 1882년에 조약을 맺은 한국은 불과 32년 만에 완전자주권을 되찾았다.
새 통상조약이 체결된 즉시, 한국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통보했다.
독일이 주변국에 최후통첩을 날린 것처럼, 전쟁 절차를 정당화하는 요식행위에 가까웠다. 예상대로 독일은 기한까지 한국의 최후통첩을 무시했다.
「독일제국은 주변국의 독립과 자유를 파괴하며,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였다. 동양과 세계의 평화, 대한과 동맹의 안보를 위하여, 대한제국은 독일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하는 바이다.
광무 18년 10월 12일.」
1914년 10월 12일, 대독 선전포고가 선포되었다. 원로 김옥균과 정당 지도부들에게 설득된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선전포고와 전시공채 발행에 동의했다.
관세자주권 화복에 도취된 한국 여론도 참전에 적극 지지하는 편이었다.
"대한제국은 연합국의 용전분투에 경의를 표하며, 세계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최후의 승리까지 함께할 것을 천명한다."
황제의 권한으로 직접 선전포고문에 서명한 이선은, 즉각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일본도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10월 8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한영일 삼국은 공동으로 독일령 산동에 대한 연합작전을 준비했다.
대한제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벨기에, 일본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승리를 함께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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