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산동 공략
1914년 10월 25일. 산동 북부 연대(옌타이)를 손쉽게 점령한 대한제국군은, 소수의 주둔군만 남기고 청도(칭다오)로 진격했다. 독일이 부설한 철도를 타고 빠르게 청도로 접근했다.
"원수부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한 후에, 피해를 줄여 청도를 함락시키길 원한다. 전군은 포위작전에 만전을 기하라."
"예!"
한국군은 여순 요새에 섣부른 공격을 해서 대규모 희생을 낳은 일본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1900년대 군제개혁 이래 한국군은 화력 중심의 군사교리를 채택했고, 독일군이 버티고 있는 요새를 향해 포탄을 쏟아붓기로 했다.
파병군 사령관 박승환 부장은 철저한 준비를 하며 느긋하게 포위전을 준비했다.
10월 26일. 한국군 선발대가 산동 북방 평도(平度)에 도달했을 무렵, 척후를 맡은 기병중대가 독일군 척후대와 충돌했다.
"전투 준비하라!"
"예!"
기병정위 김광서(金光瑞)는 중대에 전투 명령을 내렸다. 김광서는 참모차장 겸 병참국장 김정우 참장의 차남으로, 대대로 무인가문이었다. 개화된 군인집안에서 자란 김광서는, 어릴 적부터 나폴레옹 전기를 탐독하며 군인이 되길 꿈꿨다.
김광서는 광무 12년도 육군무관학교 수석졸업에, 올해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이수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린, 일명 김경천(金擎天)으로 더 유명하다.
"적군이 교전을 포기하고 퇴각합니다!"
"으음, 독일군이 야전을 벌일 생각은 없는 것 같군. 섣불리 추격하지 말라."
김광서는 퇴각하는 독일군을 섣불리 추격하지 않고, 상부에 보고했다.
독일군은 병력에서 압도하는 한국군과 야전에서 충돌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며, 현지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중화민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한국 정부는, 군대를 향해 엄정한 군기를 요구했다.
대한제국의 국력이 상승하면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멸시적 사고가 근래 들어 확산된 건 사실이나, 대민(對民)행위에 있어 실수를 저지를 만큼 군부가 어리석지 않았다.
파병군은 한국군 내에서도 최고의 군기를 자랑하는 근위사단이니만큼, 임박한 전투에만 집중했다.
10월 28일. 일본군 3사단 29여단, 2개 포병연대, 공병대대로 구성된 1만 2천 명이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청도 동북쪽 40km 지점의 노산만(嶗山滿)에 상륙했다.
같은 날, 한국군 주력 2만 2천명과 영국군 2개 대대 1,500명이 철도를 타고 청도 교외에 도착했다.
한영일 연합군은 연합사령부를 결성했다. 한국 육군 박승환 부장, 일본 해군 가토 도모사부로 중장, 영국 육군 너새니얼 바나디스톤(Nathaniel W. Barnardiston) 준장이 각국을 대표했다.
"즉시 포위작전을 실시하도록 합시다."
"해상봉쇄는 완료되었습니다. 지상에서도 포위를 완성하면 됩니다."
"적군은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한영일 연합함대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일본은 공고급 최신전함 4척을 비롯한 군함 36척을 동원했고, 영국도 순양함만 16척을 동원했다. 한국도 순양함 4척과 구축함 8척을 제공했다.
독일 동양함대는 봉쇄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탈출을 완료했지만, 한영일 연합함대는 인도양과 태평양 곳곳에서 독일 해군을 추격했다.
"독일군이 만에 하나 지상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교제철도를 완전히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남은 중국이 선포한 전투 구역을 넘어서는데……."
"삼국이 공동으로 중국 정부에 요청하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외무부에 요청하지요."
"먼저 칭다오 시가지부터 먼저 점령을 완료합시다."
10월 30일. 한영일 연합군은 청도 시가지에 진입했다.
"총독부 관저에 태극기를 꽂는다! 일본군에 영광을 넘겨 줘서는 안 된다!"
"오오!"
해군육전대 제1연대장 안중근 정령은, 한국군이 먼저 총독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서둘렀다.
안중근은 군도와 권총을 빼들고 진두지휘했다. 14년 전, 의화단전쟁의 북경 공략전 당시 독일군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는 그로선 마침내 독일에 한 방 먹여 줄 기회가 온 것이었다.
‘오만한 독일 놈들에게 동양인의 저력을 보여 주마!’
기세등등하게 진격하는 연합군과 달리, 독일군은 시가전을 포기하고 지연전을 펼치면서 요새로 퇴각했다.
"태극기가 휘날린다!"
"대한국 만세!"
10월 31일 오전. 해군육전대는 손쉽게 총독부를 점령하고, 독일제국군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독일군의 질서정연한 퇴각과 교전 회피로 인해, 양군의 손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독일군은 요새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
"요새에 틀어박혀 버틸 모양인가 본데."
"곡사포와 중포로 요새를 두드려 줍시다."
11월 초, 연합군은 섣불리 공격하기보다는 신중하게 독일군의 방어 태세를 점검했다.
군수품과 포탄을 적재하고, 대규모 포격전을 준비했다.
11월 6일. 연합군 병력 일부가 교제철도의 종점이자 산동의 성도인 제남에 입성했다. 한국군 근위사단 제2연대 1대대는 제남역에 걸린 독일제국군기를 내리고 태극기와 유니언잭, 일장기를 게양했다.
"제남은 중립지역이오! 어째서 제남까지 진격했단 말이오?"
"교제철도 확보는 연합군 사령부에서 결정한 바입니다. 귀국 정부를 통해 정식으로 요청하였습니다."
제남 점령은 산동성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남경 정부가 중립 침해에 항의했으나 현실적으로 묵인하는 쪽에 가까웠다면, 자신의 권위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한 산동군벌은 연합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만큼 중화민국은 난맥상이었다. 결국 교통정리를 위하여 육군총장 단기서가 안휘군 병력을 이끌고 제남에 도착했다.
"연합군의 진격이 허용되는 건 이 제남까지입니다. 독일군이 항복하면, 산동 조차지와 교제철도를 반환한다는 당초의 약속을 이행해 주기를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전후에 연합국 최고회의에서 이를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단기서는 중화민국의 취약함에 혀를 찼다. 차라리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직접 전투를 벌여 산동 수복을 꾀하느니만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의 국민당 정부로는 혼란이 지속될 거다. 지방에 중앙의 권위를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정권이 필요해.’
연합군의 청도 포위가 계속되는 동안, 동아시아 최초의 항공작전이 이루어졌다.
"출진! 육군항공대 출격하라!"
"준비 완료!"
"출격!"
청도 공략전은 대한제국 육군항공대에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바로 최초의 항공 군사작전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유왈보 참령이 이끄는 5대의 항공편대는, 청도 외곽 모래사장에 간이비행장을 설치하고 하늘을 향해 발진했다.
항공국장 노백린 참장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최초의 항공 군사작전이 이뤄진 게 1911년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이었고, 본격적인 군사적 이용이 이뤄진 게 세계대전이었으니, 한국은 항공대만큼은 열강과 동등하게 운용했다.
독일군에는 딱 1대의 타우베(Etrich Taube) 전투기가 있었다. 바로 그 1대가 연합군 입장에선 성가실 정도로 자주 정찰에 나섰다.
"적기 출현!"
"좋아, 내가 잡는다."
수적 열세를 확인한 타우베는 즉각 교전을 회피하고 퇴각했다. 유왈보는 빠르게 기체를 몰아 적기에 접근했다.
탕! 탕!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에서도 첫손을 꼽을 항공교전이 이뤄졌지만, 무장이라고는 조종사가 들고 있는 권총이 전부였다.
서로 간에 쏘는 권총으로는 전투기를 격추시킬 정도가 못됐다. 결국 타우베는 도주에 성공했고, 한국군 항공편대도 귀환해야 했다.
항공기는 아직 초창기에 머물러 있었다. 권총으로 적기를 쏘거나, 손으로 폭탄을 들고 투하하는 게 전부였다. 현시점에서 항공기의 역할은 현실적으로 정찰기가 한계였다.
"제길, 하다못해 기관총이라도 거치해야 하는데."
"별수 없죠. 독일군 놈들 놀라게 폭격 작전이나 나가죠."
원시적인 형태이긴 했어도, 아직 대공포라는 개념도 초기에 머물러 있던 시절이라 항공 폭격은 꽤나 효과를 발휘했다. 물리적 타격보다는,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진다는 심리적 충격이 컸다.
한국 육군항공대와 일본 해군항공대는 번갈아 출격하며 독일군 진지를 폭격했다.
일본 역시 세계 최초로 수상기모함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프랑스제 모리스 파르망(Maurice Farman) 복엽 수상기 4대는 수상기모함 와카미야에서 출격하여 독일군 진지를 정찰하고 손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현재로서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항공모함의 기원이 되는 수상기모함이었다.
그러자 독일 해군 최후의 저항이 이어졌다. 어뢰정의 기습을 받아 일본 해군은 수상기모함이 대파되고,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잃었다.
"전군, 포격 개시!"
"포격! 계속 포격하라!"
"포격을 멈추지 마라!"
11월 한 달 동안, 연합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맹렬하게 쏟아부었다. 하루 평균 2천 발의 포탄이 독일군 진지를 향해 쏟아졌다.
화력 중심 교리를 채택한 한국군뿐만 아니라, 일본군 역시 여순 전투를 반면교사로 삼아 화력 중심의 공세에 동의했다.
포격이 이어지기 한 달, 11월 30일에 마침내 연합군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전군, 요새를 향하여 공격!"
"대한국 만세!"
대한제국군의 250mm 공성포, 150mm 곡사포가 일제히 포문에서 불을 뿜었다.
이윽고 3만 5천 명의 연합군 병력이 각자 맡은 지역을 향해 돌격했다. 한국군이 우익을 맡고, 일본군이 좌익을 맡았다. 중앙에는 한국군 본대와 영국군이 배치됐다.
포병대의 맹렬한 포격은 독일군의 포대를 대부분 무력화시켰다. 아군의 화력엄호를 받은 보병은 참호를 파 가며 적 진지에 접근했다.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야습에 돌입했다.
"돌격! 진지를 점령하라!"
"대한국 만세!"
한국군 근위사단 제1연대의 선봉부대를 이끄는 보병정위 지대형(池大亨)은 돌격 구호를 외쳤다.
지대형은 김광서와 무관학교 동기로, 함께 군부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대한제국군 장교의 최고 엘리트 코스는 무관학교 졸업 후 참위 임관, 전방 소대장으로 2년간 복무, 부위 진급 후 육군대학 입학, 육군대학을 3년간 이수한 후 근위사단 중대장으로 배치받는 것이었다.
김광서와 지대형은 바로 이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았고, 바로 다음 기수에서는 홍사익과 김좌진이 뒤따르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지대형도 일명 이청천(李靑天)으로 더 유명하다.
타다다다다다다당!
지대형 정위는 군도를 빼 들고 중대의 앞에 서서 돌격했다. 적의 총알이 핑핑 스쳐 지나가는 걸 체감했지만, 이미 생사를 초월하여 돌격하고 있었다.
"적 진지에 태극기를 꽂아라!"
"와아아아!"
독일군이 발사하는 기관총의 위력은 포격전의 여파인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애초에 남은 기관총 숫자도 4대에 불과했다. 요새 전역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한 달간 이어진 포격전, 중과부적의 병력, 고립무원의 처지는 천하의 독일군도 사기를 떨어트리게 했다.
"사령관 각하! 적의 비스마르크 포대, 몰트케 포대를 모두 점령했습니다!"
"좋아, 수고했네!"
12월 1일. 독일군의 ‘몰트케 포대’, ‘비스마르크 포대’에 모두 태극기가 휘날렸다.
작전은 순조로웠고, 보병은 최일선 진지를 하나하나 빼앗아 갔다.
포병의 화포는 끊임없이 포탄을 쏘아 부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최후의 독일군 포함 야구아(Jaguar, 재규어)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카이저린 엘리자베트(Kaiserin Elisabeth)도 포격으로 침몰당했다.
공세는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12월 6일 밤, 연합군은 독일군의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고 수비 측을 압도했다.
최후 공세를 앞두고, 박승환은 독일군에 마지막으로 항복을 권유했다.
「귀관의 장병들은 용맹하게 분투해왔으나,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며, 장병들의 목숨만 내놓는 결과가 될 것이다. 연합군은 즉시 항복을 권유한다. 총독 이하 모든 장병은 국제법에 따라 정중한 예우를 받을 것을 약속한다.」
"이제 포탄과 총탄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총독 각하, 이대로 계속 저항하는 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카이저께서는 최후까지 저항하라고 명령하셨으나……."
총독 발데크는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다는 걸 진작 깨닫고 있었다. 순전히 카이저의 자존심 때문에 항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으나, 독일군은 카이저의 명령 때문에 전멸을 각오할 정도로 비이성적이지 않았다.
"항복한다. 오전 7시를 기해 전투를 중지하라."
12월 7일 오전 7시, 새벽 여명이 하늘에 막 모습을 드러낼 무렵, 독일군 진지에 백기가 올라갔다.
이윽고 독일군의 전령이 연합군 사령부에 도착하여 총독의 항복 서한을 전달했다.
"연합군은 귀국 군대의 분투에 경의를 표하며, 항복을 접수하겠소. 총독 이하 전원에게 정중한 예우를 약속하겠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박승환은 독일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전투 종료를 선언했다.
"제길, 비열한 아시아 놈들. 두고 보자. 반드시 이 치욕을 갚고 말겠다."
독일군은 전원 포로가 되었으나, 유일하게 군터 플뤼쇼브(Gunther Pluschow) 중위만이 기밀문서를 지참한 채 타우베 전투기를 타고 탈출하여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망을 가까스로 벗어나 착륙에 성공한 플뤼쇼브는, 타우베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으로 변장하여 남경을 향해 도망쳤다.
"광무 18년 12월 7일 08시를 기해 독일군이 항복하였다! 대한국군은 청도를 점령하고, 산동 작전을 완수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승전보가 본국에 전해지자, 일제히 환호성이 쏟아졌다.
독일군 사상자는 7백여 명, 포로 4천여 명이었다.
연합군 사상자는 2천여 명으로, 전사자 대부분은 일본 해군에서 발생했다. 순양함과 구축함이 어뢰에 침몰하면서 꼼짝없이 수백 명이 수장당하고 말았다.
한국군은 전사자 100여 명, 부상자 600여 명이었다. 10년 전 일본군의 파멸적인 여순 공략과 비교하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상당한 전과(戰果)를 냈다고 할 수 있었다.
「옛 기록을 살펴보니, 발해 무왕 시절 장수 장문휴가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했다고 한다. 등주는 오늘날 산동 연대의 봉래(蓬萊)이니, 국군이 독일로부터 해방시킨 바로 그곳이다.」
「산동은 고대 이래 우리 민족의 생활터전이기도 했다. 등주를 비롯한 산동 곳곳에는 신라방이 있었으며, 수군을 이끌며 해적을 토벌한 청해진대사 장보고가 무용을 떨친 곳이기도 하다.」
「실로 1200년 만의 역사적인 산동 진격이라 할 수 있다! 마침내 열강인 독일군과 싸워 이기며 대한의 무위(武威)를 세계에 떨칠 수 있게 되었으니, 자랑스럽도다! 영광스러운 순간이로다!」
육군, 해군, 민족주의 성향의 언론은 앞다퉈 한국군의 산동 공략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의화단전쟁의 청나라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점, 중국 본토인 산동을 향해 진격한다는 점 모두 국민적 환호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고구려와 발해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민족주의 여론은 732년 장문휴의 등주 원정을 언급하는가 하면, 근래 들어 해군의 선구자로 격상되고 있는 장보고의 활동상을 언급하기도 했다.
치밀한 작전, 항공기를 활용한 정찰과 폭격, 적 요새를 제압하기 위한 화력의 집중, 병과 간의 원활한 제병 협동.
열강을 상대로 한 대한제국군의 첫 전투는 훌륭한 성공이었다.
- 19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