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16화 (515/812)

197화 야망과 야욕

산동 전역의 승리는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은 물론 황제에게도 기쁨을 안겨 주었으나, 이선은 승리에 도취되진 않았다.

"훌륭한 승리임에는 틀림없으나, 양군의 압도적인 전력 격차를 생각할 때 승리는 당연했소. 병력만 해도 7대 1에 달했으니까. 보다 중요한 건, 산동 전역이 중대한 교훈이 되길 바라오."

군부 수뇌부도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전공을 세운 이를 수훈하고 전훈(戰訓)을 분석했다.

"이번 전역의 중대한 전훈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방어 측의 참호와 요새를 분쇄할 수 있다는 거지요."

"화력을 확보할 수 있는 생산력이 중요하겠군요."

"일본의 수상기모함도 신선했습니다. 잘만하면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과연. 앞으로 항공모함이란 개념이 등장할 겁니다."

"항공대 조종사들은 권총만으로는 무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현재에는 정찰용도로만 쓰이지만, 기관총을 거치하고 폭탄을 투하할 수 있도록 기체를 개량할 수 있을까요?"

"정찰기에서 전투기와 폭격기로. 현재의 항공기 제작기술로는 한계가 있지만, 러시아와 공동으로 폭격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대한에도 내년이면 도입될 수 있을 겁니다."

육해공에서 전훈을 토대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2천만이 넘는 한국 인구는 세계적으로 볼 때는 10위권에 속했지만, 하필이면 주변국의 인구가 세계 1위인 중국, 3위인 러시아, 8위인 일본이었다.

자연히 인력을 갈아 넣는 방식보다는 화력을 중시하는 교리가 우선적으로 검토되었고, 그 첫 성과가 산동 전역이었다.

"결국 생산력과 경제력이 문제로군……."

분명히 산동 전역은 훌륭한 승리였다.

하지만 이는, 압도적인 병력 우위와 엄청나게 쏟아부을 수 있었던 화력 덕분이었다.

이런 방식에는 막대한 군수물자가 필요했고, 후발주자인 한국의 빈약한 공업생산력으로는 어디까지나 국지적이고 제한적인 전투에서나 가능한 일었다.

한국은 지난 30년간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의 기초를 세울 정도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국가였지만, 서양 열강과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강대국이라는 러시아제국조차도 생산력 부족으로 쩔쩔매고 있는데, 한국에 막대한 군수물자 생산은 아직까지는 환상이었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아직 한국은 서양 열강과 합작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생산을 할 만한 공업력이 부족했다. 30년간 격차를 최대한 줄였음에도, 수백 년간 경험을 축적해 온 서양 열강과의 차이는 컸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처럼 정신론으로 빠지면 패망의 지름길이지.’

실제 역사에서 1차 세계대전의 압도적인 물량에 질린 일본은 오히려 화력우위론에서 정신론으로 퇴화해 버렸고, 그 결과는 온갖 추태와 패망이었다.

‘전쟁은 기회다. 서양 열강의 국력은 깎아내리고, 대한의 국력은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

결국 세계대전이 최고의 기회였다.

특히 러시아는 부족한 군수물자를 해외 이곳저곳에 발주를 넣고 있었고, 우방이자 철도로 연결되는 한국에도 생산 제안을 했다.

‘러시아는 기술이전에 인색한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하면, 대국다운 관대함이 있지.’

애초에 대한제국의 제식소총인 광무 보총, 혹은 ‘모총’도 모신나강의 기술이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대가로 한국은 자국의 군수생산라인을 통해 러시아에 소총과 탄환을 수출할 수 있으니, 상부상조라 할 수 있었다.

세계대전 발발 이후 한국과 러시아는 기술교류에 나섰고, 더욱 상부상조를 하고 있었다.

연합국이 동아시아에서 독일의 세력을 구축(驅逐)했을 바로 그 무렵, 러시아가 더욱 태평양 방면에 의존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 * *

1914년 12월 9일(율리우스력 11월 27일), 러시아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 비행장.

작년에 차르가 친견하는 가운데 <루스키 비탸지>의 비행을 성공시킨 시코르스키는, 이를 개량한 <일리야 무로메츠(Ilya Muromets)>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의 4발 엔진 여객기 일리야 무로메츠는, 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최초의 중폭격기로 변신했다.

폭격기로 바뀌면서 여객용 편의 장치는 대부분 제거하고, 최대 800kg의 폭탄을 장착할 수 있는 공간과 9기의 방어용 기관총을 곳곳에 설치했다. 엔진 보호를 위해 5mm의 장갑판을 덧대었다.

이미 개전 초기인 9월에 4대가 육군항공대에 편입되었고, 12월이 되자 10대로 늘어났다.

"훌륭합니다. 언제 전선에 투입될 수 있을까요?"

"올해 안으로 폭격기 편대가 편성되고, 내년 2월이면 실전에 투입될 수 있을 겁니다."

시고르스키의 설명에 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발발 이후 중립국인 이탈리아로 이전했던 이영은, 이후 새로운 훈령을 받아 러시아로 이동했다. 이영 입장에서도 아내가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가길 원했으니 마음이 편했다.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지만, 이영은 대한제국 황실의 유럽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러시아에서 이영의 역할은 중요했다. 대한제국 황제의 아우, 러시아제국 야전군 사령관의 사위인 이영은 환영받는 존재였다.

이선은 러시아-아시아은행을 통해 시고르스키와 러시아-발트운송회사에 본격적인 투자를 했고, 일리야 무로메츠의 개발에도 상당한 지분이 있었다.

"당초 합의대로 한국에서도 생산해서 러시아에 공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아무래도 러시아 국내 생산은 대부분 전선에 사용될 군수물자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국영기업인 대한중공업주식회사는 러시아 군용품들에 이어 일리야 무로메츠의 생산도 따냈다. 기술이전을 통해 한국에 자체적으로 폭격기편대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도 획득했다.

한국군은 1915년 하반기에 항공대를 러시아에 투입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미 ‘의용군’의 형태로 대한적십자사 산하 의료진이 이동외과병원을 결성하여 러시아에 파견됐다.

"대한적십자의 명예를 걸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연합국 동지들에게 힘이 되어 줍시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겸임하고 있는 이강은 파견의료진 대표를 맡은 김필순과 함께 러시아로 향했다.

명목상의 사유는 의료진 격려지만, 이선의 친서를 지참하고 있었다.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고, 자연히 군사교류도 확대됐다. 한국은 러시아의 전쟁노력에 적극 협력했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이영은 이위종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전하, 소식 들으셨습니까? 터키 해군이 흑해 연안을 기습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언제요?"

"방금 들어온 급전입니다. 오늘 새벽 오데사와 세바스토폴이 기습 포격을 당하고,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12월 9일 새벽, 오스만 해군이 오데사, 세바스토폴, 노보로시스크, 페오도시아, 얄타 등을 기습 포격했다는 페테르부르크에 전해졌다.

러시아가 그토록 염려하던 다르다넬스 해협봉쇄와 흑해 무역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

오스만제국의 참전은 필연이었는가?

이선의 개입으로 오스만 참전의 뇌관이 됐던 전함 <술탄 오스만 1세>는 사라졌지만, 흑해의 건함경쟁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된 건 아니었다.

이미 오스만은 1911년 영국에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의 건조를 의뢰했다. 메흐메트 5세의 별칭을 딴 전함 <레샤디에>는 이미 1914년 8월에 완성되었고, <파티흐 메흐메트 2세>는 한창 건조 중으로 내년에 완성 예정이었다.

8월에 영국을 방문한 오스만 해군 장교단은 인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라예보 사건과 발칸 위기가 발생했다. 러시아는 영국에 레샤디에의 인도를 지연시키라고 요청했고, 영국은 일단 인도를 지연시켰다.

세르비아의 최후통첩 수락으로 위기가 일단락되면서 영국은 인도를 승인했으나, 흑수단의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다시 격랑에 빠져들었다.

끝내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러시아는 거듭 인도를 지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오스만은 이미 친독으로 기울어졌고, 오스만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확보가 흑해의 해상패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요청도 있지만,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전함이 한 척이라도 더 필요합니다. 적성국가가 될 수 있는 터키보다는 왕립해군에 인도하는 게 낫겠습니다."

"하지만 대가 없이 압류한다면, 이야말로 터키를 적성국가로 만드는 게 아닙니까?"

"한국의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터키가 한국처럼 영국의 우호국이라면, 임대 제안을 받아들이겠지요. 만약 거절한다면, 이는 적성국가임을 자인하는 겁니다."

해군장관 처칠은 오스만에 레샤디에를 ‘임대’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 전함 충무공 이순신처럼 매일 1천 파운드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는 절대 임대를 받아들일 수 없소! 계약을 이행해서 속히 인도하시오!"

이미 250만 파운드를 완납한 오스만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비용은 차치하고, 인도 지연으로 인한 전력 손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처칠은 레샤디에를 압류할 것을 명령했다. 레샤디에는 영국 해군 전함 HMS 아쟁쿠르(Agincourt)로 명명됐다. 실제 역사에서는 HMS 에린으로 명명된 바로 그 전함이었다.

건조 중이던 파티흐 메흐메트 2세도 압류되어 영국 해군에 인도되기로 결정됐다.

"이 무례하고 오만한 영국 해적 놈들! 어디 두고 보자!"

재정 위기에도 막대한 비용을 들어 전함 건조를 의뢰했던 오스만의 여론은 격동했다.

오스만제국을 이끄는 청년튀르크당의 ‘3두’이자, 친독파인 육군대신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에게는 더없이 좋은 명분이 주어졌다.

엔베르는 전함 문제와 상관없이 이미 독일과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범투란주의자인 엔베르는 독일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투르키스탄까지 이어질 범튀르크제국을 꿈꿨다.

"우리의 미래는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 있다. 아나톨리아, 캅카스, 카스피해를 넘어 투르키스탄까지 모든 튀르크 민족을 하나의 기치 아래 단결시키자!"

러시아가 범슬라브-정교회 제국을 꿈꿨다면, 엔베르는 범튀르크-이슬람 제국의 건설을 꿈꿨다. 세계대전은 범투란주의자의 야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를 친다!"

중립을 유지하려 했던 오스만 정부는 전함 문제로 인해 엔베르의 정치공작에 말려들고 말았다.

마침 독일 지중해 함대가 영국의 공격을 피해 콘스탄티노플로 도주했고, 고립된 독일 함대는 오스만에 전함을 ‘기증’했다.

순양전함 은 <야부즈 술탄 셀림(Yavuz Sultan Selim)>으로, 순양함 는 <미딜리(Midilli)>가 되었다.

영국이 항의했지만, 오스만은 압류된 전함 대신이라고 맞섰다.

고조되던 반영 여론은 급격히 친독으로 기울어졌고, 엔베르는 해군대신 아흐메드 제말 파샤와 손잡고 전쟁을 결정했다.

12월 9일, 사실상 독일 해군이나 다름없는 오스만 해군은 흑해의 러시아 항구들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했다.

놀랍게도, 오스만 정부의 공식 승인 없이 군부 실세인 엔베르와 제말이 독일과 손잡고 멋대로 벌인 일이었다.

"망할 터키 놈들, 일본 놈들에게 배웠나?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공격이라니!"

러시아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기습공격을 당한 것 자체에 분개했다.

"대외무역의 절반 가까이 흑해에 의존하는데, 해협이 막혀 버렸으니 심각한 사태가 아닙니까?"

"아니, 차라리 잘됐소! 마침내 숙원인 콘스탄티노플 해방의 기회가 온 것이오!"

"음, 영국과 프랑스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지."

러시아 군부는 오히려 오스만의 참전을 반겼다. 러시아에 있어 ‘콘스탄티노플 해방’과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의 통제는 실로 수백 년 된 숙원이었다. 영국의 반대로 번번이 가로막혀야 했지만, 오스만이 독일 쪽으로 참전한 이상 더 이상 반대하지 않을 터였다.

"이제 어쩔 수 없군. 러시아는 반드시 보복을 하려고 하겠지. 제국을 방위하기 위해선, 독일과 손잡고 전쟁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소."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를 격파하면, 우리는 튀르크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겁니다."

중립을 고수하려던 오스만 정부는 결국 군부에 의해 전쟁으로 이끌려 가고야 말았다.

마치 세르비아에서 흑수단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부가 기뻐하며 전쟁을 결정한 것처럼, 오스만도 쿠데타로 집권한 청년튀르크당 급진파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도발했다.

러시아·프랑스·영국은 잇달아 오스만에 선전포고하고, 오스만은 정식으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동맹에 가담했다.

범(凡)제국을 꿈꾸는 자들의 야욕에, 전쟁은 거듭 확전되었다.

* * *

오스만의 참전은, 러시아의 흑해 무역로가 봉쇄됨을 의미했다. 러시아 무역의 40%가 흑해에 의존했는데, 이는 곧 국부(國富)의 큰 비중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발트해도 개전과 동시에 독일 해군에 의해 봉쇄되어, 쓰시마 해전 이후 급격히 약화된 발트함대는 핀란드만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발트해와 흑해라는 양대 무역로가 봉쇄된 러시아는, 이제 북극권에 치우친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의존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조차도 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받아 가며 스칸디나비아를 우회해야 하는 항로였고, 항구에서 수도까지 열악한 육로 교통으로 인해 운송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태평양의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눈을 돌렸다. 비록 유럽 러시아와 멀기는 해도, 가장 안전한 루트였다.

"발트해와 흑해가 모두 봉쇄됐으니, 태평양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존재가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귀국의 적극적인 협력을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귀국의 전쟁 승리를 위하여 최대한의 협조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러시아에 한국의 중요성은 예전보다 더욱 커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코가 석 자라 러시아가 요청하는 물자 생산과 수송에 한계가 있었고, 미국 역시 대서양 건너 영국과 프랑스의 주문을 우선시했다.

러시아에 남은 선택지는 일본과 한국이었는데, 8년 전에 전쟁을 벌였던 일본보다는 한국에 더 우호적이었다. 무엇보다 섬나라인 일본보다는 만주철도로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큰 강점이었다.

"자, 기회가 왔다. 러시아에 필요한 물자들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여 수송한다."

러시아는 한국에 소총과 탄환뿐만 아니라 야포, 기관총, 포탄의 생산도 의뢰했다.

한국의 군수공장은 대규모 생산을 위해 쉴 새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중국인데. 산동 문제를 중국을 자극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현재 독일령 산동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점령 중이었다. 산동 문제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할 수 있었다. 실제 역사의 일본처럼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소탐대실이 될 수 있었다.

‘역시 악역은 일본에 떠넘겨야겠군.’

비록 군부의 힘이 실제보다 약해졌다고는 하나,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선은 일본을 향해 미끼를 던져 보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일본에 여전히 야욕이 남아 있다면, 덥석 미끼를 물 수 있었다.

- 19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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