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20화 (519/812)

201화 후폭풍

원세개 정권, 이른바 ‘남양정부’가 14개조 요구를 대외적으로 알림에 따라 파장이 일어났다.

"이거 일본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유럽이 전쟁에 휘말린 틈을 타서, 혼자서 막대한 이익을 보겠다는 건가?"

일본은 14개조 요구를 극비리에 기습적으로 해결하길 원했지만, 결국 국제적 추문으로 바뀌고 말았다.

"일본이 요구한 사항 중, 산동은 적대국인 독일의 세력권이고, 일본의 세력권으로 인정받은 복건 외에 추가로 요구한 절강은 영국 및 프랑스 세력권에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중국에서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절강의 이권을 통째로 차지하려고 든다면, 열강의 세력권도 침해할 수 있었다.

일본이 부설을 희망한 무창-구강-남창, 남창-항주는 영국의 세력권인 장강 일대였다.

"일본이 연합국의 전쟁 승리를 위하여 함대를 파견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영국과 프랑스의 항의에,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걸 강조했다.

독일령 산동과 태평양 군도들의 점령 외에도, 일본은 순양함대를 인도양과 태평양에 배치하여 독일의 통상파괴전을 저지했다.

이어서 1915년 봄에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함을 포함한 함대를 지중해에 파견하여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탰다.

실제 역사보다 커진 일본의 군사적 비중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이는 중국의 문호개방과 열국의 통상 보장이라는 미합중국의 외교 원칙에 어긋난다. 미국은 일본이 재고하기를 희망한다."

중립국인 미국은 단호하게 일본을 공박했다. 세계대전을 틈타 중국 시장의 확대를 노리는 건 일본만이 아니었다. 미국은 중국, 특히 인구가 많고 부유한 강남 일대를 새로운 시장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복건과 절강을 독점적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니, 미국으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가토 다키아키는 외무대신으로 취임하면서, 전임 야마모토 내각의 온건한 대미 외교정책을 연약외교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캘리포니아에 일본인 이민 제한을 걸자, 가토는 기존의 미일합의를 파기해 버리면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일본 정부와 군부 일각에서는 남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언젠가 미국과 충돌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미국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은 동양의 프로이센이다. 지금까지는 찬탄처럼 써 왔던 표현이지만, 이제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이 세계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듯이, 일본 역시 동양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외교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미국 정계와 언론은 일본의 탐욕스러운 요구를 단호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미국도 일본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미국은 당장 코앞에서 발생한 멕시코 혁명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에,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일본을 압박하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대전쟁으로 유럽 열강의 공백을 틈타, 일본은 남중국을 독점적으로 차지하려고 한다. 일본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중국은 일본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 러시아도 독일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나라는 하나뿐이다. 동양의 피에몬테, 일본 못지않게 활력이 넘치는 떠오르는 동양의 국가, 한국뿐이다.」

전임 루스벨트 행정부나 태프트 행정부에 비하면 한국-만주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윌슨 행정부이지만, 미일관계의 악화는 자연히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시선을 돌리게 했다.

한국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윌슨에게 특사를 보냈다.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이조차도 온건하지만, 일본이 악수(惡手)를 둔 덕에 대한이 이익을 보는군."

중국에서 전해 오는 소식에 이선은 빙긋 웃었다.

미끼를 던지면 일본이 물어서 중국을 물어뜯으리라는 이선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실제 역사보다 일본의 독기(毒氣)가 빠져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21개조 요구는 14개조 요구로 대체되었다.

21개조 요구와 비교하면 14개조 요구는 온건한 편이었다. 21개조 요구는 사실상 중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시도였고, 특히 제5호는 열강의 격렬한 반대도 불러일으켰다.

"냉정하게 말해서, 일본의 요구사항은 대한의 국익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네. 우리로선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것만으로도 이익이 될 거야."

한국의 관심사는 만주와 북청이었으므로, 멀리 떨어진 복건과 절강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일본도 이를 감안하여 서양 열강 외에도 한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봤고, 그 예상은 틀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원세개와 군벌들조차 고려하지 못한 것은, 중국 국민의 애국적 분노였다.

"일본의 침략적 망동 규탄한다!"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지 마라!"

"산동, 복건, 절강은 모두 소중한 중국의 영토이다! 일본에 단 한 뼘의 영토도, 단 하나의 이권도 내줄 수 없다!"

"일본은 물러가라!"

"4억 중화 민족이여, 단결하라!"

남경과 북경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이 가두행진을 하면서 항의 시위를 했다. 경찰이 철저히 지키고 있는 일본 공사관 앞에 학생들이 모여 규탄했다.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서양 열강과 다름없는 침략자다!"

"일본 상품 거부!"

"동포들이여, 일제(日製)를 쓰지 맙시다!"

"일본식은 모조리 거부합시다!"

반일 여론이 중국을 휩쓸었다.

중국의 진보적 인사들은 대개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일본은 서양과 달리 동양이라는 동류라고 생각했고, 돌아온 건 야멸찬 배신이었다.

기대했던 자에게 배신당하면 더 배신감이 큰 법이다.

대학생들은 날마다 14개조 요구를 암송하면서 일본의 배신을 규탄했고, 여학생들도 유행하던 일본식 머리 스타일을 버렸다.

무엇보다 일본에 큰 타격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었다. 세계대전으로 열강의 대중 수출이 줄어든 틈을 타 일본의 수출이 급증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찬물을 끼얹어 버린 꼴이었다.

"비록 새로 산 자전거가 아깝지만, 이 일제 자전거를 바로 부셔 버리겠소!"

"나도 새로 산 옷이 아깝지만, 일본제 양장을 태우겠어요!"

"잘한다! 학생들 힘내라!"

"좀 질이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국산을 씁시다!"

"일제를 대체할 물건은 충분히 있습니다. 차라리 한국산을 씁시다!"

"맞소! 한국도 산동을 점령했는데, 그들은 무리한 요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소!"

한국은 가만히 있었던 것만으로 중국 진보주의자들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권력을 찬탈한 군사정권을 거부하고, 민의의 의해 선출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소!"

"한국은 과연 의로운 나라요, 중화민국의 벗이다! 중한우호 만세!"

주중 한국 무관이자 제국익문사 중국 지부장인 신규식 부령은 사람을 풀어 친한 여론을 공작했다.

진보주의자들은 군사정권을 거부했고, 여전히 국민당을 지지했다.

이들은 한국이 국민당 정부에 ‘의리’를 지켰다고 생각했고, 일본의 가혹한 요구에 대비되는 합리적인 이웃나라로 평가받았다.

남양정부도 국민의 분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열강에 지원을 요청하며, 일본의 요구에 시간을 질질 끌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유럽에서 격화되고 있는 전쟁으로 인해 일본과 척을 져가면서까지 중국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순 없소. 원세개에게 최후통첩을 요구합시다."

"여기서 물러나면 일본의 위신만 떨어집니다. 원세개가 굴복하든가, 우리 내각이 책임지고 사임하든가 둘 중 하납니다."

일본은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다. 강경론을 고집한 결과 국제적 고립을 자처했고, 중국인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자니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었다.

"이웃나라에 지나치게 굴욕을 강요하면, 반드시 후환이 뒤따르게 될 겁니다!"

"당장 8월에 총선이 있는데, 유권자들에게 지나(支那, 중국) 따위에게도 밀렸다고 할 겁니까?"

일본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일었지만, 외무대신 가토와 육군차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중장이 주도하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몰락하는 육군-조슈 파벌의 마지막 희망인 다나카는, 탁월한 정치군인이었다. 다나카는 재향군인회를 조직해 퇴역군인들의 목소리를 높였고, 우파 언론을 활용해 열심히 팽창주의 여론을 부추겼다.

가토와 다나카가 열심히 팽창주의 여론을 부추긴 결과, 호전적인 일본 여론은 ‘지나 이권’을 부르짖었다.

78세의 노인 오쿠마 총리는 끝내 강경론을 선택했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였다.

"48시간 이내로 13개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양국 간에 어떤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6월 18일, 일본은 중국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영국이 반대한 2조 7항의 철도부설권만 제외하고, 나머지 13개조는 그대로 강요되었다.

"이 조항을 수락한다면,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은 즉시 차관을 제공하고 대총통 각하의 정권을 보호하겠습니다. 누군가 각하의 정권에 반기를 든다면, 일본이 그들을 눌러 버리겠습니다."

전쟁을 암시하는 일본의 최후통첩에, 결국 원세개는 굴복하고 말았다. 도저히 현재의 중국으로서는 일본과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다.

남경은 일본의 세력권에서 너무나 가까웠다. 그렇다고 수도를 옮겨서 항전하자니 기반과 병력을 날려 먹는 꼴이었다.

군벌 연합체인 중국의 한계를 버젓이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지금은 일본과 전쟁을 벌일 수 없다. 3개월 동안 20여 차례나 회담할 정도로 저항했다면, 정부도 할 만큼 했다. 와신상담하며 이 치욕을 갚자."

6월 20일, 결국 원세개 정권은 굴복하여 13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겉보기에는 일본의 외교적 승리였고, 중국의 대패였다.

"6월 20일! 이날은 국치일이다. 결코 이날의 치욕을 잊지 말자!"

전 국민군 장교 장중정(蔣中正)은 분노로 이를 갈았다. 신해혁명의 성공 이후 장지청은 중정으로 개명을 했고,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진기미의 추천을 받아 국민군 장교로 승승장구했다.

원세개의 쿠데타 이후, 장중정은 진기미를 보호해 가까스로 상해 조계지로 피신했다. 상해에서 반 원세개 운동을 조직하던 중, 13개조 요구에 굴복했다는 소식을 전해졌다.

"반드시 일본에 원수를 갚고 말겠다!"

일본이 마수를 드러낸 절강은 장중정의 고향이었다. 침략자에게 조국과 고향의 이권을 내줄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일본 육사 출신이었지만, 장중정은 반드시 일본에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 * *

13개조 요구가 타결됨에 따라, 산동의 독일 이권은 일단 일본에 양여되었다.

"당초 합의한 사항에 따라, 연대는 한국이 이권을 계승하고, 교제철도는 공동으로 운영하지요."

일본은 큰 선심을 쓴다는 듯, 한국에도 이권의 반분을 제안했다.

"대한국 정부는 일본이 중국에 강요한 13개조 요구에 유감을 표한다. 이는 동양의 평화를 훼손하고, 중국의 권익을 침해하는 압박이었다. 대한국은 일본의 동맹이자 중국의 우호국으로서, 산동 문제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

한국이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고 13개조 요구를 비판함에 따라, 한일관계가 갑작스럽게 경색되었다.

청도에 주둔하던 한국 여단은 연대로 이동했고, 일본의 산동 이권 장악에 동조하지 않았다.

"대한국 정부는 민의에 기반을 둔, 정통성 있는 중화민국 정부가 들어선다면 산동 문제를 다시 논의하겠다."

사실상 원세개 정권을 부정하는 성명이었다. 대한제국은 남양정부와 외교 단절 수순까지 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명목상 우호국인 중국에 최후통첩을 강요해 관계를 파탄 내고, 동맹인 한국과의 관계도 경색되지 않았나! 이걸 지금 외교라고 하고 있는 건가?"

원로의 외교정책 개입이 막혀 관여할 수 없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격노하여 가토를 비난했다.

"복건과 절강에 확고한 제국의 이익선을 확보하지 않았습니까?"

"중국에 이권을 확보할 필요는 동의한다. 그래도 교묘한 외교로 반감을 최소한으로 줄였어야지, 이따위 협박으로 고립을 자처하다니!"

자유주의 세력들이 일본 정부의 독단적인 외교를 비난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이토를 비롯한 원로들도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원로라고 제국주의적 대륙 팽창을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일본이 약소국이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원로들은 열강의 눈치를 보는 조심스러운 외교를 지향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에 교육받고 성장한 세대의 외교는 거침이 없었다.

"어떻게 문민정부 정당내각이란 놈들이 군부내각 시절보다 더 강경할 수가 있나? 아니, 이래서야 춘산장 영감 시절만도 못하지 않나?"

러일전쟁과 육군의 몰락 이후 실각하여 뒷방 늙은이 신세인 야마가타도 신문을 보면서 비웃었다.

"최소한 나는 타국에 정변을 도모하거나 협박을 하진 않았다. 만한을 놓고 러시아와 정정당당하게 일전을 벌이길 바랐을 뿐이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더니, 요즘 놈들은 한술 더 뜨는구만."

원로들의 퇴진과 군부의 약화, 정당내각의 수립과 문민통제의 강화는 일본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민족주의와 팽창주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주류를 이룸에 따라 대외정책은 오히려 더 강경해지고야 말았다.

‘여러모로 일본은 한국의 반면교사야.’

이선은 일본 외교를 보면서 문뜩 기시감을 느꼈다.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일본은 한국의 미래가 될 수 있었다.

조청일전쟁의 승전 이후 승승장구만 하는 걸 보아 온 세대가 약소국 시절을 잊고 승리에만 도취된다면, 일본의 실수를 반복할 수 있었다.

팽창과 패권을 부르짖는 강경파가 주류가 될 수 없도록, 온건한 정치의 기틀을 잡아야 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4억을 단결시켜서 적으로 만들 수 있다. 중국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 영토 조금 늘리려다가 소탐대실한다.’

중국 애국주의가 언제든지 화산처럼 폭발하리라는 예측은 옳았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근대화되면서 애국주의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중국인도 신해혁명 이후 애국주의를 새로운 지향점으로 받아들였다.

‘만주 문제도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북청은 명목상 대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군주국이지만, 만주-몽골-티베트-신강으로 나뉜 상태였다. 이 중에서 만주는 러시아와 한국의 공동 보호를 받고 있었고,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가 유럽에 집중하게 됨에 따라 한국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만주는 중국과 분리된 독자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 대한의 보호를 받는 완충국가로.’

이선의 구상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러시아가 극동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되면, 차근차근 만주를 대한제국의 단독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계획이었다.

1915년, 세계대전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 20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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