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여러 개의 중국
"손일선 선생, 아니 대총통 각하 같은 분께서 함부로 허언을 입에 담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내 비록 지금은 잠시 실권(失權)하였으나 일국의 지도자였습니다. 어찌 국가의 중대사에 허언을 말하겠습니까?"
손문의 표정은 진지했으나, 김옥균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태도로 말했다.
"작금의 중국에는 청국을 멸망시키고 옛 대청의 강역까지 되찾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현실을 도외시하거나, 혹은 팽창주의를 열망하는 지지자를 얻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거에 불과합니다."
중국 내에도 만주-몽골-신강-티베트를 ‘수복’하자고 부르짖는 ‘대중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중국 본토 18성만으로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손문과 국민당은 거리를 두고 있는 주장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대총통 각하께서는, 한국이 국민당의 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해 준다면, 청국 문제에 있어 중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약조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부디 원세개를 타도하여 혁명을 이룩하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도록, 귀국의 지지와 지원을 바랍니다."
손문은 절박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치가나 외교가라기보다는 혁명가인 손문은, 협상에 능하지 못했다. 가진 패를 이미 다 보여 주고, 상대의 관용을 바라는 길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내심 빙긋 웃었다. 자신도 조선에 혁명을 이룩하겠다고 얼마나 고심했는가,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했던가.
"좋습니다. 이 사안은 매우 중요하여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각하."
김옥균과 손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다.
"여기까지 오신 김에 식사라도 하시지요. 각하를 위해 중국요리 정찬을 준비했습니다."
"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개항장인 인천에는 1883년부터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불평등조약의 폐지로 치외법권 구역인 조계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국적인 외국인 거리가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중국인들이었다.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주로 산동 출신 한족들이 이주했고, 이들이 화교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한국 정부의 엄격한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토지와 사업체 소유가 금지되었기에, 이들이 주로 종사하는 건 막노동과 식당이었다. 가난한 화교는 막노동을 하고, 성공한 화교는 식당을 차렸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중국요리, 이른바 ‘청요릿집’은 근래 한국인들이 즐기는 외식이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 청요릿집은 중화요리를 자처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청요릿집으로 통했다.
"대총통 각하와 총리대신 각하께서 찾아 주셔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청요릿집 공화춘을 운영하는 화교 우희광(于希光)이 감개무량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본래 산동회관(山東會館)이던 상호를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해 ‘공화춘(共和春)’이라고 바꿨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희광은 공화국 지지자였다. 해외 거주 화교 대부분은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혁명 이전 동맹회의 주된 자금원도 화교였다.
"미리 말했다시피 오늘 우리가 찾은 건 비밀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대관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식당뿐만 아니라 차이나타운 전체에 철저한 경비를 했다. 손문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적었다.
"자, 드시지요. 오늘은 특별히 각하의 입맛에 맞게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잘 먹겠습니다."
광동 출신인 손문이 즐기는 건 역시 고향의 음식이었고, 광동요리인 고로육(古老肉, 구라오러우)과 유사한 돼지고기 요리가 나오자 반가워했다.
"모양과 맛이 고로육과 비슷한데, 뭡니까?"
"탕추리지(糖醋里脊)라는 산동요리가 한국화된 탕수육이란 요리입니다."
"이거 아주 맛있군요. 요리법을 배워 보고 싶은데."
"호오, 각하께서 직접 요리를 하십니까?"
"미국 유학을 할 때나 망명객 시절에 중국요리를 파는 곳이 많지 않다 보니, 직접 요리해서 먹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손문은 당대 정치가로서는 드물게도, 직접 요리를 즐겨 해서 먹는 미식가이기도 했다.
"사장에게 말해 두지요. 아, 이걸 보시죠."
"흠, 이건 잘 모르겠군요."
"자장면이라고, 북경요리인 작장면(炸醬麵)을 한국화한 음식입니다."
남방 사람인 손문은 북경요리는 잘 몰랐고, 면 위에 춘장이 뒤덮인 자장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 그렇군요. 처음 봅니다."
"드셔 보시죠. 요새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음식입니다."
"호오, 이거 참 달짝지근하니 좋습니다."
"한국화된 중국요리를 대표하는 요리지요."
정찬이 계속 나오면서 김옥균과 손문은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김옥균은 사장을 불러 마지막 요리가 나오게 했다.
면 위에 돼지고기와 해산물 고명을 얹은 새빨간 국물이 담긴 그릇을 보고 손문은 정체가 궁금했다.
"이건 무엇입니까?"
"술 마신 다음에 먹기 좋지요."
"아우, 이거 정말 맵군요."
"우리 한국인들은 매운 음식이 인기입니다, 하하하."
얼얼해진 손문은 혀를 내둘렀지만, 김옥균은 신이 난 듯이 설명했다.
"이 음식에는 특별한 비화가 있습니다. 약 20년 전에 일본 나가사키에 식당을 하던 복건 출신 화교가, 가난한 유학생들을 위해 요리하다 남은 잔반들을 끓여 국물을 내서 ‘잔폰’이란 요리를 만들었다지요. 이게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잔폰이 화교들을 통해 한국에 상륙했지요. 우린 짬뽕이라고 부릅니다."
"아, 복건 요리에서 비롯된 거군요. 근데 일본인들이 이런 매운맛을 좋아한다고요?"
"아니, 일본식 잔폰은 맵지 않습니다. 이건 한국화된 거죠. 황제 폐하께서 잔폰을 처음 시식하시고 말씀하시기를, 한국인들은 매운맛을 좋아하니 고춧가루를 첨가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장면’에 이어 한국식 ‘짬뽕’이 역사보다 훨씬 빨리 개발된 데에는 이선의 역할이 있었다.
"호오, 그런가요! 이야말로 중일한 삼국이 엮인 요리이니, 실로 우리의 이상인 삼화주의와 동양평화의 이상이 담긴 요리가 아니겠습니까?"
꿈보다 해몽이라고, 손문은 짬뽕에다가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과거 한중일 삼국의 ‘삼화(三和)’를 주창했던 김옥균을 다분히 신경 쓴 말이었다.
"호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중식과 일식의 한국화를 좋아하시니, 한중일이 조화된 요리가 탄생했습니다. 과연 우리 성상께서는 음식 하나에도 삼화주의와 동양평화의 이상을 담고자 하셨군요."
김옥균도 손문에 질 수 없다는 듯이 황제를 치켜세웠다.
졸지에 짬뽕이 삼화주의와 동양평화의 상징이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선에게 그런 고상한 취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 국수와 냉면도 좋다만 짭짤한 라면하고 매콤한 짬뽕이 당기는데. 이제 msg도 발견되었으니 슬슬 개발할 시기도 되지 않았나?’
1910년대의 어느 날 밤, 포트와인을 벗을 삼아 늦게까지 정무를 보던 이선은 매콤하고 자극적인 국물이 몹시 먹고 싶었다.
궁궐에는 상시 숙수가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한식이라면 종류별로 대령할 수 있었다.
계절별로 따뜻한 국수나 시원한 냉면을 주로 먹었지만, 그날은 유독 라면이나 짬뽕이 먹고 싶었다.
"단순히 나만 먹을 게 아니라, 식량 보급에 도움이 될 식품사업에도 도전해 봐야겠군."
1908년, 일본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가 감칠맛이 나는 글루탐산 나트륨을 발견하여 ‘우마미’라고 명명했다. 즉, MSG의 기원이 되는 발견이다.
이케다는 특허를 내고, 스즈키 사부로스케(鈴木三?助)라는 실업가와 특허 실시협약을 맺고 1909년 아지노모토(味の素株)라는 상표로 조미료 공장을 만들었다.
초기에 아지노모토는 실패를 거듭했고, 전혀 팔리지 않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외면을 받았다.
파산 위기에 몰린 아지노모토를 구원한 건, 뜻밖에도 ‘대한제약주식회사’였다. 국영회사인 대한제약은 일본 외의 지역에서 MSG 생산 판매가 가능한 특허권을 취득했고, 국내에 공장을 건설하여 제조법을 개량하여 현지화했다.
1913년, 아지노모토를 대신한 한국식 MSG ‘미각(味覺)’이 출시됐다. 이는 한국 시장에서 즉각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국물요리가 많은 한국요리에서 MSG는 감칠맛을 내는 확실한 효과를 냈다. 근대화와 경제의 성장으로 한국에는 막 외식산업이 등장한 상태였고, 당시 가장 흔한 외식인 냉면과 설렁탕에서도 MSG는 필수품이 되어 갔다.
"이 집 국물맛이 아주 진국이야. 대체 비결이 뭐라던가?"
"새로 나온 조미료 맛이라네. 미각을 적당히 치면 이런 맛이 나온다네."
국영회사인 대한제약은 미각을 가장 먼저 군대에 보급품으로 납품했고, 군인들이 먹는 병영식에도 일대 개선이 일어났다.
사병들이 먹는 병영식은 흔히 밥과 국이 나왔는데, 짧은 시간에 대량으로 제공해야 하는 병영식의 특성상 깊은 국물을 내기는 어려웠다.
여기에 MSG가 감칠맛을 더했다. MSG 보급에 맞춰 여러 가지 특식들이 개발되었고, 군인들이 좋아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요새 군대 참 좋아졌어. 내가 병졸로 복무하던 광무 초년, 그러니까 19세기에는 말이야, 요동에서 얼어붙은 국을 녹여 가며 먹었다고. 그런데 요새 입영하는 병졸들한테는 이런 특식이 나오나?"
박대붕 정교는 자신이 사병으로 복무하던 1890년대 후반을 떠올렸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박대붕은 베테랑 부사관이었다.
"박 정교, 대원수 폐하께서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특별히 개발한 조미료를 먼저 군대에 보급하라고 하셨다네."
"대원수 폐하께옵서!"
박대붕은 입을 딱 벌렸다.
‘격무로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도, 장병들의 사기를 위하여 이런 사소한 일까지 하시다니……. 신민을 생각하시는 지극한 황은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박대붕은 황은에 다시금 감격하였다. 그는 어진을 바라보며 군모를 벗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MSG가 나왔으니 인스턴트 라면도 생산가능하지 않을까? 인스턴트 라면이 개발되면 맛도 맛이지만 식량 보급에 큰 도움이 될 터.’
MSG 생산에 돌입하자, 이선은 라면 개발을 명했다.
이선도 사람인지라, 국정의 다양한 부분을 총괄할 정도로 지식이 풍부해도 음식 개발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지했다. 면을 튀겨서 건조한다는 것까진 알았지만, 그 이상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실제 인스턴트 라면은 일본에서 1958년에 개발됐는데, 1910년대의 한국은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생산에 실패했다.
"으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좀 더 맵고 짜게 하는 게 어떻겠나? 근래 한국에서는 매운맛이 인기 아니던가. 고춧가루를 좀 더 넣으라고."
인스턴트 라면의 개발과 대량생산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중국식 란주(란저우) 우육면을 한국식으로 개량하여, 생면과 육수, MSG로 대략 비슷한 맛을 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나가사키 잔폰을 한국식으로 개량한 짬뽕도 개발되었으니, 이는 다분히 황제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래, 이 맛이야! 아주 좋네. 짐만 즐기고자 만든 요리가 아니니, 보다 많은 사람이 접할 수 있도록 요리법을 공개하도록."
"예, 폐하."
이리하여 한국식 ‘라면’과 ‘짬뽕’이 한국의 외식문화에 추가되었으니, 황제의 사리사욕이 민간의 음식문화를 발전시킨 드문 경우였다.
"그래, 손문이 원세개를 타도하고 국민당 정부를 재건하면, 청국 문제에는 영구히 손을 떼겠다고 약조했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정치가의 약속만큼 믿기 어려운 것도 없지. 아, 불기 전에 듭시다."
"황공하옵니다."
이선은 경운궁에서 김옥균과 함께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먹으면서 회견했다. 황실에는 면요리를 좋아하는 황제를 위해 전담 요리사가 있을 정도였다.
"폐하, 손문은 지금 절박합니다. 국내에 원세개에 맞설 무력이 없고, 일본이 원세개를 밀어 줘도 열강들이 전쟁으로 외면하고 있는 지금, 대한 말고는 도울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문서로 약조를 하라고 해도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구두(口頭)가 아니라 문서로 약조를 받아 내시오. 중화민국의 국부인 손문이 서명한 문서라면 향후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까."
"예, 반드시 문서를 받아 내겠습니다."
손문은 문서로 작성하기를 썩 내키지 않겠지만, 어차피 북청의 강역을 ‘중국’으로 여기지 않는 그로서는 상관없을 터였다. 손문에게 중요한 건 중국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하온데 3개 사단을 무장할 비용과 자금이라면 상당한 지출이 필요하지 않겠사옵니까?"
"뭐, 극비를 요하는 사안이니 정부 예산이 아니라 황실 내탕금으로 해결합시다. 그 정도 투자로 손문과 국민당에 막대한 심리적 빚을 안겨 준다면 해 볼 만한 투자지."
이선에게 돈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손문이 3개 사단을 모으겠다고 하기 전에 먼저 군벌들이 들고 일어설 거요. 이미 조짐이 보이고 있소."
익문사의 공작 이후, 독립 성향이 강한 중국 서남부의 군벌들을 중심으로 반원 연합이 결성될 기미가 보였다. 이들은 원세개의 권력 독점도, 중앙집권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군벌들이 독립을 선포할 수도, 아니면 손문을 추대해서 호국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환영할 일이오."
"흠, 그리되면 지역 군벌들의 힘은 더욱 강해질 테고, 중국은 다시 연성자치가 주류를 이루겠군요. 누가 이기든 중국 정부의 힘은 미약해질 겁니다."
"그렇소. 고균, 짐이 중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경도 잘 알겠지."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김옥균은 뭐라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친중 사대주의자들과 반대편에 서서 서구화를 추진하고, 마침내 중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한 이선이 아니었던가?
"당장 지금 짐이 먹는 음식들도 중국요리를 우리 입맛에 맞게 개량한 게 아니겠소? 중국요리의 세계도 참으로 무궁무진하다오. 중국 8대 요리라는 광동, 산동, 사천, 강소, 안휘, 복건, 절강, 호남, 모두 다른 풍미가 있지. 지역별로 문화가 다르니, 음식도 문화를 반영하는 게 아니겠소?"
이선의 중화요리 찬미에 김옥균은 더욱 종잡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다양한 중국을 어찌 하나의 그릇으로 담아 둘 수 있겠소? 새삼 말하자면 짐은 중국이 좋소. 그래서 중국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으면 더욱 좋겠소."
김옥균은 비로소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
만주-몽골-신강-티베트가 ‘중국’에서 분리하였듯, 정체성이 다른 중국 내부의 다양한 지역도 분열되어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신도 중국을 좋아하옵니다. 대한의 국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중국은 하나가 아닌 여럿인 게 좋겠습니다."
‘하나의 중국’이 아닌 ‘여러 개의 중국’으로.
이념적으로 연성자치를 부르짖고, 실질적으로 지역 군벌들로 분열된 지금이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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