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30화 (529/812)

211화 광무 20년

광무 20년(1916) 봄.

세계를 불태우는 전화(戰火)와 달리, 대한제국은 평온했다.

유럽에서는 천지를 뒤흔드는 포성과 함께 인간은 참호를 파고 들어가고, 들판과 산악이 찢겨 나갔다.

아시아에서도 중국은 내전과 군벌들의 분열로 숱한 인간들이 고통받았다.

세계대전 발발 이후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에 돌입한 국가 중, 이러한 평온을 누리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전쟁은 이들 국가에 기회였다.

"러시아에서 주문한 물량을 다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야."

개전 당시부터 시작되었던 러시아의 군수품 부족은 1916년까지도 계속되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식무기인 소총과 탄약의 부족이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러시아군은 매달 약 20만 정의 소총 생산을 필요로 했지만, 1915년 월평균 생산량은 약 7만 정에 불과했다. 탄약 생산량도 개전 초기에 비하면 3배가 늘어났음에도, 1915년 내내 탄약 생산량은 소요량의 절반에 불과했다.

스톨리핀의 계획대로 ‘평화의 20년’이 있었더라면 러시아의 공업력은 일취월장했겠지만, 예상치 못했던 전쟁은 러시아 산업의 척추를 부러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소총과 탄약은 대한과 러시아가 호환이 가능하니, 최대한 많이 생산해서 보내도록."

대한제국군 제식소총인 광무 보총, 이른바 ‘모총’은 러시아군 제식소총 모신나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20세기 초 한국인의 체형에 맞게 좀 더 아담하게 만들고, 여름철 습한 기후를 고려하여 개량한 걸 제외하면 모신나강과 거의 일치했다.

"정부에서 군수품 수출 기업에게는 많은 혜택을 준다고 하였으니 쉴 새 없이 공장을 돌리라고!"

황성, 평양, 함흥, 부평, 부산, 요동 안산 등 한국의 공업지대는 일대 전시호황을 맞이했다.

경의선과 남만주철도를 통해 육로로, 혹은 부산과 원산을 통해 해로로 연해주로 수출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럽 러시아로 향했다.

"흠, 이거 다루기 편하고 좋은데."

"모신나강 원본보다 고장도 덜 나고 말이야."

한국의 모총은 러시아에서 꽤나 호평을 받았다. 러시아에서도 체격 작은 병사들은 많았고, 이들은 모신나강보다 모총이 더 다루기 편했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정신없이 물량을 찍어 내는 데 바빠서 품질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한국은 생산품에 엄격한 관리를 해서 품질도 좋았다.

한국이 러시아에 보내는 공급량은 소총은 매월 약 1만 정으로 러시아군이 필요한 물량에 비하면 여전히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이었지만, 큰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다.

다른 연합국들은 자국 생산량을 만드는 데도 부족했고, 세계 최대의 공급처인 미국은 주로 대서양 건너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했다.

흑해와 발트해의 봉쇄로 러시아는 태평양 방면에 의존했고, 한국의 존재는 갈수록 중요해졌다.

"중공업에 이어 경공업도 수출 확장 일로입니다."

"국산 수입대체를 이어 수출에도 성공하다니!"

경제적으로 볼 때, 광무 20년은 한국에 있어 실로 역사적인 해였다.

1876년 개항 이래 40년, 마침내 만성적인 수출입 적자를 벗어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도 1890년대부터 공업을 육성해 왔지만, 서양제품의 품질경쟁에서 밀려 국내시장에서조차 곤란을 겪었다.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관세자주권이 없기 때문에 세율조정조차 불가능했다.

마침내 191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공업이 성숙해지고, 관세자주권을 되찾고,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마침내 한국에도 중대한 기회가 도래했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제 코가 석 자인 서양 열강은 막대한 인구의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 빈 자리를 놓고 미국, 일본, 한국이 수혜를 받게 되었다.

"일본이 13개조 요구로 중일관계를 파탄 내지 않았더라면, 경쟁이 더 힘들었겠지."

서양 열강의 철수 이후, 우위를 점한 건 미국과 일본이었다. 특히 일본은 가까운 거리를 활용해 대중 수출량을 엄청나게 늘렸다.

일본은 13개조 요구를 강요해 관철시켰지만, 중국인들의 광범위한 반일감정과 일제 불매운동을 낳게 되었다.

"일본 상품 거부! 중국의 애국자라면 결코 일제는 쓰면 안 된다!"

"근데 중국제 공업품은 질이 너무 떨어지고······."

"그래서 한국제 써 보니까 나쁘지 않던데?"

"음, 오히려 일제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말이야."

수혜자는 단연코 한국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제는 일본제에 비해 후발주자로서 품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이 일제의 대체 상품으로 구입하게 되면서 판매량이 급증했다.

"인천에서 바로 갓 들어온 한국산 제품들 팝니다! 싸다 싸!"

한국산은 물건이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로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한국의 경공업 생산도 크게 늘어났다.

"그래도 일본처럼 중국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보이면 안 되지. 수출 판로 확대는 열강의 이해관계가 떨어지는 화북에 집중하도록."

장강 이남은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만큼,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열강이 가장 공들이는 지역이었고, 일본도 복건을 기반으로 강남 시장을 지배하려고 들었다.

한국은 열강의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화북 일대, 특히 하북과 독일이 철수한 산동에 집중했다. 천진의 한국 조계지에는 한국제 소비재가 가득 들어와 내륙으로 들어갔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나네그려. 대한 건국 이래 최대의 호황이야!"

"대한 건국? 아니 태조 고황제의 개국 이래 최대 호황이지."

"어허, 그럼 전에는 이만한 호황이 있었을 것 같나?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지!"

"단군 이래? 그럼 역사상 최고란 말이군!"

"그래, 맞아! 하하하."

전시 호황으로 인한 수출과 생산 증대는, 소득 증가와 투자 확대, 경기 상승이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졌고, 한국은 1916년부터 유례없는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개항으로 세계 자본주의경제의 일부로 편입된 지 40년, 여전히 도농격차, 빈부격차는 사회적 문제로 남았지만, 한국은 마침내 절대적 빈곤을 탈피하고 세계 자본주의경제의 신흥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시대적 행운이 뒤따랐다지만, 정부의 확고한 지도력과 국민의 피땀 흘리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30년 전 무력하고 가난했던 조선을 생각해 보게. 황제 폐하께서 국정을 맡아 개화로 이끌지 않으셨다면, 이 나라가 대체 어찌 되었겠나?"

"암, 이게 다 개화의 힘이지!"

"아, 지극한 황은이시여!"

갑신경장 이후 30여 년, 이선과 개화당을 향한 국민의 지지는 변함 없었다.

광무 20년의 4대 총선은 전쟁과 호황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제4회 총선거에서 입헌개화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여, 황제 폐하의 조각(組閣) 칙명을 받아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광무 20년 5월, 제4회 총선거에서 입헌개화당은 민의원 200석 중 102석으로 간신히 과반을 넘겼다.

개화당의 장기 집권에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염증을 느꼈지만, 투표권을 지닌 중상류층 대부분은 개화당의 통치에 큰 불만이 없었다.

제1야당 자유주의 신민당(49석)과 제2야당 인민주의 진보당(18석)은 합쳐서 67석을 차지, 의석수의 3분의 1인 개헌 저지선을 가까스로 확보했다. 이는 상당한 약진으로, 개화당에 반대하는 야당이 개헌 저지선에 도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대안세력을 원하는 이들도 많다는 증거였다.

전쟁이라는 호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팽창주의 성향의 제국당(13석)은 당세 확장에 실패했고, 사실상 개화당의 2중대, 관제야당 노릇으로 만족했다.

"선거로 민의를 재확인하였으니, 이제 신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옵니다."

"그동안 노고가 많았소, 금릉위."

7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기간을 재임했던 총리 박영효가 물러났다.

박영효의 재임기간 동안 신해혁명, 세계대전, 호국전쟁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이어졌고, 정부의 안정성을 위해 자연히 총리의 재임기간이 길어졌다.

총리에서 물러난 박영효는 원훈의 칭호를 받았다. 원훈 중 생존해 있는 김옥균, 유길준과 함께 계속 황제의 추밀(樞密) 고문관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을 터였다.

"삼가 황명을 받들어, 민의원과 중추원 양원은 제6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서재필 공이 선출되었음을 가결하는 바입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의원 동지 여러분, 영광스러운 자리를 맡게 되어 감읍할 따름입니다. 위로는 대황제 폐하를 높이 받들고, 아래로는 국민의 민의를 깊이 헤아려······."

6대 총리로는 입헌개화당의 자유주의적 계파를 대표하는 53세의 서재필이 선출되었다.

갑신경장 때부터 중책을 맡아 온 서재필은 수구파들로부터 급진파 ‘6적(김옥균·박영효·홍영식·유길준·서광범·서재필)’으로 불릴 정도로 초기 급진개화파를 대표했고, 미국 의대 유학파 출신으로서 군무대신과 내무대신 등을 역임하며 근대적 의료·위생 체계 확립에 큰 기틀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서재필의 총리 취임에는 의외라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기독교도에 외국인 부인이라는 장애물이 있음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에 오르다니."

"뭐, 그만큼 대한도 자유로운 나라라는 증거 아니겠나."

서재필은 미국 유학 중 미국 명문가 출신 뮤리엘 암스트롱과 사랑에 빠져 혼인했고, 아내를 따라 종교도 기독교로 개종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지만, 대한제국은 유교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선의 후예였다. 서양 여인과 결혼한 기독교도라는 건 유교적 가치에 익숙한 국민들 대부분에게 핸디캡으로 여겨졌다.

역대 총리는 모두 유교였고, 예외적으로 김옥균이 불교를 깊이 신봉하긴 했으나 공식적인 입장은 유교였다.

즉, 서재필은 최초의 기독교도이자 외국인 부인을 둔 총리였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네만, 황제 폐하께서도 서양인 부인이 있지 않으신가. 그러니 같은 처지인 서재필 공을 특별히 아끼는 게 아니겠어?"

"잠깐, 그럼 파란양도 기독교도 아닌가? 설마 정친왕 전하나 황녀께서 기독교도는 아니겠지?"

"설마! 황실에서 기독교도라니, 가당키나 한가?"

호사가들은 불경죄가 될 수도 있는 말을 떠들었다.

물론 이선과 개화당 원훈들이 서재필을 총리로 택한 건, 개인적인 이유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본인의 종교나 부인의 국적이 국정을 수행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나? 대한국의 총리로서 적임자를 선출했을 뿐이다."

이선이 서재필을 낙점한 건, 대내외적인 이유에서였다.

‘역사대로 올해 대선에서 윌슨이 재선하면, 내년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되면 미국이 연합국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되겠지. 전후 국제질서도 윌슨이 주도하게 될 거고. 미국통으로 미국 정계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깊은 서재필이 전시 수상으로 적격이야.’

서재필은 미국 유학파에, 부인도 미국 정계 명문가 출신이고, 주미 공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미국과 관계가 아주 두터웠다.

미국과 윌슨이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는데 함께하려면, 서재필이 적절한 인사였다.

신임 내무대신으로는 국제정세에 밝은 민영환이 임명되었고, 신임 외무대신으로는 러시아 대사를 지내며 세계대전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한 이상설이 임명되어 내각의 2인자가 되었다.

"세계대전이라는 이 비상한 시국에, 외교는 전쟁과 다름없소. 각국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의 역할이 이보다 더 중요한 적이 없었으니, 경들의 분투를 바라는 바이오."

서재필 총리 임명과 비슷한 맥락으로, 주미 특명전권대사에는 이승만이 임명되었다. 역시 미국통이자 윌슨 대통령의 프린스턴대학 교수 시절 제자였던 점을 감안한 인선이었다.

‘서재필 공을 총리로, 나를 미국대사로 임명한 걸 보면 어심은 확실하다. 앞으로 미국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리라고 보시는 거지. 윌슨 교수의 제자인 내가 아니면 누가 한미관계 증진을 이끌겠나? 미국의 참전과 한미동맹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차기 외무대신, 차차기 총리도 꿈만은 아니지.’

세계대전 관여와 임박한 만주 처리 문제를 두고, 주러시아 특명전권대사로는 이완용이 임명되었다. 내심 은근히 총리직을 노렸던 이완용은 개화당 창립 인사인 서재필에 밀린 것을 인정하고, 다음 목표를 세웠다.

‘외무대신까지 재임한 나를 러시아에 보낸다는 건, 역시 러시아와 만주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이겠지? 대한에 가장 중요한 만주 문제를 러시아와 협의하여 잘 처리한다면, 차기 총리를 노려 볼 수 있다.’

이완용과 이승만 모두 머릿속으로 행복한 동상이몽을 꿈꿨지만, 임명권을 행사할 당사자인 이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황제와 지도부가 결정하는 총리 임명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 총선부터는 보통선거권으로 확대하고, 민의에 의해 선출된 총리가 국정을 이끌게 해야지. 현재의 정치 구조로는 야당들은 모두 보통선거권을 찬성하겠지. 개화당 내부의 반발이 문제인데, 그래서 미국식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서재필을 총리로 임명했지.’

이선은 세계대전이 끝나면, 서양 국가 대부분이 보통선거권 제도를 확립하리라 예상했다. 세계적 추세를 명분과 모범으로 삼아, 한국이 아시아 최초로 보통선거권을 부여할 계획이었다.

신교육을 받은 세대가 성장함에 따라,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는 경장을 선포한 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1920년대에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고 의회제를 확립, 국민의 시대를 열겠다는 이선의 계획은, 착착 진행 중이었다.

‘자, 그럼 이제 진에게도 본격적인 제왕학 교육을 시켜 볼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군주의 상을 배워야지.’

광무 20년, 대한제국 선포 20년.

광무 원년(1897)에 태어난 황태자 이진도 꼭 스무 살,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었다. 관례적으로 성인으로 대접받는 나이이자, 대한제국의 새 민법상으로도 성인에 해당되는 연령이었다.

이선은 지금까지 황태자를 서양인과 서양 유학파 교수들에게 맡겨 다방면의 근대교육을 시켰으나, 스무 살이 된 올해부터 본격적인 제왕학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세계대전으로 국민의 권리가 확산되는 지금이 배우기에 딱 좋은 시기. 주변국으로 눈을 돌려 봐도, 일본에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확산되고 중국에서도 군사정권이 타도됐다. 서양 유일의 전제군주국인 러시아에도 변화는 피할 수 없을 터, 이제부터 진이 새로운 시대를 배워 나가면 된다.’

광무 20년 5월 31일, 황제의 49번째 탄일인 건원절을 기하여 이선은 황태자에게 정치와 행정의 실무를 참관하며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신 진은 성심(誠心)을 다해 부황을 보좌하며, 부황의 가르침을 배워 깊이 깨우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동안 국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지 못했다. 이제 너도 국정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공사(公私)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돌이켜보면 이선은 모범적인 군주였지만, 모범적인 부친과는 거리가 있었다. ‘2천만 국민의 운명’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가족은 돌아보지 못했다.

부친을 존경하고 숭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 있던 이진은, 아버지의 말에 당연히 크게 기뻐했다.

광무 20년, 대한제국은 한창 진보 중이었다.

- 21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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