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32화 (531/812)

213화 최후의 심판

시간을 잠시 앞으로 돌려, 1915년 12월 20일.

프랑스 샹티이(Chantilly)의 총사령부에서 연합국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그동안 의사소통이 제한적이었던 연합국 간에 전쟁 정책을 조율하고, 1916년도의 작전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 당시 연합국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일본, 한국이었다.

이 중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이미 본토가 함락되어 망명정부를 세웠고, 벨기에도 국토의 90%가 독일군에 점령된 상태였다. 대전략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극동의 두 나라도 제외하면, 연합국은 실질적으로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 4개국이었다.

한국도 소수나마 유럽에 병력을 파병하고 있으므로, 동부전선에 파견된 노백린 참장이 한국대표로 연합국 회의에 참석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1915년도는 우리 연합국에 있어 재난과도 같은 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보면 다릅니다. 프랑스군은 상파뉴와 아르투아에서 독일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총사령부의 추정에 따르면, 독일군의 예비대는 대부분 소모되었습니다."

회의는 연합국의 주력인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Joseph Joffre)가 주도했다. 1915년은 연합국에게 ‘흉년(L’ annee sterile)’이라고 불릴 정도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각 전선에서 밀렸다. 그럼에도, 조프르는 낙관론으로 일관했다.

"1916년에도 공세는 계속될 것이며, 승리가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공격에 발맞추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동시에 전면공세로 나서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적군이 한 전역에서 다른 전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지 못하도록, 적절한 시기에 각 군의 가용 가능한 최대 병력으로 공격해야 합니다."

동부, 서부, 남부 전선에서 일제히 중부동맹국을 향해 공세를 개시해 승기를 잡겠다는 계획이었다.

"러시아는 올해 입은 손실이 큽니다. 대공세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감안하여 주십시오."

"이해합니다. 서부전선과 지중해전선에서 먼저 공세를 벌여 적의 주의를 끌면, 러시아가 전열을 갖춰 동부에서 공세를 감행하는 겁니다."

1915년 하반기에 독일군의 주력을 상대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대퇴각’한 러시아를 대신해, 프랑스와 영국이 1916년도 공세의 주력을 맡도록 했다.

막대한 손실을 내며 서부전선을 지탱하고 있는 프랑스군은 영국에 병력의 증가를 거듭 요구했다. 1915년 말까지, 주요 참전국 중 유일하게 영국은 여전히 모병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916년 1월, 마침내 영국은 징병제를 실시했다. 육군장관 호레이쇼 키치너(Horatio Kitchener) 원수의 이름을 따 ‘키치너 군대’라 불리는 24개 사단을 새로 편성했다.

영불연합군은 솜(Somme)강 양안에서 독일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했다. 탄약이 충분히 보급되고, 키치너 군대가 준비를 갖추는 여름까지 기다릴 계획이었다.

이탈리아도 여름에 알프스에서 공세를, 러시아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향해 공세를 펼치기로 합의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군. 과연 독일군의 예비대가 모두 소모됐을까? 그동안 독일이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

프랑스군 총사령부의 추정에 따르면, 독일군은 예비대를 모두 소모했다. 그러므로 공세를 벌일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추정에 연합국 지휘부는 모두 동의하고, 총공세를 합의했다.

연합국의 이름 높은 명장들이 낙관론과 공세일관주의에 빠져 있는 것에, 노백린은 회의적이었다.

어쩌면 그건 국토를 점령당한 상태에서 총력을 기울여 전투를 벌이는 나라와,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냉철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라의 심리적 차이일 수도 있었다.

정부, 군부, 국민은 모두 하루라도 빨리 국토를 수복하고 적국을 타도하길 희망했으며, 장군들은 공세만이 승리의 길이라고 믿었다.

연합국 지휘관 회의의 결과를 전달받은 이선은 우려를 느꼈다.

‘팔켄하인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다. 역사대로라면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계획하고 있을 터인데.’

한때 대한제국군 군사고문관을 역임했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1914년 10월부터 독일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연합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팔켄하인에 대해선 한국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선은 노백린을 통해 연합국에 우려를 전달했다.

「대한제국 정보부가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독일군은 1916년도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음.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에게 다대한 피해를 입힐, 극단적인 소모전을 계획할 가능성이 농후함.」

"우리도 확보하지 못한 정보를 한국이 어떻게 얻나? 차르가 지휘하는 동부전선이라면 모를까, 서부전선에서 한국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한국의 경고는 낙관론이 지배하고 있는 연합군 사령부에서 무시당했다. 아직 한국은 연합국 내에서 발언권이 적었다.

이선은 언제나 ‘카산드라의 경고’를 보내왔다. 이선의 경고를 여러 번 겪어 본 니콜라이 2세는 그 효과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영불 연합국에는 아직 미지수의 이야기였다.

‘마음대로 해라. 뜨겁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소모전에서 희생당할 병사들이 아깝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선의 경고가 틀렸다. 독일군은 실제 역사에서 지옥의 상징이 될 ‘베르됭’을 노리고 있지 않았다.

역사의 사소한 변화가, 나비효과처럼 전쟁의 변화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1916년 여름, 연합국의 총공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독일군이 먼저 회심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1916년 1월, 독일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대장은 독일군, 더 나아가 동맹군의 전체 전략을 계획했다.

한국군 군사고문관과 러일전쟁 관전무관을 역임하고 귀국한 팔켄하인은, 통찰력 있는 보고서와 지휘력으로 카이저의 눈에 들어 빠르게 진급했다.

1912년 소장으로 진급한 팔켄하인은,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프로이센 육군부장관으로 임명됐다.

1914년 대전쟁이 발발하고,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의 실행에 실패하고 몰락하면서, 팔켄하인은 참모총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모든 이가 깜짝 놀랄 정도의 빠른 승진이었다.

"에리히 경은 전형적인 프로이센 장군이지만, 유능하고 논리적이며 당당하고 화술도 좋지. 소심하고 약해 빠졌던 헬무트(몰트케)하고는 달라. 짐의 마음에 쏙 들어."

팔켄하인의 출세가도는 그 자신이 유능한 덕도 있었지만,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총애를 얻은 덕분이었다.

카이저는 참모총장의 능력과 성품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지만, 기실 팔켄하인은 극도로 냉정하고 무자비한 군인이었다. 단지 최고 통수권자인 카이저를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으로 인해, 팔켄하인은 카이저 앞에서만 사교적인 인간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최종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적의 전의를 꺾기 위해,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 한다."

팔켄하인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최초의 독가스 공격, 무제한 잠수함 작전, 무차별 폭격을 모두 승인했다. 단지 1910년대라는 기술적 한계가 그가 지향하던 총력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합국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건 불가능하다. 러시아에 혁명을 촉발시켜 전쟁을 그만두게 하고, 프랑스가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하여, 영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면 된다. 이탈리아와 기타 떨거지들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유럽에 ‘대독일’을 건설하겠다는 호전적인 팽창주의자들과 달리, 팔켄하인은 완승의 가능성에 비관적이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를 쟁취하여, 연합국의 주력인 러시아와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영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겠다.

팔켄하인은 자신의 전략적 목표에 맞춰 새로운 작전을 구상했고, 카이저에게 1916년도 전략에 대한 장문의 비망록을 작성했다.

일종의 출사표였다.

「1916년 1월 현재, 프랑스군은 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완전히 타도되지는 않았지만, 극심한 타격을 입어 결코 이전의 힘을 되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쟁이 지속되는 이유는, 영국이 연합국에 여전히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나폴레옹에 대적했던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독일의 유럽 지배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의 적은 인적, 물적 우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지속된다면, 독일의 남은 희망을 모조리 앗아 갈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미국 참전에 대한 우려로 인해,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중단되었다. 카이저가 자랑하던 제국해군은 영국 왕립해군의 봉쇄에 갇혔고, 독일은 해상봉쇄에 시달려야 했다.

1916년이 되자, 해상봉쇄로 인한 독일의 물자 부족은 슬슬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효율적인 독일 관료제의 통제로 인해 물자 공급은 아직까진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1년 이내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릴 터였다.

참모본부는 어떻게든 위기를 타개해야 했다.

「우리는 섬나라 영국을 직접 타격할 수 없습니다. 영국의 진짜 무기는 유럽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 러시아군, 이탈리아군입니다. 이 군대들을 무찌르면, 독일을 무너트리려는 영국의 야욕을 격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전략의 우선순위는 누가 되어야겠습니까?」

독일의 주적으로 영국을 지목한 팔켄하인은, 이제 구체적인 전략을 제안했다.

「오스트리아는 지중해전선으로 집중하길 원하지만, 이탈리아는 너무나 부차적이라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서부전선의 프랑스는 분명 중요한 적입니다. 프랑스가 무너진 다음에야, 영국은 전쟁 지속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최종승리는, 프랑스와 러시아를 격퇴함으로써 이뤄질 것입니다.」

1916년 현재, 양면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일군에는 ‘서부전선론자’와 ‘동부전선론자’가 대립했다. 슐리펜의 유산을 계승하여, 특정 시점에 한 전선에 병력을 압도적으로 집중하여 결전을 노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독일군을 여전히 지배했다.

서부전선론자는 프랑스에 집중을, 동부전선론자는 러시아에 집중하여 결전을 벌이길 희망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팔켄하인은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한 공세를 계획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중에서, 프랑스가 더 전쟁에 대한 열의가 강합니다. 저들은 독일에 대한 복수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1871년을 반복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다릅니다. 지난 러일전쟁의 경험은, 차리즘의 러시아 체제가 전쟁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상기시켰습니다. 현재 러시아에 가해지고 있는 압력은, 극동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팔켄하인은 3년간 대한제국의 군사고문관을 지냈고, 그 직후에 러일전쟁 관전무관을 역임하며 러시아군의 실태를 파악했다. 이후 참모총장 슐리펜에게 발탁되어, 참모본부에서도 러시아 전담과를 맡아 러시아군을 오랫동안 면밀하게 분석했다.

실제 역사와 달라졌던 팔켄하인의 행보로 인해, 원래 서부전선론자였던 팔켄하인은 동부전선론자가 되었다. 사소한 나비효과가 거대한 돌풍을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우리의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의 이탈과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러시아는 먼저 타도되어야 합니다. 러시아에 전면적이고 거대한 혁명은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전쟁에 대한 반감으로 반란이 일어나,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기대를 걸어 볼 만합니다.」

취약한 다민족 전제국가들, 즉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은 언제든지 붕괴할 위기가 있었다.

독일에게 연전연패 중인 러시아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을 상대로는 연전연승이었다. 동부전선을 방치했다가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이 먼저 이탈하거나 붕괴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역사의 변화는 작용했다.

80대 중반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언제 서거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었고,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전쟁 지속에 회의적이었다. 독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설령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제가 되어도 당장 오스트리아가 이탈하진 않겠지만, 만약 동부전선을 내버려 둔다면 단독협상에 나설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험요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점령은 상징적인 결과만이 있을 뿐이고, 모스크바 진격은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광대한 내지로의 진격은 우리가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합니다. 오직 우크라이나만이 유일하게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는 전리품입니다.」

팔켄하인의 전략적 목표는 분명해졌다. 러시아의 자원 보고(寶庫),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땅은, 풍족한 밀과 석탄, 각종 원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상실한 러시아 정권은 유지될 수 없기에, 결코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러시아는 병력을 계속 우크라이나에 투입할 것이나, 적들은 피를 남김없이 흘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한다면, 러시아에 정신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러시아는 전쟁 지속을 포기할 것이고,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자원을 쥔 상태에서 영국의 봉쇄를 견뎌 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팔켄하인이 보낸 장문의 비망록은, 카이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참모총장은 정확히 알고 있네. 역시 주적은 영국이지. 하지만 영국을 직접 끌어내릴 순 없으니, 먼저 영국이 가진 최고의 무기인 러시아와 프랑스를 순차적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좋아. 이대로 시행하게."

과연 팔켄하인은 카이저가 듣기 좋게 말을 포장할 줄 알았다. 카이저가 증오하는 주적 영국의 역할을 과대포장하고, 이를 위해선 먼저 러시아와 프랑스를 순차적으로 격파해야 한다. 혁명을 혐오하는 카이저의 취향에도 맞게, ‘전면적이고 거대한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독일 정부와 군부는 명백하게 러시아의 붕괴를 획책했다. 1916년 대공세는 이를 위한 길이었다.

"1906년보다 더 거대한 혁명이 일어난다면, 러시아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소수민족들이 도미노처럼 들고 일어나게 해야 한다. 1916년 대공세의 성공이 역사를 바꿀 것이다!"

카이저의 생일인 1월 27일에 맞춰 작전 계획이 발표되었다.

작전명 게리히트(Gericht), 이른바 심판(審判) 작전. 연합국을 심판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명칭이었다.

이는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Jungstes Gericht)’을 암시하기도 했다.

1916년 초여름, 독일제국은 러시아제국을 향해 ‘최후의 심판’을 감행했다.

우크라이나 들판에, 묵시록적인 미래가 암시되었다.

- 21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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