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대한국군 유럽파병
제3차 한러협약이 체결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조약을 비준하고 파병 준비에 나섰다.
"파병의 제반 비용은 러시아가 부담하기로 했고, 연합국은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파병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에서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장비 일부를 무상으로 공여할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파병 결정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연합국에서도 환영받았다. 군단급 병력 가지고 전황이 바뀌지야 않겠지만, 극동의 국가가 유럽에 병력을 파견한다는 상징성은 충분했다.
한국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및 프랑스와도 협상을 했다. 열강과 비교하면 뒤떨어지는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하여, 상당량의 장비와 무기를 제공하고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다.
"군단급 파병에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푼다는 건, 그만큼 저들의 전황이 급박하다는 거겠지."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변화는 없을 테니."
"올해 포르투갈이 연합국으로 새로 참전하기는 했지만, 전황에 큰 의미는 없었으니까요.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모두 불리한 상황이고."
1916년 4월, 영국의 우방인 포르투갈이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유럽의 3류열강으로 전락한 포르투갈인지라 전황에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영국의 요청을 받아 서부전선에 5만 5천의 포르투갈 원정군단(Portuguese Expeditionary Corps)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파병의 대가로 영국과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대규모 군수지원을 했다. 포르투갈 군단은 영국제 소총과 프랑스제 중포(重砲)로 무장했다.
한국군의 파병도 포르투갈군의 파병에 준하는 대우를 받기로 했다. 한국군은 자국산 소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있으니, 최신 장비 및 무기의 공여와 생산을 위한 기술 이전을 약속받았다.
"가능하면 전차 기술을 확보해야 하네. 당장은 무리여도 차후에 생산할 수 있도록."
이선은 진작부터 전차 개발에 관심이 있었으나, 막 기지개를 튼 한국의 중공업은 독자적으로 전차를 개발할 능력이 없었다.
한국의 군수공업은 소총과 탄환을 넘어 중포와 기관총도 대량생산했고, 러시아와 협력하여 미국제 트럭을 개조한 장갑차 생산에 성공하는 쾌거를 달성했지만, 전차는 서양 열강의 기술 이전이 필요했다.
아직 영국의 ‘탱크’조차 프랑스에도 정보 공유 없이 극비리에 개발되는 상황이었고, 프랑스도 독자적으로 개발 중이었다. 러시아의 이른바 ‘차르 탱크’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불 모두 아직 개발 단계인지라 연합국일지라도 기술을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곧 전차가 실전에 투입되면, 이선은 러시아를 내세워 동부전선에도 전차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기술 이전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정예부대를 파병하려고 하지만, 전선에서 무익하게 소모되는 건 원치 않네. 러시아가 원하는 것도 정치적 의미의 파병이니까. 러시아군과 조율하여 2선에 배치되도록 하지."
"예. 군단급 파병으로 보병 2개 사단과 기병 1개 사단을 선발할 방침입니다."
차르의 체면치레와 한국의 생색내기, 연합국에 눈에 띄는 역할을 하려면 최전선보다는 수도 근처에 배치되는 게 적절했다.
"파병부대는 어떻게 선발하면 좋을지 원수부에서 논의해 보겠습니다."
‘광무 20년 7월 배치 현황’이라고 적혀 있는 지도에 따르면, 대한제국군의 상비군은 다음과 같았다.
근위제1사단, 사령부 황성(서울). (수도군단)
근위제2사단, 사령부 서경(평양). (1군단)
제1사단, 사령부 경기 인천. (수도군단)
제2사단, 사령부 전북 전주. (2군단)
제3사단, 사령부 경북 대구. (2군단)
제5사단, 사령부 함남 함흥. (3군단)
제6사단, 사령부 요동 봉황성. (1군단)
제7사단, 사령부 연길 화룡. (3군단)
제8사단, 사령부 요동 안산. (1군단)
제9사단, 사령부 함북 경성. (3군단)
제10사단, 사령부 평북 의주. (1군단)
제11사단, 사령부 경남 부산. (2군단)
제12사단, 사령부 경기 수원. (수도군단)
제13사단, 사령부 강원 원주. (수도군단)
남만주의용사단, 사령부 무순.
남만주의용기병사단, 사령부 돈화.
이외에도 기병 여단, 해병 여단, 육군항공대 등이 있었다.
근위사단은 보병 2개 여단(4개 연대) 포병연대, 기병연대, 공병대대로 구성되어 총원이 2만에 달했다. 일반적인 진위사단은 신편제에 따라 보병 3개 연대, 포병 1개 연대로 구성되어 총원은 1만 5천 내외였다.
남만주 자치령 의용사단은 실질적으로 대한제국군 소속이나 명목상으로는 ‘자치령 의용군’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파병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국군에서 가장 강력한 근위사단을 보내야 합니다. 근위 1사단은 산동 전역에서 공을 세운 바 있으나, 대원수 폐하를 시위(侍位)해야 하는 임무를 장기간 해제하고 유럽까지 보내긴 어렵습니다. 그러니 근위 2사단을 파병하였으면 합니다."
"동의합니다. 진위사단 중에는 2군단 예하 후방사단은 제외하고, 평안-요동방면 1군단 예하 사단들도 유사시 중국을 견제해야 하니 제외해야 합니다. 함경-연길 방면의 3군단 예하 사단은 러시아와도 관계가 깊으니 이들 중에 선발했으면 합니다."
"9사단이 유사시 연해주 방면을 맡을 부대였으니, 러시아어 구사자들도 여럿입니다. 9사단을 선발하도록 하지요."
"여전히 기병의 활용도가 높은 러시아 전선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기병사단도 군단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좋습니다. 기병 1여단과 2여단을 1사단으로 편성하지요."
이로써 근위 2사단과 9사단, 기병 1사단이 파병군단으로 선발되었다.
"대한국군이 머나먼 유럽에서 국위를 떨치는데, 해군만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전함 충무공 이순신이 파견되어 있지 않던가요?"
"영국군 소속으로 그렇지요. 해군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싸울 권리를 주십시오. 산동 전역에서도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해군은 산동 전역 이후 해군육전대를 해병대(海兵隊)로 개칭하고, 3개 해병 연대를 창설했다. 해군의 강력한 요청으로 해병 2개 연대, 1여단을 파병군단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파병군단은 부족하나마 본관이 맡고자 합니다."
"참모총장께서 직접요?"
참모총장 홍범도가 직접 파병군 사령관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이선의 임명으로 참모총장을 맡았으나, 본질적으로 참모보다는 야전 지휘관이 더 어울리는 홍범도였다.
‘하긴, 야전 지휘관과 참모는 역할이 다르지. 홍 장군이라면 연합국에 할 말 다 할 사람이기도 하고.’
이선도 홍범도는 참모총장보다는 군단 사령관이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장군의 뜻을 가납하겠소. 후임 참모총장으로는 박승환 장군을 임명하지."
파병을 앞두고 보직 이동이 이뤄졌다. 홍범도가 파병군 사령관을 맡고, 근위1사단장을 역임하던 박승환이 후임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병군 참모장은 러시아 현지에서 경험이 많은 노백린 장군이 맡고, 각 지휘관은 가장 유능한 장교들로 선발하라."
광무 20년, 기존의 대장-부장-참장이라는 장성급 3계급 체계에서 새로 정장(正將) 계급이 도입, 4계급 체계로 바뀌었다. 홍범도는 정장으로 진급하여 파병군 사령관이 되었다.
파병군 지휘부는 다음과 같았다.
군단장 홍범도 정장 (1868년생)
참모장 노백린 부장 (1875년생)
근위제2사단장 이동휘 부장 (1873년생)
보병제9사단장 이갑 참장 (1877년생)
기병제1사단장 유동열 참장 (1879년생)
해병제1여단장 안중근 참장 (1879년생)
경장 초기 구 연무공원 출신인 홍범도를 제외하면, 신 육군무관학교-조청일 전쟁 혹은 북벌전쟁 참전-유럽 유학 혹은 육군대학 졸업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1870년대생 장교들이 마침내 군부의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병력 규모는 총 45,000명입니다. 편제와 준비가 완료되는 즉시 파병을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러시아의 상황이 갈수록 심상치 않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오."
"예, 대원수 폐하!"
8월 10일, 정부는 <대한국군 구주파병>에 대한 동의안을 중추원과 민의원에 상정했다. 해외파병은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여당인 입헌개화당과 관제야당인 제국당이 당론으로 찬성을 결정했기 때문에 가결은 형식적인 절차였지만, 야당인 신민당과 진보당은 반대했다.
"친애하는 의원 동지 여러분, 대한국 정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연합국의 최종 승리와 대한국의 국익을 위하여 구주에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 정부는 정파에 관계없이, 의원 동지 여러분의 거국적인 판단을 기대합니다."
짝짝짝짝짝-.
총리 서재필이 정부를 대표해 파병안을 상정하자, 개화당과 제국당은 기립박수로 맞이했다.
신민당 원내총무 안창호가 발언권을 얻고 연설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의원 동지 여러분! 우리 대한국군은 대한의 자유와 독립,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국군은 청국의 침략에 맞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의화단에 맞서 북벌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전쟁이, 열강들이 세계를 분할하기 위한 탐욕스러운 전쟁이 대한의 자유와 독립과 관계가 있습니까? 어찌하여 국군이, 대한의 청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을 지키기 위해싸우다 죽어야 합니까?"
"옳소!"
"옳긴 뭐가 옳냐! 비애국적인 말은 삼가시오!"
"대한국군의 신성한 의무를 부정하는가!"
제국당에서 ‘비(非)애국적’이란 비난이 쏟아지자, 진보당 총재 전봉준이 발언권을 얻었다.
"존경하는 의원 동지 여러분, 대저 애국이란 무엇입니까? 입만 열면 전쟁을 부르짖으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면 애국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래전에 지나간 일을 말하자니 민망한 일이지만, 이 늙은이는 광무 4년의 북벌전쟁에서 몸소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는 침략적 목적의 전쟁이 아니라, 의화단과 청조의 만행으로부터 동포들을 구제하고, 누구나 농토를 소유하고 경작할 권리가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군의 북벌에 도움이 됐으니, 녹두장군은 참으로 애국자이시지요!"
전봉준이 ‘경자농민전쟁’을 언급하자, 개화당 일각에서 그 덕택에 대한제국이 북벌을 성공할 수 있었다고 칭찬인지 비꼼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본 의원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전쟁에도 대의명분이란 게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이든, 자유와 평화의 수호든, 명분이 있어야 목숨을 바쳐 싸울 이유가 생깁니다. 이 파병에는 국익이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언급될 뿐, 대의명분이 없습니다. 파병으로 인한 안보 공백은 어찌합니까? 일본과 러시아가 싸웠을 때 대한은 현명하게도 중립을 지켰습니다. 어째서 이번에는 그러지 않는 것입니까?"
전봉준의 지지에 힘을 얻은 안창호가 다시 정부를 공박했다.
"과연 독일 군국주의자들은 사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 있는 러시아 전제정권은 정의롭습니까? 그들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소수민족을 학대하는 정권입니다. 왜 우리 청년들이 피를 흘려 가며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까? 대체 어떤 국익이 청년들의 피를 정당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옳소!"
의석의 좌측, 신민당과 진보당 블록에서는 일제히 박수가 쏟아졌다.
총리 서재필은 내심 난처했다. 의석수로 밀어붙일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거국적인 지지를 얻어 파병안을 통과시키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한러협약과 밀약의 내용을 보면 한국이 파병의 대가로 얼마나 많은 걸 얻을 수 있는지, 정부 인사들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익’의 세부사항을 의회에서 떠들 수도 없었다. 이 시기의 외교는 아직 비밀외교였고, 영국과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정부는 의회에 외교상의 비밀을 공유할 의무가 없었다.
"친애하는 의원 동지 여러분, 이번 파병은 대의명분과 실리를 모두 만족시키는 사안입니다. 러시아 정부가 전제정을 고수하고 있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나 그들 국내의 사정입니다. 보다 중요한 건, 러시아는 대한의 우방으로서 매우 핵심적인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붕괴를 결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안보 공백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국군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외무대신 이상설이 총리를 대신해 점잖은 어조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상설은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품으로 야당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이였다.
"명분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데,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연합국은 자유의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립을 지키고 있으나, 미국이 참전한다면 더욱 확고해질 겁니다. 비록 러시아가 당장은 전제정을 고수하더라도, 시대적인 변화를 등지고 홀로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승리는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만, 연합국의 승리는 곧 자유주의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대한은 어느 쪽에 서야겠습니까? 전후질서를 고려하면, 대한도 승리에 일익을 맡아야 합니다!"
"옳소!"
"훌륭하신 말씀!"
명분과 실리를 모두 내세운 이상설의 연설에 입헌개화당은 일제히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신민당과 진보당은 수차례 반대토론을 벌이며 표결을 지연시켰으나, 결국 개화당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표결을 강행했다.
8월 12일, 파병안은 130석에 달하는 압도적인 지지로 민의원에서 통과되었다. 이튿날 중추원에서도 파병안을 가결함에 따라, 모든 법적 절차가 완료되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끝나면 모든 국가에 보통선거권이 부여될 겁니다.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국민을 위해 당연한 조치지요."
"대한의 정치개혁도 보통선거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보통선거권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함께 단결합시다."
이번에도 여지없는 개화당의 승리였으나, 야권이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주의 성향의 신민당과 인민주의 성향의 진보당은 지역적 기반과 계급적 기반이 달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일단 ‘개화당 독재’를 종식 시켜야 한다는데는 일치했다.
보통선거권을 연결고리로 하는 신민-진보 야권 블록이 결성되었다.
"자랑스러운 대한의 용사들이여! 그대들은 이 평양에서, 만주에서, 산동에서 무위(武威)를 떨쳐왔다. 러시아와 유럽에서도 그대들의 영웅적인 활약은 계속되리라 믿는다. 대한의 국익을 위하여, 우방인 러시아를 돕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독일 군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싸우자!"
"와아아아아아!"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광무 20년 10월 1일, 독립전쟁(조청일전쟁) 발발 22주년을 기념하여 평양에서 대규모 행사가 있었다. 바로 근위 2사단을 비롯한 유럽 파병군의 환송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대한국군이여, 유럽에서도 무위를 떨쳐라!"
"대한국군이여, 용맹하게 싸우고 무사히 돌아오라!"
평양 시민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는 병사들을 향해 열렬히 환호했다. 마치 1914년의 개전 초기의 유럽을 보는 듯했다.
"대한국군 구주파병군단, 진격!"
1916년 10월, 4만 5천의 대한제국군이 경의선, 만주철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로 향하는 긴 여정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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