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38화 (537/812)

219화 오만과 편견

1916년 겨울, 우크라이나 전선은 독일군의 당초 예상을 깨고 소모전에 접어들었다.

독일군의 목표는 키예프를 점령하고 최소한 드네프르강 우안(우크라이나 서부)까지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일대는 흑토지대로 전통적인 농업지역이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와도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곡창지대인 서우크라이나를 점령해 당면한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러시아군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브루실로프가 이끄는 남서전선군은 역공을 가해 독일군 양익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파했고, 역포위를 우려한 독일군은 진격을 멈췄다.

"아군의 당면한 목표는 적을 완파하는 게 아니라, 적을 최대한 괴롭히는 것이다."

브루실로프는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병력 증원이 이뤄지기 전에, 서쪽으로 밀어낸 전선을 다시 동쪽으로 후퇴했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면서 농토에 불을 질러 독일군의 식량 수확을 막았다. 가을 추수를 앞둔 농민들에게는 비정한 조치였지만, 러시아군의 청야작전에는 예외가 없었다. 독일군에는 밀 한 이삭도 넘겨주지 않을 태세였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이대로 공세를 멈출 생각이 없었으므로, 전투는 계속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추태란 말입니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동맹군의 발목을 잡지는 말아야지요! 독일의 동맹에 대한 배려도 한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동부전선 전역은 독일군의 지휘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서부전선의 급한 불을 끄고, 동부전선을 찾은 팔켄하인은 오스트리아군의 동부전선 사령관 요제프 프리드리히 대공에게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합스부르크 황족인 프리드리히 대공은 치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참패를 당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팔켄하인과 함께 동부전선을 찾은 합스부르크 왕위계승서열 2위인 카를 대공이 대신 항변했다.

"장군, 말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우리 군도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애초에 키예프까지 점령한다는 작전에 무리가 있지 않나 싶은……."

"작전에 무리가 있었다고요? 전하께서는 이 사람을 뭘로 보십니까? 나는 경험 많은 프로이센 장군입니다!"

팔켄하인은 카를 대공의 말을 끊고 면박을 주었다. 팔켄하인의 오만함에 오스트리아군 장성들은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냉정하고 비사교적이었던 팔켄하인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성마르게 변해 갔다.

연전연패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편견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고,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인 회첸도르프가 협의 없이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서 이탈리아로 보내자 아예 사적인 연락조차 끊을 정도였다.

팔켄하인만 그런 게 아니라,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를 비롯한 동부전선의 독일군 장성들도 오스트리아군을 멸시했다. 비유하자면, 2차대전기 독일 장성들이 동맹인 이탈리아군을 멸시한 것과 유사했다.

"앞으로 동부전선의 지휘는 단일화하여 독일군이 맡는다."

결국 팔켄하인과 루덴도르프의 요구대로, 요제프 프리드리히 대공은 경질되고 오스트리아군은 동부전선의 지휘권을 독일군에 넘겼다. 힌덴부르크 원수가 동부전선의 전체 지휘를 맡게 되었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갈수록 독일에 종속되는 처지로 떨어져 갔다.

"프로이센 놈들이 이렇게까지 무례할 수가 있나? 도대체 이런 대우를 받아 가면서까지 무익한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있나?"

조카이자 계승서열 2위인 카를 대공이 팔켄하인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말에,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격분했다.

"오만한 프로이센 상놈들! 누군 지고 싶어서 지나? 우리도 독일처럼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싸우고 싶단 말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회첸도르프는 서로를 혐오하는 숙적이었지만, 독일에 대한 분노는 일치했다. 회첸도르프에겐 1866년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독일 연방에서 추방한 프로이센의 그림자가 보였다.

회첸도르프 입장에선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슬라브 민족들이 이렇게까지 전쟁에 비협조적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포병, 기병, 공병 등에는 독일계와 헝가리계가 다수였으므로, 일선 보병 병력의 7할이 슬라브계였다. 폴란드계와 크로아티아계 정도를 제외하면, 전쟁이 지속될수록 슬라브계 민족의 충성심은 떨어졌고, 러시아군과 싸우느니 백기를 들고 집단 투항하는 병사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애초에 이래서 전쟁은 무리수라고 하지 않았나? 세르비아 잡으려다 제국이 무너질 판이 아닌가!"

처음부터 전쟁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연전연패하고 독일에 종속되는 상황이 우려스러웠다. 독일 덕에 가까스로 전선은 유지하고 있지만, 상호 파멸의 길이 빤히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합스부르크와 로마노프 두 왕조가 모두 무너진다. 어떻게든 강화협상을 추진해야 하는데……."

러시아 일각에서 단독강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있듯이,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내심 강화를 원했다. 하지만 독일이 용납할 리가 없었다. 독일은 ‘최후의 승리’까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태도였다.

노쇠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계승을 준비했고, 종전을 구상했다.

"물러서지 마라! 끝까지 싸워라!"

독일군의 증원이 이뤄진 뒤에도, 도로의 미비와 병참의 부족은 동맹군을 괴롭혔다. 러시아군은 방어태세를 굳건히 해 전선은 키예프 서쪽 140km 지점인 지토미르-빈니차에서 고착화됐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결국 독일군의 공세도 둔화되기에 이르렀다. 독일군도 키예프 점령과 우크라이나 확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적의 진격을 막아 냈다! 적은 결코 무적이 아니다. 신성한 러시아에서 적을 몰아내는 날까지,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브루실로프 장군 만세!"

역습과 방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브루실로프는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브루실로프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인 쿠투조프 원수에 비견되기에 이르렀다.

만약 브루실로프가 아니었더라면, 남서전선군은 그대로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일에 넘어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러시아의 전쟁 수행능력은 바닥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장군을 스타프카로 불러 훈장을 수여하시겠다는군요. 최고 훈격인 <성 게오르기 황금 용맹 훈장>이 수여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남서전선군 휘하 제2기병군단 사령관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중장, 즉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브루실로프에게 축하를 전했다.

왕위계승서열 2위인 미하일은 야심이 없었고, 역설적으로 조카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인 탓에 사랑하는 여인과 서둘러 결혼했다. 왕족이 아닌 귀족 여성과 귀천상혼을 했으니 계승권이 박탈되리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과연 차르의 노여움을 산 미하일은,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해 한동안 프랑스에서 생활해야 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전에 육군 대령이었던 미하일은 러시아로 귀국을 허락받아 군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중장까지 진급했다. 대부분 왕족이 그런 것처럼 명목상의 사령관이었지만, 미하일 대공은 전쟁에 무지한 형과 달리 제법 군사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어 군부 인사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승리의 대가로 지불한 비용이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역공에 성공해 오스트리아군 포로를 40만이나 잡았습니다. 적군의 사상자와 포로를 합치면 족히 100만은 될 겁니다."

"그러니 대단한 성과가 아닙니까?"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피해가 엄청났다. 오스트리아군은 갈수록 전의를 상실하고 손쉽게 백기를 들었다. 40만의 포로를 제외하고도 30만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도 30만의 사상자를 냈다. 70만이라는 병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우리 군의 손실은 더욱 큽니다. 지금까지 극비로 뒀습니다만, 6월 이래 사상자가 70만에 실종자가 80만입니다."

"세상에, 실종자가 80만이나 됩니까?"

"실종으로 분류하긴 했습니다만, 대부분 포로겠지요. 자의든 타의든 항복한 병사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브루실로프의 분전에 초기에 1:2까지 벌어졌던 사상자 교환비는 종반부에 거의 1:1.2까지 줄어들었다.

문제는 러시아군의 사기저하가 오스트리아군보다 더 심각하다는 점이었다.

러시아군은 포로의 수가 사상자의 수를 한참 앞질렀다. 가까스로 군의 붕괴는 막았지만, 전투를 거부하는 러시아군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포로 외에도 탈영이 속출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지켜 내긴 했지만, 러시아군의 손실은 150만 명에 달했다. 개전 이래 러시아의 인적손실은 이미 5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군이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만,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대부분 농민 출신인 병사들은 왜 독일과 싸워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합니다. 그들은 국가가 점령할 땅보다 자신이 소유할 땅을 원하지요. 전쟁 승리를 위해서라도 과감하고 즉각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전하께서 꼭 폐하께 건의해 주십시오."

브루실로프 곁에 있던 브론스키가 미하일 대공에게 청했다. 이들은 군인이지만 정치의 필요성을 알았다. 지금 러시아 최대의 문제는 정치였다.

"장군들이 우려하는 바를 모두 이해합니다. 나 역시 깊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감하고 즉각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가 의견을 개진한다고 통할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전하께서는 폐하의 하나뿐인 친형제가 아닙니까? 결혼 문제도 해결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미하일이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형제는 화해했다. 전사(戰死)를 우려한 미하일이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니콜라이도 귀천상혼을 인정하고 조카에게 작위를 내렸다.

"내가 말씀드려 봤자, 황후가 속삭이겠지요. 미하일 대공이 알렉세이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니콜라이 대공이 총사령관으로서 폐하의 자리를 노렸던 것처럼, 미하일은 군부의 지지를 얻어 폐하와 알렉세이를 몰아내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 궁정정치의 실상을 알고 있는 미하일의 말에, 장군들은 충격을 받고 한숨을 쉬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라스푸틴의 전횡과 농단은 없었지만, 섭정으로 임명된 황후 알렉산드라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소문대로군요. 그래서 니콜라이 대공께서 경질된 거였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오직 황후의 말씀만 들을 뿐, 그 누구의 조언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합니다만, 병사들 사이에서도 독일 출신 황후가 일부러 조국에 승리를 안겨 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의 번영을 원한다는 건 황후도 다르지 않습니다. 황후께서는 완전히 러시아인이 됐어요. 문제는 20세기의 러시아인이 아니라 17세기의 러시아인이 되었다는 거지요."

이미 알렉산드라는 철저한 러시아인이었다. ‘신의 대리인이자 정교회의 수호자인 차르’에 대한 전제적 신념은 오히려 차르보다 독일 출신 황후에게 더 강했다. 전제정 러시아를 아들 알렉세이에게 털끝 하나 훼손하지 않고 물려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알렉산드라를 지배했다.

‘러시아인은 무지한 어린아이와도 같으니 오직 채찍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황후의 오만과 편견은 더욱 강해졌고, 일말의 양보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두마에서는 연일 정부를 비판하는 거로 압니다만, 내각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까?"

"어차피 현재 각료의 대부분은 황후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전제정에 대한 맹신은 다를 바가 없지요."

스톨리핀 이후 총리를 맡았던 온건보수파 코콥초프도 작년 차르의 총사령관 취임에 반대하다 경질되었고, 이미 고령으로 은퇴했던 골수 전제주의자인 전임 내무대신 이반 고레미킨(Ivan Goremykin)이 총리가 되었다.

차르도, 섭정도, 총리도 시대착오적인 전제주의자들로만 구성되었으니 20세기의 총력전을 치르고 있는 나라 꼴이 어찌 될지는 뻔했다.

그나마 외무대신 사조노프가 총리의 견제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3차 한러협약 체결 이후 경질되고야 말았다.

"사조노프가 한국에는 어떤 양보를 해도 상관없어. 극동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폴란드에 양보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1916년, 이미 폴란드 전역이 독일군 점령하에 놓였다. 독일은 점령지인 폴란드, 리투아니아, 서우크라이나에 친독 괴뢰정권을 세울 준비를 했고, 실제로 1916년 11월에 폴란드 ‘독립’에 대해 발표했다. 폴란드인들은 삼국분할의 한 축인 독일의 진심을 믿지 않았지만, 삼국분할 120년 만에 폴란드가 지도에 다시 나타난 것은 상징적인 일이었다.

독일이 폴란드 독립을 선언하기 전에, 사조노프는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명분이라도 얻고자 러시아도 전후에 폴란드의 자치를 인정하자고 제안했다.

"형식상 폴란드 국왕으로 차르를 모실 수만 있다면, 폴란드인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부여하도록 하시지요."

요컨대 1815년 알렉산드르 1세 시절의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인데, 황후는 이조차도 반대했다.

"정말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군요. 폴란드에 완전한 자치권을 주면, 그다음에는 다른 민족이 요구하지 않겠어요? 요구하면 다 줄 건가요? 그럼 러시아제국은 해체되고 말겠죠."

황후의 반발에 차르는 외무대신을 경질하고, 역시나 반동파 인사를 후임 외무대신으로 임명했다. 내각 전체가 황후의 영향력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론스키 장군, 그러고 보니 장군의 사위가 한국 황제의 형제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 폐하께서는 한국 황제의 조언만은 금과옥조로 여긴다고 합니다만. 이영 대공은 페테르부르크에 사니까 이 상황을 잘 알 겁니다.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순 없을까요?"

미하일 대공의 물음에 브론스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선과 달리 이영은 차르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고, 이영은 가급적 정치적 사안에 휘말리는 걸 피하려 했다.

"제 사위의 처지는 전하와 매우 비슷합니다. 황제의 아우로서 가급적 정치적 발언을 삼가야 하는 입장이지요."

이영과 자신의 처지가 매우 비슷하다는 말에, 미하일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해 봐야지요. 유감스럽게도 현재 러시아에서 폐하의 생각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한국 황제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페테르부르크에 갈 일이 있는데, 직접 이영 대공을 만나 봐야겠습니다."

미하일은 이선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미수 사건 당시 세 살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미하일이지만, ‘로마노프 왕조의 구원자’ 이선에 대해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커가면서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형 니콜라이가 이선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이선이 로마노프 왕조를 구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22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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