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후방의 전쟁
1917년 초, 러시아제국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모종의 계획이 전개되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 무렵, 차르의 아우 미하일 대공이 수도를 찾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이하여 가족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대공을 만나길 청했으나, 미하일은 정중하게 초대를 거부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미하일은 완고한 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방법을 찾고 있었고, 사전에 예고한 대로 이영을 찾았다.
이영은 아내 아나스타샤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대공 전하, 저희 저택을 방문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기병 군단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고 장인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만 나야 명목상 지휘관이라 부하들이 잘 싸워 준 거지요. 브론스키 장군이야말로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공이 컸습니다."
이영과 미하일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이는 1878년생인 미하일이 9살 위였지만, 황제의 아우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꽤 친밀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황실에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는 점도.
"친왕비께서는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아, 내가 듣기로 임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축하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이영과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부부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자식이 없었으나,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두 분의 결혼, 그리고 태어날 아이는 러시아와 한국의 우호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양국 모두의 경사입니다."
"그렇게 봐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영은 조심스러웠다. 맏형 이선이나 이강은 지지해 주겠지만, 보수적인 이왕가에서 혼혈인 왕족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종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태상황과 황태후도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친왕 전하께서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짐작하신 바가 맞겠습니다만, 제가 감히 논할 일이 아닙니다."
이영은 적자이기 때문에, 형 이강보다 왕위계승권이 위였다. 이척은 아예 자식이 없었으므로, 이영과 그 소생의 아들은 황자들 다음가는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황자가 셋이나 되므로 순서가 오지도 않겠지만, 이영은 아들이 태어나도 왕위계승권은 알아서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친왕 전하는 형님께서 지지해 주지 않으십니까? 나는 아들에게 대공 작위도 못 물려주는 사람입니다. 뭐, 애초에 그런 지위에 미련도 없지만."
미하일은 이영의 고민을 짐작했다. 그 자신도 평민이나 다름없는 하급 귀족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바람에, 차르의 노여움을 사 작위와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차르가 결정적으로 분노한 이유는, 제수(弟嫂)가 교회에서 금지하는 이혼을 했다는 점이었다. 미하일의 아들은 아예 사생아 취급을 받았다.
나중에 형과 화해해서 본인의 작위는 돌려받았지만, 아들에게는 대공이 아니라 백작 작위만 주어졌을 뿐이었다. 당연히 계승권은 없었다.
"이런,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좋은 분위기를 망쳤군요. 즐거운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예, 식사와 다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무쪼록 대공 전하의 마음에 드는 식사가 되길 바랍니다."
이영 부부와 미하일은 함께 만찬을 했다. 술이 몇 차례 돌 때까지 한담(閑談)만 나눴다.
"내가 듣기로 친왕께서는 사교계에 참석을 자주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만."
"송구합니다. 제가 그렇게 사교적이지 않다 보니……."
이영은 귀족들의 사교계를 영 거북스러워했다. ‘러시아 여인과 결혼한 동양 왕자’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어딜 가도 주목을 받기 때문에 동물원 원숭이가 되는 기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전쟁 중에도 화려한 무도회와 파티가 열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선의 병사들, 후방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고통받고 있는데 귀족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아니, 이해합니다. 나는 페테르부르크 귀족사회를 경멸합니다. 겉으로는 온갖 점잔을 떨어도, 그들보다 더 추잡하고 교활한 인간들은 없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 구제불능의 쓰레기입니다."
미하일의 노골적인 비난에 이영 부부는 놀랐다. 충격의 강도는 아나스타샤가 더 컸다. 다름 아닌 차르의 친형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술기운으로 하는 말 같진 않았다.
"친왕 전하,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친왕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미하일이 아나스타샤를 곁눈질로 보자, 이영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내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아나스타샤는 생각난 게 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과를 응접실에 준비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부인."
아나스타샤가 떠나자 두 사람만이 남았다. 미하일은 목소리를 낮추고 본론을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비밀입니다. 전하의 형님이신 한국 황제 폐하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우리 황제 폐하께 친서를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친서 요청이라면 제가 아니라 대사관을 통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비공식적으로 말입니다. 한국 황제께서 형님께 종종 친서를 보내 조언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외교와 관련된 사안으로 압니다만, 내정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 분 군주 간의 일이라, 제가 감히 논할 수 있을지……."
이영이 발을 빼자, 미하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왜 논하지 못합니까? 친왕께서 특사로 있으면서 종종 친서를 전달하는 거로 압니다."
"아니, 저는 문서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러시아 국내 사정에 대해 어찌 개입하겠습니까?"
"친왕 전하. 나는 정치에 개입할 생각이 없고, 발언조차 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깊이 우려하고 걱정합니다. 우리 황실뿐만 아니라 국가의 운명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느낍니다. 황실과 정부의 일부 인사에 대한 대중의 증오는 놀랍게도 좌파와 우파, 과격파와 온건파를 가리지 않습니다. 변화에 대한 요구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미하일은 러시아인들에게 드러내지 않던 우려를 이영에게 전했다. 오히려 외국인이라는 점이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 러시아에는 변화가 시급한데, 오직 차르만이 모릅니다. 형님은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황후의 말만 들을 뿐이지요. 하지만 한국 황제는 생명의 은인이자 친우로서, 형님도 그 조언은 귀중히 여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어머님, 황태후께 직접 들은 말입니다."
"……."
"한국 황제께서 형님께,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어느 때보다 조언이 시급합니다."
미하일의 호소에 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뜻이 닿을 수 있도록, 우리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오오, 고맙습니다."
이영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접었다. 한껏 기대가 오른 대공의 기분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럼 좋은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영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영이 본국으로 상신하면, 이선도 분명 친서를 다시 보내려 할 것이다.
미하일은 모르고 있지만, 사실 이선은 이미 내정에 대한 조언도 조심스럽게 차르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차르는 외교와 전쟁이라면 모를까,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언도 듣지 않으려 했다.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이영은 주러시아 정보망의 일원이었다. 대한제국 황족이자 러시아 장군의 사위로서 황실과 군부에서 정보를 얻었다.
대사 이완용은 정치인과 외교관, 공사 이위종은 관료와 정보기관에서 정보를 청취했다. 국외 혁명조직과 혁명가들은 제국익문사 유럽지부장 조한민이 맡고 있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은, 러시아제국이 이대로 변화 없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전선과 후방의 사기저하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연합국의 일원이자 러시아의 물주 역할을 하는 영국과 프랑스도 차르 정권에 대해 극도로 실망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여, 니콜라이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차르스코예 셀로에 왔다.
1917년 1월 1일(서력 1월 14일), 주러시아 영국대사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경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뷰캐넌은 러시아 주재 외교관 중 차르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자부할 정도였고, 차르에게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황제 폐하, 새해에는 반드시 국민의 신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대사의 충고에 차르는 뜻밖의 답변을 했다.
"지금 짐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거요, 국민이 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거요?"
뷰캐넌은 당연히 전자의 의미로 말했지만, 니콜라이는 후자로 받아들였다. 대사는 차르의 상황 인식에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외교관답게 답변했다.
"양쪽 모두입니다."
"짐은 국민에게 실망했소. 우리의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러시아인들이 이렇게 나약하고 불평불만만 늘어놓을 줄은."
수도와 전선 모두 멀리 떨어져 있는 최고사령부에서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니콜라이는, 오직 황후의 말만 듣고 있었다.
"폐하, 간청드립니다. 약간의 정치적 개혁이면 혁명을 막을 수 있습니다. 두마에 내각 추천 권한을 부여하고,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십시오. 만약 혁명이 일어나면, 황궁의 수비를 맡길 만큼 신뢰할 만한 군대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대사. 조언은 고맙지만, 러시아 국내 문제는 짐이 알아서 할 일이오."
끝내 니콜라이가 충고를 거부하자, 뷰캐넌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영국대사인 그는 알고 있었다. 차르를 대신할 궁정 쿠데타가 모의되고 있다는 것을. 뷰캐넌의 보호를 받아 피신한 입헌민주당수 밀류코프가 쿠데타 조직의 일원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대사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영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정보요원이 쿠데타 계획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황제와 황후를 끌어내리고 ‘전쟁에 효율적인 신정부’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황후는 크림의 별궁에 감금시키거나, 영국으로 추방합시다."
"그럼 차르는?"
"조용히 물러나 주시는 게 가장 좋은 일이지."
"그 후에 계승은 누가 하는 게 좋겠소?"
"황태자는 어린 데다 병약하니까 곤란하오. 정부와 군대의 신망을 받을 수 있는 분을 추대해야지. 그다음 계승서열로 가면 무난할 거요."
미하일 대공이 그들의 추대 대상으로 떠올랐다. 미하일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궁정 쿠데타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동시에, 민중의 인내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후방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러시아에서 온 극비전문을 받은 이선은 생각에 잠겼다.
이영의 요청에 이어, 외교가와 군부 일각에서 수상한 동태가 보인다는 대사관의 보고가 있었다. 익문사에서도 페트로그라드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결국, 1917년에 니콜라이가 무너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역사대로라면, 1917년 2월(서력 3월) 혁명으로 니콜라이는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한다.
하지만 역사는 상당히 바뀌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지도 않았고, 스톨리핀이 암살을 피해 농지개혁을 일정 부분 완료할 수 있었다.
분명 변화한 역사로 니콜라이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존재했는데, 그 스스로 다 걷어차고 있었다.
‘혁명은 필연인가? 실제 역사에서도 쿠데타 모의는 있었지. 하지만 아무리 궁정 쿠데타가 성공해도, 민심은 거스를 수 없다. 혁명의 파고(波高)가 치면 누구도 막지 못한다.’
2월 혁명은 자연발생적인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궁정 쿠데타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입헌군주국 혹은 민주공화국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겠지. 어쩌면 그들은 이미 레짐 체인지를 추구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선은 영국 정부가 얽힌 음모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지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영국은 전쟁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의 붕괴와 이탈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내게 있어 가장 좋은 건, 니콜라이 스스로 현실을 깨닫고 개혁을 하는 거지. 한국을 위해선 니콜라이가 황제로 있는 게 낫다. 하지만 러시아와 연합국을 위해선 그가 물러나는 게 좋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대로 니콜라이가 몰락하게 내버려 둬야 하나?’
이선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오랜 친우 니콜라이를 쉽게 저버릴 수가 없었다. 사적인 감정이야 군주로서 접는다고 쳐도, 니콜라이가 국내 정치는 최악일망정 한국에 대해선 무한한 도움을 주는 우방국 지도자였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고려천자’, 만력제의 환생이었다.
‘좋다. 니콜라이에게 충고하자. 친우로서의 마지막 조언이다.’
이선은 이성과 감정에 호소하는 ‘비외교적인’ 문장의 친서를 작성했다.
「친애하는 짐의 형제 황제 폐하! 우리가 어느덧 친우로서 지내 온 세월도 36년이나 되었습니다.
…… 나는 황후에 대한 폐하의 헌신적인 감정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가족애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다릅니다. 폐하는 남편이 아닌 주권자로서 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친우로서 폐하에게 호소합니다. 어두운 밤에, 절벽으로 끝나는 길을 걷는 친구를 본다면, 그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게 의무가 아닐까요? 폐하 앞에 놓여 있는 어둠의 심연을 경고하는 것도 똑같이 내 의무입니다.
길의 갈림길까지 오게 되었으니, 이제 폐하는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하나는 영광스러운 승리와 평화로 이끌 길이요, 하나는 혁명과 재앙으로 이끌 길입니다.
나는 폐하께 전자를 선택하라고 간곡히 청합니다. 잘못된 길에 접어든다면, 폐하는 물론이요, 폐하께서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위기에 빠트리고 말 것입니다.
…… 부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즉위하면서 신에게 한 맹세, 전제정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맹세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맹세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신의 일은 신에게 맡기더라도, 카이사르의 일은 오직 카이사르만이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희생으로 치러지고 있는 전쟁입니다. 오직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부만이 승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선제적 개혁만이 혁명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 폐하께 어떤 미래가 닥치더라도, 나는 폐하의 친우로서 헌신할 것입니다. 부디 폐하와 러시아를 위하여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폐하의 형제, 이선.」
이선은 전문을 페트로그라드로 전송했다.
전문을 받은 이영은,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차르에게 알현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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