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42화 (541/812)

223화 1917년

러시아의 진정한 문제는 정치개혁이 아닌 사회경제적 모순이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사실 이건 비단 러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후발국가 모두의 문제지요."

예컨대 중국이 신해혁명으로 정치개혁은 이뤘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오히려 더 심화됐기 때문이었다. 손문과 국민당도 이를 인지하여 ‘평균지권’, 즉 토지개혁을 주장했으나 지방의 힘을 장악하고 있는 신사계급의 압도적인 반대로 첫발조차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히 한국이나 일본은 작은 나라로서의 강점이 있어요. 러시아나 중국처럼 거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를 갖고 있으면, 그 무수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가 힘들지. 물론 조건이 좋다 한들, 지도자와 지배계급의 혁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점에서 토지 문제가 핵심이라는 걸 파악한 한국 황제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끄는 계몽전제군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리야노프는 의외로 이선을 높이 평가했다.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선의 행보가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의 인생도 바꾸고 말았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이 이선이 의해 실패한 이후, 6년 뒤에 블라디미르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주도한 인민주의 조직이 결국 차르를 암살했다. ‘황제 시해범’의 일족이 된 울리야노프 일가는 도저히 러시아에서 살 수가 없었고, 일가족이 오스트리아로 이주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민주주의 주류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블라디미르는 ‘볼셰비키’가 아니라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한 ‘사회민주주의-국제주의자’가 되었다.

저작과 연설의 대상도 러시아인보다는 유럽인이었고, 그는 사실상 러시아 대중에게 잊혀진 존재였다.

"그래서 스톨리핀 전 총리도 농지개혁을 추진했던 게 아닙니까? 만약 그가 경질되지 않고,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희망했던 20년간의 평화가 유지됐더라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요."

"흠.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한 한국이나 일본은, 아예 자본주의 사회에 막 편입된 시점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처지니까 오히려 가능했지. 러시아는 수백 년간 내려온 구체제의 모순에 자본주의의 모순까지 수십 년 동안 더해졌소. 이런 문제는 표트르 대제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해결이 불가능하오. 하물며 스톨리핀은 차르의 신임에 운명이 달려 있는데, 우리의 차르는 니콜라샤란 말이지."

울리야노프는 니콜라이 2세를 애칭인 ‘니콜라샤’라고 불렀다. 애정이 아닌 조롱의 의미가 듬뿍 담겨 있었다.

"니콜라샤나 정부 인사들은 뒤늦게 2월 선언이라고 정치개혁 몇 개 던져 주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소. 러시아군의 병사들이란 결국 제복 입은 농민들이지. 전쟁을 경험한 러시아 농민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유순한 소작농들이 아니오. 혁명은 결국 언젠가 일어나게 되어 있소."

"그 혁명의 시기가 언제겠습니까?"

"허허, 그걸 내가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울리야노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혁명 필연론자인 그도 머지않아 곧 혁명이 일어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실제 역사와 달리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세력 내에서 볼셰비키(다수파)-멘셰비키(소수파) 분열이 없었다. 분열을 이끈 ‘레닌’의 독선적 지도가 이 세계에는 없었다.

설령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즉각적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 이행을 이끌 정치세력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 병사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면, 혁명이 일어나겠지요. 전쟁이 러시아가 아닌 차르와 귀족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 지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을 얻는 것보다 내 소유의 토지를 얻는 게 훨씬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을 때."

"과연 그렇군요. 선생이 속한 국제주의파는 조속한 전쟁 종결과 혁명을 주장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혁명이 성공한다면, 어떻게 전쟁을 종결시키겠습니까?"

1914년 세계대전 발발은 국제사회주의도 두 조각을 냈다. 마르크스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며 제2인터내셔널을 주도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전쟁 공채에 찬성하고, 반전평화와 국제연대를 주장하던 프랑스 사회당의 조레스가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후, 각국 사회주의자도 대부분 전쟁 지지를 선택했다. 즉, ‘사회애국주의(social chauvinism)’와 ‘국제주의’로 분열된 것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전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러시아 역시 사회주의 세력이 분열됐는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플레하노프가 전향하여 ‘조국방위파’를 이끌었다.

울리야노프는 전쟁 초기부터 사회적 애국주의를 강력히 비난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멘셰비키의 리더로 숙적인 율리 마르토프(Yuliy Martov),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국제주의파의 지도적 인물로 떠올랐다.

울리야노프의 사상은 바뀌었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역사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이 성공한 첫날부터 주장할 겁니다. 교전국의 점령지 철수. 무배상, 무병합. 민족자결 원칙에 기초한 소수민족들의 독립."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하는 승자 없는 평화와 비슷하군요."

1917년 1월, 윌슨은 교전국들에 무배상 무병합의 ‘승자 없는 평화’를 제안했다. 각국 정부는 거절했으나, 전쟁 지속을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환영했다.

"윌슨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주장하지만, 우리는 전 세계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주장한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지요."

"이상은 훌륭합니다만, 지도자가 각국의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지요? 국가의 권력을 잡은 후에도 진정으로 세계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까?"

조한민의 질문에 울리야노프는 차갑게 웃었다.

"그거야 권력자가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한국 황제가 한국의 국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머나먼 유럽까지 병력을 파병한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연합국의 대의에 동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아니지, 니콜라샤는 한국 황제의 벗이자 물주니까. 그래서 차르가 망하길 원치 않는 거 아니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물주라 망하질 않길 원하는 것처럼. 니콜라샤의 증조부인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헌병 노릇을 했지만, 그 귀결은 크림전쟁의 패배였지. 설마하니 한국의 파병 이유가 차르의 헌병 노릇을 하는 건 아니길 바라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건 아닙니다."

울리야노프는 문득 웃음을 거두고 정색했다.

"선생이 한국 황제의 요원이라는 건 알고 있소. 나와 나눈 대화도 보고가 되겠지?"

"호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정체가 밝혀졌음에도, 조한민의 반응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그 역시 진작 눈치챘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첩보원들은 이골이 나게 봤으니까.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에 의해 신원이 보증되었다곤 하지만, 사회주의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동양인 기자. 이쪽 업계의 생리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하지."

"그런데도 용인하고 계속 만나 준 이유는 뭡니까?"

"그거 아시오? 오흐라나(내무부 비밀경찰)와 장다르메(국가헌병대)는 같은 무리로 보이지만, 의외로 알력이 심하다오. 한국 황제가 차르의 동맹인 건 알지만, 이해관계가 다르겠지. 그쪽도 진작 우리를 뒤쫓고 있으면서도, 용인하고 있었잖소. 이유가 뭐요?"

조한민은 씩 웃었다.

"서양인들은 사업을 할 때 보험을 들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험이 필요합니다."

"아, 역시 비즈니스맨은 다르시군. 그래서 우리가 당신들의 보험이다? 카이저라면 우리를 보험으로 취급할 수도 있지. 러시아의 혁명을 가장 열망하는 건 독일이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막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오?"

이미 독일 외무부의 비밀요원들은 울리야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의 국제주의파와 접촉했다. 독일은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자금과 무기를 조달할 용의가 있었다.

울리야노프는 고심 끝에 거절했다. 대의명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다. 공동의 적인 차르에 맞서서 독일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는 있었으나, 독일 자금을 지원받는 건 차후에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우리 황제 폐하의 생각은 카이저와 다릅니다. 혁명은 외부에서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부에서 터지는 거지요. 화산이 폭발하면 아무도 못 막습니다. 그렇다면 재난 상황에 미리 보험을 둘 필요가 있지요."

"혁명의 생리를 잘 알고 계시군. 조 선생이 황제에게 그리 말했소?"

"아뇨, 오히려 황제 폐하께서 제게 그리 알려 주셨지요. 폐하께서는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뿐만 아니라, 울리야노프 선생의 글도 열심히 탐독하십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매우 흥미롭다고 하시더군요. 선생의 제국주의론도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폐하께 보고되었습니다."

울리야노프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대머리를 치면서 껄껄 웃었다.

"이야, 이거 참 놀랍군. 내 글의 독자가 기껏해야 수백일 텐데, 설마하니 동양의 군주를 독자로 두고 있을지는 몰랐소."

"동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좋은 말이군. 군주와 사회민주주의자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적이지. 적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지. 정말이지 귀국 황제는 대단하오. 만약 차르의 위치에 있었다면 혁명은 아예 불가능했을지도 몰라."

울리야노프는 다시 웃음을 거두었다.

"참 역설적인 일이군. 내 부친께선 니콜라샤의 조부를 위해 일하셨소. 내 형님은 바로 그를 죽였지. 니콜라샤의 부친은 내 형님을 죽였고. 나는 니콜라샤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지. 3대에 걸쳐 로마노프 왕조와 악연을 맺은 내게, 로마노프 왕조의 벗인 한국 황제가 관심을 보이다니."

블라디미르의 부친 일리야 울리야노프는 러시아제국의 충성스러운 교육관료였다. 일리야의 장남 알렉산드르는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고, 차르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자를 처형하고 일가를 추방했다. 추방당한 블라디미르는 혁명가가 되어 니콜라이 2세를 끌어내리려 하니, 실로 악연이었다.

"그래서, 이 보잘것없는 적, 일개 망명자에게 무슨 보험을 들어 두실 생각이오? 사업 계획이나 들어 봅시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돌발적 상황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원하십니다……."

조한민과 울리야노프는 한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소. 결정은 당이 할 일이지만."

"당 중앙위원회를 주도하는 게 선생 아니십니까?"

"나는 전제군주가 아니오. 7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일 뿐이지."

실제 역사의 ‘레닌’은 볼셰비키의 독재적 지도자였지만, 이 세계의 울리야노프는 달랐다.

"좋습니다. 혁명이 내일 당장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만, 모를 일이지. 아, 귀국 황제께 전해 주시오. 역사의 진보는 필연이고, 역사는 인민의 편입니다. 인민에 맞서는 권력자는 결국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해 드리지요. 이런 말을 듣고 좋아할 군주는 없겠지만,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관대하시니까 말입니다."

"다른 군주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귀국 황제께선 이해해 주리라는 기대가 생기는군. 그럼 다음에는 러시아에서 보게 되길 바랍니다."

* * *

광무 21년(1917) 4월, 대한제국 황성.

전쟁과 기아 상태에 놓인 유럽의 대도시들과 달리, 서울은 전시호황을 맞이하여 번영하고 있었다.

정부는 4월 11일 계천기원절, 대한제국 선포 20주년을 맞이하여 열병식을 개최하리라고 발표했다.

<대황제폐하 성수오십년, 어극이십일년, 경축 대한국계천기원절!>

‘이런 거 그만하자니까.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네.’

이선은 정부가 매년 국경일을 기념하는 게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전쟁 중이라 오히려 더 성화였다.

사실 계천기원절은 명분이고, 연합국으로의 참전과 유럽에 대규모 파병을 한 것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한 열병식이었다. 파병군 장병들의 가족 중 선발된 이들이 경운궁에 초청되었고, 이들은 황은을 찬미했다.

"황제 폐하께서 군림하시는 황궁에서 알현하게 되다니……. 지극한 황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초청을 받은 이들 중에는, 박대붕 정교의 늙은 부친도 있었다. 박대붕은 황제로부터 친히 훈장을 받은 북벌전쟁의 용사이자, 파병에도 자원하여 나선 애국자로 포장되었다. 황제의 앞에 서자, 한반도 남쪽 끝 전라남도 해남에서 온 촌로(村老)는 ‘나라님’을 뵌다는 감격으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미천한 제 아들놈에게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주셨고,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토지까지 하사해 주셨습니다. 제 아들놈은 지극한 황은에 만 번 죽어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며, 언제든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장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박 노인은 궁내부 관료가 미리 연습시켜 준 말을 열심히 외워서 틀리지 않고 말하는 데 성공했다.

"박대붕 정교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용사요. 대한은 결코 충정을 잊지 않을 것이오. 노인장은 참으로 아들이 자랑스럽겠소."

"화, 황공하옵니다!"

‘나라님’의 치하에 노인은 감격하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선이 친히 노인에게 은사금을 하사하자, 노인은 울며 고개를 조아렸다.

기자들은 이 순간을 사진과 감동적인 필치로 담아 보도했다. 기사를 읽던 독자들이 노인에게 감정 이입하며 울컥하는 건 비일비재했다.

"아, 세상천지에 우리 성상처럼 신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군주가 또 있겠는가!"

"암,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없지."

전쟁으로 권위와 신망이 모두 추락하고 있는 유럽의 왕실들과 달리, 50세 즉위 20주년을 맞이한 대한제국 황제 이선의 권위와 신망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짐의 나이가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이오. 지천명이란 문자 그대로 천명을 깨닫는 나이지. 금세기의 천명이란 무엇이겠소? 바로 민심에 부응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것이오. 짐은 천명을 겸손히 따를 뿐이오."

계천기원절을 경축하기 위해 온 대신과 의원들은 황제의 말에 더욱 감읍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내 나이가 어느덧 50이라. 그래, 올해가 1917년이지.’

당사자인 이선은 새삼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1917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실제 역사의 전개대로라면, 1917년 4월 현재에는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해야 했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결정하고,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해야 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요한 세계사적 전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변수가 발생했으니 그렇다 쳐도, 미국의 참전이 이뤄지지 않는 건 이선이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또 역사가 바뀌었다는 의미였다.

‘나비효과처럼 역사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군.’

이선은 조한민의 보고서를 읽었다.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 즉 이선이 알던 실제 역사의 레닌과 같지만 다른 인간이 존재했다.

레닌이야말로 이선의 역사개변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선이 1881년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막지 않았더라면, 레닌은 실제 역사의 행보를 그대로 밟았으리라.

‘역사의 진보는 필연이고, 역사는 인민의 편이다. 인민에 맞서는 권력자는 결국 쓰러지게 되어 있다.’

이선은 울리야노프의 말을 되풀이했다. 20세기의 역사를 알고 있는 그로선 굳이 반박할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혁명은, 군주와 혁명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22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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