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지천명(知天命)
5월 10일(율리우스력 4월 27일),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미하일 2세’의 차르 계승을 선포했다. 두마는 압도적 다수로 미하일 2세의 계승에 찬성표를 던졌다.
"전(全) 러시아 국민의 황제, 미하일 2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소비에트는 군주정 존속에 불만을 느꼈지만, 임시정부 지지라는 기존의 합의를 유지했다.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제헌의회에서 정치체제를 결정한다는 조서에 만족했다.
"총리 겸 내무장관 르보프 공작, 외무장관 밀류코프, 법무장관 케렌스키, …… 육군장관 구치코프, 총사령관 니콜라이 대공, 참모총장 브루실로프 대장."
임시정부 각료들은 대부분 두마 인사들로 채워졌다. 차르를 끌어내리는 쿠데타를 모의했던 이들도 재빠르게 두마와 결합하여 내각의 요직을 차지했다. 이들이 시위대 진압을 노렸다는 사실은 비밀로 남았고, 귀족과 자본가 중심의 두마에서는 쿠데타 모의를 오히려 ‘구국의 결단’이라고 칭송했다.
각료 명단이 발표될 때, 민중의 환호성이 들린 건 케렌스키와 브루실로프 뿐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전선을 지켜 내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케렌스키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서 요직을 겸임하는 유일한 인사로 혁명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뭐야? 그러니까 우리가 겨우 차르를 대공으로 바꿨을 뿐이란 말이야?"
"임시정부가 이미 미하일 2세를 선포했네."
"망할 놈의 정부! 소비에트는 뭘 하는 거야?"
"제헌의회 선거로 정치체제를 결정한다니까, 기다려 봐야지."
혁명의 중심지인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군주정 존속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특히 시위의 전면에서 섰던 사람들이 그랬다.
"전군의 병사들이여! 새 황제가 선포되었다. 전 러시아 국민의 황제, 미하일 2세 만세!"
전선의 병사들에게 차르 퇴위가 선포되었다. 대부분 문맹인 병사들은 승계 조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학교를 나온 병사들이 해설해 주었다.
"차르가 바뀌었다는데?"
"그럼 독일 여자도 황후에서 쫓겨난 건가!"
"그 정도가 아니야. 혁명이라고!"
"혁명?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포고문을 보면 새 차르는 모든 국민이 선출한 제헌의회에 통치를 맡기겠다는군."
"제헌의회는 뭐가 좋은데?"
"우리 가난뱅이들 세상이 온다는 거지! 페트로그라드에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수립됐어. 토지개혁!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 줄 거라고!"
"정말이야? 드디어 내 소유의 토지가 생길 수 있는 건가?"
"근데 내 고향은 이미 독일군에 점령당했는데."
"그러니 우리의 토지를 지켜 내려면 독일 침략자를 몰아내야지!"
상층부가 우려하던 군의 전면적 붕괴는 발생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독일 간첩’ 황후가 쫓겨난 것에 환호했고, 무능함의 극치로 조롱받았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함에 만족했다.
절대다수가 소작농 출신인 병사들은 소비에트와 토지개혁에 대한 기대로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미하일 2세 만세!"
"선하신 차르, 국민의 황제 만세!"
특히 농촌에서는 아직 ‘차르 신화’가 남아 있었다. 제정이 살아남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제정은 가까스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이 실패로 끝나고 6년간 더 재위하여 대의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확립한 젬스트보(지방의회)의 대표성은 지방의 목소리를 높였다.
둘째, 스톨리핀이 암살되지 않고 농지개혁을 불완전한 형태나마 진행했다. 자작농을 육성하여 체제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계획은 시간 부족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농민층의 상당수에 기대를 주는 데는 성공했다.
셋째, 두마의 권위가 실제보다 강했다. 실제 니콜라이 2세는 두마가 조금이라도 비판의 소리를 내면 정회하고 해산시키는 등 최소한의 존중도 없었지만, 이선의 조언을 받은 니콜라이는 두마에게 일정 부분 양보를 했다.
넷째, 라스푸틴을 비롯한 니콜라이 2세 재위 말년의 추문이 없었다. 과장된 소문과 달리 라스푸틴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건 마지막 1년 정도지만, 라스푸틴에 얽힌 온갖 추태와 유언비어는 민중 사이에서 제정의 권위를 빠르게 추락시켰다.
다섯째, 매우 역설적인 요인으로, 독일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농민 출신 병사들에게 현실적인 위기로 다가왔다. 독일은 우크라이나를 점령해 식량과 원료를 빼앗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고, 토지개혁의 기대에 부푼 병사들의 전의가 유지됐다.
결국, 이 다섯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민 사이에서 제정의 결정적인 추락을 방지했다.
이 요인 대부분이 이선이 추동(推動)한 역사적 변화에서 기인했으니, 이선은 동시대 사람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역사를 크게 바꿔 버린 셈이었다.
"민중의 세상이 도래했다!"
"자유의 나라, 러시아 만세!"
율리우스력 4월에 일어나 ‘4월 혁명’으로 명명된 페트로그라드의 혁명은 단 1주일 만에 전제군주를 몰아냈고, 영국식 입헌군주제 국가로 변모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영국보다 더 자유로운 나라였다.
"혁명은 왕가가 인민의 지지와 결속 없이 존속이 불능하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로마노프 왕가의 일원으로, 그동안 제국의 이름으로 벌어졌던 인민의 비극을 참회하고 싶습니다."
임시정부와 제헌의회에 헌신을 맹세한 미하일 2세에 이어, 추정 왕위계승자인 키릴 대공의 ‘자유주의적’ 행보가 눈을 끌었다. 키릴 대공은 가슴에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리본을 달고, 4월 혁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머리 숙여 사죄했다. 생전 처음 보는 왕족의 행보에, 차르를 증오하던 이들도 손뼉을 쳤다.
미하일 2세와 키릴 대공의 ‘변신’은, 그들 자신이 니콜라이 2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유주의적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한 것도 있지만,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나선 영국·프랑스·한국 외교관들의 조언을 받아서였다.
특히 영국 유학파이자 왕자인 이영이 입헌군주정의 왕족으로서 필요한 자질과 행보를 조언했다. 이영은 미하일 2세의 즉위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이선의 중재로 무사히 귀국한 키릴 대공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동양에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본다(民惟邦本, 食爲民天).’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의 4대 군주이시자 제 선조이신 세종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러시아 황실에서도 이를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유교적 위민(爲民)과 영국식 입헌군주제, 상징적 왕족으로서의 처세를 모두 배운 이영은 미하일과 키릴에게 좋은 멘토가 되었다.
"쯧쯧, 이제 차르가 인민의 노예가 되었구나. 제헌의회에 왕위를 구걸하는 차르라니! 로마노프 왕조가 망했구나!"
니콜라이는 미하일의 계승 조서를 읽고 혀를 찼다. 그의 눈에는 이제 차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 신문 그만 보시고 같이 산책해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걸요!"
"하하, 그러자꾸나. 날씨가 정말 좋구나."
니콜라이는 대공 신분으로 돌아와,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르 궁에서 아내와 다섯 자식과 함께 살았다.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궁전을 벗어날 수 없는 사실상 가택연금 신세였지만, 가정적인 니콜라이는 온전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만족했다.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그리고 알렉세이도 아버지의 귀환을 기뻐했다. 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왕좌에 앉아 있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니콜라이에게는 모처럼 가족들과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적어도 당분간은.
* * *
「러시아 수도에서 민중 봉기 발생!」
「러시아군, 혁명에 가담한 것으로 보임!」
「러시아 황제 퇴위, 임시정부 수립!」
「새 황제 폐하께서는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제헌의회 수립을 천명!」
1917년 5월, 러시아 혁명의 소식이 세계에 타진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군 파병 이후 러시아가 신문지상에서 등장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민중 혁명’과도 같은 단어는 검열 당국에서 꺼리는 표현이었지만, 서재필 내각은 예외적으로 러시아 혁명 소식을 최소한의 검열로 보도를 허락했다.
"동토의 전제국가, 러시아에서도 자유와 민중의 대의가 승리했습니다. 위대한 러시아 인민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러시아는 대한의 변함없는 우방이며, 러시아 인민은 우리 대한국민의 형제입니다!"
한국의 자유주의자와 인민주의자들, 신민당과 진보당은 러시아 혁명에 환호를 보냈다.
여당인 입헌개화당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한국에 우호적인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 건 아쉽지만, 새 황제와 임시정부도 충분히 우호적이었다.
"대한국 정부는 러시아 임시정부를 승인하며, 러시아 국민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연합국 동지들과 함께, 자유의 승리를 위하여 함께 싸울 것을 천명합니다!"
5월 15일, 대한제국은 러시아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임시정부를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였다. 오히려 영국, 프랑스의 공식승인보다 이틀 빨랐다.
"올해 건원절은 대황제 폐하께서 성수 오십 세를 맞이하시니 더욱 특별합니다. 모든 대한국민은 크나큰 기쁨의 감사를 올립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5월 31일, 이선의 50번째 탄일인 건원절을 맞이하여 전국적인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자는 정부의 제안은 이선이 전쟁 중임을 들어 사양했다.
공식적인 기념행사는 관례적인 열병식 외에는 없었지만, 국민적으로 자발적인 축하 행렬이 이어졌다.
"군주를 쫓아내는 러시아와 달리, 대한의 신민은 군주를 부모처럼 섬기고 숭배하노라."
"그야 우리 황제께서는 성군이신데, 당연한 게 아니겠나?"
"암,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는 서양과 달리 대한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성이지."
이선의 나이 50세, 재위 20년. 황제숭배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유교적 충군(忠君)을 기본으로 여기는 조선의 문화에, 근대적 국민교육에 의한 대한애국주의가 더해지고, 개혁과 근대화의 성과가 눈으로 보이니, 군주인 동시에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인 이선 한 사람에게 숭배가 집중되었다.
일본의 천황숭배 못지않은 개인숭배 풍토였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다른 시각이 있었으나, 황제에 대한 존숭은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한국에도 노동계급이 형성되고, 혁명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회주의의 영향이 조금씩 들어오기는 시작했지만,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아, 정말 피곤하다. 언제까지 반복되는 거냐.’
어느덧 나이 50, 지천명을 맞이한 이선은 피로를 느꼈다.
권좌에 오르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선은 점점 냉소적으로 변했고, 황실을 기념하는 온갖 국경일은 기쁜게 아니라 귀찮게 느껴졌다.
국경일의 존재가 황제를 숭상하고, 황실과 국민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는 의식임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애초에 그럴 의도로 제정한 것이지만 매년 반복되는 행사에 지겨움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참석해서 손만 들어 주면 그만인데, 그 기념일에 동원되는 인력과 비용이 얼마냐?’
가만 보면, 의전중독은 황제인 자신보다 정부가 더 심했다. 정부는 정치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초점을 황제에게 돌려 무마시켰다. 사실상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는 정부였지만, 정부는 비판할지언정 황제는 존숭하는 국민적 합의 때문이었다.
‘나도 니콜라이처럼 퇴위하면 속은 편할지도 모르겠군.’
이선은 니콜라이의 퇴위에 생각이 미쳤다. 아쉬움은 느꼈지만,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였다.
‘니콜라이는 안타깝게 됐지만, 어쩌겠나. 자업자득인 것을. 그렇게 많은 조언을 들었음에도, 모든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으니. 진의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황실에서는 대부분 니콜라이의 퇴위를 안타깝게 여겼다.
"아라사 황제는 우리 대한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거늘, 이렇게 퇴위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려. 폭동을 일으켜 군주를 쫓아내다니, 아라사 신민들은 실로 은혜를 모르는 난신적자가 아닌가?"
태상황은 혁명 소식을 듣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태상황의 보수적 세계관에서, 인민이 혁명을 일으켜 군주를 쫓아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자신이 권력을 상실한 것도 임오군란 이후의 일이었으니, 니콜라이에게 동질의식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천명을 거스르면 군주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지요. 성상의 말씀대로 금세기의 천명은 곧 민심 아니겠습니까. 다만 제가 직접 본 니콜라이 황제께서는 점잖고 좋은 분인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의친왕 이강은 진보적이었으므로 혁명을 긍정했지만, 니콜라이 개인의 운명에는 동정을 표했다.
"차르가 타도되다니, 마침내 러시아에도 자유의 날이 왔군요! 정말로 기쁜 날입니다. 폴란드의 해방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마르가리타는 조용히 살았으므로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혁명 소식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직 사회민주주의자이자 폴란드 독립운동가로서, 러시아 혁명은 그토록 열망하던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동의했고, 임시정부에 폴란드 독립을 승인하라고 압박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니 소자도 기쁩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니 이안도 행복했다. 자신이 대한황제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이안은 폴란드인의 정체성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기쁨은 곧 자신의 행복이었다.
"니콜라이 황제께서는 부황의 친우이자, 우리 대한에 가장 우호적인 군주이시거늘. 군주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도, 어찌 신민이 군주를 폭동으로 몰아낸단 말입니까! 4년 전만 해도 그토록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던 신민이 이렇게 돌변하다니. 폐하의 운명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이진의 반응은 분노와 슬픔에 가까웠다. 4년 전 직접 러시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이의 환대를 받았고, 삼촌과 조카처럼 대했으니 인간적인 비애가 컸다.
아무리 서구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이진에게 군주는 곧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차기 군주로서 신민에게 공정하고 시혜적인 선정을 베풀 생각은 충분했지만, 신민이 군주의 안위를 침해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태자, 꼭 그렇게 봐선 안 된다. 물론 니콜라이는 짐의 소중한 친우이자 우방국의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시대의 흐름에 너무 뒤처졌어."
"하오나, 성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물며 그 옛날 맹자께서도, 백성을 귀히 여기고 사직을 다음으로 여기고 군주는 가볍게 본다 하였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러시아가 인민의 뜻을 따른 결과, 군주는 퇴위할지언정 사직은 지킬 수 있었다."
이선은 아들에게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인민을 무시하는 군주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명심하거라. 금세기의 천명은 민심에 부응하는 것이다."
"부황의 가르침을 깊게 명심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부황의 말에 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에게 직접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1년, 이진은 부황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지. 내가 백날 떠드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미하일 2세의 즉위 축하 명목으로 진을 러시아에 파견해야겠다. 훌륭한 선생을 붙여서.’
이선은 이진을 러시아에 사절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혁명의 상황을 직접 눈을 본다면,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천명은 남이 알려 줘서 될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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