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승리 없는 평화
7월 하순, 이진과 특사단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러시아 남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대한제국 유럽파병군단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특사단이 키예프에 도착하자, 홍범도 정장 이하 한국군 사령부가 직접 맞이했다.
"대한국 만세! 황태자 전하 천세!"
"전하, 원로에 얼마나 노고가 크셨습니까. 이곳까지 친히 찾아 주시니 장병 모두에게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대한국군 장병들이 먼 이국에서 싸우고 있는데, 당연히 찾아와 봐야지요."
한국군이 유럽까지 파병한 건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황태자가 전선을 시찰하는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전황은 어떻습니까?"
"겨울 이후 소강상태입니다. 러시아군은 공세를 자제하고 있고, 독일군도 마찬가지입니다."
1916년의 치열한 전투와 달리, 1917년 동부전선은 소강상태였다.
러시아군은 혁명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느라 공세를 8월 이후로 미뤘지만, 독일군이 잠잠한 건 의외였다.
열렬한 ‘동부전선론자’인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 콤비가 총사령부를 지배하는데도, 독일군은 공세를 자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독일은 러시아가 단독 강화에 응하리라고 기대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공세를 자제하는 것이겠지요."
"임시정부나 소비에트 모두 단독강화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는데."
"러시아군의 사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군 사기 저하가 그리 심각합니까?"
"현 전선의 방어라면 모를까, 공세에 응할지 의문입니다. 병사와 장교의 대립이 심하고, 민족별 대립도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해묵은 문제, 장교-병사의 대립은 4월 혁명 이후 절정에 달했다.
장교들의 무능한 지휘와 학대에 질린 병사들은 별도의 군사위원회를 조직해 저항했고, 소비에트가 내세운 ‘혁명적 방어주의’에는 동의했지만 모든 공세 계획에 반대했다. 장교들의 명령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권위는 날이 갈수록 추락했다.
여기에 러시아 출신 장병과 우크라이나 출신 장병 간의 대립도 이어졌다. 공세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러시아 출신과 달리, 우크라이나 출신은 독일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를 탈환하길 원했다.
새로 성립한 우크라이나 의회, ‘라다’는 임시정부에 서부 우크라이나 탈환을 요청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별도의 부대를 창설하여 지휘권을 라다에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임시정부는 탈환 작전에는 동의했지만, 별도 부대 창설은 거부했다. 혹시 우크라이나군이 반기를 들고 임시정부의 통제를 거부할지 우려했다.
"이래서야 하계공세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국군은 최선을 다해 싸우리라 다짐합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러시아군은 자신할 수 없습니다."
홍범도는 냉정하게 평했다.
임시정부는 8월 중순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총공세를 계획했다. 연합국의 요청에 부응한 것도 있지만, 공세 성공으로 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끌어올릴 목적이었다.
임시정부도 독일군이 우세하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목표는 우크라이나 전선의 양익을 담당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었다. 한국군이 상대할 적도 바로 이들이었다.
한국군의 병력은 군단급으로 전체 병력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지만, 동부전선에 파병된 유일한 연합국 병력이었으므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래도 공세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정치적 요인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인도 있습니다. 러시아군이 공세에 나서면, 연합국은 어떻게든 그리스와 루마니아를 연합국에 합류시키려고 합니다. 루마니아가 받을 압력을 줄이려면 서쪽으로 길을 열어야 합니다."
원래 역사라면 이미 루마니아가 참전하여 동부전선의 일익을 맡았겠지만, 역사의 변화는 루마니아가 중립국으로 남도록 했다.
불가리아의 동맹국 합류, 세르비아의 붕괴,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의 우크라이나 진격은 루마니아를 지리적으로 고립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참전은 어불성설이었다.
어차피 실제 루마니아의 참전도 단 몇 달 만에 독일에 참패하여 러시아가 억지로 루마니아 전선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중립 유지가 나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합국은 발칸의 중립국으로 남아 있는 그리스와 루마니아를 참전시키려고 애를 썼고, 이들도 영토 확장을 위해 참전하고 싶어 했다.
즉, 러시아군이 공세에 나서야 지리적으로 고립된 루마니아도 안심하고 참전하고, 루마니아의 참전은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 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 의지를 꺾는다는 논리였다.
"국군은 대원수 폐하의 명을 받은바,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번 공세에 동부전선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이진과 특사단은 사령부의 장교들에게 건승을 기원했다.
그래도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설령 그리스와 루마니아가 참전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뭔가 특별한 반전이 없는 이상, 연합국의 불리한 전황은 계속될 터였다.
1917년 여름, 러시아에서 혁명의 소용돌이가 한창 전개되고 있는 동안, 세계사의 전개도 방향을 틀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중대한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 *
시기를 잠시 앞으로 돌려서.
1916년 11월 재선에 성공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7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종전과 평화를 촉구했다.
「어떤 목적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지독한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다. …… 미합중국은 모든 교전국에 즉각적인 종전과 평화를 촉구하는 바이다. 미합중국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확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이른바 ‘승자 없는 평화’ 제안에, 연합국과 중부동맹국 모두 단호히 거부했다.
동맹국은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윌슨이 실은 영국과 프랑스의 뒷배라고 생각했고, 연합국은 ‘교수 출신 미국 샌님’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다.
윌슨은 공염불이나 다름없는 말로만 위협하지 않았다. 윌슨의 요청을 받은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미국 국민이 저축한 돈을 더는 연합국에 빌려주지 마라’고 은행을 압박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채권은 미국 자본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연합국의 자금 조달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연합국은 종전의 조건을 천명한다. 독일과 그 동맹국은 벨기에와 세르비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즉각 철수하라.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라.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억압받는 민족들이 진정한 자결권을 얻을 때까지, 연합국의 전쟁 노력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연합국의 종전 조건은 독일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독일 역시 유럽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계획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윌슨이 주장하는 ‘자결권’을 전쟁 목적으로 교묘하게 내세워 회피하여, 중부제국의 해체까지 전쟁을 지속하리라고 천명했다.
문제는 전쟁 지속을 위해 필요한 돈이었다. 연합국은 미국에서 매일 1천만 달러 이상의 군수품을 구매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영국의 금 보유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미국 자본이 구매하는 전쟁채권에 의존해야 했다. 연합국은 미국이 아니면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참전하면 연합국이 이기겠지. 하지만 이 끔찍한 학살극에서 미국은 어느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이는 유럽의 끔찍한 폭력의 순환을 영속화하는 것이며, 문명을 해치는 범죄다."
윌슨은 참전을 거부하는 고립주의 여론을 등에 업고, 참전 불가를 공약으로 내걸어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여론을 신경 써야 했고, 동시에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를 원했다.
"승리는 패자에 강요된 평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평화는 굴욕적으로, 견딜 수 없는 희생을 치르며 수용될 것이며, 고통과 분노, 쓰라린 기억을 남길 것이다. 무배상, 무병합, 자결권의 승리 없는 평화. 국제연맹 수립, 군비 축소, 항해의 자유에 기초한 신질서를 확립한다."
‘국제주의자’ 윌슨은 신질서를 유럽 열강에 강요할 생각이었다. 그는 분명 이상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미국의 국익을 중시하는 미국 대통령이었다.
군비 축소와 국제연맹의 확립으로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해 평화를 영속화하고, 전쟁으로 추락한 유럽과 달리 급성장한 미국 자본과 생산력은 ‘유럽의 묘비 위에 패권의 옥좌에 앉은’ 미국의 지위를 보장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선 그 어떤 유럽 열강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는 안 됐다.
"대통령 각하의 구상, 각하의 세계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각하께서는 새로운 세계를 이끄실 겁니다."
윌슨의 제안을 몽상이라고 조소한 다른 연합국과 달리, 주미 한국대사 이승만은 윌슨의 구상에 찬동했다.
이승만 자신이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로, 윌슨에게 정치학 박사 논문 심사도 받았다.
"박사 개인의 의견이오, 귀국 정부가 동의하는 바요?"
"아직까진 제 개인의 의견입니다만, 황제 폐하와 서재필 총리도 각하의 구상을 듣고 크게 감탄하셨습니다."
자유주의와 국제주의를 제창하지만, 보수적인 남부 출신 윌슨은 ‘유색인종’에 거부감을 느꼈다. 특히 일본은 경계대상이었다.
중국 문제, 필리핀 문제, 서부 이민 문제를 놓고 거듭 갈등을 벌이고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미국의 충실한 우방을 자처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 자유주의자 서재필-이승만 조합은 미국에 한국이 ‘동양 유일의 친미 자유주의 정권’이라는 확실한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나마 한국은 말이 좀 통하는 편이지.’
미국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대부분 국가가 자신의 구상에 비난과 조소를 퍼붓는 상황에서, 대사이자 제자인 이승만이 한국을 대표해 찬사를 보내니 내심 만족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사실 유럽에도 윌슨의 제안에 공명한 여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연합국의 좌파 야당, 예컨대 영국 노동당이나 프랑스 사회당은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본래 자신의 구상에 윌슨의 제안을 더 해 미국을 중재자로 하는 강화협상을 추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자치권을 가진 다민족 연방으로 재편하고자 하며,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자결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아와 붕괴 위기에 놓인 합스부르크제국을 구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이는 곧 독일이라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독일은 결코 ‘승자 없는 평화’ 따위를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자적인 강화를 추구한다는 소식이 독일의 귀에 들어가자, 독일 최고사령부는 오스트리아를 윽박질러 강화 시도를 중단하게 했다. 사실상 독일에 의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강화 추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상호불신은 갈수록 심해졌다.
강화 시도가 교착에 빠졌을 때, 세계를 뒤흔드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러시아 4월 혁명의 발생이었다.
새로 수립된 소비에트도 윌슨의 ‘승자 없는 평화’, ‘무배상-무병합-자결권’을 강화 조건으로 내세웠다.
연합국, 특히 전제정인 러시아에 대한 윌슨의 거부감은 혁명으로 상당히 해소될 수 있었다. 윌슨 행정부는 신속히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도 러시아 혁명을 환영했다.
러시아의 적들도 혁명을 환영했으니, 독일 최고사령부는 이를 전세의 결정적인 전환으로 판단했다.
"러시아 혁명은 동부전선에서 우리가 받을 압력을 크게 줄여 줄 것입니다. 이제 서부전선에 총력을 기울여,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지속의지를 소진시켜야 합니다."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하잔 말이오?"
"지상 공세보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됩니다, 폐하."
육군참모총장 힌덴부르크 원수, 참모차장 겸 병참감 루덴도르프 대장, 해군참모총장 홀첸도로프(Henning von Holtzendorff) 제독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재개를 강력히 주장했다.
1915년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이후, 독일은 미국의 압력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취소했다.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포기했다. 해군대신 티르피츠 제독이 반발하여 사임했음에도, 총리 베트만-홀베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1916년 12월에 취임한 참모총장 힌덴부르크, 아니 실질적인 지배자인 루덴도르프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력히 주창했다.
베트만-홀베크와 각료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재개는 지연되었지만, 러시아 혁명은 마침내 정당화의 조건을 갖춰 주었다.
"현재 영국의 식량 상황은 우리 못지않게 심각합니다. ……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면, 영국은 6개월 이내로 강화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영국이 협상에 응하면 프랑스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안 됩니다, 폐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면 미국은 반드시 참전하려고 할 겁니다."
"설령 그 기간 안에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전쟁 준비가 안 된 미국은 결코 대서양을 건널 수 없습니다. 늦어도 6월 1일에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올해 안에 전쟁이 끝납니다."
루덴도르프와 홀첸도르프는 영국의 식량 상황을 구체적인 지표를 들어가며 분석한 후, 미국 참전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를 굴복시킨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외무부는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 대비해, 새로운 동맹국으로 하여금 미국을 견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새로운 동맹국이라면 어디요?"
"멕시코와 일본입니다."
신임 외무대신 아트투르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멕시코와 일본? 내전 중인 멕시코가 미국과 싸울 능력이 되나? 그리고 일본은 연합국과 한패가 아니오?"
"물론 그렇습니다만, 일본의 이해관계는 여타 연합국과 다릅니다. 일본은 연합국이 요구하는 지상군 파병을 거부하고, 중국에 13개조 조약을 강요하여 연합국 사이에서 외교적 고립을 자처했습니다. 일본의 공격적인 태도는 영국과 프랑스를 질리게 했고, 미국의 분노를 샀습니다. 특히 근래 멕시코와 일본, 필리핀과 일본 사이에 모종의 유대관계가 확산된다는 소문이 있어 미국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미일관계의 악화를 이용해야 합니다."
명백히 미국이 자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하는 멕시코,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미국의 피보호국인 필리핀 문제에 일본이 개입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일본은 본래 프로이센을 모범으로 한 친독국가였습니다. 그건 차치하더라도, 동양 패권에 대한 일본의 야망은 연합국에 대한 신의보다 더 강합니다. 막대한 전후 이권을 약속한다면, 그들의 변절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카이저는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양 세력을 혐오하는 ‘황화론’의 제창자였지만, 외교에선 감정보다 이익이 더 중요했다.
"흠, 밑져야 본전이겠지. 추진해 보시오."
"예, 폐하."
독일은 일본과 멕시코를 동맹국으로 끌어들여 미국을 견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짐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 6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도록 결정하는 바이오."
"재고해 주십시오, 폐하!"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폐하!"
"이미 짐은 결정했소. 만반의 준비를 한 후, 5월 31일에 미국에 통보하도록 하시오."
카이저 빌헬름은 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결정했다.
1917년 5월 9일,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 바로 그날.
독일과 전쟁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결정이 내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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