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하계공세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 5월 하순, 영불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다. 작년 솜 전투에서 타격이 컸음에도, 연합군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베르됭 전투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충분한 인력과 저력을 갖고 있었다.
"L'heure venue! Confiance! Courage! Vive la France! (때가 왔다! 자신감과 용기를! 프랑스 만세!)"
프랑스군 총사령관 로베르 니벨의 이름을 따 ‘니벨 공세’라고 명명한 대공세는, 작전 개시 며칠 만에 대참사가 되고야 말았다.
‘지크프리트 선(Siegfried Line)’으로 후퇴하여 전선을 정비한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세에 철저히 대비했고, 연합군은 문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쌓는 지옥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야 말았다.
연합군의 희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1주일 만에 공세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미친 전쟁을 중단하라!"
러시아 혁명의 소식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군 사이에서는 무수한 시체만 낳는 공세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확산되었다. 마치 1917년 초의 러시아처럼, 공세 중단과 평화를 요구하는 병사들의 대규모 항명과 하극상이 잇달아 발생했다.
니벨은 즉각 경질되어 필리프 페탱으로 교체되었고, 총사령관에 취임한 페탱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했다. 프랑스군의 사기진작과 동시에 하극상 처벌을 강화하여 군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기를 유지했다.
서부전선의 공세는 다시 실패로 끝났다. 독일 전쟁기계의 위력은 1917년에도 변함없이 강력했다.
"미국, 독일에 선전포고!"
"아메리카 만세!"
"자유의 벗이여, 영원하라!"
서부전선의 공세가 실패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대서양 제해권이 흔들리고, 동부전선의 전선이 붕괴하고 있던 연합국 최대의 위기 순간.
미국의 참전은 전쟁의 역학관계를 바꿔 버렸다.
미국의 상비군은 10만여 명으로 유럽 열강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였으나, 막대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 육군부는 1918년 여름까지 100만 대군을 유럽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군대가 당장 투입되는 건 아니었지만, 미국의 역할은 그 막대한 생산력이었다. 미국의 공업력은 영국과 독일을 이미 앞지르고 세계 1위였다. 미국 자본은 연합국의 전시 재정을 좌지우지했고, 미국의 군수품 생산은 연합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프랑스와 미국, 두 민주공화국이 힘을 합쳐, 공화국이 전쟁에서 군주국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음을 증명할 때가 왔다."
프랑스 군부에 맞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열렬히 부르짖던 옛 급진주의자, 현재에는 누구보다 강경한 총력전 지지자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미국의 참전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클레망소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진보파에게, 1917년에 러시아 혁명과 미국의 참전이 잇달아 이뤄진 것은 역사의 진보, 신의 섭리나 다름없었다.
국가안보상 필요했지만 찜찜하기 짝이 없었던 차리즘과의 동맹은 프랑스 혁명을 모범으로 하는 민주주의 러시아와의 동맹으로 변했고, 미국의 참전까지 더해지자 민주주의 대 군국주의라는 새로운 구도로 전쟁을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보급이다!"
"엉클 샘 만세!"
전선의 병사와 후방의 시민들에게, 이념적인 문제보다 중요한 건 실질적인 지원이었다. 독일의 기대와 달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미국의 참전만 앞당겼을 뿐, 해상수송을 막지 못했다.
당장 미국의 밀과 원료, 탄약과 포탄을 가득 실은 배들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는 장기전으로 인한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지쳐 있는 병사와 시민들에게 ‘엉클 샘’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자유의 수호를 위해 분투하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미국의 지원이 서부전선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미국 재무부는 즉각 러시아 임시정부에 1억 달러의 차관을 조건 없이 제공했다.
미국의 군수품이 태평양 건너 러시아로도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군수품이 높이 쌓였다.
문제는 러시아 철도망이 붕괴되고 있어,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부는 한국과 만주를 통해 운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신해 부산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부산에 도착한 미국의 물자가 부산항에 집적했다. 바로 화물차로 옮겨져 경부선, 경의선, 만주철도로 러시아 국경까지 운송되었다.
"대한제국과 미합중국은 연합국의 최종 승리를 위하여 함께 분투하며, 독일에 맞서 러시아의 전쟁수행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이 미국 전시물자의 운송을 도맡으면서, 한미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한국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필요한 사항을 중재했고, 미국은 동부전선을 유지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러시아 철도망의 붕괴를 막기 위해 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럼 우리가 해결하지요."
윌슨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을 회복할 지원도 승인했다. 미국 철도위원회는 기관차와 화차 4만 량을 러시아로 보내고, 수리를 담당할 철도기술자들도 파견하기로 했다.
‘역시 미국의 자금력과 생산력이란…….’
이선은 미국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정확히 예측했으면서도, 신속히 현실로 구현되자 감탄을 거듭했다.
불과 얼마 전까진 상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막대한 지원이 러시아로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역사의 놀라운 변화였다.
* * *
"미국의 참전이 적시에 이루어졌소."
"공세를 앞둔 우리에게 큰 힘이 될 거요."
미국의 참전과 즉각적인 지원 표명은, 러시아군의 전투능력을 재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던 군부와 임시정부, 소비에트의 ‘혁명적 방어주의자’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육군참모총장으로 하계공세 계획을 지휘는 브루실로프 대장, 임시정부 육해군장관으로 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하는 케렌스키, 체신부 장관이자 소비에트의 혁명적 방어주의를 대표하는 체레텔리는 반드시 하계공세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남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가해, 서우크라이나의 점령지를 수복한다."
이들은 독일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현실 인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일시적으로라도 적에게 맹렬한 타격을 가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해 러시아의 군사적 능력을 만천하에 과시하길 바랐다.
대내적으로는 전투의 승리로 불만의 파고(波高)를 잠재우고, 대외적으로는 연합국에 조속한 강화가 이뤄지도록 압력을 가하는 게 목표였다.
"친애하는 러시아 여성 동지들이여! 어머니 러시아를 지키는 성스러운 임무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다. 모두 무기를 들고 모국을 수호하자!"
임시정부는 러시아 국민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어머니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남녀가 함께 싸운다는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여군이 창설되었다.
마리야 보치카레바(Maria L. Bochkareva)는 군대 지원이 거절당한 후, 니콜라이 2세에게 특별히 청원하여 전투병이 된 케이스였다. 혁명 이후 보카레바는 임시정부에 여군 창설을 청원했고, 청원은 받아들여져 여성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어머니 러시아를 지키자!"
귀족과 중산층 여성 사이에서 광적인 애국주의 열풍이 불면서, 삽시간에 2천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보치카레바와 교관들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300명만 선발해 여성대대를 구성했다.
제1러시아여성대대의 창설식은 성 이삭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여성대대원들은 미하일 2세와 대주교의 축성을 받으며 사열을 했다. 이들은 제1시베리아 군단 소속으로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허, 여자가 전쟁에 나간다니. 정말 놀라운 노릇이군."
"남녀는 엄연히 유별한데, 군역과 전쟁은 남자의 몫이지요. 연약한 여자가 어찌……."
창설식에 초청된 대한제국 특사단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사단은 진보적인 인사로 구성되었으나,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성장한 이들이었다. 이들로선 여자가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다는 걸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가부장적이라면 동양권 뺨치는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여군 창설이 이들에게 주는 충격은 상당했다.
전쟁으로 남성을 대신해 여성이 후방의 공장과 농장에서 광범위한 생산 업무를 떠맡게 된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여군 창설은 논의된 바가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저들의 애국심이 대단하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들 말처럼 조국을 지키는 데 남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권리에게는 의무가 뒤따른다고 하지요. 러시아는 제헌의회 선거에서 여성에게도 보통선거권을 부여한다고 합니다. 저들은 러시아 여성시민의 능동성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겠지요."
특사단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교육을 받은 김규식과 여운형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의무 뒤에 권리 있다’를 주장하며,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이상 보통선거권도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사례인 건 틀림없군요. 실전에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징성은 충분하겠어요."
황태자 이진은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념의 차이라기보단 세대 차이였다. 예컨대 이상설이나 전봉준은 대신을 지낸 이들 중에선 가장 진보적이었지만, 남녀유별과 가부장제를 당연히 여겼던 구세대였다.
이진은 부친인 이선으로부터 진보적인 사회관을 교육받았고, 그 자신도 의식적으로 진보적이려고 노력했다.
즉, 정치관은 진보적이나 사회관은 보수적인 이상설과 달리, 이진은 정치관은 보수적이나 사회관은 진보적이었다.
‘뭐, 이건 러시아의 일이니까. 대한에서는 먼 훗날에 여군 창설을 고려해 볼 수 있겠지.’
물론 이진은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국에 적용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장차 남성 보통선거권은 인정할 수 있어도, 평의회(소비에트)나 사회주의자들이 질서를 파괴하는 건 막아야 했다. 백번 양보해서 체제 친화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용납할 수 있었지만,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나 급진 좌익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저 시끄러운 혁명가들이 떠드는 걸 잠재우고, 우리 대한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하계공세는 성공해야 해.’
하계공세의 시작은 8월 14일(율리우스력 8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대한제국군 파병군은 남서부전선에서 공세의 일익을 맡을 예정이었다.
"친애하는 장병 동지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군대가 전투에도 가장 효율적인 군대라는 걸 보여 줍시다. 혁명의 러시아는 놀라운 애국심과 열정을 지니고 공세로 나아갈 겁니다. 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러시아 만세!"
"와아아아아!"
"러시아 만세! 혁명 만세!"
임시정부 육해군장관 케렌스키는 전선을 시찰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탁월한 연설가, 연극적이고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케렌스키의 연설에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의도적으로 프랑스 혁명가들과 나폴레옹의 흉내를 냈다. 그는 마치 나폴레옹처럼 상의 안쪽에 손을 넣고 포즈를 취하며, 로베스피에르처럼 혁명의 승리를 연설했다. 1917년 러시아는 1790년대 프랑스와 유사하며, 프랑스가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듯이 러시아의 혁명전쟁도 승리해야 했다.
"그래, 전선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병사들의 열의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토지와 평화를 향한 병사들의 열의가 전투에 대한 열의보다 강합니다."
임시정부는 전선에 정부위원을 파견해 전황을 파악하고 군부를 통제했다. 남서부전선의 정부위원은 사회혁명당의 보리스 사빈코프였다. 과거에 사회혁명당 전투단을 이끌며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대공과 내무대신 플레베 등 차르의 고관들을 암살한, 가장 악명 높은 암살자였다.
"임시정부가 선제적으로 토지개혁을 약속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 스톨리핀조차도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국가와 군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손을 써야 합니다. 전선에서 반전을 부추기는 선동가들은 가차 없이 총살시켜야 하고요."
놀랍게도 사빈코프와 스톨리핀의 의견이 일치했다. 사빈코프가 스톨리핀을 암살하려 했고, 스톨리핀이 사빈코프를 체포하여 처형하려고 했던 악연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즉각적인 토지개혁은 임시정부가 반대하고, 사형제 부활은 소비에트가 반대합니다."
"장관 동지께서는 양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아닙니까. 설득해 주십시오."
"동지, 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 입장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임시정부를 흔들려고 좌익과 우익 양쪽에서 모두 짖어 대고 있어요. 급진 좌익들은 혁명의 수레바퀴를 빨리 돌리자고 난리고, 군주제 지지자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고 난리란 말입니다. 섣불리 정책을 집행했다가 분란만 커질 수 있어요."
혁명의 스타가 된 케렌스키의 대중적 인기는 굉장했으나, ‘입만 산 삼류변호사, 사이비 나폴레옹’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급진 좌익과 강경 우익 모두 그를 싫어했다.
임시정부를 향한 급진 좌익과 강경 우익의 정치적 공세도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혁명을 겪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수백 년간 차르의 나라였지요. 러시아에 민주주의는 이릅니다. 민중은 민주주의가 뭔지 이해도 못 합니다. 혼란을 막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과거 급진파에 속했던 사빈코프는 혁명적 방어주의를 적극 지지했고, 군의 전쟁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우경화됐다.
"어허, 그 무슨 위험한 말이오. 혁명을 부정하는 겁니까?"
"혁명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한 겁니다. 러시아에는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국가를 단호하게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로베스피에르나 나폴레옹처럼 말입니다."
사빈코프는 대놓고 지도자가 누가 되어야 한다고는 안 했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의 흉내를 내는 케렌스키를 암시하고 있었다.
"쉿,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중요한 건 공세의 성공입니다. 공세만 성공한다면, 정치적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케렌스키는 사빈코프의 입을 막았지만, 비난하진 않았다. 그도 상당히 공감한다는 의미였다.
임시정부와 군부 모두 하계공세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정치적 명운과 군사적 명운이 모두 걸려 있었다.
"공세가 개시되는 8월 14일은 대한국 개국기원절이다. 태조 고황제 폐하의 빛나는 무공을 이 전선에서 재현하자!"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파병군 사령관 홍범도는 공세를 앞두고 장병들에게 격려사를 했다. 공세가 시작되는 날은 마침 공교롭게도 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국기원절이었다.
장병들 사이에서는 비장한 각오가 흘렀다.
지금까지 소규모 교전만 치렀던 한국군에, 하계공세는 마침내 대전쟁의 대전역을 경험하게 할 터였다.
"전군, 포격 개시!"
8월 14일 새벽, 천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하계공세가 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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