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562화 (561/812)

243화 떨어진 별이 머무는 곳

제2차 한청협약 또는 한청보호조약, 혹은 정사(丁巳)조약.

정사조약 체결은 청국이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대한제국은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이용할 수 있었다. 외교와 재정 고문을 파견해 청국의 외무와 재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대청국 외무고문에 대한국 특명전권대사 이완용을 초빙하고, 재무고문에 미합중국 특명전권대사 찰스 크레인을 초빙한다."

외무고문은 예상대로 이완용이었고, 재무고문으로 초빙된 찰스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은 부유한 사업가 출신으로 윌슨 대통령의 측근이었다. 1912년 윌슨의 대선 승리에 공헌하여 외교가에 입문하게 되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와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했다.

크레인은 특히 동아시아와 러시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의 러시아 특별외교위원회 소속으로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을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대사. 짐은 대사가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입장에서, 동양 평화와 청국의 진보를 위해 힘써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예, 폐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레인을 재무고문으로 기용한 건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윌슨의 측근이자 친한파 외교관이지만, 지나치게 한국에 기울어지지 않고 신중하고 균형적인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선의 예상대로 미국은 크레인의 기용을 반겼고, 주변국에서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혼자 만주를 장악한다는 악명을 얻기보다는, 청국의 명목상 주권을 존중하면서 이권을 미국과 나눠 먹는 길을 택해야지.’

한국은 만주의 이권을 미국, 러시아, 일본 등과 공유할 생각이 있었다. 물론 핵심적인 통제권은 한국이 장악하는 걸 전제로 했다.

"본관은 대청국 외무고문으로서, 청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완용은 외무고문으로서 청국 외무대신 양돈언을 보좌하는 역할이었지만, 청국의 실질적인 외교 책임자가 되었다.

"대한과 대청은 300년 근린이요, 한민족과 만주족은 수천 년 형제민족이니, 마땅히 같은 길을 걸어야지요."

1627년 정묘년에 후금과 조선은 ‘형제지국’이 되었다. 말이 좋아 형제국이지, 후금이 일방적으로 우위에 있는 관계였다. 결국 10년 뒤에 대청국을 선포한 후 조선에 칭신을 요구했고, 조선이 거부하자 무력으로 침공하여 굴복시켰다.

3세기 만에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제 청국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간섭을 받는 관계가 되었다.

"이래서야 대청이 한국의 속국이 된 게 아닌가?"

"속국이라니, 그 무슨 말씀을.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거지요."

‘중국의 위협’은 군벌로 쪼개진 중국의 현실을 볼 때 당장 현실성이 없었지만, 청 황실에는 현실적인 위협처럼 느껴졌다.

작년 복벽전쟁 패전 이후 북양군벌은 청조의 관할로 약조했던 자금성과 역대 황릉의 소유권을 빼앗았다. 단기서와 풍국장은 청 황실의 보물을 몰수해 군비로 전용하기까지 했다. 청 황실은 격노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중화민국에 대한 분노와 공포는 청 황실이 자연스럽게 한국과 밀착하는 길이 되었다.

"차라리 잘됐군. 한국이 만주의 상전이 된 이상, 청조가 우리 위에 군림하려고 들지 않을 테니 말이야."

대청국을 구성하는 지역들 - 즉 몽골, 티베트, 신강 등은 오히려 환영했다. 독립 열기가 강한 몽골과 티베트는 사실상의 독립을 쟁취해 자치정부를 운영했고, 만주 조정을 고깝게 여겼다.

"한국은 몽골, 티베트, 신강의 자치를 지지합니다. 단, 즉각적인 독립은 시기상조입니다. 대청국이 분열하면 가장 큰 이익을 누릴 건 중국입니다."

한국은 ‘민족자결’을 내세워 몽골, 티베트, 신장 등의 자치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임과 동시에, 중국이라는 공동의 위협에 맞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의 ‘재정복’은 이들에게도 두려운 일이었으므로, 일단 실질적인 자치 선에서 받아들였다.

"러시아의 약화로 세력균형이 깨지고 있어.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네."

몽골은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규정되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받았지만, 러시아가 혁명으로 동아시아에 신경 쓸 여력이 떨어지자 한국에 밀착했다.

신강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순무 양증신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지만, 역시 러시아의 힘이 약화되자 새로운 길을 찾았다.

티베트는 영국의 세력권으로 규정되어 다른 지역과는 상황이 달랐으나, 지도자인 달라이라마 13세가 한국에 긍정적이고 우호적이었다.

1910년대, ‘중국’과 ‘청국’은 완전히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걷고 있었다.

* * *

한국 주도로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동안, 그동안 유라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을 주도하던 러시아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국경을 접한 북만주와 몽골은 열강으로부터 공인받은 세력권이요, 동투르키스탄(신강)에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였다.

하지만 1917년 현재의 러시아에는 동아시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제 코가 석 자요, 코앞에 불이 나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초겨울의 바이칼 호수가 이런 풍경이었던가."

한때, 유라시아의 지배자를 꿈꾸던 차르 니콜라이 2세. 이제 시민 니콜라이 로마노프가 된 그는 바다처럼 넓은 바이칼 호수를 보며 감탄을 흘렸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를 다스렸지만, 니콜라이가 실제로 방문한 지역은 손에 꼽았다. 그나마 니콜라이는 세계 일주를 체험한 최초의 러시아 군주로, 1891년 극동과 시베리아 일대를 방문한 바 있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되면 호수가 얼어붙습니다. 호수를 우회하는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얼어붙은 호수 위로 기차가 다녔지요."

"그래, 기억하오. 1905년 일본과의 전쟁 당시에 이 문제로 고민이 많았지."

니콜라이는 거듭 추억에 잠겼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옛 추억과 가족들뿐이었다.

‘제국을 다스렸던 내게 주어진 건, 이제 이 작은 저택뿐이란 말인가.’

10월 중순,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차르스코예 셀로를 떠나 바이칼 호수에 인접한 도시 이르쿠츠크로 이송되었다.

"허, 우리더러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란 말이오?"

"유배가 아닙니다. 보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는 거지요. 페트로그라드는 위험합니다. 급진좌익들이 폐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럼 차라리 크림의 얄타로 보내 주시오."

"아시다시피 크림으로 가려면 우크라이나를 경유해야 하는데, 거긴 지금 전선입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들의 책동도 만만치 않습니다."

"후, 난 퇴위한 몸이니 따르라면 따르는 수밖에. 하지만 선황께서 정치범들을 유배 보냈던 이르쿠츠크라니."

니콜라이는 이르쿠츠크행이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은 기분이었으나, 임시정부 총리 케렌스키는 전 황제를 다독였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반의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예전하고는 달리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서 교통도 편리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머나먼 곳인 건 틀림없지."

페트로그라드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6,000km는 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돌아올 수도 있었다.

"반대로 만주나 몽골과는 가깝지요. 이르쿠츠크에는 한국군도 주둔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이는 케렌스키가 암시하는 말을 이해했다. 이르쿠츠크로 거처를 옮기면 망명이 수월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알겠소. 그럼 거처를 옮기도록 하리다."

니콜라이 2세 일가는 차르스코예 셀로를 떠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안전을 위해서 특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대한제국 특사단의 특별열차에 동행했다. 이진은 열차에 올라선 니콜라이와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폐하를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고맙소, 황태자. 황태자의 배려였구려."

한국 특사단은 2차 파병을 통보하면서, 본국의 승인을 받은 이진은 러시아 정부에 정식으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망명을 요청했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가 반대하니 외국 망명은 허용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으나, 미하일 2세가 한국의 입장을 고려해 타협책을 제시했다.

만주와 몽골에서 멀지 않은 이르쿠츠크로 거주지를 옮긴다. 이르쿠츠크에서 몽골 국경의 캬흐타까지는 지척이었다.

‘임시정부가 망명은 허용해 줄 수 없으나, 유사시 혼란을 틈타 탈출할 수는 있다.’

제정 시절에도 시베리아에 유배된 정치범이 거주지를 벗어나 탈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늘날 러시아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인사들치고 시베리아 유배경험이 없는 이들이 드물고, 탈출 경험 있는 이들도 허다했다.

"폐하. 비록 지금은 이곳에 모시게 되었지만,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즉시 대한제국으로 모시겠습니다. 부황께서도 폐하와 가족들께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내 친우 이선, 그 아들인 그대의 배려가 정말 고맙구려."

그리하여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이르쿠츠크 생활이 시작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차르 일가의 거주지로 배정받은 저택은 옛 데카브리스트의 저택이었다.

1825년 전제정과 농노제에 반대하여 봉기한 데카브리스트(12월당)는 니콜라이 1세에 의해 철저히 진압되었고, 주모자들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특히 이르쿠츠크에는 데카브리스트가 대거 유배되어 중심지가 되었는데, 비록 정치범의 신세가 되었지만 고귀한 이상을 지닌 이들은 벽지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문화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허,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곳인가."

차르 일가의 거주지로 배정된 저택은, 데카브리스트 주모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볼콘스키(Sergey Volkonsky) 공작의 저택이었다.

시베리아 광산 노역형을 선고받은 볼콘스키는 형을 다 산 후에도 귀향을 허락받지 못했고, 이르쿠츠크에 정착했다.

여러 데카브리스트 중에도 특히 볼콘스키가 유명한 이유는, 그의 아내 마리야 볼콘스카야 공작부인의 헌신적인 사랑 덕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반역자인 남편과 이혼하면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유지하게 해 주겠다고 했지만, 마리야는 거부하고 유배를 떠난 남편의 옥바라지를 선택했다. 광산 갱도에서 노역 중인 남편과 상봉한 마리야는 무릎을 꿇고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입을 맞췄다고 한다.

「시베리아 깊은 광맥 속에 그대들의 드높은 자존심의 인내를 보존하소서.

그대들의 비통한 노력과 높은 정신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으리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기다리던 그 날은 오리니.」

저택에 새겨진 시 구절을 셋째 마리야가 읊자, 니콜라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게 누구 시인 줄 아느냐?"

"푸시킨이잖아요, 아버지."

"그래, 푸시킨이지. 이자들은 너희 고조부인 니콜라이 1세께 반기를 든 역적들이다. 푸시킨은 너희 고조부께 반감을 품고 저런 시를 쓴 거고."

"뭐 어때요? 볼콘스카야 공작부인의 사랑은 위대하잖아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까지 오다니, 얼마나 낭만적이에요."

마리야의 말에 니콜라이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데카브리스트는 역적이라고 교육을 받았는데, 딸은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생각했다.

푸시킨뿐만 아니라 볼콘스키 공작의 먼 친척이었던 톨스토이도 그들에 대한 글을 썼고,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 역사의 전설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

4월 혁명의 성공 이후 혁명가 숭배 풍토가 형성됨에 따라,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 혁명의 기원으로 숭배되었다.

‘하필 우리 일가를 이 저택에 수용하다니. 나를 모욕하려는 건가?’

표면적인 이유야 볼콘스키 저택이 현재는 국유화된 상태고, 차르 일가를 수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상징성 때문에 니콜라이는 임시정부가 일부러 이곳으로 정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었다.

"살인자 차르를 심판하라!"

"피의 일요일을 잊지 말라!"

"차르를 재판정으로!"

이르쿠츠크에서도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노동당 지역당원들이 차르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르쿠츠크는 비교적 좌익의 영향력이 강하지 못한 곳이라 시위도 산발적이었지만, 이들은 차르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르쿠츠크에는 철도 경비를 위해 한국군 중대가 주둔 중이었고,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경비병과 교대로 저택 경비도 맡도록 했다.

니콜라이 일가는 안전을 위해서라도 저택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오늘처럼 밖으로 나올 때에는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였다.

"왜 사람들은 우리를 이렇게 미워하는 걸까요?"

"그건 저들이 어버이 차르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역적들이라서 그렇단다. 좌익분자들의 선동에 넘어간 무식한 종자들이지."

넷째 아나스타샤의 질문에 알렉산드라는 악감정을 담아 답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큰딸 올가가 다른 시각을 드러냈다.

"우리 책임도 있어. 대부분 국민이 가난하고 힘들게 살잖아. 그런데 우리는 전혀 몰랐지. 저들이 어버이 차르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 거야."

"얘, 올랴! 넌 어찌 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을……."

니콜라이는 큰딸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신민의 ‘배신’에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도 책임이 무겁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오는 머나먼 여정 동안, 니콜라이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러시아와 대면하게 되었다.

철도 사정으로 인해 기차는 중간에 자주 정차했다. 그럴 때마다 내려서 잠깐 쉬는 동안, 니콜라이는 처음으로 꾸며 내지 않은 러시아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나같이 빈곤과 굶주림에 찌들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급격히 몰락했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깊고도 어두웠다.

궁전 안의 작은 세계에서만 살아가고, 기껏 밖으로 나와도 정부에 의해 미리 준비되어 꾸며진 환경만을 체험했다. 선별된 농민과 노동자의 대표자들은 차르의 은혜 덕에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를 칭송했고, 니콜라이는 그걸 진심으로 믿었다.

모두 허상이었다. 그가 아는 러시아는 실재하지 않는 러시아, 허상의 러시아였다.

‘퇴위한 다음에야 깨닫게 되다니.’

니콜라이는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볼콘스키 저택의 서재를 가만히 서성이던 니콜라이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자유주의 성향의 서적들을 읽었다. 자신이 금서로 지정했던 책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1825년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유럽을 본받아 일찌감치 위로부터의 개혁을 했더라면…….’

그랬으면 혁명을 피했을지도 몰랐다.

니콜라이는 생전 한 번도 안 해 봤던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의 일을 논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돌이켜 보면 1905년부터 실수의 연속이었다. 비테와 스톨리핀의 조언을 진작 들었더라면, 이선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터인데.’

니콜라이는 거듭 헛웃음을 흘렸다. 권력이 있을 땐 깨닫지 못했고, 깨달았을 때는 권력이 없었다.

1917년, 제정 러시아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 무렵 페트로그라드에서, 제정의 운명을 결정지을 사건이 전개되었다.

- 24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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