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카이저 전투
광무 22년(1918) 3월 3일, 대한제국 황성.
주러시아대사 조한민이 보낸 전문이 도착했다.
「러시아 정부, 평화 여론의 압력에 동맹국과 단독강화 가능성을 타진해 봤으나 조건의 차이로 인해 결렬될 것으로 보임. 독일은 러시아에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는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음. 주화파들조차 난색을 표하고, 혁명전쟁론이 득세함. 러시아는 연합국의 확실한 지원보증만 있다면 전쟁을 이어 갈 용의가 있음. 주화파를 대표하는 사민당 국제주의 파벌조차도 전쟁으로 기울어짐.」
전문을 읽던 이선은 새삼 역사의 역설을 체감했다. 실제 역사에서 1918년 3월 3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된 날이었다.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에 굴복했고, 막대한 영토가 독일의 영역으로 넘겨졌다.
변화한 역사에서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대신해 ‘러시아 민주주의 연방공화국’이 혁명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추신. 국제주의 파벌의 수장인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는 취리히의 맹약을 지키겠다고 동의함.」
전문의 마지막을 읽던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 레닌. 그야말로 내가 바꾼 역사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
이선의 역사 개입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막으면서 시작됐다. 장기적으로 러시아 혁명을 막기 위해서라기보단, 망명자인 이선이 힘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였다.
역사는 변화했다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결국 6년 후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그 주모자가 바로 블라디미르의 형인 알렉산드르였고, 울리야노프 일가는 러시아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망명을 떠났다.
오스트리아에서 교육을 받아 독일에서 활동한 블라디미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가 됐고, 사회민주당을 대표하는 이론가가 되었다.
1887년 망명부터 1917년 혁명까지 30년 동안, 울리야노프가 러시아에 체류한 기간은 1906년 혁명의 혼란스러운 기간밖에 없었다. 그는 러시아인이지만 사실상 정신적으로는 유럽인이었다. 울리야노프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는 탁월할지 몰라도, 러시아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았다. 당을 대표하는 이론가일지언정 혁명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러니 볼셰비키가 등장할 수도 없었고, 볼셰비키의 지도자인 레닌도 될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말은 옳았군. 역사의 진보는 필연이고, 역사는 인민의 편이다. 인민에 맞서는 권력자는 결국 쓰러지게 되어 있다.’
결국 러시아혁명은 피하지 못했다. 역사의 변수가 여러 가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임오군란을 막은 이후 36년이 지났다. 조선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지.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까지 바꾸기까진 역부족인가.’
이선의 역사개변으로 알렉산드르 2세의 대의제 실험도 이뤄졌고, 러일전쟁의 충격적인 패배도 막았고, 니콜라이 2세의 통치도 실제보다는 온건했고, 스톨리핀의 농지개혁도 상당부분 진행됐으며, 알렉세이의 혈우병이 완화되어 라스푸틴이 등장하지 않아 로마노프 왕조의 권위도 크게 추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혁명은 일어났다.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사회주의자들이 집권했다.
이선은 전율을 느꼈다. 수백 년 동안 누적된 사회경제적 문제는, 통치자의 성향이 바뀌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철저하고 확고한 개혁만이 혁명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제 민주주의는 세계적 대세가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나면 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은 거의 남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부가 더 문제지. 팽창주의 욕구가 군국주의와 파시즘으로 변화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더 건강을 유지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애에 할 수 있는 개혁과 변화는 모두 이루고 간다.’
이선의 나이 어느덧 51세. 이 시대에는 노년기에 접어든 연령대였다.
나이를 들어도, 이선의 우려는 줄어들지 않았다. 과거에 걱정했던 국가의 생존은 이제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장차 한국 내부에서 군국주의, 혹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파시즘’의 대두를 우려했다.
파시즘은 공포와 증오를 토대로 삼으며, 가공할 만한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중국과 일본은 이제 한국에 있어 절대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세계혁명의 위협과 공포야말로 파시즘의 자양분이지.’
그래서 이선은 국경을 접한 러시아가 적화(赤化)되는 걸 용인할 수 없었다. 이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치명적인 문제였다. 작금의 대한제국에서 공산주의가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반공(反共)을 명분으로 삼아 군부와 파시즘이 득세할 가능성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다만 사회민주주의 러시아라면 충분히 우방이 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할 경우,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신정부를 승인한다.
러시아 신정부는 인민주권과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삼아, 억압받는 계급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존중한다.
러시아 신정부는 아시아를 향한 제국주의적 정책을 철회하고, 아시아인들의 주권을 존중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세계혁명의 대상은 유럽이지, 아시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위와 같은 조건으로 한국은 러시아 신정부를 승인하고 지지한다.」
조한민과 울리야노프가 맺은 ‘취리히의 맹약’을 요약하면 이와 같았다.
이선이 여러 혁명가 중에서도 울리야노프와 접촉한 이유는, 그가 사회민주당 내에서 국제주의 파벌을 대표하기도 하거니와, ‘민족문제’의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족문제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족을 부차적인 문제로 생각했고, 계급투쟁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주류는 계급문제에만 신경 썼지, 식민지와 소수민족 문제를 애써 외면했다.
울리야노프는 이 점에서 달랐다.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교육을 받으며 다민족국가에서는 계급문제 못지않게 민족문제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오스트리아보다 더 다양한 다민족국가, 러시아의 혁명은 계급문제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의 자결권 문제가 핵심으로 떠오르리라고 파악했다.
「러시아로부터 분리하기를 원하는 폴란드와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국 내에 자결을 원하는 모든 민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자. 새로운 러시아는 자유로운 민족의 연합으로 굳건해질 것이다.」
울리야노프의 급진적인 방안은 대러시아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소수민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선과 대한제국 입장에서도 바람직했다.
약속이 지켜진다면, 새로운 러시아는 아시아에 제국주의적 정책을 포기할 것이다. 북만주는 물론이요, 몽골과 신강에서도 손을 떼게 될 것이다.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세계혁명’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건재한 유럽에서나 추구할 일이지, 아시아에서는 추구하지 않는다.
이선은 러시아에서 스웨덴으로 옮겨 놓은 개인자산 일부를 국제주의 파벌의 정치자금으로 댔다. 이는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울리야노프는 목적을 위해 한국 황제와 손을 잡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이념 지향성은 달라도 일단은 한배를 타는 데 동의했다.
‘한국은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민주주의 러시아를 연결하는 고리가 될 것이고, 두 대국이 부르짖는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가면을 쓰고 아시아 대륙을 주무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러시아를 동부전선에 묶어 두어야 했다.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는 순간 연합국의 공적(公敵)이 될 것이고, 고립된 러시아는 좌파든 우파든 더욱 급진화될 수 있었다.
필요하다면 러시아가 독일을 상대로 혁명전쟁을 일으키게 해야 했다. 자금과 물자 지원은 ‘민주주의의 병기창’ 미국이 아끼지 않으리라.
혁명의 불이 독일과 중부유럽에 옮겨붙어도 상관없었다. 아시아로만 향하지 않는다면.
* * *
1918년 2월과 3월, 러시아와 중부동맹국은 단독강화를 논의했다. 러시아는 평화를 외치는 국내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은 강화논의를 비밀로 하고 싶어 했지만,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은 공개외교로 전환했으므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무배상, 무병합, 자결권. 승리 없는 평화의 대원칙이 지켜져야만 한다. 또한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리지 않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겠다.」
러시아는 무배상-무병합-자결권의 3대 원칙, 윌슨도 동의하는 ‘승리 없는 평화’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연합국을 달래기 위한 방책으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서부전선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조건도 걸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에 동의한다. 러시아는 즉각 동원을 해제하고, 폴란드·핀란드·리투아니아·쿠를란트-리보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라. 독일군을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국내 문제이지, 조약으로 논의할 사항이 아니다.」
독일의 요구는 민족자결의 가면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러시아로 하여금 영토를 할양하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민족자결의 대의를 존중한다. 하지만 독일 제국주의자들을 어찌 믿고 내준단 말인가? 독일의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이미 러시아는 폴란드와 핀란드의 독립을 승인했고, 연방공화국으로 개편하여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현재 독일의 조종을 폴란드가 진정한 독립국이라 할 수 있는가? 독일군이 해당 지역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자유로운 독립투표가 이뤄진다는 조건으로 독립 혹은 자치를 인정하겠다.」
「이들 국가들은 독일의 보호 없이 존속할 수 없으므로, 최소한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는 독일군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로부터 해방되어 기쁘게 생각하며, 쿠를란트에서는 카이저께 즉위를 요청하는 청원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독립을 청원하는 사절을 보냈다. 러시아가 진정으로 자결을 존중한다면, 이들의 독립 여망을 무시하지 말라.」
"놀고 있네. 일부 친독파들, 독일계 지주들을 제외하면 누가 카이저의 지배를 원한단 말인가?"
독일의 기만적 요구에 러시아는 좌우를 막론하고 반발했다. 우익은 대러시아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반발했고, 좌익은 독일이 민족자결의 대의를 더럽히는 게 뻔히 보였기에 반발했다.
말이 좋아 독립이지, 폴란드인 대부분은 독일의 괴뢰왕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독일이 독립을 내세워 우크라이나를 차지하여 밀과 원료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것은 뻔했다.
그럼에도,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 정부는 마지막으로 강화를 호소하기로 했다.
"독일이 정말로 강화에 응한다면 좋은 일이고, 실패해도 인민들에 정부는 할 만큼 했고, 독일의 야욕 때문에 강화가 실패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오."
「러시아는 중부동맹국의 인민들과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 독일이 패권적 야욕만 저버린다면, 우리는 동원을 해제하고 전쟁을 중단할 것이다. 러시아와 독일 모두 폴란드·핀란드·리투아니아·쿠를란트-리보니아·에스토니아·우크라이나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공동으로 독립을 보장한다. 차후에 제3국의 참관하에 독립 국민투표를 진행한다.」
"장난하나? 군대를 모두 철수시키고 제3국의 참관으로 독립 투표? 어느 세월에?"
"도대체 빨갱이들과 무슨 협상을 한단 말입니까? 저자들은 그저 군을 재건할 목적으로 시간만 질질 끌고 있을 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공세에 나서서 굴복시켜야 합니다!"
독일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참모총장 힌덴부르크와 참모차장 루덴도르프는 러시아와 강화회담에 나서는 것 자체를 반기지 않았다.
군사력을 기준으로 모든 문제를 판단하는 독일 군부로서는, 이미 제대로 된 군대라고는 보유하지 않는 러시아가 독일과 대등한 위치에서 강화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부 영토를 점령하여, 강제로라도 식량과 원료를 끌어와 전쟁의 동력으로 삼고자하는 이들에게 협상은 무의미했다.
"공동 독립 보장이니, 국민투표니 하는 건 형식상 필요한 절차일 뿐. 결국 저들이 독립하면 독일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러시아가 싸울 의지가 없다고 판단된 이상, 러시아의 체면을 세워 주는 선에서 동부전선의 전쟁을 끝내고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독일 외무대신 리하르트 폰 퀼만(Richard von Kuhlmann)은 조건이 어쨌건 강화조약을 맺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폐하,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재개하면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모든 조건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재개하면 제국의회와 사민당은 크게 실망할 겁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더 이상 공세의 여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만약 러시아와의 단독강화가 실패하면, 자국만이라도 독자적으로 강화를 추진할 거라고 단언했다. 독일 외무부는 그를 달래느라 진을 빼고 있었지만, 심지어 군부는 만약 그리되면 오스트리아 정치에 개입하여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망할 놈의 사민당, 제국의회! 짐이 그들의 눈치를 보려고 러시아와 강화를 맺어야 하나? 선출직 의원 나부랭이들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개입할 수는 없어! 이는 철저히 짐의 권한이다!"
카이저 빌헬름은 제국의회, 사민당(SPD)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다.
"러시아 혁명이란 건 유대인의 음모다. 빨갱이들은 국제 유대인의 조종을 받고 있다. 심지어 윌슨조차도 프리메이슨의 조종을 받아 호엔촐레른 왕조를 무너트리려 한다! 우리는 유대-프리메이슨 음모에 맞서 제국을 지켜내야 한다!"
카이저는 갑자기 케케묵은 유대인-프리메이슨 음모론을 제기하며 발광했다.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의 집권에 충격을 받은 카이저는 원인을 찾으려 했고, 그 원인을 유대인-프리메이슨 음모론에서 찾았다.
"러시아 빨갱이들은 로마노프 왕조를 전복했고, 이제는 독일 빨갱이들과 손잡고 호엔촐레른 왕조를 전복하려 한다. 우리는 최대한 러시아 빨갱이들을 때려잡아야 한다. 빨갱이들은 맹수다. 그놈들을 사냥하듯 포위하여 총으로 쏘아 죽여라!"
카이저의 발작과도 같은 외침에 외무대신은 낙담하고, 루덴도르프는 환호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공세를 개시하면 3개월 이내로 러시아를 굴복시키겠습니다. 6월 말까지 동부전선을 정리하고, 8월에는 병력을 집결시켜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감행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려면 가을은 되어야 할 겁니다. 그 전에 파리를 점령, 프랑스도 전열에서 탈락시킬 수 있습니다."
먼저 동부전선을 3개월 이내로 끝내고 서부전선에 병력을 돌려 전쟁을 끝내겠다는, 1918년 판 슐리펜 계획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올해 가을의 낙엽이 지기 전에 동부와 서부에서 모두 전쟁을 끝낼 수 있겠군. 그리되면 앵글로색슨 연합은 유럽 대륙을 지배하는 독일제국에 맞설 수 없을 것이다."
루덴도르프의 낙관론에, 카이저는 만족감을 표명했다. 그는 여전히 허세와 자신감이 넘쳤고,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의 미래상을 그렸다.
강화협상은 결렬되었다.
1918년 3월 21일 춘분에, 루덴도르프가 구상한 동부전선의 총공세가 예정되었다.
춘계공세, 혹은 독일 군부가 명명한 대로 ‘카이저 전투(Kaiserschlacht)’라고 명명한 독일 최후의 대공세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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