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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왕자와 공주 (2) (582/812)

외전. 왕자와 공주 (2)

“안드레이,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요! 왜 자꾸 무시하는 거예요?”

소녀의 다급한 외침에도, 소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대답 좀 해요!”

“……내 이름은 안드레이가 아닙니다. 성은 이, 이름은 안. 폴란드식 이름으로도 얀이란 말입니다!”

자꾸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안드레이’라고 지칭하자, 이안은 정색하며 반박했다.

“하지만 얀이면 러시아에선 이반인데, 이반은 너무 촌스럽잖아요. 안 어울려요.”

‘성 요한’에서 유래한 이름은 영어권에선 ‘존’이고 폴란드에선 ‘얀’, 러시아에선 ‘이반’이었다. 이반은 러시아인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가장 흔하고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이름이 안이니까, 안드레이! 괜찮지 않아요?”

“그게 대체 무슨 논리죠?”

참으로 기적의 논리였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안드레이, 정말 좋은 이름이라고요. 성 안드레이(사도 안드레아스)는 러시아의 수호성인이기도 해요.”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라니까 더 사양하고 싶네요.”

이안은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다. 러시아는 어머니의 조국을 압제한 나라였다.

“사양하지 말아요. 이제부터 전하의 러시아식 이름은 안드레이예요.”

“아, 싫다니까요! 내가 왜 러시아식 이름을 가져야 하죠?”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뜬금없는 질문에 이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12월 13일인데요. 무슨 날이죠?”

“러시아에서 쓰는 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30일이에요.”

11월 30일이라고 해도 이안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정말 모르냐는 듯 놀라워했다.

“11월 30일은 성 안드레이 축일이잖아요! 가톨릭에서도 사도 축일은 기념할 텐데, 정말 몰라요?”

아나스타샤는 이안이 가톨릭교도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폴란드인의 이미지는 곧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에서 태어난 이안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근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대원왕비(여흥부대부인 민씨)처럼 천주 신앙을 고백한 이도 있었지만, 성리학 국가 조선의 후예인 대한 황실에서 유학 외의 다른 가르침을 따르기는 곤란했다.

더욱이 마르가리타가 폴란드인이라지만 신앙을 저버린 사회민주주의자였기 때문에, 애초에 가톨릭을 따를 여지가 없었다.

“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죠.”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정교회의 수호자’인 차르의 자녀들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그녀가 지금껏 봐 온 왕족들은 종파는 달라도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고, 폴란드인의 혈통을 받은 이안도 당연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럼 얀이란 이름은 뭐예요? 세례명 아닌가요?”

“아니에요. 애칭 정도죠. 내 어머니의 성은 얀코프스카. 거기서 따온 거예요.”

아나스타샤는 ‘얀’이란 이름이 성 요한에서 따온 세례명이라고 역시나 지레짐작했던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가톨릭교도가 아니란 말이죠?”

“그렇다니까요.”

그러자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연극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오히려 더 잘됐군요! 예수 그리스도 이래 사도 전승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정통 교회, 러시아 정교회의 믿음을 따르세요! 정교회의 수호자, 차르의 딸인 내가 대모(代母)가 되어 줄게요! С нами Бог(신은 우리와 함께하시니)!”

아나스타샤의 열렬한 전도에, 이안은 진심으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정색하고 절대 안 믿는다고 반박하려던 차에, 아나스타샤가 빙긋 웃었다.

“농담이에요. 동양에는 동양의 방식이 있겠죠. 동양인들은 불교를 믿죠?”

아나스타샤가 이번에는 합장하는 시늉을 하자, 이안은 거듭 정색하고 설명했다.

“동양인이라고 다 불교 믿는다고 생각하면 편견입니다. 대한제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황실은 유교적 전통을 따릅니다. 차르가 정교회의 수호자인 것처럼, 대한 황제는 유교의 수호자라고요. 알겠습니까, 전하?”

“알겠어요. 근데 전하는 정말 진지하시네요. 하나하나 그렇게 다 반박하면 피곤하지 않아요? 농담이라구요, 농담. 나도 동양인이 전부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한국은 유교를 중시한다는 걸 안다구요.”

아나스타샤는 5남매 중에서 유독 장난기가 많았고, 특히 셋째 언니인 마리야를 놀려먹는 걸 좋아했다. 진지한 성격의 이안은 숱한 장난으로 단련된 아나스탸사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비로소 장난이라는 걸 깨달은 이안이 입을 다물자, 아나스타샤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명명일이라고 해서, 이름을 따온 성인의 축일을 생일 못지않게 중시해요. 그러니까, 성 안드레이 축일인 내일은 전하의 새로운 명명일이에요. 축연을 열자고요! 축연을 준비하기 위해 살 게 있는데, 시내로 나가도 되죠?”

이안도 명명일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부황께서 러시아 차르를 처음 만난 게 바로 그의 명명일에서였다던가. 어머니께서는 폴란드에서도 명명일을 기념하는 문화가 있다고 하셨지.’

“아무튼, 난 기독교도가 아니고 안드레이도 아니니까 명명일도 축연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 괜히 준비할 것도 없어요.”

“전하, 여자랑 대화해 본 적 거의 없죠?”

그야말로 비수처럼 찌르며 파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어, 없긴 왜 없어요!”

“아니, 어머니랑 누이 말고요. 가족은 제외해야죠. 아, 궁인도 제외.”

이안은 할 말을 잃었다. 그야말로 정곡을 찔렸다. 가족과 궁인들을 제외하면 여자와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하물며 또래 여자하고는 더더욱 교류할 일이 없었다.

남녀를 나누는 궁중의 유교적 법도는 여전히 엄격했다. 그나마 이진은 외교적 활동을 하므로 외교관 자녀와 사교를 한다든가 하지만, 학업 외에는 외부활동을 일체 않았던 이안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유일한 대외활동이었던 광무학교는 남학교였다.

“내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잘 생각해 봐요.”

그 말을 끝으로, 아나스타샤는 총총 자리에서 떴다. 이안은 도대체 뭘 잘 생각해 보라는 건지, 통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5남매의 맏이 올가였다.

“미안해요. 산책하다가 본의 아니게 들어 버렸네요.”

“아, 개의치 마세요. 별 이야기 아니었습니다.”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올가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안과 안드레이, 사도 안드레아스 축일, 러시아의 전통인 명명일, 이런 건 전하와 상관없다고 여기시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아무 상관 없지요.”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심리를 이해해 주세요. 우리는 모두 불안한 망명자 처지랍니다. 물론 전하께서, 전하의 부황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고 계시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이곳은 모든 게 낯설답니다. 이 도시의 러시아 이름 달니이. 아, 그처럼 여긴 우리에게 너무나 머나먼 곳이에요.”

올가의 말투는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우울한 심경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맏이로서의 책무로 동생들 앞에서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내 불안하고 우울한 심경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곳을 모국 러시아의 연장선처럼 여기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살아왔던 그 방식 그대로. 앞날이 불안한 망명자가 아니라 편안한 보금자리에 온 가족처럼. 그렇게 하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이안은 비로소 아나스타샤의 돌발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총명하고 논리적이며, 눈치도 꽤 좋다고 자부했지만,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물며 상대가 또래 여자라면 더더욱.

“그리고, 왜 하필 명명일의 대상이 전하겠어요?”

“음, 새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서요?”

올가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지켜본바, 그들 5남매가 모두 의지할 정도로 굉장히 총명하고 민첩한 왕자인데, 어찌 이토록 사람 심리는 이해하지 못하는지 의문이었다.

“명명일을 맞이한 사람을 위하여 축연을 열고, 선물을 줘요. 아나스타샤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전하에게 그러고 싶은 거예요. 명명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명분이 되겠죠.”

아무리 이안이 둔감하다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아니, 왜? 설마, 공주가 날 좋아한단 말이야?’

순간, 이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이안은 숙부 이영의 어릴 적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유식하고 총명하지만, 세상을 책으로만 배웠기에 사람을 대하는 게 능숙하지 못했다. 또래 여성에 대한 면역력은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이영이 처음 사랑에 빠진 여성, 지금은 이안의 숙모가 된 여성의 이름도 아나스타샤였다.

* * *

“바보야, 바보.”

“누가?”

“누구긴 누구야, 고매하신 안 왕자님이시지.”

아나스타샤는 바로 위의 언니이자 룸메이트,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마리야에게 이안과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건 네가 이해할 수 없게 말을 한 게 맞네.”

“뭐야? 지금 그 바보 편을 드는 거야?”

아나스타샤가 토라진 듯 쏘아대자, 언제나 동생의 장난을 받아주고 말싸움에서 져주던 마리야도 이번만은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말이 심하네. 안 왕자님이 러시아에서 여기까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런 분에게 바보가 뭐니?”

“그럼 바보더러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해?”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마리야가 정색했다.

“나스챠, 너 왜 이러니? 안 왕자님은 잘못한 게 없어. 그리고 사람 없는 곳에서 험담하지 마. 공주로서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야.”

“험담? 이게 험담이라고?”

“그럼 그게 험담이 아니면 뭐니? 네가 잘못 없는 안 왕자님을 계속 비난하잖니.”

아나스타샤는 코웃음을 쳤다.

“흥! 마샤, 완전히 그 왕자에게 빠졌구나. 동생보다 정인(情人)이 좋다 그거지?”

“뭐, 뭐라고?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마리야가 얼굴을 붉히면서 어조를 높였다.

“내가 평생 마샤를 봐 왔는데, 모를 것 같아? 마샤는 언제나 로맨스를 갈구해 왔잖아. 낭만적인 사랑,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결혼, 행복한 가정.”

“그래, 그게 뭐?”

네 자매 중에서 마리야는 가장 사랑을 갈구하는 꿈많은 소녀였다. 올가가 황실 여인의 결혼적령기를 넘긴 23세, 타티야나가 21세가 되도록 결혼을 회피하는 것과 달리, 19세의 마리야는 결혼과 가정을 꿈꿨다. 전제조건은 낭만적인 사랑이 함께하는 연애결혼이었다.

“마샤는 황실병원에 입원한 군인들과도, 이르쿠츠크의 경비병들하고도 친했잖아. 그중에선 마샤한테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남자도 있었고. 어때? 마샤도 전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

“뭔 소리야, 대체! 신분이 다른 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자매 중에서 마리야는 유배 생활에 가장 잘 적응했고,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감시 목적으로 배치된 경비병들하고도 친해질 정도였다.

지금껏 황실 무도회에서 주목을 받고 최고의 신붓감으로 평가받은 건 자매 중 가장 아름답다는 타티야나였지만, 제복을 걸쳤을 뿐 본질은 순박한 시골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건 단연 마리야였다.

“그래, 신분이 다르니까 안 되지. 하지만 왕자라면 어때? 비록 동양인 이교도지만 괜찮겠지. 위기의 순간에 우리 모두를 구하러 머나먼 길을 헤쳐 온 이국의 동양 왕자님한테 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백마 탄 왕자님, 마샤가 꿈꾸는 낭만적인 로맨스 아니야?”

당사자인 이안은 둔감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마리야가 이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자매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마리야의 눈에 이안은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이르쿠츠크를 떠나 은밀히 청국 국경을 넘고, 만주를 횡단하여 대련에 도착해서 정착할 때까지, 이안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 겉으론 냉정해 보여도 생각이 깊은 이안에게 5남매 모두 호감을 느꼈다. 대부분 인간적인 호감이었다면, 유독 마리야는 이성적인 호감을 느꼈다.

그건 마리야가 ‘금세 사랑에 빠지는’ 유형의,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19세 소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위기의 순간에 우리 모두를 구하러 머나먼 길을 헤쳐 온 이국의 동양 왕자님’이 얼마나 특별해 보였겠는가. 사람은 위기를 함께 헤친 이성에게 더욱 호감을 느낀다는데, 이야말로 그런 상황이었다.

“나스챠, 너 정말 안 되겠구나. 어떻게 사람 마음을 곡해하고 그런 말을 해? 난 왕자님을 고마운 은인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야!”

“근데 왜 그렇게 기를 쓰고 편을 드는데?”

“네가 은인을 함부로 비난하니까 그렇지!”

“거봐, 아니라고 하지만 표정과 어조에서 본심 나오고 있잖아!”

마리야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어조는 높아져 갔다. 아나스타샤는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었다.

“마리야는 동양의 왕자님을 좋아한대요~ 어제는 전장의 장교님, 오늘은 병사 동지, 내일은 백마 탄 왕자님인가요~?”

아나스타샤가 노래까지 개사해가면서 부르자, 순진한 마리야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너, 너 진짜……. 못됐어.”

마리야가 화내며 싸우기는커녕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아나스타샤는 당황해서 뭐라 말하지도 못한 채 방을 떠나고 말았다.

본심을 숨기고 마리야를 계속 놀려 댔지만, 아나스타샤의 마음은 착잡했다.

명명절 아이디어를 낸 건 자신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르쿠츠크에서 지금까지, 이안과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서 이야기를 끌어낸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다들 마샤만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올가와 타티야나는 아나스타샤가 유독 친한 언니인 마리야를 위해서 열심히 판을 깔아 주었다고 생각했다.

아나스타샤의 본심이 다르다는 걸 올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만, 마리야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반은 호감이라고 친다면, 반은 경쟁심리였다. 아나스타샤는 지고 싶지 않았다. 특히 마리야에게는 더더욱.

무도회에서 언제나 더 주목받는 건 마리야였다. 타티야나는 워낙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라 그렇다 쳐도, 매번 마리야한테 밀리는 게 분했다.

‘왜 언제나 나만 어린아이 취급하는 거야! 나도 이제 17세라고!’

갑자기 서러움이 확 밀려와 눈물이 나는데, 그 순간 타티야나와 딱 부딪히고 말았다.

“왜 그래, 나스챠?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무 일도 아냐.”

“큰 소리가 들리던데, 마샤랑 싸웠니?”

“신경 쓰지 마! 아무 일도 아니라니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숙이면서 확 소리를 지르자, 동생을 잘 아는 타티야나가 다독였다.

“말해 봐, 무슨 일이든 간에. 다 들어줄게.”

둘째 언니의 부드러운 다독거림에, 아나스타샤는 눈물을 흘리며 무장을 해제했다. 그리고 자신의 속내를 조심스럽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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