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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황제의 구상 (588/812)

2화 황제의 구상

광무 23년(1919)을 맞이한 대한제국의 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4년간의 대전쟁은 대한제국에 전례 없는 기회를 부여했다. 

“아, 이보다 더 좋았던 시기가 있었던가!”

국제정치적으로 대한제국의 위상은 급부상했다. 아편전쟁 이후 최초로 발생한 서양 열강의 공백을 틈타,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에 나섰다. 전쟁과 혁명의 위기에 놓인 러시아를 대신하여 만주의 세력권을 장악하고, 북청의 보호자로 나섰다. 

러시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유럽에 파병, 동부전선의 역사를 바꿔 버렸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신생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은 가까스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페트로그라드 사수의 공을 세운 대한제국이, 연합국 내부에서 발언권이 높아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대호황을 맞이했다. 연합국에 대한 군수품 판매는 호황의 극히 일부를 담당했다. 

보다 중요한 건, 만주와 화북 시장의 장악이었다. 서양 열강의 철수, 일본의 섣부른 13개조 강요로 인한 중국의 반일 감정, 한국 공업의 발달이 맞물리며 한국 제품의 시장 장악력은 높아졌다. 만주는 사실상 한국의 텃밭이 되었고, 더 나아가 황하 이북의 화북 일대에도 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1876년 개항 이래로 40년 만에 무역흑자를 달성했다. 1916년에서 1918년까지 이어진 3년간의 전례 없는 대호황, 이른바 ‘대전경기(大戰景氣)’는 대한제국을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게 했다. 

“즉, 한국의 위상이 이보다 높았던 적이 없었단 말이지.”

대한제국은 7대 승전국, 이른바 ‘7대강국’의 일원이 되었다.

승전에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이른바 ‘빅3(Big 3)’의 지위를 확보했다면,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한국이 그다음을 차지했다. 

혁명 러시아가 사실상 연합국과 이해관계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은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회담에서 5-6위가량의 발언권을 갖고 있는 국가였다.

“머나먼 이국에서 고혼(孤魂)이 된 장병들의 희생이 이루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이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거둔 최대한의 성과였다.

대전 후반부에 참전한 미국(전사자 약 10만)은 논외로 치더라도, 프랑스는 약 120만의 전사자를, 영국도 약 100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러시아의 경우에는 약 200만에 육박했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는 여론의 급진화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전승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한 이탈리아조차도 약 60만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이는 강경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발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은 예외적으로,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포함하더라도 약 2만이 사망했다. 물론 2만 청년들의 목숨도 귀했지만, 서양 연합국의 압도적인 전사자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일본에 비하면 전승의 확고한 기여였다. 전쟁 내내 해군만 파견하고, 전쟁이 다 끝날 무렵에야 육군을 파병한 일본의 사망자는 2천 이하였다. 그들 나름대로는 러일전쟁의 피해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연합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희생은 하지 않고 이득만 누리려는 걸로 보였다.

“대한의 국가적 위상이 가장 높아진 지금, 동양 질서의 재편을 서양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오.”

국무회의에서 파리강화회담이 중대한 화두로 떠올랐다. 

파리강화회담에서 한국의 당면한 목표는, 대전 기간 동안 확보한 만주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공공연히 승인받는 것이었다. 만주와 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혁명 러시아가 부르짖는 ‘세계혁명’에 연합국 수뇌부가 위협을 느끼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산동 문제는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1914년 이래, 독일이 점유하던 독일령 산동은 한국과 일본이 분할해서 관리하는 중이었다. 청도(칭다오)와 산동반동 남부는 일본이, 연대(옌타이)와 산동반동 북부는 한국이 관할했다.

공식적으로는 ‘대전 종식까지만 연합국이 관할하고, 종전 후 중화민국에 반환’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일본은 순순히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일본은 비밀리에 한국에 산동반도 분할을 제안했다. 현재의 점령지를 강화회담에서 승인받아 그대로 확보하자는 제안이었다. 일본은 이미 점령한 청도와 독일령 태평양 섬들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연대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요동반도와 인천을 잇는 삼각지대입니다. 마땅히 확보해야 합니다.”

“대한에 있어 화북 시장이 중요해진 지금, 연대 확보는 서해의 제해권 확보에 정점을 찍게 될 것입니다.”

군부, 특히 해군은 연대 점령을 원했다. 군부의 주류인 육군은 만주에만 집중해도 부족한 상황이라 점령지 확대에 유보적이었지만,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있던 해군은 산동으로의 진출을 원했다. 해군의 설득에 육군도 넘어가고 말았다.

“만주 관리하기도 벅찬데, 무슨 산동까지? 과욕은 금물입니다.”

“일본이 13개조 요구를 강요하는 바람에 중국에 반일 감정이 폭발했던 걸 잊었습니까? 산동 점령은 그에 못지않은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기껏 공들여온 중국 시장을 저버릴 생각입니까?”

정부, 특히 외무부와 탁지부는 산동 점령에 반대했다. 산동 점령으로 인해 중국의 민족주의적 여론을 반한으로 돌릴까 우려했다.

“중국은 현재 북방의 북양군벌과 남방의 호법정부로 갈라져 내전 중입니다. 산동 문제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중국 여론이 무섭다면, 산동이 아니라 요동도 포기해야겠지요.”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중국 영토인 산동과, 청국 영토인 요동이 같습니까?”

“대한은 산동 반환을 약속한 바 있습니다. 연대를 얻고 국제적 악명을 얻는다면 소탐대실입니다.”

“정식 조약도 아니고, 구두로 한 약속이 무슨 제약이 있단 말입니까?”

“산동 반환은 중국 통일을 부르짖는 단기서 정권에 힘을 실어 주는 꼴이 될 겁니다!”

“실리적인 문제에서도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클 겁니다!”

“대한에게 중요한 건 요동이지 산동이 아닙니다! 만주 장악에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결론이 나지 않자, 자연히 공은 황제에게 돌아갔다. 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던 이선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론, 기껏 확보한 점령지에서 철수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오. 산동에서 독일군을 몰아낸 건 대한국군이지 중국군이 아니니까. 인천과 대련을 잇는 연대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임에는 틀림없고.”

산동 점령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황제의 말에 군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선의 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하나, 짐은 소탐대실이라는 외무부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오. 지금 대한이 집중해야 할 곳은 만주지, 산동이 아니오. 요동반도와 대련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는데, 굳이 산동반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지. 무엇보다 산동 문제는 중국 민족주의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소. 구태여 자극할 필요가 없소.”

이선은 원역사에서 1919년에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폭발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기존의 제국주의적 접근법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리라는 걸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짐은 일본이 산동반도에 진출하는 걸 원치 않소. 일본과 산동을 분할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돌려주는 게 낫소. 일본의 대중(對中) 영향력은 어디까지나 전당강 이남으로 묶어 둬야 합니다. 일본이 화북에 진출하는 상황은 결코 용인할 수 없소.”

정부와 군부는 일본을 동맹이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여겼지만, 이선은 미래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서양 열강의 부재를 틈타 전당강(錢塘江) 이남, 복건과 절강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여기에 산동반도까지 이어진다면, 동중국 연안 전체가 일본의 영향권에 넘어갈 우려가 있었다.

‘일본과 손잡고 산동과 화북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중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는 게 낫지.’

한국이 산동 분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청도 점령을 끝까지 요구할 가능성이 컸다.

일본 군부의 주류인 해군이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북수남진을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중국 대륙에 교두보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도는 군항의 입지로도 훌륭했다.

일본은 산동 문제를 놓고 무리수를 둘 가능성이 컸고, 중국은 반발할 터였다. 중일 간에 갈등을 부추기는 동안, 한국은 조심스럽게 만주를 차지하면 것이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외교무대에서 어제의 동지가 반드시 오늘의 동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외다. 내일의 적일 수도 있소. 종전까지는 승리라는 하나의 대의로 뭉쳐 있었지만, 막대한 전리품을 두고 연합국도 분열하게 될 것이오. 영국, 일본, 러시아는 우리의 동맹이었지만, 올해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소.”

이선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종전의 그 순간부터, 연합국은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영국, 일본, 러시아는 더 이상 동맹이 아니었다. 특정사안에서는 같은 의견으로 뭉칠 수 있으나, 이해관계가 달라진다면 견제해야 했다.

* * *

“짐이 경에게 총리의 중임을 맡긴 것은, 그만큼 경의 충정과 능력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이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 영환은 목숨을 다하여 지극한 성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민영환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해 ‘서리(署理, 임시)’라는 단어가 붙기는 했지만, 의회 동의는 절차상의 문제였다.

내각제실시 이래, 민영환은 최초의 비(非) 개화당 출신 총리가 되었다. 그간의 총리들, 즉 김홍집·박정양·김옥균·유길준·박영효·서재필 등은 계파는 다를지라도 모두 개화당 출신이었다.

민영환은 전문 관료 출신으로, 관료이자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 개화당 지도부하고는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

개화당으로서는 못내 껄끄러운 인사였다.

“계정(桂庭, 민영환의 호)을 총리로 임명하신 어심(御心)을 가늠하지 못하겠소.”

“뭐, 계정이 내각 서열 2위인 참정대신이었으니, 송재(서재필)의 뒤를 잇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박영효의 말에 김옥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자, 박영효가 열을 올렸다.

“그간 참정대신이야 명예직 아니었소? 총리 유고시에나 계승하는 자리지, 후임 총리로 가는 길이 아니었잖소.”

기실 참정대신이 내각 서열 2위이기는 해도, 무임소장관이자 명예직에 가까웠다. 주로 정계 은퇴를 앞둔 원로대신이 임명되곤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계정의 출신을 생각해 보시오. 개화당의 적인 여흥 민문 출신이오. 특히 그 아비인 민겸호는 성상을 모해하려 한 역적이지. 역적의 자식이 총리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성상께서는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묻지 않겠다고 하셨네. 연좌제는 이미 한참 전에 폐지됐거늘, 뭔 새삼스러운 말인가. 그간 계정이 성상과 국가에 바친 충성을 보고도 역적의 자식이란 말이 나오나?”

민영환은 바로 역적 민겸호의 자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자 폐비 민씨의 지친으로, 부패한 권력자로 임오군란을 촉발시킨 장본인이었다. 민겸호는 분노한 군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군란 수습 과정에서 대원군과 완화군을 모해하려 한 혐의가 추가, 역적으로 규정되어 공개적으로 효수되었다.

그 아들인 영환과 영찬에도 죄가 연좌될 수 있었으나, 이선이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연좌해서는 안 된다’고 앞장서서 보호했다. 영환과 영찬은 백부이자 왕세자 이척의 장인인 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가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

민태호도 외척을 혐오하는 대원군에 의해 숙청되어 다시 위기에 몰렸으나, 이선이 다시 보호하여 영환과 영찬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민영환은 확고한 문명개화파이자, 이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관료가 되었다.

“완화군 대감의 지극한 보살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벌써 여러 번 목이 잘렸을 것이네. 대감의 은혜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대감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

이선을 향한 민영환의 충성심은 독보적이었다.

어찌 보면 아비의 원수일 수도 있겠으나, 그 아비의 최후가 너무나 추한 것이었으므로 민영환은 부친을 부정했다. 그 말마따나 이선이 아니었더라면 민영환은 대원군에게 몇 번은 죽을 뻔한 몸이었다.

연좌를 면하게 해준 것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국비유학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귀국한 후에는 관료로 발탁해 중책을 도맡았다.

개화당 지도부에 비하면 실권은 없어도, 실무자로서 오랜 경력을 쌓은 끝에 참정대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지극한 성은이시여! 신 영환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직 성상만을 받들 뿐이옵니다.”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이선을 향한 민영환의 충심은 이루 다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개화당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계정의 충심과 능력, 인정하겠소. 하지만 그가 총리까지 오를 인사인가, 싶으면 동의하기 어렵소. 그는 무당파 관료요. 아니, 오히려 확고한 근왕파 인사지. 정당정치를 확립하겠다는 성상의 뜻과도 거리가 멀지 않소? 성상께서 지금까지 내각의 영역을 존중해 주셨는데, 철저한 근왕파인 계정을 내세워서 내각을 완전히 종속시키겠다는 의미가 아니겠소?”

대한제국은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였다. 내각 총리대신은 의회 선출이 아니라 황제가 임명하며, 책임도 의회가 아니라 황제에게 졌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이선은 의회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개화당 인사를 총리로 임명해 왔다. 개화당이 그 이전부터 권력집단인 점을 감안하면 요식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어찌 됐건 내각제의 형식을 존중한 것이었다.

황제가 군사와 외교에서 전권을 행사하긴 했지만, 내정의 상당 부분은 총리에게 위임해왔다. 갈수록 총리의 권한은 커져 갔고, 5대 총리 박영효의 시기에 이르면 상당 부분 통치권을 행사해 왔다.

박영효는 결국 예전으로 돌아가 전권을 다시 황권으로 종속시키려는 게 아닌가, 라고 의구심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난 아니라고 보네. 성상께선 오히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구상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하네. 이 시기에 다시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할 리가 없네.”

김옥균은 다시금 이선의 국가구상을 떠올렸다. 제4기에 접어드는 시기, 오히려 국민국가로 전환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황제의 구상이 무엇인지, 김옥균은 새삼 궁금해졌다. 현재로선 그저 믿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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