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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대리청정(代理聽政) (593/812)

7화 대리청정(代理聽政)

1919년 1월 18일, 대망의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선은 직접 참석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데, 멀리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 당장이라도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강화회의에서 군주가 직접 나서 외교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먼 거리로 인해, 한국이 파견한 대표사절단은 아직 해상(海上)에 있었다. 먼저 도착한 주영대사 이영, 주미대사 이승만, 주불대사 김규식이 이선의 훈령을 받아 대표단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선이 신뢰하는 아우 이영, 강화회의를 주도하는 윌슨과 사제관계인 이승만, 소장(少壯) 외교관 중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김규식은 모두 미래가 촉망되는 뛰어난 인재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3대 거물’과 그 휘하의 닳고 닳은 제국주의자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무리였다.

‘12년 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하고는 다르다. 그때는 마음 편하게 유람하는 쪽에 가까웠지. 이번에는 정말로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리라.’

1907년에도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위해 유럽을 순방한 바 있었으나, 그때는 훨씬 마음 편한 방문이었다. 실질적인 외교적 논의는 러시아 및 영국과 별도의 협약을 맺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으니, 다자외교와 강화조약 체결과 세계질서 재편이라는 임무를 모두 수행해야 했다.

도저히 멀리 앉아서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대한제국에서 그만한 외교적 역량을 가진 인물이 없었고, 무엇보다 베르사유 조약의 파국적 결과를 예견하고 있는 인물도 자신밖에 없었다.

‘내가 부재하는 동안에는, 태자에게 대리를 맡겨야겠다. 실질적인 통치는 내각이 할 터이니, 의전상의 의무를 맡기면 되겠지. 진에게도 군주로서의 학습이 될 터고.’

12년 전에는 형식적으로 순친왕 이척에게 대리를 맡기고, 내각과 원훈에게 국내정치를 위임하고 떠났다.

이번에는 태자 이진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길 계획이었다. 이진의 나이 스물 셋, 대리청정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했다.

이선은 이진을 함녕전으로 불러들였다.

“태자.”

“예, 폐하.”

“내 너에게 물어볼 게 있다.”

“하문하시옵소서.”

“너는 나의 장자이자 대한의 황태자다. 미래의 황제가 될 운명이지. 너에게 주어진 막중한 의무를 수행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전에 없는 물음에 이진은 긴장했다. 부황이 이런 질문을 던진 건 처음이었다. 대답을 고심하던 이진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어찌 소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아직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사오니, 부황의 가르침을 따를 뿐이옵니다.”

이진의 답에 이선이 빙긋 웃었다.

“하하, 긴장할 것 없다. 너를 시험하려는 게 아니니. 단지 나는 너에게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예, 부황의 명이라면 언제든지 따를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이진은 부황이 자신에게 무언가 임무를 내리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근래 이진이 이선을 대리해 의전을 수행하거나, 국내 순방을 맡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컨대 얼마 전에도, 이선은 동래 방문 후 바로 황성으로 귀경했으나, 이진은 이선을 대리하여 하삼도(下三道, 삼남) 일대를 순행한 후 귀경했다.

“짐은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자 한다.”

“대, 대리, 대리청정이라니요?”

하지만 부황의 말은 이진의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대리청정의 뜻을 모르는가? 대조(大朝, 임금)를 대리하여 소조(小朝, 태자)가 국정을 수행하는 게 아니더냐.”

“뜻을 모르는 건 아니옵고, 폐하께서는 정무를 수행하시기에 문제없이 강건하신데……. 황공하오나 어찌 소자가 대리청정을 수행하겠습니까?”

대리청정은 군주가 정말로 노환이나 중병으로 정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맡기거나, 아니면 후계자의 능력을 시험할 용도로 행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와 사도세자였다.

이선은 노환도 중병도 없었으므로, 이진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러웠다.

“혹여, 황송하오나 소자가 모르는 환후(患候)가 있으신 건 아니신지요?”

그렇다면 더욱 걱정이었다. 부황이 자신이 모르는 중병이라도 앓고 있다면, 이진으로서는 천붕(天崩)이나 다름없었다. 

“아, 걱정하지 말라. 자잘하게 안 좋은 곳은 많다지만, 크게 아픈 데는 없다. 건강상의 이유로 대리를 맡기려는 게 아니다. 파리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에 직접 참석하기 위함이다. 다녀오는 데 족히 반년의 시간은 필요하겠으므로, 너에게 대리를 맡기고자 한다.”

이선은 차분히 강화회의에 직접 참석하려는 이유를 이진에게 설명했다. 대신들에게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아들에게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 강화회의는 실로 세계의 질서를 결정하게 될 자리다. 향후 수십 년의 진로를 결정할 테지. 내 재위기를 넘어 너의 시대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거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대한을 위하여, 그리고 너의 시대를 위하여 내가 직접 나서고자 한다.”

이진은 이선에게서 ‘너의 시대’라는 말을 듣자,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부황의 관심과 인정에 목말라 있던 이진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은 없었다.

“부황께옵서 국가를 위하여 몸소 머나먼 길을 다녀오시겠다고 하시니, 신자(臣子)된 처지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나 소자는 어리고 부족한 점이 많사오니, 대리청정은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가납하여주시옵소서.”

이진은 부황이 자신을 위해 유럽까지 간다는 말에 크게 기쁘면서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관례적인 사양을 했다. 이선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 여기에는 너와 나뿐인데, 사양하는 시늉할 것 없다. 관례라고 해도 대신들 앞에서나 해라.”

“하오나 소자가 어찌 감히 대리청정을…….” 

“내 너를 믿고 대리를 맡기려는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

이선이 정색하며 뜻을 확고히 하자, 이진이 마침내 고개를 조아렸다.

광무 23년 1월 20일, 국무회의.

“작금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는 전후 세계 질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요. 대한에도 중대한 국익이 걸려 있으니, 훈령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게 외교 현장이거늘, 전보로 주고받는 식으로 빠르게 대처할 수 없소. 이에 짐이 직접 광무 11년(1907)의 선례를 따라 유럽에 다녀오고자 하니, 경들은 짐의 뜻을 헤아렸으면 하오.”

황제의 강화회의 참석 선언에 내각 대신들은 놀랐다. 총리 민영환이 반대의 뜻을 표했다.

“폐하의 지극하신 뜻을 신등(臣等)이 마땅히 헤아려야겠사오나, 이미 전 총리대신 서재필을 수석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사온데, 성상께서 직접 머나먼 유럽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행하실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세계 각국에서도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이 직접 파리로 향하고 있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바로 그렇소.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영국의 로이드조지와 프랑스의 클레망소 역시, 짐은 이미 12년 전에 그들과 회담을 한 적 있소. 짐이 그들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바, 직접 상대하고자 하오.”

내각은 난색을 표했으나, 이선의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은 사전에 민영환에게 귀띔을 주고 합의를 했었다. 즉, 민영환과 대신들의 반대는 형식적인 반대였다.

“성심(聖心)이 그러하시다면, 신등은 마땅히 따르겠나이다.”

“고맙소. 짐은 경들을 믿고 떠나겠소.”

“하오면, 폐하께서 해외에 계시는 동안 지엄한 군상대권은 누가 대리하오리이까?”

“태자 이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나이도 장성하였으니 대리청정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소.”

“실로 황태자께옵서는 총명하고 어지시니,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의 복입니다.”

황제의 유럽행부터 대리청정에 이르기까지, 국무회의에서 중대 사안이 빠르게 의결되었다.

이선은 그날로 즉시 황명을 내렸다.

「태자 진은 총명하고 어질며, 나이가 점차 장성하여 가니 근래 시좌(侍坐, 임금이 정전 나갔을 때에 세자가 옆에서 모시고 앉던 일)하거나 군주의 책무를 대리하게 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짐이 구주(歐洲, 유럽)의 강화회의에 몸소 참석하고자 하나, 국사(國事)의 중대함은 한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에 열성조(列聖朝)의 고례를 전범(典範)으로 따라, 태자 진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자 한다. 태자가 밝게 익혀서 치도(治道)를 통달하게 하고자 함이니, 이는 종묘사직의 홍복이요 국가의 행운이다.」

대리청정의 황명이 떨어지자, 이진은 관례상 정전 앞에서 엎드리고 사양을 했다.

「소자의 나이 어리고 무지하니, 오직 부황 폐하의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짐의 뜻은 정해졌으니, 태자는 사양하지 말라.」

「만기(萬機)를 다스리는 일은 모두 나라와 신민들의 안위가 달린 일입니다. 이는 태평성대에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이처럼 극도로 어려운 시기에 변변치 못한 소자에게 맡기니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부황 폐하께서는 명을 거두어 국사를 보전하옵고 소자의 마음도 편안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대리청정은 열성조의 고례를 따른 것이며, 이미 대신들과 의논하여 내각에서 결정한 바이다. 사양하며 형식적인 예를 차릴 겨를이 없으니, 너는 깊이 헤아리고 번거롭게 굴지 말라.」

관례상의 사양이 끝나고, 이진은 대리청정의 명을 받들었다.

“신 이진은 부황 폐하의 지엄한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을 수행하도록 하겠나이다.”

관례상 대리청정 의식이 있어야 했다. 이에 궁내부 장례원경이 물었다.

“태자가 정사를 대리할 길일은 언제쯤으로 잡으면 좋겠습니까?”

“시급한 일이니 길일을 따질 필요가 없다. 내일 즉시 거행하라.”

“하오면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는 일을 원구단, 종묘, 사직, 영녕전, 경효전에 고하고, 조서의 반포는 즉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라.”

“황태자가 대리청정 함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대로 경운궁 중화전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대리청정의 예도 규례대로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진하의식은 간소하게 치르도록 하고, 황태자의 청정은 순조 정해년(1827년)과 을미년(1895)의 절목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예, 폐하! 삼가 명을 받듭니다.”

황태자 이진의 대리청정은 멀리는 세종-문종과 순조-문조(효명세자), 가까이는 1895년 태상황-순친왕의 전례를 따라 수행하도록 했다.

광무 23년 1월 21일. 경운궁에서 대리청정의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진이 종묘사직과 열성조에 고하고, 이선은 조서를 반포하여 태자의 대리청정을 공식화했다.

“태자는 바른 사람을 가까이하고 옳은 말을 들어 국무를 수행하는데 힘쓰라.”

“예, 폐하! 대리청정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직 부황의 가르침을 깊이 따르며, 대신들과 의논하여 국무를 집행하겠나이다.”

이진은 이선에게 절하며 대리청정의 전교를 받아들였다.

「태자가 대리청정을 할 만큼 총명하고 장성하였으니, 실로 종사의 홍복이오. 장차 밝은 군주가 될 수 있도록 치도를 익히도록 하시오.」

태상황은 노환으로 진하의식에 참석하진 않았으나, 태자에게 격려의 뜻을 보냈다.

원역사대로라면 바로 이 날, 1919년 1월 21일에 고종 이형은 서거했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인해, 태상황은 노환으로 잔병치레는 할지언정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다.

강제로 세자 이척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던 자신과 달리, 이선은 자신의 뜻으로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태상황은 새삼 씁쓸함을 느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퇴위 이후 어언 22년, 달관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게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짐은 경들이 태자를 충실하고 현명하게 보좌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소.”

“예, 폐하. 삼가 지엄한 황명을 받드나이다.”

이선은 민영환 이하 내각 대신들뿐만 아니라, 김옥균 이하 원훈들에게도 이진의 보좌를 맡겼다.

황제가 부재하는 동안, 원훈의 영향력이 내각보다 더 강해지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원훈 중에서도 김옥균과 유길준은 노환과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박영효가 정국을 주도할 터였다.

이선은 속내를 감추고, 박영효에게 사실상의 대임을 맡긴 것이었다.

* * *

“개화당은 진보당이 위험천만한 급진 세력인 것처럼 모략하지만, 유럽에 가면 기껏해야 농본주의 중도 정당일 뿐이야. 진짜 급진 세력은 나오지도 않았지. 지금은 오히려 개화당의 권력욕이 진보당보다 더 위험하지.”

이선은 속내를 오직 익문사 독리 이회영에게만 밝혔다.

개화당은 과거 수구파들이 자신들에게 그랬듯이, ‘나라를 뒤집을 급진 세력’이라고 매도했다.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그럴 여지가 있다지만, 유럽으로 치면 동유럽의 중도 농민당에 더 가까웠다. 급진적인 색채가 다소 있을지라도, 애초에 진보당은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임을 자처하며 국가를 따랐다.

“짐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창당도 용인할 생각이네. 대한도 이제 노동 문제를 회피할 수 없네.”

이선의 구상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필요로 했다.

관료·지주·자본가·군대의 정당인 개화당, 서북지역과 신흥 상공인·지식인 계층을 대표하는 신민당, 삼남지역과 농민 계층을 대표하는 진보당.

현재 정계에 노동자 계층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은 없었다. 신민당과 진보당 모두 세계적 추세에 맞춰 ‘노동계급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긴 했지만, 노동자의 정치 참여는 미미했다.

“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곧 정당으로 조직될 것 같습니다.”

“호오, 우당이 아는 바가 있는가?”

“예, 빠르면 올해 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주도하는 계층이 어디인가? 노동자인가 지식인 계층인가?”

“현재까지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담론 정도로 나오는 정도입니다만, 서경과 원산 일대에서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는 노동운동과 결합한다면 대중적 지지기반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체제 안의 개혁이라면 용인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혁명이 아니라 사회개량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 계급을 대변할 수 있는 견실한 정당이라면 환영일세.”

체제를 뒤엎으려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독일이나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처럼 체제 내의 개혁과 사회개량을 추구한다면, 이선은 개화당 지도부와 달리 노동자 정당을 얼마든지 용인할 생각이 있었다.

‘대한에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선제적인 사회개혁으로 혁명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야 한다. 그러려면 개화당의 방식으로는 안 돼. 향후의 정치는 자유주의자가 주도하고, 보수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가 오른쪽과 왼쪽에서 견제하는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다.’

물론 이선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권력을 안겨 줄 생각은 없었다. 사회민주당의 역할은 견제와 왼쪽으로의 추동이었다.

확고한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사회개혁에도 친화적인 자유주의 정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1919년, 광무 23년은 변혁의 해가 될 터였다.

35년 집권의 개화당은 이제 물러나야 했다.

이선의 유럽행은, 대외적으로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외교를 행하기 위함이지만, 대내적으로는 정치 변혁도 염두에 둔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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