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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파리의 한국 황제 (599/812)

13화 파리의 한국 황제

1919년 3월, 파리 호텔 리츠(Hotel Ritz).

강화회의에 참석한 국가원수, 왕족, 저명인사들로 북적거리는 파리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이선이 앉아 있었다.

“폐하, 자세를 조금만 바꿔 주십시오. 예, 좋습니다. 시선은 이쪽을 바라봐 주십시오.”

화가는 이선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선은 화가의 요구대로 자세를 바로잡고, 시선을 돌렸다.

“실례했소. 잠시 집중력을 잃은 것 같군요.”

“아닙니다. 잘해 주고 계십니다.”

한동안 조용히 시간이 흐른 후, 화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

이선은 늙은 화가의 주름진 손을 잡아 악수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황제의 행동에 주위의 수행원들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선은 개의치 않았다.

“짐은 선생의 오랜 숭배자였습니다. 선생이 직접 짐의 초상화를 그려 주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이선의 극찬에 늙은 화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평생 수많은 찬사를 받아 왔는지라 칭찬은 익숙했지만, 머나먼 동양에서도 자신의 팬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황제가.

“동방의 고귀하신 황제께서 이 늙은이의 그림을 그토록 아껴 주시니, 정말로 기쁠 따름입니다.”

노인은 바로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였다.

르누아르의 나이 어느덧 78세, 동료들 대부분은 이미 별세했지만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르누아르는 50대 이후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통받았다.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붓을 잡아 힘겹게 그리면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날씨가 따뜻한 지중해 연안의 프로방스로 이주해 작업을 이어 나갔다.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냐는 친구의 질문에, 늙은 거장은 답했다.

“고통은 일시적이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라네.”

대전쟁 종전 이후, 르누아르는 프랑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모처럼 파리에 왔다. 루브르 박물관에 옛 거장들의 그림 옆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는 걸 보고 늙은 화가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깊은 감명을 받은 건 그만이 아니었다. 루브르를 방문한 이선은 르누아르가 아직도 살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짐은 지금껏 수많은 역사의 거인들을 만나 왔습니다. 하지만 선생을 만나게 된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습니다.”

외교적 수사가 담겨 있지 않은 이선의 순수한 찬사였다. 역사의 거인이지만 동시에 노회한 제국주의자들, 클레망소, 로이드조지, 윌슨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기쁜 일이었다.

이선은 르누아르에게 최상의 경의를 표했고, 예상치 못하게 동양의 황제에게 찬사를 받은 르누아르도 기뻐했다.

“선생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우려가 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선생께 초상화를 의뢰하고 싶습니다. 짐에게 큰 영광이 되겠습니다.”

르누아르는 고심했다. 초상화도 숱하게 그려온 르누아르였기에, 아무리 늙었어도 초상화를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군주의 어진을 그리는 건 처음이었다. 더욱이 동양의 군주 어진이라면 요구사항도 많을 터였다. 늙은 거장은 황제라고 해도 자신의 화풍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이선은 선선히 말했다.

“짐은 선생의 작업에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선생의 화풍대로 자연스럽게 그려 주십시오. 단지 그림에 들어갈 소품 몇 가지는 그려 줬으면 하는 부탁은 드리고 싶군요.”

이선이 자유롭게 그려 달라는 부탁을 하자, 르누아르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늙은 거장의 마지막 초상화가 될 그림이었다.

대한제국은 5년에 한 번씩 공식 어진을 제작했다.

광무 2년(1898)의 곤룡포 어진과 7년(1903) 육군 대원수 군복 어진은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렸다. 광무 12년(1908)의 12장 면류관과 면복(冕服) 어진, 17년(1913)의 해군 대원수 군복 어진은 당대 최고의 한국화가로 여겨진 어진화사 채용신(蔡龍臣)과 조석진(趙錫晋)이 그렸다.

가장 최근에는 광무 22년(1918)의 그림으로, 새로 채용된 카키색 신군복 대원수 정장을 근래 주목받는 젊은 서양화가 김은호(金股鎬)가 그렸다.

어진이 새로 제작되면, 모사본이 전국에 반포되어 관공서와 학교 등지에 내걸렸다.

5년 단위 기준으로 하면 다음은 광무 27년이 되어야겠지만, 이번에 이선이 의뢰한 건 국가에서 사용할 공식 어진이 아니라 개인이 소장할 초상화였다.

“동양의 황제께서 제 그림을 수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선은 르누아르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명화가 그림 여러 점을 황실 내탕금으로 수집하였다.

오랫동안 무명이었기에 팔리지 않았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도 일찌감치 구매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구매자의 후원 덕에, 재정난을 해결한 반 고흐는 원역사와 달리 자살하지 않고 1900년까지 더 살아 여러 작품을 남겼다.

“내가 미술을 좋아하지만, 선생의 그림은 특별히 좋아합니다. 선생이 그린 그림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삶의 활력을 찾는 느낌이지요. 짐이 하는 일, 정치와 외교란 건 지극히 피곤한 일입니다. 일을 마치고 와인 한잔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선생의 그림을 보고 나면 삶의 위안이 됩니다.”

“제 그림이 폐하의 위안이 된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이선의 말에 르누아르가 빙긋 웃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예술애호가 못지않게 와인애호가시로군요. 늘 술잔을 들고 계시니, 하하.”

“와인의 본고장에 왔는데, 사양할 이유가 없지요. 짐이 보르도 와인을 좋아하지만, 동양까지 수입하기는 무리입니다. 그러니 주로 포트와인을 마십니다만. 보르도는 여기 왔을 때 많이 마셔야지요. 자, 선생도 함께 마십시다.”

이선은 그날의 작업이 끝나면 꼭 와인을 마셨고, 르누아르는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이선의 초상화에 통치를 상징하는 헌법과 세계지도 외에 와인이 들어간 이유였다.

“미술품은 황실 내탕금으로 사지만, 짐 혼자 소유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술은 만인이 봐야 의미가 있지요. 짐은 이미 황궁 근처에 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주로 황실 소유의 소장품인데, 올해부터는 선생의 그림도 전시될 겁니다. 국민이 선생의 그림을 보고 짐과 같은 기쁨을 느꼈으면 합니다.”

이선은 광무 6년(1902)에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17년에는 황립미술관을 개관했다.

황실이 전통적으로 보유하던 유물,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전국에서 발굴된 고고학 발견물, 이선이 수집한 소장품 등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황제 혼자 즐기는 게 아니라, 백성과 함께 즐기겠다는 여민해락(與民偕樂)의 정신이었다.

이선 자신도 뿌듯함을 느꼈으니, 원역사에서는 병탄으로 인해 일본인의 손으로 진행되었던 한반도와 만주의 고고학적 발굴이, 대한제국의 주관으로 이뤄져 국내에 전시되니 옛 사학도로서 감개무량했다.

“폐하께서는 진정 예술애호가이자 국민의 지도자이십니다.”

과연 이선은 예술애호가였다. 그의 취향은 서양 근대문학, 고전음악, 인상주의 미술이었다. 유럽을 방문할 때마다 19세기를 빛낸 위대한 예술가들을 만날 기회들이 있었지만, 이선은 최대한 자제해 왔다.

‘나는 어디까지나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왔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 흐트러지면 안 되지. 황제 신분에 사사로운 만남을 해서도 안 되고.’

오해의 여지가 발생할 수 있는 예술가와의 사적인 만남을 피했다는 것뿐이지, 이선은 유럽에 오게 되면 짬을 내서 예술 순례를 했다.

예컨대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차이콥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직접 지휘하는 교향곡을,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를 들었다. 모스크바에서는 톨스토이의 강연회에 참석하고 체호프가 상연하는 연극을 봤다.

베를린, 빈, 파리, 런던에서도 박물관, 미술관, 오페라 극장, 콘서트하우스를 순례했다. 

국제정치와 외교의 숨 막히는 과정 속에서, 이 짧은 ‘일탈’은 이선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훗날 선위하고 은퇴하면 예술 후원자나 될까.’

이선은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인 동시에, 19세기 말-20세기 초를 살아가는 한 인간이었다.

* * *

이선은 파리에서 당분간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강화회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빅3’이 일시적으로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윌슨은 국제연맹에 부정적인 상원과 공화당을 설득하기 위해 2월 중순에 일시 귀국했고, 로이드조지도 의회와 협의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다.

클레망소는 2월 19일 아나키스트의 테러를 당했다. 총알이 갈비뼈 사이에 명중해 제거조차 할 수 없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77세라는 나이는 속일 수 없어 당분간 요양해야 했다.

빅3이 재집결할 3월 중순이 될 때까지, 이선은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했다. 애초에 이선은 강화회의 전권대표단이 아니었고, 제국이 몰락하는 시대에 황제가 모든 외교를 주관한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빅3이 돌아와서 교착이 계속되는 순간, 이선은 대표단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대신 이선은 박물관 참관과 같은 대중친화적인 활동으로 프랑스인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특히 르누아르에게 보낸 이선의 경의는,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아주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황제라는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현지인들처럼 연미복과 프록코트를 입었지만, 신문을 읽은 이들은 이 동양 신사가 사실 한국 황제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들은 동양의 황제가 서양 예술애호가라는 점에 놀라워했고, 취향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 황제 폐하는 탁월한 통치자이자 뛰어난 외교관인 동시에, 숨겨진 예술애호가이기도 하다. 예술에 대한 폐하의 지식과 교양의 깊이는 우리 유럽인이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다. ……」

이선은 일종의 소프트파워 외교를 하고 있었다. 이선 본인은 늘 딜레탕트(dilettante, 호사가)에 불과하다고 겸손히 말하지만, 예술적 교양을 중시하는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동양의 황제가 서양 예술애호가라는 걸 진심으로 만족스러워했다.

서양인들은 ‘근대화’된 동양 국가들을 칭찬하면서도 경멸감을 드러낼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었다.

「일본은 외관상으로만 근대화되었을 뿐, 내면은 여전히 전근대적 동양인일 뿐이다. 원숭이처럼 서양인 흉내는 잘 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경제적·기술적·군사적으로만 서양을 따라잡고 있을 뿐,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서양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미였다.

모든 게 서양 위주로 돌아가는 제국주의 시대, 서양은 곧 모범이고 해답으로 여겨졌다. 비서양적인 것은 곧 열등하고 퇴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선은 달랐다. ‘퇴보적인’ 동양인의 이미지와 달리, 이선과 대화를 한 서양인들은 동양 황제의 지식과 진보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선이 일부러 서양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에 이미 현대화된 21세기 사람의 감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압도할 수밖에 없었다.

문무대왕함이 프랑스 마르세유 항에 도착한 건 항해 5주 만인 2월 27일이었다. 이선은 장기간 항해의 여독을 풀 틈도 없이, 바로 다음날 야간열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선은 파리강화회의 대한제국 전권대표단은 아니었다. 수석에 전 총리대신 서재필, 차석에 전 외무대신 이상설, 대표단에 주미대사 이승만, 주불대사 김규식, 주영대사 이영 5인이었다.

그렇기에 이선은 공식 사절은 아니지만, 대한제국외교의 실세가 황제라는 건 모를 리가 없었다.

프랑스 정부는 대한제국 황제를 위하여 최상의 환대를 준비했으니, 바로 1919년 3월 1일 토요일 ‘한국의 날’ 특별행사였다.

“프랑스 공화국의 우방이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 제국의 야욕을 격파하기 위해 함께 싸운 전우, 대한제국 만세!”

작년 12월 윌슨이 파리에 처음 방문했을 때,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더불어 공화국 대통령 근위대와 미군 파병군의 행진이 있었다.

그 선례를 따라, 무개차(無蓋車)를 탄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와 이선을 호위하는 공화국 대통령 근위대와 대한제국군의 행진이 거행되었다.

동부전선에 파병되었던 대한제국군 근위 2사단 산하 근위기마대 1개 중대가 1918년 12월에 있었던 연합국 공동 개선행진을 위해서 파견되었고, 그 후로 이선이 도착할 때까지 파리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이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공화국 대통령 근위대와 대한제국군 근위기마대가 샹젤리제 대로를 행진했다. 허리춤에 걸린 사브르, 머리에 쓴 황동투구, 은빛 흉갑(胸甲)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프랑스군 보병대의 총검도 하늘을 향해 번쩍였다.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

“Vive la Corée(한국 만세)!”

푸앵카레와 이선을 태운 고급 세단이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에 이르는 동안, 파리 시민들은 열렬한 환호로 맞이했다. 시내 곳곳에는 삼색기와 태극기가 엇갈려서 게양되어 휘날렸다.

“한국 황제 폐하 만세!”

“프랑스의 우방 만세!”

“평화의 수호자 만세!”

연합국 전시 프로파간다는 대한제국과 이선을 동양의 믿음직한 우방이자 동부전선을 지켜낸 전우로 묘사했다. 특히 1918년 페트로그라드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로 한국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고, 동양의 이름 없는 약소국에서 ‘7대 승전국’으로 올라섰다.

프랑스 국민은 일본과 중국은 알아도 한국은 몰랐지만, 1918년 이후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선을 ‘아시아의 희망’으로 여긴 아시아인들만큼은 아니어도, 프랑스 국민도 함께 싸운 전우이자 평화의 수호자로 반갑게 맞이했다.

‘내가 프랑스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문을 행진할 줄이야. 나폴레옹이라도 된 기분이군.’

이선 자신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파리 개선문은 나폴레옹 1세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정작 나폴레옹은 목조 모형으로 대체해야 했던 개선문 행진을 이선이 하고 있었다.

프랑스 일부 호사가들은 이선을 ‘동양의 나폴레옹’이라고 추켜세우고 있었으니, 나폴레옹처럼 파리에서 개선을 하는 것도 그럴싸했다.

하지만 이선이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는 건, 프랑스가 그에게 나폴레옹 체험을 시켜 줘서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은 강화회의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았지. 프랑스 정부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이제 대한은 강화회의 대표로서, 승전국으로서 파리에서 개선식을 한다. 이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원역사에서는 열강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았던 한국이, 7대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참석했다. 이선과 대한제국 대표단은 승리자로서 환영받았다.

이선으로선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38년 세월의 노력이 마침내 한국과 동양을 넘어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프랑스가 한국의 날을 개최하여 이선을 열렬히 환영한 1919년 3월 1일은, 공교롭게도 원역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이 일어났던 날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한국이 열강으로서 세계에 공인되는 날로 기억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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