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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독립의 후원자 (600/812)

14화 독립의 후원자

이선은 프랑스에서 국빈으로 예우 받았으나, 정식 대표단은 아니었다. 이선은 형식을 존중하여 일종의 ‘옵서버(observer, 참관인)’로 배후에 있었다.

참관인이라고는 하지만, 이선의 명성은 이미 유럽에서도 자자했으므로 그를 찾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선이 머무는 리츠 호텔 스위트룸에는 비공식적으로라도 회견을 원하는 이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동유럽의 신생국인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이선을 만나길 가장 열망하는 나라였다.

세계대전을 통해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은 건 오히려 이쪽이니만큼, 최고위 대표단이 이선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폐하. 연합국과 귀국의 군대가 체코군단과 함께 싸워 승리를 이끈 덕입니다.”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Tomáš Masaryk)는 독립 외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마사리크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명망 높은 학자였고, 동시에 체코 독립운동가였다.

대전쟁이 발발한 후 마사리크는 체코 국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고, 열성적인 외교 활동을 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을 누비며 연합국의 지지를 끌어냈다. 독립을 설득하기 위해 만난 로이드조지, 클레망소, 브루실로프, 윌슨 모두 그를 높이 평가했다.

체코 독립의 결정적 요인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창설도 그의 공이었다.

“한국과 체코는 진정한 전우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독일 제국주의를 무찌르기 위해 함께 피를 흘린 전우입니다.”

“한국인들은 진정으로 체코군단의 공로를 높이 평가합니다.”

체코군단은 동부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우크라이나 전역과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활약했다.

페트로그라드 전투 당시, 체코군단은 한국군의 측면을 맡으며 독일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독일군의 돌파로 한국군이 위태로워졌을 때, 측면의 체코군단이 엄호에 성공하여 한국군은 위기를 넘기고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면 어려운 점이 많을 겁니다. 각하께서 중심이 되어 중부유럽의 모범적인 민주국가를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마사리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독립과 함께 혼란에 빠진 다른 국가들과 달리, 체코는 민주공화국을 향해 착실히 나아갔다. 원역사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는 전간기 중동부유럽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였다.

“예, 폐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진정한 민족자결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도록 귀국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체코군단의 최대 공로인 페트로그라드 전투를 함께 승리로 이끈 한국은, 체코의 동맹이자 독립의 후원자가 된 셈이었다.

‘체코군단이 한국독립군을 지원했다는 걸 생각하면, 기이한 역설이군.’

원역사에서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 개입했다가 퇴각하는 체코군단과 접촉하여 대량의 무기를 얻어 냈다. 체코군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청산리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역사의 변화는, 한국이 오히려 체코 독립의 후원자가 되게 만들었다.

“폴란드 독립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폐하. 귀국과 연합국이 독립을 향한 폴란드 인민의 호소에 응답해 준 덕분입니다.”

신생 폴란드 공화국 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도 이선을 만나기 위해 리츠 호텔을 찾았다.

“각하의 음악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요. 짐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 폐하께서 제 음악을 들어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짐은 클래식 애호가입니다. 쇼팽은 짐이 가장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합니다. 쇼팽의 재림으로 꼽히는 각하의 음악을 모를 리가 없지요.”

“그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이 말하길, 한국 황제께서는 진정한 예술애호가시라더니, 과연 그렇군요. 크나큰 영광입니다.”

파데레프스키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동시에 폴란드 독립운동가였다. 쇼팽 사후 최고의 폴란드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음악가로서의 명성은 파데레프스키의 외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체코에 마사리크가 있었다면 폴란드에는 파데레프스키가 있었다. 파데레프스키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순회하며 폴란드 독립을 호소했다. 순회 콘서트 비용을 모아 폴란드 군단의 조직에 힘을 보탰다. 그는 윌슨의 15개조 선언에서 폴란드 독립이 확고히 인정될 수 있도록 노력한 공로자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파데레프스키는 123년 만에 재건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폴란드인들은 폐하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과 우호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진정 폴란드의 벗입니다. 폐하는 일관되게 독립을 지지해 주셨으며, 그리고 또…….”

파데레프스키는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이선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됐다.

“폴란드는 차리즘에 맞선 독립투사 미하우 얀코프스키, 애국지사 마워고자타 얀코프스카 여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와 여사께서 폴란드를 방문할 수 있다면, 폴란드 국민 모두에게 큰 기쁨일 것입니다.”

1863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 이후 이선을 만나 함께 고려대대를 창설하고, 조선으로 이주하여 성공한 미하일(미하우) 얀코프스키.

얀코프스키는 그렇다 쳐도, 그 조카인 마르가리타(마워고자타) 얀코프스카의 ‘로맨스’는 폴란드인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폐하께서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폐하와 여사의 이야기는 폴란드 국민에게 깊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총명한 젊은 여의사는,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조국 폴란드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독립투쟁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끝내 차르의 개에게 붙잡히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여의사는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향을 거부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택했다. 아아, 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에게 시베리아는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가련한 애국투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동양의 왕자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헤치고 나타난 것이었다! 왕자는 잔혹한 차르를 설득해 그녀를 안전한 동방으로 망명시켰다.」

「머나먼 이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여의사. 그녀는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마르가리타의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 되어 폴란드에서 절찬리에 판매되었다.

1903년 한국을 방문한 바츠와프 시예로프스키(Wacław Sieroszewski)가 쓴, 한국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 ≪한국의 삶≫의 일부였다.

물론 이선과 마르가리타의 본명을 넣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 원, 남사스럽게……. 남의 인생을 왜 소설로 써? 이거 초상권 침해 아니냐?’

이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시아의 신화적 인물로 떠오른 것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데, 폴란드에서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말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진작 마르가리타를 통해 듣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술자리 농담으로 웃어 넘겼다. 그런데 폴란드 총리가 직접 소설을 증정하니 이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짐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사실은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물론 그렇습니다. 소설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외세의 지배에 신음하던 폴란드 국민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만해…….’

어지간한 정치적 비난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선이지만, 이 순간만은 피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선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소설의 저자는 평안하십니까? 한국에 왔을 때 짐이 만난 기억이 있는데.”

“예, 해방된 조국에서 중책을 맡고 있습니다.”

시예로프스키도 독립운동을 하다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던 인물로, 역시 사할린으로 유배되어 아이누 연구가가 된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와 함께 동아시아를 탐사하고 귀국하여 여행기와 소설을 썼다.

브로니스와프의 동생이 바로 폴란드 사회당 지도자이자 폴란드 초대 국가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였다.

시예로프스키 본인도 민족독립당 위원장, 폴란드 임시정부 정보선전부 장관을 역임한 신생 국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안부 전해 주십시오. 피우수트스키 원수께도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원수의 형님이 되는 분하고는 한국에서 직접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시예로프스키 씨의 소개장을 갖고 왔었지요.”

유제프의 형 브로니스와프는 아이누 여인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망명해 러일전쟁 시기 폴란드 독립지원을 요청했고, 한국에도 방문해 지원을 호소한 바 있었다. 물론 이선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승낙하지 않았다.

“아, 그러시군요. 원수께서도 형님을 통해 폐하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제게 친서를 부탁하셨습니다.”

친서를 받은 이선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친서를 먼저 건네고 소설은 나중일 터였다. 그런데 파데레프스키가 단순히 찬사를 보내려고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선을 향한 폴란드인들의 열렬한 기대와 호감을 먼저 상기시킨 후에 친서를 건넴으로써 감정적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예술가답게 사람 심리 움직이는 건 제법이지만, 난 개인적인 감정으로 외교를 하지 않는다네.’

하지만 이선은 쉽게 감상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폴란드 국가원수의 친서가 얼마나 자신에게 설득력이 있는지가 중요했다.

친서를 읽고 난 이선은 빙긋 웃었다.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시간이 되면 짐이 바르샤바를 직접 방문하도록 하지요.”

“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피우수트스키의 친서는 이선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흥미로웠다. 

“만약 가능하다면 얀코프스카 여사와 황자 전하도 초청하고 싶습니다만.”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서울에 전보를 보내겠습니다.”

폴란드 총리의 정식 초청이 아니더라도, 이선은 마르가리타의 방문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마르가리타도 독립된 조국 방문을 열망하는 만큼,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 겸사겸사 안에게도 유럽 방문의 기회가 될 테고.’

파데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선뿐만 아니라 마르가리타와 이안이 폴란드를 방문하면 외교적 효과는 배가될 터였다. 특히 마르가리타는 피우수트스키의 옛 사회당 동지이기도 했다. 

‘폴란드는 한국에도 필요한 나라니까.’

연합국, 특히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강력한 후원자를 자처했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중요했다.

프랑스는 특히 폴란드를 강화하여, 누대의 숙적 독일과 새로운 적으로 떠오르는 혁명 러시아를 동시에 견제할 계획을 세웠다.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부활을 원하는 피우수트스키 역시, 프랑스와 손을 잡고 옛 영토의 수복에 나섰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조직된 폴란드군은, 빌뉴스와 렘베르크를 점령한 독일 강철군단을 격파하고 진격을 개시했다.

그다음 목표는, 바로 폴란드 누대의 숙적 러시아였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놓고, 폴란드는 러시아와 일전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만약 러시아와 적이 되어야 한다면…….’

한국도 러시아의 채무불이행 선언과 외교문서 공개로 난처해진 나라였다.

한국의 채무는 5천만 달러니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미한 액수고, 그간 러시아와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면 참고 넘어갈 만하지만, 외교문서 공개는 불쾌한 일이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제국이 맺은 밀약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만주를 향한 한국의 야욕이 만천하에 공개된 셈이었다.

이미 한국이 실질적으로 만주를 장악했고, 열강 또한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라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청국의 형제국이자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던 한국의 위신이 깎이는 일이었다.

‘뭐, 그것까지도 참아줄 수는 있어. 동양에서 물러나 주기만 한다면야. 지금처럼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유럽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알 바가 아니지.’

이선은 개화당 우파와 달리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과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 혁명 주도 세력에게 중요한 건 단연 유럽이었다.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세력이라 상대하기 까다로운 건 틀림없었지만, 적어도 아시아 문제를 놓고선 일정 부분 합의를 이뤄 낸 바 있었다.

청국의 공동보호자였던 러시아는 만주, 몽골, 신강에서 모두 철수했다. 이제 청국은 사실상 한국의 품 안에 들어온 셈이었다.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 혁명에 공포를 느끼고 혐오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러시아의 채무 불이행으로 120억 달러를 날릴 위기에 놓인 프랑스의 분노는 격심했다.

‘서방과 러시아 중에 양자택일을 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결국 대한은 서방을 택할 수밖에 없지.’

서방이 만약 러시아 혁명정권의 전복을 꾀해 전쟁을 조장한다면, 한국은 결국 동맹인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

“폐하. 일전에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가 은밀히 전하기를, 만약 연합국이 러시아의 채무불이행을 규탄하며 최고위원회 축출과 외교적 보이콧에 돌입하면, 대한도 동의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하였습니다.”

이선이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 주불대사 김규식이 클레망소의 은밀한 제안을 전달했다.

외교적 보이콧은 사실상 단교의 전 단계였다. 그 다음은 경제봉쇄, 군사개입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신중히 논의한 후에 답변하겠다고 전하게.”

“예, 폐하.”

프랑스는 이미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야망을 부추기고, 우크라이나-벨라루스-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민족주의자들의 분리운동을 지원하고, 은밀히 러시아 국내 반(反) 볼셰비키 세력과 접촉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다양한 민족주의 우파집단의 반혁명운동을 선동했다.

만약 서방이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기를 원한다면, 동쪽에서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한국도 그들의 편에 서기를 원할 터였다.

‘그리되면 러시아가 아시아 문제에 집중할 수 없게 해야지.’

이선은 한국이 직접 러시아와 군사적 충돌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 전쟁에 개입하여 거대한 시베리아로 출병한다는 건 수렁에 빠져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관심이 서쪽으로 쏠리도록 획책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신생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후원하고, 러시아 국내 소수민족들, 특히 중앙아시아 튀르크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근래 튀르크 제어를 익힌 제국익문사 요원들이 양성되어 투르키스탄에도 침투해 있었다. 익문사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1919년의 시대정신, 민족자결주의에 충실한 선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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