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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동양의 헌병 (604/812)

18화 동양의 헌병

클레망소의 제안이 흥미롭기는 하였으나, 이선은 불개입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현시점에서 굳이 러시아와 전쟁을 각오할 필요는 없었다.

대한제국 전권대표단의 의견도 대동소이했다.

“클레망소 총리의 제안은 요컨대 대한이 폴란드와 함께 러시아에 맞서는 전쟁에 첨병이 되어 달라는 것인데, 프랑스와 대한의 입장이 다릅니다.”

“프랑스는 러시아가 거액의 채무를 불이행하였으니 분노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대한은 러시아와 그 정도로 척을 진 일이 없습니다.”

수석 서재필과 차석 이상설 모두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현재 국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개화당 우파가 들으면 솔깃할 제안이었지만, 대표단은 넘어가지 않았다. 서재필만 해도 철저한 친미파에 러시아 혁명에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외교관답게 현실주의자였다. 한국의 국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외교적 해결책을 중시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러시아 사회주의를 이념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러시아에 반감을 드러내는 클레망소 총리도 확고한 민주공화주의자이자 미영불 대서양 민주주의 동맹을 추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만약 미국과 영국이 모두 러시아를 봉쇄할 의사가 있다면, 대한도 그 대열에 서야 합니다.”

이승만은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대립과 냉전을 암시했다.

세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지정학적 다툼이라는 할포드 맥킨더(Halford Mackinder) 지정학의 영향을 받은 이승만은, 클레망소가 ‘대서양 민주주의 동맹’을 추진하는 것처럼 ‘태평양 안보동맹’을 추구했다.

미국의 패권이라는 20세기 국제정치의 상수(常數)에,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한국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했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자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지키는 대륙의 헌병이라면, 한국이 아시아에서 같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는 김옥균이 오래 전에 주장했던 ‘동양의 프랑스’ 담론과 유사했기에, 개화당 지도부에게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우사의 생각은 어떤가? 경은 주불대사로서 프랑스의 정책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이선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김규식에게 물었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프린스턴 동문으로 모두 윌슨의 제자였지만, 성향과 방법론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승만 대사의 말처럼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를 독일을 대신하는 새로운 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념은 달라도, 러시아 사회주의를 옛 차리즘의 후계자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러시아가 전제정의 본산으로서 세력을 확장했다면, 현재의 러시아는 사회주의의 본산으로 세계혁명을 선동하니 미리 막자는 게 아닐지요.”

“신의 생각도 김규식 대사의 분석과 같습니다.”

모처럼 의견이 일치하자, 이승만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만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으로 100만이 넘는 청년들이 전사하였으니 직접 싸우려고 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대한과 폴란드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폴란드는 식민지의 원한과 영토 문제 때문에라도 러시아와 싸우려 하지만, 대한은 만주 문제만 해결된다면 굳이 러시아와 대립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령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와 대립할지라도, 대한은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김규식의 의견에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념의 호오(好惡)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이해관계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루소포비아(러시아공포증)에,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더해졌다. 러시아가 막대한 채무를 불이행하고, 패전국과 식민지에 은근히 혁명을 선동하고 있으니,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울 터였다.

하지만 한국은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과 그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동부전선에서 함께 싸우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두었다. 러시아가 만주와 몽골로 침투하지 않는다면,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이 문제는 답변을 보류하도록 합시다. 연합국 간에 의견 통일도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니. 전략적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해서, 만주 문제에 대한 열강의 지지를 얻어 내야 합니다.”

이선은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을 택했다. 한국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서구 열강에게 기대와 유인 동기를 계속 제시하게 놔두는 것이었다.

‘과거처럼 한국이 서구 열강에 비해 절대적 을의 위치에 놓여 있다면 택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서구 열강의 힘이 크게 빠지고 한국의 국력이 상승한 지금은 고려해 볼 방법이지.’

* * *

이선은 서양 열강에 앞서 일본과 동아시아 문제를 확정짓기로 했다.

이선과 한국 대표단, 사이온지와 일본 대표단이 고위회담에 나섰다.

“자,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 양국이 동양의 여러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해 봅시다.”

“알겠습니다. 폐하, 한국 대표단은 중국에 연대(옌타이)를 반환한다고 발표하였는데, 폐하께서도 같은 입장이십니까?”

“반대로 묻지요. 얼마 전 중국 대표단이 짐을 찾아와 독일령 산동은 당연히 중국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던데, 여전히 귀국은 산동 문제에 대해 타협할 생각이 없습니까?”

“독일령 청도와 그 이권을 넘겨받는 건 이미 연합국과 합의한 사항입니다.”

일본을 견제하고 있는 윌슨은 내심 중국의 편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귀국은 무혈로 확보한 요동과 대련이 있기에 산동이 필요 없을지 모르겠으나, 일본은 독일을 무찌르고 획득한 청도가 필요합니다.”

외무대신 마키노의 말에는,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여순과 대련에서 피를 흘린 건 일본인데 그 과실을 얻은 건 한국이 아니냐는 은근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러시아의 외교문서 공개로 그동안 한국과 러시아가 맺은 밀약이 공개되었고, 마찬가지로 일본이 연합국과 맺은 밀약도 공개되었다. 서로의 속내가 다 드러난 셈이었다.

“경들도 외교관이 아닙니까? 피 흘리지 않고 외교로 획득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요. 군부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으나, 외교관이라면 대국적인 판단을 해야지요.”

의도를 간파한 이선이 내심 냉소했다.

기실 대외온건파에 속하는 사이온지나 마키노는 산동을 반드시 점유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육군과 해군을 막론하지 않고, 군부는 강력히 청도 점령을 원했다. 사쓰마 파벌인 마키노는 해군의 압력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일본은 한국의 요동과 대련 점유를 인정합니다. 귀국도 일본의 산동과 청도 점유를 인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의 만주 장악을 승인할 터이니, 한국도 일본이 산동으로 손을 뻗는 걸 지지해 달라는 말이었다.

“뭐, 좋습니다. 귀국이 그리 원한다면 그리하십시오. 대한도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중국인들의 민족 감정이 폭발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국은 군벌들 간의 내전으로 정신이 없는 나라인데, 여론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선도 당장 일본과 마찰을 빚어 가며 중국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일본이 인천에서 가까운 산동까지 들어오는 건 눈엣가시 같았지만, 산동 문제를 놓고 중국과 영원히 척을 진다면 나쁘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의 민족 감정을 명백히 얕잡아보고 있었다. 이선은 그 폭발력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말없이 중일간의 대립을 기대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대한은 일본의 산동과 청도 점유를 지지할 터이니, 귀국도 대한의 요동과 대련 점유를 지지하는 겁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련과 청도를 잇는 무역항로는 양국의 우애와 번영을 상징하게 될 겁니다.”

일본은 무수한 피를 흘리고도 얻지 못했던 요동과 대련을 한국이 피 흘리지 않고 차지한다는 게 속이 쓰렸지만, 산동 확보에 만족했다.

“아, 그런데 영국이나 프랑스가 귀국에도 러시아에 대한 개입을 제안했습니까?”

이선의 물음에 사이온지가 되물었다.

“귀국에도, 라는 건 비슷한 제안을 받으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러시아 국내에 위기가 발생하고, 폴란드가 서방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면, 한국과 일본이 러시아 극동에 개입할 수 있냐는 제안이었는데.”

한국이 먼저 패를 드러내자, 사이온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망소 총리가 유사한 제안을 해 왔습니다.”

“하긴, 클레망소 총리와 사이온지 후작은 오랜 벗이기도 하니, 먼저 일본에게 제안을 했을 것 같군요. 이 제안에 어찌 생각하십니까?”

“일본은 러시아 문제에 개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현재의 러시아 체제가 혐오스럽긴 하지만,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일본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지요.”

이선은 잠시 계산에 나섰다.

원역사에서는 연합국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지배할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미국은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다.

‘시베리아 파병을 주도한 육군이 몰락해서 일본의 외교정책이 바뀐 건가, 아니면 전략적 모호성인가.’

이선은 전자이길 기대했다. 일본 정부가 육군을 확실히 통제한다면, 일본이 모험적 팽창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터였다.

‘육군은 개입해야 한다고 성화지만, 또 바보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사이온지의 속내를 보면, 이선의 예측은 얼추 맞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파멸적 결과를 인식하고 있는 일본 정계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대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 문제에 중립을 지킬 겁니다.”

“그럼 양국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선 중립을 지키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한일 양국은 모두 러시아 문제에 중립을 지키자는 구두 합의를 했다.

* * *

그런데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눈여겨보는 건 클레망소뿐만이 아니었다.

대영제국 육군부 장관, 윈스턴 처칠은 유라시아 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총리, 러시아를 이대로 놔둬선 안 됩니다. 빌뉴스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를 광신적인 볼셰비키 무리가 지배하도록 둘 생각입니까?”

처칠은 영국 정치인들, 가장 강경한 반(反)볼셰비키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러시아 타도를 외쳤다.

「러시아 혁명은 스페인 독감을 능가하는 세계적 전염병이다. 바이러스가 확산되었을 때 대처하려면 이미 늦었다. 혁명이 아직 유아기에 머물러 있을 때, 바로 지금 목 졸라 죽여야 한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처칠은 로이드조지 총리와 내각 동료들, 그리고 윌슨과 클레망소에게도 러시아에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 클레망소는 당연히 환영했지만, 로이드조지와 윌슨은 부정적이었다.

“또 그 이야기요? 우린 지금 패전국 독일을 상대하고 있지, 러시아를 적으로 상대하고 있지 않소.”

“총리께서 말씀하셨듯이, 현재 가장 우려스러운 상황은 러시아와 독일이 손을 잡는 겁니다. 지금처럼 독일에 강경한 배상금을 요구한다면, 독일 노동계급은 연합국이 자신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고 인식할 겁니다. 그들은 자연히 러시아의 유혹에 이끌리겠지요.”

처칠은 내각 내에서 드물게 대독 유화론자였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가 요구하는 독일의 전면적인 군축도 반대했다. 처칠이 독일을 온정적으로 바라봐서가 아니라, 러시아에 맞서는 보루로 활용하기를 원해서였다.

“총선에서 확인했듯이, 유권자들이 원하는 건 독일의 징벌이오. 러시아 징벌이 아니라.”

“볼셰비키가 유라시아를 지배한다면, 우리가 여기서 독일에게 징벌적 강화를 맺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뭐, 좋소. 볼셰비키가 독일 군국주의자들만큼이나 문명에 해롭다는 건 나도 동의합니다. 육군부에서는 러시아 개입에 필요한 병력을 얼마 정도로 추산합니까?”

“최소한 40만은 필요합니다.”

처칠의 답변에 로이드조지는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국민들이 새로운 전쟁에 동의하겠소? 동원 해제를 해야 할 이 시기에, 40만 병력을 침공에 동원할 여유가 어디 있겠소?”

“반드시 러시아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동원 해제는 미뤄야 합니다. 라인 방면군 100만 병력을 유지해야 힘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국민군은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겠지만, 러시아 사회주의 진압이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납득시킬 수는 없을 거요. 당장 노동조합들이 파업하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물론 국내의 사회개혁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독일과의 전쟁을 끝난 결과가 러시아에 대한 전면적 공격의 개시라면, 승전국 국민들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극심한 분노의 파도가 몰아칠 터였다.

처칠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종전 직후의 육군 총수로 입각한 처칠의 사명은 조속히 동원을 해제하고 평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국내 노동계에 타협책을 제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강경책을 유지하길 바랐다.

“19세기 내내 그랬듯이, 러시아는 언제나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를 원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붉은 혁명이라는 최악의 형태지요. 크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그랬듯이, 러시아를 봉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프랑스처럼 폴란드와 체코를 내세우자는 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한데, 신생국들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버텨 줄지 의문이군.”

처칠은 세계지도에서 발트해, 흑해, 그리고 태평양을 가리켰다.

“러시아의 진출을 완전히 봉쇄해야 합니다.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를 독립시켜 발트해 진출을 막고, 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켜 흑해 진출을 막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유럽 민족주의자들은 우리의 충실한 대리인이 되어 줘야 합니다.”

“그럼 태평양에서는?”

“우리는 15년 전, 일본을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극동의 헌병으로 고용했습니다. 일본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지요. 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만주 장악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피가 많이 흘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들이 우리 유권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처칠의 냉소적인 말에 로이드조지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일본은 극동의 헌병으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여전히 대영제국 해양패권의 하위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지만, 대륙에는 새로운 헌병을 고용해야지요. 우리의 동맹국이자 러일전쟁과 대전쟁에서 큰 수혜를 입은 나라, 바로 한국입니다. 무엇보다 동부전선에서 싸운 한국군 10만 병력이 러시아 국경에 존재한다는 가치가 매우 크지요.”

처칠의 지목이 한반도와 만주로 향했다.

“대영제국의 유권자들이 러시아에서 피를 흘릴 일은 없을 겁니다. 서로는 폴란드인, 체코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동으로는 한국인들이 대영제국을 위해 싸우게 해야지요.”

“흠, 한국이 극동의 헌병 역할에 만족하겠소?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흘린 피에 비해 얻은 게 적은데, 반면교사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러니 최대한 많은 전리품을 던져 줘야지요. 폴란드가 고토 수복을 원하는 것처럼, 한국이 만주를 원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방해물이 될 유일한 존재는 북방의 러시아밖에 없지요. 만주와 프리모리예(연해주)의 지배권을 대가로 한국을 고용해야 합니다. 한국이 극동의 헌병, 러시아에 맞서는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처칠은 대한제국을 대영제국 세계전략의 일원, 새로운 헌병으로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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