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양극화된 세계
“서방 열강은 말로만 새로운 세계를 운운할 뿐, 여전히 제국주의적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4개국은 야합을 중단하고 강화회의 26개국 대표단을 존중하라!”
러시아는 빅4를 제국주의적 방식이라 비난하며 연합국 최고위원회와 7국위원회를 탈퇴했다. 러시아 축출과 제재를 모의하던 영국과 프랑스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러시아 탈퇴의 표면상 이유는 ‘서방의 제국주의적 야합’을 비난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더 복잡했다.
이 무렵, 동유럽 문제를 놓고 영불과 러시아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국경을 결정하는 것 못지않게, 동부 국경의 결정도 중요합니다.”
“음, 러시아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려면…….”
패전국의 국경을 다시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건, 러시아와 동유럽 문제였다.
러시아와 인접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동부 영토는 미확정이었다. 특히 러시아를 몰아내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재건을 원하는 폴란드의 태도가 강경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는 난처하게도,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이 자치를 허용한 소수민족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3월 1일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을 시작으로, 4월까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가 잇달아 독립 선언 대열에 합류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리투아니아 국가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민족자결권을 추인하고,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건설을 선언한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1916-18년 독일군의 동부전선 파상공세로 대부분 점령됐었고, 명목상 독립된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의 패망 이후에는 러시아가 재빨리 복귀했다. 독일이 내세웠던 괴뢰정권은 모두 해체되었고, 지역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았다.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은 지역의 자치를 보장했지만, 소비에트의 급진화는 지역 민족주의자들과 우익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인 군대 조직에 나서고, 귀환을 거부하는 독일군 잔당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독일군의 무기와 인력이 각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세계혁명은 러시아 제국주의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러시아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
제정 러시아의 가혹한 지배로 인해 누적된 반감, 전쟁기간 동안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전선이 오가며 당한 피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은 민족주의 우익의 득세로 이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은근히 분리주의 여론을 부추겼고, 민족자결주의의 열풍 속에서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의 총애를 받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토 확장에 나서자, 분리주의자들은 때를 늦추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우크라이나 라다는 우크라이나 인민의 유일한 대표기구이며, 인민의 열망을 받아들여 러시아로부터의 독립과 공화국 건국을 선포한다!」
무엇보다 러시아에 가장 치명적인 건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이었다. 러시아에 있어 우크라이나의 가치는 발트 3국과 비교할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인을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민족이라 여겼고, 민족감정이 아니더라도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농토, 풍부한 철과 석탄, 공업기반은 러시아에 필수불가결의 존재였다.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은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권리를 존중한다. 하지만 이는 노동대중의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외세에 부역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일방적인 독립선언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모스크바의 반발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독립을 선포한 키예프 중앙 라다(의회)와 달리, 키예프 소비에트는 분리에 반대하며 파업에 나섰다.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키예프 주둔군이 라다의 편을 들자, 시가지에서 교전이 벌어진 끝에 라다가 승리를 거두었다.
우크라이나 라다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개혁적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소비에트가 추진한 토지개혁을 인정하여 우크라이나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당연히 러시아는 분리를 막으려 했고, 협상이 결렬되자 독립을 선포한 국가들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국주의 앞잡이들, 반동들을 분쇄하라!”
동원해제를 한 러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제한적이었으나, 신생국가의 군대 상황은 더 절망적이었다. 러시아군의 서부 공세에 레발(탈린)과 리가는 빠르게 함락되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임시정부는 수도를 떠나 변경으로 이전했다.
러시아는 단숨에 우크라이나 동부를 점령하여 키예프를 압박했다. 하리코프에는 좌익이 주도하는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우크라이나군의 필사적인 방어로 러시아군의 드네프르 도하는 저지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자주독립을 짓밟으려 합니다. 이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위배한 제국주의적 행태입니다. 우크라이나 인민을 도와주십시오!」
우크라이나의 독립 호소는 영국과 프랑스가 그토록 기다리던 개입의 명분을 확보해 주었다.
“러시아 대표는 계속 우리를 제국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민족자결을 존중하라고 하는데, 현재 러시아가 동유럽에서 보이는 행태는 제국주의가 아닙니까? 러시아에서 분리하여 자결을 쟁취하길 원하는 민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영국과 프랑스는 역공에 나섰다. 러시아는 즉각 반박했다.
“러시아는 서방과 달리 자결을 원하는 민족의 독립과 자치를 보장했습니다. 러시아가 폴란드와 핀란드의 독립을 승인한 건, 폴란드 인민과 핀란드 인민이 압도적으로 독립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트와 우크라이나는 다릅니다. 독일에 부역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합법적인 연방정부에 맞서 일방적인 분리를 선포한 게 불과합니다!”
서방과 러시아가 생각하는 민족자결의 간극이 드러나자, 오랜 지배의 원한으로 러시아라면 이를 가는 폴란드가 서방의 전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차리즘이 무너진 후에도, 러시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혁명의 이름으로 주변 민족을 짓밟고 있습니다. 모스크바는 약소민족의 벗이 아니라, 적색 제국주의의 온상입니다!”
폴란드는 파리에서 러시아 규탄을 주도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의 통제를 벗어나 만행을 저지르는 독일군 잔당 강철군단을 격파하고 빌뉴스와 렘베르크(리비우)에 진주했다.
폴란드 국가원수 피우수트스키는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의 보호자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야욕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재건하려는 피우수트스키의 야심을 러시아 못지않게 경계했으나, 모스크바의 위협이 당면해 있었으므로 일단 폴란드와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모스크바는 동시에 3개의 전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발트3국, 우크라이나에 이어 폴란드가 이들의 후원자로 등장하며 진격을 개시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아직 상호 간에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의 전쟁 상태였다.
러시아 남부에서도, 특히 혁명에 적대적인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가 새로운 분리주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카자크 분리주의를 내세우며 ‘돈 인민공화국’과 ‘쿠반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광기에 찬 볼셰비키 무리는 러시아를 통치할 자격이 없다. 볼셰비키의 파멸적인 정책은 러시아를 산산이 쪼개고 있다. 모든 러시아 애국자들은 단결하라!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러시아를 위해 싸우자!”
자칭 쿠반 인민공화국의 수도이자 우익의 거점으로 떠오른 예카테리노다르(크라스노다르)를 향해 반혁명 인사들이 은밀히 결집하고 있었다. 전 러시아군 사령관들, 카자크 지도자들, 입헌민주당, 보수주의 우익 인사들이었다.
러시아 우익은 반동적 군주제 지지자에서 자유주의적 민주공화제 지지자에 이르기까지, 차리즘의 강력한 중앙집권제에서 연방자치주의자까지 스펙트럼이 복잡했지만, 일단 볼셰비키에 맞서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해산된 옛 장교연맹과 돈-쿠반 카자크를 중심으로, ‘러시아 의용군’이 결성되었다.
목표는 볼셰비키 정권 타도였다.
러시아 남부가 흔들리자, 인접한 캅카스 국가들도 독립대열에 섰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도 독립을 선언했다.
불과 2개월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옛 러시아 제국의 잔해에서 10여 개의 독립국가가 등장한 것이었다.
* * *
“혁명군이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틈을 틈타, 반혁명 세력이 쿠반에 집결했습니다.”
“마치 미리 준비한 것처럼 연쇄적으로 일이 터지는군.”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 프랑스와 영국이 있습니다. 클레망소와 처칠의 주장대로 혁명 러시아가 요람에 있을 때 목 졸라 죽이려는 것입니다!”
서유럽에서 벌어지는 혁명적 운동과 식민지 독립운동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다고 영국과 프랑스가 의심하는 것처럼, 러시아도 분리주의와 반혁명 운동의 배후에 서방이 있다고 확신했다.
상호불신은 극에 달했고, 마침내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러시아 일국의 혁명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건, 서방의 행태로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혁명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노농인민의 국가를 말려 죽이려는 제국주의 국가의 압박과 봉쇄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혁명의 위기와 서방을 향한 공포가 확산되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급진좌익분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로는 「연속혁명론」을 제창하는 외무인민위원 트로츠키가 있었다.
“동지들! 나는 파리에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의 추악한 면면을 똑똑히 봤습니다. 이들은 15개조 요구와 민족자결의 그럴싸한 가면을 쓰고, 세계를 멋대로 분할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위선을 떨면서 다른 쪽에서는 인도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짓밟습니다. 이들은 혁명 러시아를 독일 군국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혁명 러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렬에 설 수 없습니다!”
“옳소!”
“유럽의 연속혁명만이 혁명의 생존을 보장할 것입니다. 특히 독일, 마르크스주의가 기원한 국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계급을 보유한 독일이 혁명의 대열에 합류해야 합니다!”
트로츠키는 탁월한 연설력으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휘어잡았다.
“트로츠키 동지가 정세를 주도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소. 서방이 우리에게 대결을 강요하고 있으니,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맞서 싸우는 수밖에.”
당내 중도파를 대표하며 은근히 트로츠키를 경계하던 울리야노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소비에트는 급격히 좌경화되고 있었고, 그 선봉에는 트로츠키가 있었다.
“노동자·농민·병사의 소비에트는 1917년 4월 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인민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국호와 국기를 개정한다.”
1919년 5월 1일 노동절, 1917년 ‘4월 혁명’ 2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는 국호를 러시아 민주주의 연방공화국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СФСР)으로 개정했다.
국기도 기존에 병행해서 쓰던 적기(赤旗)와 삼색기 중에서 삼색기를 폐지하고, 사회주의의 상징인 적기만을 내세웠다. 그야말로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었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반혁명 세력이 가담한 두마는 인민의 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해산한다.”
소비에트는 더욱 강경해졌다. 입헌민주당과 일부 사회혁명당 우파 인사들이 의용군에 가담한 걸 명분으로 삼아 두마를 아예 해산해 버렸다. 두마 제1당인 사회혁명당 우파는 반발했지만,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 좌파로 구성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의 추인을 받아 두마 해산을 정당화했다.
“우크라이나와 돈-쿠반은 러시아의 방데다. 그루지야는 러시아의 지롱드다. 자코뱅이 그러했던 것처럼, 반혁명 세력을 일소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 주도세력은 작금의 사태가 프랑스 혁명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자코뱅이 방데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듯이, 볼셰비키는 반혁명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위기에 처한 사회주의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로 집결하라!”
기존의 러시아 연방군은 노농적군(勞農赤軍)으로 대체되었다. 국방인민위원으로 취임한 트로츠키가 노농적군의 조직을 맡아 동원령을 내렸다.
트로츠키의 제안으로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 장교들은 계속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장교들이라고 해서 모두 반혁명에 동의하는 게 아니었고, 잇단 독립 선언과 폴란드의 공세, 서방의 봉쇄정책은 러시아가 정말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어찌 됐건 현 정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다수파다.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외세와 결탁해 무력으로 무너트리려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고심 끝에 동조한 장교들과 달리, 상당수의 병사는 기꺼이 동원령에 응하여 붉은 군대에 합류했다.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을 이끈 노농인민의 소비에트 정부를 보호하자!”
“반혁명 세력을 분쇄하자!”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 만세!”
“전 러시아와 유럽에 붉은 기를 휘날리자!”
노농적군은 유라시아 적화(赤化)의 선봉에 섰다.
* * *
“유럽에 적기가 휘날리는 꼴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소.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독립을 선포한 국가들을 지원해서 모스크바에 맞서게 해야 합니다.”
“러시아 국내에 분리주의 세력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러시아 남부에 반혁명 세력이 결집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합니다.”
“쿠데타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 우익은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데, 모스크바에 맞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요? 직접 개입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직접 군대를 보내 개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즉각 여론이 폭발할 겁니다.”
혁명 러시아를 바라보는 빅4의 이해관계는 달랐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타도하길 원했지만, 이탈리아는 소극적이었고, 미국은 반대했다.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외침을 미국이 외면만 할 수는 없었다. 윌슨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가 강경책을 쓰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들은 모두 우리의 벗입니다. 분리주의 세력과 러시아 우익을 지원해 내전을 격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폴란드의 야망을 이용해 러시아를 타격해야 합니다.”
“폴란드는 전쟁에 돌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전의가 충만합니다. 우리가 허가를 안 해도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할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어떻습니까?”
“폴란드가 양국 간 테셴 국경 문제를 합의해 주면, 동부전선에서 경험이 많은 체코군단을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좋소. 체코군단이라면 믿을 만하지. 폴란드에 우크라이나에서 영토를 보상해 주는 대가로 테셴은 적당히 양보하라고 합시다.”
“바르샤바와 프라하에 차관과 무기를 제공해 주고, 분리주의 세력과 러시아 우익들과는 계속 접촉해보도록 합시다.”
“볼셰비키를 타도할 수 있으면 좋고, 안 되어도 최소한 봉쇄는 해야 합니다.”
서방은 마침내 러시아 ‘봉쇄’를 결의했다. 러시아 내부의 전쟁에서 국제전으로 확대될 양상이었다.
러시아 내전, 우크라이나와 발트3국의 독립전쟁,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누적된 의심과 증오, 야망과 안보의식, 열망과 공포는 일부 정치가들이 나서서 타협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대전의 결과, 유라시아는 양극화되었다. 협상과 평화적 개혁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서로를 의심하고 증오하는 두 개의 세계로 쪼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