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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우발적 충돌 (611/812)

25화 우발적 충돌

“제길, 전쟁 끝난 지가 벌써 반년이야. 대체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냐?”

“그러게 말이다.”

“무책임한 정부, 이 느려터진 철도! 무슨 놈의 땅은 이렇게 넓단 말이야? 이제 숲이라면 지긋지긋해!”

보병 제6사단과 해병 제1여단은 철군의 가장 후위에 속한 부대였다. 철군의 우선순위는 전선에서 피해가 컸던 부대였다. 6사단과 해병 1여단은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예비대를 맡았던 만큼 다른 부대에 비해 피해가 덜했고, 자연히 후위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운 건 역시 마찬가지였던 이들에게 있어, 종전에서 철군까지 반년이나 걸렸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교들의 반복적인 설교에 이들의 분노는 러시아를 향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기대했던 ‘유럽’에 왔던 이들에게 전쟁과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러시아는 실망 그 자체였다. 특히 우랄산맥 동부는 행정력이 무너지고 있어 혼란이 한층 심했다. 이는 자연히 러시아에 대한 분노와 멸시로 이어졌다.

“러시아 놈들, 청국놈들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인들이다.”

“이런 놈들이 북방의 강대국이라고 군림해왔더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전쟁 기간 동안 엄정한 군기를 자랑했던 한국군이지만, 철군이 길어지면서 점차 군기가 문란해졌다.

특히 해병 1여단의 상황이 심각했다. 1여단은 용맹하기로 유명했던 부대로 전선에서 활약했고,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안중근은 영웅으로 표상되었다. 

하지만 안중근이 콘스탄티노플 해협통제위원회의 위원으로 전임되고, 부대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안중근과 달리 신임 여단장이 부대를 장악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한층 악화되었다.

군기가 엄격했던 만큼, 해병 1여단의 일탈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봐, 우린 너희들을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낸 해방군이다! 그런데 해방군에게 값을 받으려고 들어?”

“그, 그래도 값은 지불해야…….”

“어이, 통역병. 저 로스케 놈이 뭐라고 떠드는 거냐?”

“값은 지불하라는데요.”

“어차피 네놈들은 재산도 공유하는 빨갱이 놈들 아니냐고. 무슨 돈을 받으려 들어?”

병사들이 마을에 쳐들어가 약탈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특히 해병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더 비싸고 좋은 걸 훔치느냐는 경쟁이 붙을 지경이었다.

심각한 군기위반이었지만, 1여단 사령부는 묵인했다. 누적된 병사들의 분노가 군부에 향하는 것보단, ‘러시아 빨갱이’에게 향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군기위반에 대한 처벌이 없자, 병사들의 난동은 더욱 커져 갔다.

“어릴 때만 해도 공포와 선망의 대상이었던 러시아였는데, 막상 와 보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어.”

“그나마 나은 건 여자지. 백인 여자들이 예쁘긴 하다니까. 이목구비 뚜렷하고 풍만하고.”

파병군의 주둔이 길어지면서, 한국군 장병과 러시아 여성들 간의 성적 관계가 늘어났다.

오랜 전쟁과 혁명, 물류 붕괴는 가뜩이나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던 우랄 동부의 경제적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고, 가장이 경제를 책임졌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가부장이 사라진 가정들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파탄에 놓인 여성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성매매로 내몰렸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외국군 장교들이 주된 상대가 되었는데, 일본군이 주둔 중인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경우에는 아예 거대한 매춘거리가 형성될 정도였다.

근대화에 나선 일본인이 ‘문명화된’ 백인을 선망하면서도 인종적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처럼, 한국인도 비슷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런데 마침내 위치가 역전되는 것처럼 보였으니, 무기를 지니고 있는 병사들에게 두 번 다시 없어 보이는 기회였다.

“언제 백인 여자들하고 놀아 볼 수 있겠냐? 이번이 생애 마지막 기회 아니겠어?”

“어이, 상부 훈령 못 들었어? 성병 옮을지도 모른다던데.”

“성병 전염 좋아하네. 장교 놈들, 지들은 러시아 여자들하고 놀아나면서 우리는 못 하게 하고.”

파병군은 군기 위반과 성병 전염을 우려하여 성매매를 금지시켰지만 장교들은 이미 관계를 맺은 이가 허다했다. 그만한 경제적 여유를 지니지 못한 병사들은 강압적으로 희롱하거나 추행했다.

성매매는 그나마 상호합의에 의한 것이었다면, 성폭행은 완전히 범죄였다.

물론 장병 중에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여전히 엄정히 군기를 지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제부쉬까(아가씨)! 장교랑만 놀지 말고 우리랑도 놀자니까?”

“왜, 왜 이러세요! 소리 지르겠어요!”

“러시아어 아는 사람? 뭐라는 거냐?”

“소리 지르겠다는데요.”

“그래, 질러 봐라. 누가 네 편 들어주나.”

“우리가 아니었으면 너흰 독일에 먹혔어. 독일의 노예가 될 걸 구해 줬는데, 해방군에 이 정도 보은도 못 하나?”

병사들이 여인의 옷을 벗기려는 순간, 우람한 몸집의 군인이 비호처럼 날아와 추행하는 병사들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시바, 어떤 새끼야?”

“화, 황 참교님!”

“새끼…… 기합!”

참교의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은 일제히 부동자세로 섰다.

‘기합(氣合)’은 이 당시 유행하던 군대은어로, 잘못한 사람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단련시킨다는 의미였다.

“해병대 구호 제창!”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 해병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당연한 본분이다!”

여단장 안중근이 직접 제정한 해병대 구호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었다.

“그렇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하는 짓이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이냐?”

“아닙니다! 악!”

황 참교는 병사들의 가슴팍을 군홧발로 걷어찼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서운지, 구원을 받은 여인이 공포로 벌벌 떨 지경이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해병은 언제나 당당하고, 용맹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 연약한 아녀자를 괴롭히는 행동이 어찌 해병답다고 하겠는가! 너희는 지금 해병혼을 더럽히고 있다!”

“악! 시정하겠습니다!”

“당장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도록!”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병사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여인에게 빌었다. 그들 못지않게 공포에 질린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자, 황 참교는 그때서야 여인을 보내고 병사들을 끌고 갔다.

“구호를 외치면서! 원대로 복귀한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 해병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당연한 본분이다!”

“새끼…… 기합! 기합이 부족하다!”

병사들이 꼼짝 못 하는 해병의 전설, 황말출 참교는 ‘말출(末出)’이라고 막 정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경북 봉화 출신의 빈농 자제였다. 옛 시대였다면 천한 빈농으로 삶을 마쳤으리라.

그런데 시대의 변화는 황말출에게도 기회가 되었다. 산골짜기를 벗어나 일부러 해병대 입대를 택한 황말출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열렸다.

농사일로 단련된 거한(巨漢) 황말출은 전사로 거듭났고, 해병 1여단 소속으로 파병되어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다. 특히 백병전에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으니, 혼자서 야전삽을 들고 독일군 1개 소대를 쓸어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였다.

무공을 인정받은 황말출은 여단장 안중근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 받고 참교로 진급했다. 사병이 별도의 선발과정과 부사관 교육 없이 진급했다는 건, 굉장한 전공을 세웠다는 걸 의미했다.

해남 땅끝마을 출신의 빈농 박대붕이 황제에게 친히 훈장을 수여받은 자랑스러운 군인이 된 것처럼, 산골 촌놈 황말출은 해병의 전설이 되었다.

대한제국 해병의 상징 안중근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황말출은 전우들의 일탈을 참을 수 없었고, 그는 자발적으로 헌병 노릇을 하면서 군기 위반을 단속했다. 황말출은 해병혼 그 자체였다.

그런데 만약 그가 연루된 우발적 충돌이 없었더라면, 해병대의 군기 위반은 한러관계에 있어 불쾌하지만 참을 수 있는 해프닝 정도로 끝나고 말았으리라.

* * *

본래 우랄 동부에는 인구가 희박하고, 개척농이 중심이 되어 있다. 노동계급은 점점이 박힌 도시를 따라 형성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시베리아와 극동에 이주한 농민들은 제정 시대에도 광대한 황무지를 임대받았고, 스톨리핀 개혁의 일환으로 소유권도 인정받았기에, 대부분 자영농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자연히 농민의 힘이 강하기 마련이었다.

스톨리핀이 극동 총독으로 좌천된 이후에도 극동 개발에 힘을 썼기에, 극동 주민들은 전반적으로 체제에 충성하는 입장이었다. 혁명의 여파도 유럽과 비교할 수 없었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 좌파가 유럽 지역을 휩쓴 것과 달리, 우랄 동부에서는 입헌민주당과 사회혁명당 우파가 강세를 보였다.

19세기 중반 이래 시베리아에도 자치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개척민들은 정부가 시베리아를 자원 수급처나 유배지 취급하는 것에 불쾌감을 보였고, 시베리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치주의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혁명 이후 연방 체제하에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시베리아의 자치는 인정되지 않자, 이들은 독자적인 자치 국가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볼셰비키 집권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호를 개정하고, 국가두마를 해산하면서 지방두마들조차도 모조리 해산조치를 내리자, 사회혁명당 우파가 다수를 이루는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두마는 반발했다.

“모스크바의 압제를 벗어나 시베리아 자치공화국을 선포합시다!”

사회혁명당 우파가 주도하는 일단의 지식인들은 시베리아 자치공화국 선포를 구상하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로 지방두마를 옮겨 ‘시베리아 의회’를 개최했다.

“반혁명 세력의 분리 야욕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소비에트 정부는 시베리아 의회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에 나섰다.

별도의 군사력이 없는 시베리아 의회였기에 수월하게 진압되리라 생각했는데, 소비에트 정부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나타났다.

“러시아를 파괴하려 드는 볼셰비키에 맞서, 성전을 선포한다!”

카자크라는 군사 특권 계급을 해체하려는 볼셰비키에 맞서 카자크들은 당연히 부정적이었고, 유럽에서는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가 반혁명의 거점이 됐다.

아시아 국경에서도 카자크가 있었으니, 바로 우수리 카자크, 아무르 카자크, 바이칼 카자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했던 건 바이칼 카자크로, 이들은 혁명에 극히 적대적이었다.

바이칼 카자크의 수장 그리고리 세묘노프(Grigory Semyono), 부랴트 기병부대를 이끌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 남작이 반혁명의 선봉에 섰다.

이미 1918년 말부터 세묘노프와 운게른은 기병대를 이끌고 내전에 돌입했고, 이르쿠츠크 공격에 실패하고 패배하여 몽골로 퇴각했으나 그 세력을 유지했다.

1919년 봄까지 세묘노프와 운게른의 부대는 국경을 넘어서 지방 소비에트 방위대, 즉 ‘적위대’를 계속 괴롭혔고, 적위대는 온 신경을 세묘노프-운게른 부대에 써야 했다. 그 사이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베리아 의회는 연합국의 후원을 받으며 모스크바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자연히 모스크바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저들이 러시아에서 패퇴하여 만주와 몽골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데도, 어찌 세력을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만주와 몽골은 청국령이 아니던가? 청국이 배후에 있을 리는 없고, 한국이 이들의 뒷배를 봐주는 걸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의 의심처럼, 세묘노프와 운게른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한 건 사실이었다.

「우리는 로마노프 왕조의 충성스러운 신하들로, 반역자들을 무찌르고 제정을 부활시키려 합니다. 황태자 전하와 대공녀 전하를 모시고, 러시아로 진격하여 황제 폐하를 구하여 제국을 재건하려는 마음뿐입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제국의 우방이자, 한국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 황제 폐하의 벗입니다. 부디 우리의 성전을 지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호오, 러시아에 아직도 이런 우국충정의 충신들이 남아 있었다니!”

“대한을 대신해서 볼셰비키와 싸워 줄 수 있지 않겠소?” 

지원 요청을 받은 민영환 내각이나 박영효는 솔깃해했지만, 보고를 받은 이선의 반응은 냉정했다.

이선은 세묘노프와 운게른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절대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받았고, 차갑게 거절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런 시대착오적 미치광이들의 불장난에 절대 응하지 말 것!」

이선의 강력한 거부에 세묘노프-운게른 부대는 만주에서 추방되어 외몽골로 향했지만, 만주의 청국 정부로부터 독립을 꾀하고 있는 몽골 복드칸 정권이 은밀히 이들을 받아들이고 후원했다.

세묘노프-운게른 부대가 거점을 몽골로 이전하자, 한국도 이는 묵인하고 받아들였다.

배후지를 얻은 세묘노프-운게른 부대는 만주-몽골-러시아 국경을 넘나들며 거침없는 파괴와 약탈 행각에 나섰으니, 소비에트 정부에게는 극동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었다.

「인민의 적, 반동 세묘노프-운게른 부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토벌하라!」

하지만 러시아에 만주 동청철도 수비대 파병의 권한은 있어도, 러시아군에 몽골 국경을 넘을 권한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청국 내 동청철도 수비대를 이끌던 호르바트 장군은 소비에트에 반대하여 모스크바의 통제를 거부했고, 세묘노프-운게른을 은밀히 지원했다.

러시아는 청국에 월경 토벌을 요청했지만, 청국은 당연히 러시아군의 입경을 거부했다.

모스크바의 의심은 거의 확신이 되었다.

「청국, 그리고 청국 배후에 있는 한국과 반혁명군의 연계는 분명해 보인다. 저들을 한시라도 영토 내에 둘 수 없다. 조속히 저들의 철군을 완료시키도록 하라.」

훈령을 받은 바이칼 소비에트는 모스크바에 반문했다. 

「한국군 병력은 적위대를 압도하며, 저들이 인민에게 저지르는 민폐는 소비에트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5월 14일, 모스크바는 바이칼 소비에트에 훈령을 내렸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 러시아 인민에 위해를 가는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말도록! 난동자는 반드시 체포하여 한국군이 반혁명 세력과 결탁했다는 자백을 받아야 한다. 이는 연합국의 반혁명 음모를 적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훈령을 받은 바이칼 소비에트는, 적위대에게 비상 대기령을 걸었다.

“한국군이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잠시도 긴장을 놓치지 마라. 만약 저들이 앞으로 한 번이라도 난동을 부린다면, 반드시 난동자들을 체포하라!”

“옛!

광무 23년(1919) 5월 15일.

이날은 바로 조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일, 즉 독립전쟁 승전 24주년이었다.

파병군 사령부는 승전기념일을 맞이하여 병사들에게 넉넉히 술을 돌리도록 하고, 휴가를 주었다.

군에서 매년 승전기념일은 크게 축하했고, 특히 올해는 병사들의 누적된 불만을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을지 몰라도, 일촉즉발의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한국군과 러시아군의 ‘우발적 충돌’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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