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시베리아 임시정부
연합국과 시베리아 개입에 합의한 한국은, 영국으로부터 만주 전역이 한국의 독점적인 세력권임을 인정받았다. 이윽고 프랑스도 흔쾌히 동의했다.
“병력은 언제부터 투입이 가능합니까?”
“시일이 필요합니다. 절차상 시베리아 자치정부가 먼저 수립되고, 이들이 지원을 요청하여 한국 정부와 의회가 동의하고 파병하는 형식이 좋겠습니다. 그동안 한국군은 전략적 준비를 할 겁니다. 7월에서 8월이면 본격적인 개입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선은 전략상의 준비와 절차상의 명분을 내세워 시간을 벌었다. 이미 유럽 러시아에서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는 만큼, 소비에트 정부가 도저히 아시아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될 때 개입하는 게 가장 좋았다.
“치타를 중심으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만주횡단철도를 확실히 장악하되, 정권은 지역의회에 넘기도록 하라.”
한국군이 치타를 점령함으로써, 만주를 연결하는 철도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와 극동을 잇는 횡단철도까지 장악한 셈이 되었다. 극동은 사실상 무주공산 상태였다.
“파병군을 확실히 통제하고, 모든 불법적 행위는 엄단하라. 신임 참모장에게 전권을 부여한다.”
이선은 파리에 있어 제한적인 정보만을 받고 있었다. 치타에서 서울, 서울에서 파리로 두 번 걸러진 정보를 받는 데다가, 심지어 서울의 정부와 군부도 시베리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지 사령부의 보고대로 ‘소비에트 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은 적위대가 선제공격해서 반격했다’라고 인지하는 상황이었다.
신임 참모장 겸 사령관 대리로 임명된 제1기병사단장 유동열 부장이 신속히 치타로 향했다. 러시아통인 유동열은 군부 내 다른 모험주의자들과 결이 달랐고, 이선도 그를 신임했다.
‘유동열은 믿을 만한 인물이지만, 초록은 동색이라고 어찌 될지 모르지.’
이선은 군부의 충성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현지 상황을 군부에만 맡길 생각이 없었다.
외교관이 영사로 파견되어 현지에서 한국 정부를 대표하도록 하고, 은밀히 제국익문사 요원들을 파견해 멀리 떨어진 이선의 눈과 귀가 되도록 했다.
정부가 군부를 견제하고, 익문사가 군부와 정부를 모두 감시하는 구조였다.
익문사 요원들은 독자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이선에게 보고할 터였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치타.
“참모장 각하,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노고라고 할 게 뭐 있겠나? 타지에 주둔하는 제군이 고생이지.”
파병군 참모장 겸 사령관 대리로 임명되어 치타에 도착한 유동열 부장은 바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위관장교 시절 이르쿠츠크 군사학교에서 유학하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근무한 유동열은 러시아어가 유창했고, 파병군 제1기병사단장으로 복무하면서 군부 내 러시아통으로 인정받는 인사였다.
유동열은 보르자와 치타를 잇는 철도 연변의 병력을 통제하고, 감찰을 통해 진상을 파악했다.
“개판이로구만. 이래서 해병 놈들은.”
5월 15일 보르자에서 발생한 충돌 사건의 근원이 해병대의 군기이탈과 난동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연대장 곽근풍 정령이 책임을 피하려고 사건의 선후를 바꿔 허위보고를 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유동열은 즉시 곽근풍을 치타 사령부로 출두시켰다.
“이놈 당장 직위해제하고 헌병대에 구금시켜.”
“참모장 각하! 소관은 적의 기습에 맞서 신속히 대응…….”
“닥쳐라! 휘하 부대를 통제하지 못해 군기를 그 지경까지 만든 것도 모자라, 책임을 피하려고 허위보고까지 해? 네놈은 그것만으로도 총살감이야!”
유동열의 일갈에 곽근풍은 더는 항변하지 못했다.
“가, 각하…….”
“군사재판은 피할 수 없으니 각오하도록.”
곽근풍은 그 자리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동부전선에서 무공을 떨치며 성 게오르기 훈장까지 받은 장교의 자업자득인 몰락이었다.
“난동을 부린 병사들은 어찌할까요?”
“난동에 연루된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전부 체포할 수야 없지 않나? 모든 책임은 지휘관이 진다. 연대장 외에는 불문에 부치되, 확실히 군기교육을 시키도록.”
현실적으로 주둔군 대부분을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곽근풍을 체포하고 주둔군에 엄격한 군기교육을 명령한 유동열은, 보르자 마을을 찾았다.
새로운 한국군의 등장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주민들을 향해 유동열이 유창한 러시아어로 연설했다.
“친애하는 러시아 국민 여러분. 우리 대한제국군은 러시아의 오랜 우방이자 러시아 국민의 벗으로서,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고자 함께 싸웠습니다. 혁명과 전염병의 혼란 속에서 철군이 지연되고, 이에 일부 병사들이 일탈행위를 벌였으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군은 책임자를 처벌하고, 치안이 안정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동열은 말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민정활동에 나섰다. 만주에서 싣고 온 식량과 생필품이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빈곤에 시달리던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불안과 공포에 떨던 민심은 진정되었다.
“어 장군. 제한된 정보 속에서 치타를 점령한 건 군인으로선 현명한 판단이었을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정부에 큰 부담을 안겨 준 셈이 되었네.”
“송구할 따름입니다. 마땅히 소관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유동열의 힐난에 치타 점령을 주도한 6사단장 어담이 고개를 숙였다.
“아닐세. 일단 정부는 선제공격의 책임을 러시아에 돌리고 있어. 어디까지나 러시아가 기습한 걸로 해야 하는데, 귀관까지 처벌하면 우리가 선제공격했다고 자인하는 셈밖에 안 되네. 최종 판단은 대원수 폐하께 맡기고, 일단 불문에 부치도록 하지.”
유동열은 어담을 불문에 부쳤다. 어차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치타 점령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일상적인 민정과 치안은 지역의회에 맡기고, 군은 주둔지로 돌아간다.”
한국군은 소비에트를 대신해 수립된 시베리아 자치의회에 치타의 민정을 이양했다.
물론 치타 역과 철도 연변은 한국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유동열은 파병군을 확실히 장악했고, 이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에 다시 고삐를 채우고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상황이 안정되자, 한국은 다음 공작에 들어갔다.
* * *
소비에트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한 시베리아 두마.
시베리아 두마는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과 탄압에 반대했고, 사회혁명당 우파와 자유주의적 지역주의자들이 결합했다.
일본군과 미군의 협력을 받은 시베리아 두마의 반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소비에트는 전복되었고, 시베리아 두마는 독자적인 자치정부 수립을 골몰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두마는 이윽고 들려온 ‘치타 해방’과 동지들의 석방을 기뻐했다. 두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신속히 치타로 이동했다.
“볼셰비키의 폭거에 맞서, 제헌의회와 민주공화국의 대의를 지키고, 시베리아인을 위한 시베리아를 건설하자.”
6월 12일, 시베리아 두마의원으로 사회혁명당원 표트르 볼로고드스키(Pyotr Vologodsky)를 의장으로 하는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시베리아 임시정부는 시베리아 애국자의 오랜 꿈인 시베리아 지역두마에서 나왔습니다. 시베리아 지역두마를 탄생시킨 시베리아 자치의 이상(理想)은, 오랫동안 우리 조국의 가장 훌륭한 아들들이 가슴 깊이 품어 온 생각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자치주의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시베리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품어온 이상이었다. 시베리아를 식민지 취급하는 제정에 맞서, 이상적인 자유국가를 건설하려는 계획이었다.
명망 높은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그리고리 포타닌(Grigory Potanin)이 구체화한 시베리아 자치주의는, 시베리아의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여러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자유주의적 연합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마침내 이상을 실현시킬 기회를 제공했다. 인민주의 사회혁명당과 자유주의적 자치주의자 사이에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으나, 볼셰비키라는 당면한 적에 맞서 일단 단결하였다.
“시베리아는 결코 러시아에서 분리될 수 없다. 분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외세의 앞잡이다!”
소비에트는 물론이고, ‘하나이자 분리할 수 없는 러시아’를 강조하는 러시아 우익들도 시베리아 자치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시베리아는 민주적인 러시아 연방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동시에 시베리아는 고도의 자치를 행사할 수 있는 연방 구성원이어야 한다. 제국도, 공화국도, 소비에트도 시베리아인의 열망을 짓밟았다. 이제 우리가 직접 행동으로 나설 때이다.”
이상은 훌륭해도, 시베리아 임시정부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광활한 영토 내의 희박한 인구와 부족한 군사력은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임시정부는 ‘시베리아군’을 창설하고,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이어, 북만주 동청철도 경비대는 시베리아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상 극동 전역이 시베리아 정부의 관할로 들어간 것이었다.
보수적인 제정복고파인 철도경비대 사령관 호르바트가 시베리아 정부를 지지한 건, 다분히 한국의 공작을 받아서였다.
“소비에트에 맞서려면 인민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시베리아 임시정부를 주도하는 이들은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시베리아 인민의 지지를 확인한 이들입니다. 이들과 협력하십시오.”
극동 러시아에서 가장 잘 조직된 군대라 할 수 있는 동청철도 경비대의 합류는 시베리아 임시정부에게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인민주의 사회혁명당, 시베리아 자치주의자, 제정복고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시베리아 임시정부를 제헌의회의 정통을 잇는, 시베리아 인민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김하석(金夏錫)이 대한제국 정부를 대표해 치타로 파견되어 시베리아 임시정부와 접촉했다.
“귀국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에 맞서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지, 결코 특정국가의 대외전략에 종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시베리아는 시베리아인이 통치해야 합니다.”
시베리아 임시정부는 한국이나 일본의 괴뢰정부가 될 생각이 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협력은 하게 되었지만, 임시정부는 ‘외세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두려워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소비에트의 폭거에 맞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시베리아의 주권을 침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좋습니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군대 편성입니다. 무기를 지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 정부가 전시에 주문했으나 인수하지 않은 소총과 야포가 있습니다. 이를 귀 정부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 귀국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공작은 무기 지원만이 아니었다.
15만에 달하는 재러 한인, 고려인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마침내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제헌의회를 계승하는 정부로, 시베리아 거주 모든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약속합니다. 15만 고려동포도 임시정부에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고려인 사회를 대표하는 두 지도자, 최재형과 문창범은 시베리아 임시정부에 입각했다. 최재형은 재무차관, 문창범은 교통차관에 임명됐다.
40년 전 이선이 처음 연해주에 도착했을 때 발탁하여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가 된 최재형은, 이 무렵에는 동포사회를 넘어 연해주를 대표하는 사업가이자 정치가였다.
최재형은 동포에 대한 의무감과 모국에 대한 애착을 모두 갖고 있었고, 시베리아 정부가 고려인에게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고려인이여! 임시정부를 수호하자!”
세계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한 고려인의 수는 약 5천여 명. 동원해제 이후 고향인 연해주로 돌아온 고려인들이 재소집되었다.
고려인 3천여 명이 시베리아군에 가담하여, 고려인으로서 러시아 육군 대령까지 승진한 김인수(빅토르 김)을 지휘관으로 하는 ‘고려연대’를 결성했다.
“시베리아 임시정부는 시베리아의 다섯 민족, 즉 슬라브계, 튀르크계, 몽골계, 퉁구스계, 고려계의 협력과 연방을 약속한다.”
시베리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주민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슬라브계, 레나강유역의 야쿠트인으로 대표되는 튀르크계, 바이칼호일대의 부랴트인으로 대표되는 몽골계, 아무르유역의 에벤키인으로 대표되는 퉁구스계, 그리고 연해주의 고려인이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다섯 민족으로 표상되었다.
만주족-몽골족-티베트족-회족-한족의 ‘오족협화’를 자처하는 대청국처럼, 러시아판 민족화합이었다.
“시베리아인을 위한 시베리아!”
“시베리아 임시정부 만세!”
그야말로 온갖 정치세력과 민족의 연합체인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삽시간에 바이칼호 동쪽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군대가 강력하거나 인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유럽 러시아가 전례 없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어, 도저히 모스크바가 극동에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 * *
5월 말. 소비에트에 반대하는 백군 장교들,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가 중심이 된 ‘의용군’은 적군(赤軍)의 전력이 대부분 발트와 우크라이나에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 세력을 키웠다.
연합국이 내전 개입 의사를 보이자, 의용군은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하여 예카테리도나르(크라스노다르)에서 북쪽으로 출진을 개시했다.
의용군은 ‘적위대’에 맞서 ‘백위대’로 지칭되었고, 이른바 백군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하나이자 분열할 수 없는 러시아를 위하여!”
“러시아를 파괴하는 볼셰비키를 타도하자!”
병력 대부분이 서쪽에 묶여 있는 적군은 백군의 공격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백군은 로스토프를 점령하고, 돈강 하류 일대를 장악했다. 다음 목표는 로스토프 바로 북쪽,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와 그 서쪽의 곡창지대였다.
양질의 철광과 탄전을 보유한 주요 공업지대인 돈바스와 가장 비옥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 동남부는, 지금까지 소비에트 정부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 모두 중시하는 지역이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내전을 선포한다! 노동자 농민이여, 혁명을 지키기 위하여 붉은 군대로 오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머리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우크라이나는 결코 상실할 수 없다.”
6월 4일, 소비에트 정부는 공식적으로 내전 발발을 선포했다.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징병이 실시되었다. 동시에 도시와 군대의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촌의 식량공출이 실시되었다. 전례 없이 가혹한 조치였으나, 소비에트 정부는 내전의 비상시국을 들어 정당화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적이든 백이든 압제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우크라이나인이여, 출신과 계급을 막론하고 인민군으로 오라!”
백군의 공격으로 적군의 공세가 주춤하자, 우크라이나 인민군도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섰다.
주 전선은 비옥한 우크라이나 동남부에 형성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패권을 놓고 싸우는 전쟁이 3파전으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1919년 6월, 러시아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동으로는 시베리아, 서로는 발트, 남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돈-쿠반, 북으로는 무르만스크.
옛 러시아제국의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유라시아를 태우기 시작한 불길은 쉽사리 진압될 길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