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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대전환 : 대호황의 빛과 그림자 (627/812)

41화 대전환 : 대호황의 빛과 그림자

1919년에 전개되는 대한제국의 정치적 변혁 이전에, 먼저 사회경제적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 대한제국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동을 겪고 있었다.

「대조선은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식산흥업으로 산업입국의 길을 연다.」

산업화 정책은 1880년대 갑신경장 이후부터 ‘식산흥업(殖産興業)’으로 추진되었지만, 주산업인 농업개혁과 새로운 광산개발 등 1차 산업에 치중되었다.

독립전쟁(조청일전쟁)과 북벌전쟁(의화단전쟁)으로 청국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은 1900년대부터 본격적인 공업화가 추진되었다.

하지만 개화당 정부의 일관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1900년대의 공업화는 한계가 있었다.

서구 열강과의 경쟁은 언감생심이었고, 후발주자인 일본의 공업이 급격히 성장해 동아시아 시장을 잠식해 갔다. 산업화의 최후발주자인 한국은 아직 이들과 맞서기에는 무리였고, 현실적으로 경공업을 육성하여 국내 수입대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변동은 한국의 기회였다.

1905-06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춤한 틈을 타 한국은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국내 시장을 잠식하던 일제 경공업 제품이 쇠퇴하고 국산 제품이 주류를 이루었고, 훗날의 밑거름이 될 군수공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1-12년의 신해혁명은 중국의 분열과 청국의 분리로 이어졌고, 막 성장하는 한국 자본주의는 만주라는 원료수급처이자 대외시장을 확보할 기회가 오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황제 이선의 명으로 개화당 정부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공업으로의 대전환! 대한의 미래는 공업, 특히 중공업에 있다. 향후 철강, 기계, 철도, 조선, 전기, 화학 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

이른바 ‘대전환’ 정책은 정부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의 공업화 수준은 여전히 서양 열강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일본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양의 공업은 한참 앞서 있습니다. 대한의 공업은 국제무대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공업 육성에 나선 일본조차도 서양에 비하면 낮은 품질로 인해 고전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최후발주자인 한국의 중공업 추진은 지나치게 이르고 도박과도 같은 정책이었다. 동양의 선발주자인 청국이 실패하고, 일본도 고전 중이었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지만 시장을 확보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한국이 어디서 판로를 찾는단 말인가? 한국의 수요는 중공업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선은 중공업정책을 밀어붙였고, 박영효 내각은 황제의 구상을 지지하고 집행했다.

1912년부터 본격적인 중공업 정책이 추진되어, 세금·배상금·외채에 심지어 황실 내탕금과 ‘국민성금’까지 동원된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었다. 성공하면 한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지만, 실패하면 막대한 채무에 시달리다 파산할 우려가 있었다.

「유럽에서 대전쟁 발발! 열강, 전쟁승리를 위해 총동원!」

국운을 건 도박과도 같았던 대전환은 세계대전 발발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총력전에 나선 서양 열강은 군수품 생산에 모든 전력을 돌렸고,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아시아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총포탄의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풍부한 텅스텐 을 보유한 한국은 기회를 얻었다. 단일 텅스텐 광산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영월 상동광산을 비롯한 대형 광산을 보유한 대한광공업주식회사는 전쟁을 틈타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산업의 쌀’로 불리는 강철 수요도 폭증했다. 독립전쟁 이후 한국에 할양되어 개발한 남만주 안산 제철소는 일본 규슈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와 함께 동양 최대의 제철소로 성장했다. 기존 동양 최대 제철소였던 호북 한야평제철소가 신해혁명 과정에서 완전히 붕괴하는 바람에, 그 수혜는 고스란히 안산제철소가 누리게 되었다.

군수품 수요도 폭증하여, 특히 막대한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러시아를 향해 한국의 군수품도 향했다. 주요 수출품목인 광무 제식보총(한국형 모신나강)과 탄약 외에도 기관총·중포 생산이 급증했고, 러시아의 기술이전을 받아 최신형 ≪일리야 무로메츠≫ 폭격기 생산까지 나서게 되었다.

「대한의 상품, 대륙으로 진출하다! 대한의 경제영토는 만주를 넘어 황하까지!」

연합국에 대한 군수품 판매는 전시호황의 일부만을 담당했다.

보다 중요한 건, 만주와 화북 시장으로의 진출이었다. 

서양 열강의 철수, 일본의 섣부른 13개조 강요로 인한 중국의 반일 감정, 한국 공업의 발달이 맞물리며 한국 제품의 시장 장악력은 높아졌다.

만주는 사실상 한국의 독점적 시장이 되었고, 더 나아가 황하 이북의 화북 일대에도 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일본의 공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시장 판로를 찾고 있었으므로, 한국은 지나치게 무리하지 않았다. 중국 대륙은 넓고 인구는 많았다. 한국은 일본과 밀약을 맺고, 대략 황하를 경계로 경제세력권을 형성하기로 합의했다.

장강 이남이 중국의 알짜배기이긴 했으나, 전쟁이 끝나면 강남을 세력권으로 여기는 영국이 반드시 복귀할 터이니 넘볼 필요도 없었다.

「마침내 수출액이 수입액을 초과! 채권액이 채무액을 초과! 전례 없는 대호황!」

1876년 개항 이래로 40년 만에 무역흑자를 달성했다. 1916년에서 1918년까지 이어진 3년간의 전례 없는 대호황, 이른바 ‘대전경기(大戰景氣)’는 정말로 대한제국의 대전환을 이끌어 냈다.

‘대전경기’ 동안, 한국 경제는 전에 없을 정도로 성장을 이뤄 냈다. 공장에서는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나오는 즉시 해외로 수출되어 막대한 판매고를 올렸다. 국부가 증대하고, 소비가 확산됐다.

서울-인천·평양-남포·함흥-원산·창원-부산으로 이어지는 4대 공업지구와 4대 항구가 상공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시기가 또 있겠는가.”

“태조 고황제께서 개국하신 이래 최대 호황이 아니겠는가.”

“아니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지. 하하하.”

“흐흐흐, 맞네. 벌었으면 써야지.”

그 무렵 한국에서는 단군이 민족의 시원(始元)으로서 숭배되었고,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이란 말은 곧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부흥을 의미했다.

과연 공업화정책과 대전경기는 한국 사회를 근본적인 대전환을 이끌었다.

공업부문의 생산력 증대와 무역액의 급증은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다. 1919년에 이르면 공업은 국부(國富)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 한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공업국가가 확립되었다. 대자본이 형성되고, 중산층이 확대되었으며, 공장 노동자가 급증하였다.

30년 전 한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다시 서울을 방문한다면, 이들은 변화한 도시를 보고 깜짝 놀랄 터였다.

이촌향도 현상이 본격화되어 도시 인구가 급증하고, 소비가 확대되어 상업이 발전하였으며, 전력산업의 발전으로 도시에는 전기·전차·전화가 일상화되어, 문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전근대적 농업사회는 근대적 산업사회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였다.

실로 역사적인 대전환이었다.

* * *

대호황은 분명히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세상만물이 다 그렇듯이,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었다.

대호황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코 자본가였다.

전통적인 조선의 사농공상 체제에서 상인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으니, 한국 자본가 계급의 형성은 서구의 자본주의보다는 국가주도하의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에 가까웠다. 

필연적으로 자본은 국가와 밀착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맹아단계였던 한국의 자본가 계급은, 대전기간 동안 급성장하여 서양과 같은 독점자본 형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전시에 수요가 폭증한 군수산업에서 국민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공업에 이르기까지, 개화당 정권과 밀착한 독점자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일본의 자이바츠(財閥)를 음역한 ‘재벌’ 집단이 형성되었다. 대한광공업주식회사·대한무역주식회사·서경기기제작주식회사·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한국의 4대 재벌이었다. 평양 자본가들이 주축이 된 서경기기를 제외하면, 모두 국책으로 수립되었다가 민간에 불하된 자본이었다. 정권과의 밀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민은 배부르고 돈은 넘쳐흐르는구려. 이게 다 지극한 성은이자 국가의 덕 아니겠소?”

“산업화를 이끈 황제 폐하의 혜안, 각하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어허,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나는 그저 성상 폐하의 지엄한 황명을 받들었을 뿐이오.”

“물론 그렇습니다만, 각하께서 실무를 맡아 추진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개화당 정권, 특히 총리 재임시절에 적극적으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한 박영효가 대자본과 밀착했다.

갑신경장 시기 농업개혁과 식산흥업을 추진한 실무가가 1840년대생 김홍집과 어윤중이라면, 광무개혁 시기 공업화와 대전환을 추진한 실무가는 단연 박영효와 서재필이었다.

현재 살아 있는 개화당 원훈 중 1850년대생인 김옥균과 유길준이 개화의 이데올로그(사상가)로 방향성을 잡았다면, 1860년대생인 박영효와 서재필은 정책을 추진한 실무자였다. 이는 황제 이선도 높이 평가하는 바였다.

늙고 병들어 은퇴수순인 김옥균과 유길준, 기독교도이자 미국인 부인을 뒀다는 핸디캡으로 인해 파벌에 비교적 초연했던 서재필과 달리, 선왕의 부마이자 개화당 지도부인 박영효는 주류 중의 주류였다.

개화당 대신들, 황실 인척들, 군부 강경파, 대자본가들은 박영효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유럽의 대전쟁이 대한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게 되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뭐, 4년이면 오래 했지. 언제까지 전시호황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전쟁 피해자들이 들으면 격분할 일이지만, 한국의 대자본은 종전이 아쉽기 짝이 없었다. 세계대전이 대호황을 이끌었고, 대호황은 부를 급증시켰다. 가장 확실한 수익처를 잃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지요. 러시아에서 내전이 한창 아닙니까.”

“내전은 국가 간의 전면전하고는 경우가 좀 다르지.”

“어떤 의미에선 더 중요하지요. 그 미치광이 빨갱이 놈들에 맞선 전쟁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대한에 독일 군국주의자와 러시아 빨갱이들 중에 누가 더 위험합니까? 단연코 후자지요.”

“옳으신 말씀. 빨갱이들이 붉은 물을 풀어놓기 전에 방역 차단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근래 들어 노동조합 운동이니 사회민주주의 연구회니 이딴 게 생기는데, 위아래도 없는 유럽도 아닌 대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대개 서구 유학과 대외무역 경험이 많은 자본가들은, 사회주의를 극도로 경계하고 공포심을 느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다는 일은 이들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다.

“러시아 빨갱이들이 빚을 안 갚겠다고 하는 바람에 본 손해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당장 요절을 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동안 러시아에 팔아먹은 물건이 얼만데, 러시아 시장도 완전히 막혀 버린 거 아닙니까.”

소비에트 러시아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영국이나 프랑스만큼은 아니어도 돈을 떼어먹힌 한국 자본가들도 여럿이었고, 이들은 이념적인 이유에서든 실질적인 이유에서든 소비에트를 증오하게 되었다.

“서방도 대한에 러시아 개입을 원하고 있고, 때마침 시베리아에서 일도 터져줬으니. 본격적으로 전쟁에 나섰으면 합니다.”

“아, 그게 쉽지 않소. 러시아와의 전쟁은 장기전 우려가 있소.”

“독일도 격파한 대한국군이 오합지졸 빨갱이들을 못 이겠습니까?”

“폐하께서 원치 않으신단 말이오. 신하된 도리로 어찌 성지(聖旨)를 거역하겠소?”

군부 강경파와 자본가들의 러시아 개입 주장에, 박영효는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시베리아 정부를 승인하시고, 개입을 원하는 영국 및 프랑스와 협력하시고, 러시아와 전쟁에 나선 폴란드와 체코도 방문하시지 않았습니까? 성상의 뜻도 개입에 있으신 게 아닐까요?”

“아니오. 내전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서양 열강과 러시아 모두를 적당히 만족시킬 수 있는 선 안에서 회피하려는 데에 더 가깝소.”

이선은 자신의 뜻을 원훈과 내각에 알렸고, 박영효 자신도 개입주의자이긴 했지만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맞서기가 어려웠다.

“러시아 개입은 단순히 이념 문제가 아닙니다. 국익과 관계된 일이지요. 러시아의 붉은 위협에 맞서 대한의 이익선인 만몽(滿蒙)을 지키고,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외교적으로도 대한에 대한 서양 자유주의 국가들의 신뢰가 두터워지겠지요.”

“정치적으로도, 전시체제가 지속되면 근래 발흥하는 사회주의 세력들을 제압하고 야당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광무 23년(1919)의 정치는 과거와 달랐다.

‘개화당 독재’라고 불릴 정도로 황제와 소수 엘리트들이 정책 집행을 전담했던 과거와 달리, 팽창주의적인 여론과 결합한 개화당 우파와 군부 강경파 외에도 자본가들도 적극 거들었다.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종전으로 침체되고 있는 군수산업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잉여생산물을 어디다 해결합니까?”

“직접 개입 안 해도, 시베리아군에다가 넘기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그 치들, 지불할 돈은 있답니까?”

“없으면 자원으로 받아내면 되지 않겠소. 러시아 극동에 미개발 광산이 많은데.”

 “각하, 전비라면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앞장서서 대겠습니다. 대신 군수생산과 전시체제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시면 됩니다.”

전시체제가 지속되면, 대전경기의 중요한 축이었던 군수생산은 수요와 공급을 만족시킬 수 있고, 억압적인 전시 보안법을 이용해 발흥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을 억제할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시베리아의 자원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대자본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명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쓰라고 러시아 황제의 자녀들을 받아 준 게 아닙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이들을 아끼지 않으십니까. 폐위된 황제를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내세워 러시아에 군대를 파병시킬 명분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음, 황태자 전하는 그 누구보다도 러시아제국의 멸망을 안타깝게 여기셨지.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폐제(廢帝)가 위험할 수 있소.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요.”

“물론 성상께서는 폐제와는 오랜 벗이지요. 폐제가 대한에 베푼 공덕도 적지 않고 말입니다. 아, 실로 고려천자라 불린 대명 만력제와 같지요. 그러니 대한이 러시아 문제에 개입하기에 이보다 더 명분이 없지 않겠습니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냉정한 이야기였다.

「니콜라이 2세가 볼셰비키 손에 죽어 준다면 국가와 황실 입장에서도 이보다 더 좋은 개입명분이 생기겠는가?」

“아아, 그리된다면 마땅히 대보단(大報壇)을 쌓아드려야지.”

살아 있는 차르보다는 죽은 차르가 대한의 국익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자, 박영효는 냉소를 흘렸다.

박영효는 김옥균만큼은 아니어도 오랜 주군인 이선에 대한 충성심이 분명했으나, ‘황제가 국익을 위하여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간언하는 것도 신하된 도리’라고 판단을 내렸다.

만력제처럼 대보단을 쌓아 제를 올리고, 대명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북벌을 준비했듯이, 차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소비에트를 토벌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말이 옳소. 국익을 위해서라도 러시아 과격파들(볼셰비키)과의 전쟁은 불가피하오. 정부, 군부, 재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준비를 취하도록 합시다.”

“예, 각하!”

전쟁으로 이익을 누리고 성장한 이들은, 언제든지 전쟁의 북소리를 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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