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오월동주
광무 23년(1919) 8월. 대한제국 정부는 급격히 러시아 내전개입론으로 기울어졌다.
정부의 지침을 받는 관영언론, 친정부 성향의 민영언론들은 앞다투어 비난을 쏟아 냈다.
「러시아 과격파들, 황제 시해(弑害)! 과격파 정권이 전임 황제를 처형하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어떤 분이었는가? 우리 대황제 폐하의 친우이자 대한의 동맹 지도자로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격파들의 만행 – 한때 군주였던 분을 무참하게 시해!」
「현재 러시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미치광이 사회주의자들이 무지한 대중을 선동해 정권을 장악!」
「인민의 적으로 규정된 귀족, 장교, 사제, 자본가, 상인, 부농에 대한 끔찍한 박해와 학살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부녀(婦女)는 능욕당하고, 자제는 수용소나 다름없는 고아원으로 끌려가…….」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러시아 과격파들 – 명심하라, 러시아 다음에는 국경을 접한 모든 나라다! 대한도 그들의 마수에서 멀지 않다!」
「과격파들의 만행을 처단하기 위해 러시아 충의자사들이 봉기하다! 억압받는 민심의 여망(輿望)은 대련에 망명하여 대한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알렉세이 황태자 전하께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정부의 지침으로 일관되게 ‘과격파(過激派)’로 명명되었다.
소비에트의 의미인 ‘평의회’, 볼셰비키의 의미인 ‘다수파’는 긍정적인 뉘앙스를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회민주노동당이니 사회혁명당이니 하는 명칭은 아예 소개조차 되지 않았다.
반소 백군이 퍼트리는 프로파간다를 서방 언론이 옮겨 적고, 한국 언론은 다시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었다. 소비에트와 적군의 만행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었고, 백군의 만행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백군이 주로 퍼트리는 프로파간다는 ‘유대-마르크스주의’ 음모론이었는데, 한국은 유대인에 대해 감정이 없었으므로 그 부분은 삭제되었다. 대신 ‘군주 시해’와 ‘사회 붕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어떻게 군주였던 분을 시해할 수 있단 말인가?”
“성상의 상심이 크시겠군. 아라사 황제와는 오랜 벗이셨다는데.”
“폐주(廢主)가 무도하다 하여 폐위하는 경우는 있어도, 시해하는 경우는 없었네. 폭군 연산군도 유배에 그쳤으며, 광해군도 유배지에서 천수를 누리지 않았던가?”
“충의를 아는 우리 조선과 저 무도한 아라사 놈들이 어찌 같겠는가.”
“아니, 그렇지도 않네. 그들이라고 어찌 충의를 모르겠는가? 대한에 망명한 황태자를 추대한다고 하지 않는다든가?”
“오오, 과연 우리 성상의 혜안이로군!”
“신문 봤나? 과격파 놈들, 보통 미치광이들이 아니야. 약탈, 재산 몰수, 박해, 방화, 강간, 학살! 이런 끔찍한 놈들과 국경을 접해야 한단 말인가?”
“안 되지, 안 돼! 마땅히 토벌해야지!”
정부와 언론의 프로파간다에 여론을 주도하는 중상류계층- 즉 관료·장교·자본가·지주·지식인 등은 격분했다. 오랫동안 유교적인 충의(忠義) 관념을 체화하고, 근대화로 자본주의의 단물을 맛본 이들은 본능적으로 ‘러시아 과격파’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군주는 신성한 존재요, 정치는 교육받은 엘리트가 해야 하며, 사유재산은 불가침이고, 신분에 귀천은 없더라도 계층의 구분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러시아 과격파들은 이 모든 걸 파괴하고 있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선과 니콜라이의 동맹으로 잠잠해졌지만, 국경을 접한 이웃나라로서 러시아의 엄청나게 넓은 영토와 군사력을 두려워하는 전통적 공로증이 되살아났다. 이번에는 이념과 체제에 대한 공포였다.
「군주를 시해하는 역적들과는 잠시라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아라사 황제께서는 우리 성상의 친우이시며, 대한과 동맹을 맺은 맹우(盟友)이셨습니다! 어찌 이런 패역무도한 참사를 외국의 일이라 하여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대한은 중화의 정통을 대명(大明)에서 계승하였으니, 천하에 의리(義理)를 지키는 나라는 오로지 대한만이 남았습니다.
저 중국, 아라사, 덕국(독일), 오지리(오스트리아), 토이기(터키) 등에서는 군주가 덕이 없어 신민이 감히 지엄한 군상대권을 빼앗고 옥좌를 도둑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물며 걸주(桀紂)가 아니고서야 신민이 어찌 군주를 시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로 작금의 천하는 의리를 완전히 상실하기에 이르렀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하오나 우리 성상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聖人)이시니, 그 성덕(聖德)은 대한뿐 아니라 모든 동양과 아세아에서 우러러보는 바입니다.
아라사 황제의 자녀가 대한에 왔음은, 실로 다친 새가 품에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아라사 태자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을 잇고, 밝은 하늘을 되찾게 하는 것은 대한이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입니다!
아아, 진실로 의리와 왕화(王化)를 지키는 나라는 오직 대한뿐이니, 천하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나라도 오직 대한뿐입니다!
부디 성상께서는 밝으신 혜안으로 굽어살피시어, 천하에 의리가 분명함을 알리시옵소서!」
대외문제에 개입하길 극도로 꺼리는 유림들도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개화당 정부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유림은 유럽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광무 18년의 대전 참전과 20년의 파병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유림이 이렇게 적극적인 건 북벌전쟁 이후로 처음인데? 운현궁에서 손을 쓴 겁니까?”
박영효는 유림, 특히 영남 남인들과 관계가 깊은 운현궁이 유림을 움직였는지 궁금했다. 대원군 사후에는 이준용이 보수 유림과 유착 관계였다.
“뭐, 적당히 소문을 뿌리긴 했습니다만, 유림이 자발적으로 움직인 겁니다.”
이선과 개화당 정권의 급진개혁을 혐오하던 보수적 유림들도 북벌 성공을 계기로 친정부로 돌아섰고, 유림은 이선을 세종과도 같은 성군의 반열에 올렸다.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신유림’이 대세를 이루었고, 적극적인 근대학문 학습으로 유교와 근대화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진보적 개신유림은 정치에도 참여하여 신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아무리 개신유림이라 한들, 이들에게 있어서 인민혁명이나 군주 시해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곧 세상이 무너진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해혁명 이후 유림은 중화의 정통과 유교적 의리는 오직 대한제국만이 남았다고 확신했고, 1917-19년의 군주제 폐지와 세계혁명에 직면하자 더더욱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 결과 ‘세계 유일의 정통유교국가인 대한이 러시아에 의리를 보여야 한다.’라는, 유교적 명분론과 팽창주의가 결합한, 기이한 ‘유교 세계혁명론’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좋소. 어찌 됐건 유림이 전쟁을 지지한다는 건 놀라울 따름이군. 즉시 황태자 전하께 상주합시다.”
정부, 군부, 원훈, 관료, 개화당, 자본가, 언론, 심지어 유림에 이르기까지 개입을 부르짖는 상황이 왔다.
대외적으로도 명분이 충족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의 개입을 원했고, 시베리아 정부와 백군도 지원을 요청했다.
“시베리아 독립 만세! 시베리아 공화국 만세!”
7월 4일,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에서 시베리아 임시정부는 공식적으로 ‘시베리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들이 규정한 영토는 서로는 우랄산맥에서 동으로는 태평양에 이르는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 전체였다.
시베리아 자치주의자가 주도하는 시베리아 정부는 모든 시베리아인의 단결을 촉구했지만, 좌우 양쪽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소비에트 정부와 좌익은 시베리아 공화국을 부르주아 괴뢰정권으로 규정했고, 백군과 우익은 ‘하나이자 분리할 수 없는 러시아’를 쪼개려는 반역으로 규정했다.
시베리아 공화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지역 소비에트는 파르티잔 투쟁에 들어갔고, 일단 반소(反蘇)로 한배를 탔던 우익은 정부 통제를 벗어나 독단적으로 군벌화에 들어갔다.
지역 소비에트는 유격전으로 괴롭혔고, 세묘노프와 운게른으로 대표되는 군벌들은 시베리아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전투에 나섰다.
1919년 여름 백군의 군사적 성공은 더더욱 통합론에 불을 붙였다. 투르키스탄 백군이 진격한 후, 사마라에 사회혁명당 우파가 주도하는 제헌의회 재건정부가 들어섰다. 제헌의회 재건정부는 시베리아 공화국에 통합을 요구했다.
역시 사회혁명당 출신이 많은 시베리아 공화국은 연방제의 성립과 시베리아 자치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답을 보냈다.
“시베리아 분리주의 시도는 실패한 건가? 차라리 반소로 통합하는 게 나은 건가?”
“현재로서는 분리보다는 통합에 힘을 실어 주는 게 옳다고 봅니다.”
시베리아 정부를 배후에서 지원하던 현지 한국 외교관과 군인들도 백군으로의 통합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무렵, 전임 총리 스톨리핀이 돌아왔다.
1917년 사회혁명당의 테러로 중상을 입고 정치활동을 중단했던 스톨리핀은, 제정 폐지 이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했다.
러시아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스톨리핀은 미국 정부에 귀국을 청원했고, 내전에 개입하길 꺼리던 윌슨은 스톨리핀의 귀국을 막았다. 수차례의 청원 끝에 스톨리핀은 비록 유럽행은 허가되지 않았지만, 태평양을 건널 수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도착한 스톨리핀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대련이었다. 한국 정부도 흔쾌히 그에게 입국을 허가했다.
“황태자 전하, 여대공 전하! 인사 올립니다. 머나먼 곳에서 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무사했군요!”
5남매도 스톨리핀과의 재회를 환영했다. 니콜라이나 알렉산드라가 내심 스톨리핀을 꺼렸던 걸 올가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들을 찾아왔던 사람 중 가장 거물이자 유능한 사람이기에 환영했다.
“두 분 폐하의 서거에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저는 황제 폐하와 로마노프 왕조에 진심으로 충성을 바쳤던 사람으로서, 비통함을 금치 못합니다.”
“고맙습니다. 두 분의 추억을 공유하는 분께서 오니 저희도 기쁩니다.”
5남매와 회포를 푼 후, 스톨리핀은 바로 드미트리 대공과 접촉했다.
“볼셰비키에 맞서 정통 러시아를 재건하려면, 알렉세이 대공을 차기 황제로 선포해야 합니다.”
“전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정복고는 아직 이릅니다. 일단 볼셰비키를 무찌르는 게 중요합니다. 남러시아 정부, 사마라 정부, 시베리아 정부를 모두 통합하려면 제정이 아니라 제헌의회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제정복고 여부도 제헌의회에서 결정한다고 발표해야 인민이 따를 겁니다.”
군주제의 실패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스톨리핀은 망명지인 미국에 머물며 민주공화국의 역동성을 경험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각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드미트리 대공은 확고한 제정복고파였지만, 스톨리핀의 정치적 경륜에 한 수 접어야 했다.
“스톨리핀이라면 우리의 벗이 아닌가. 마땅히 그를 밀어줘야지.”
개화당 정부도 스톨리핀의 복귀를 환영했다. 극동 총독으로서 스톨리핀은 대한제국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이선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정통 러시아 정부가 재건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대한제국 역시 황제 폐하의 시해로 크게 충격받은 바입니다.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스톨리핀의 복귀로 극동 지역은 지도력 부재를 벗어나게 되었다.
철저한 군주제 지지자였던 스톨리핀은 좌익의 공적(公敵)으로 증오하는 이들이 적잖았지만, 극동에서만은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극동 총독으로서 농지개혁과 농민정착을 성공시킨 덕에, 자영농 중심의 극동에서는 스톨리핀을 지지했다.
“러시아는 하나이며 결코 분열할 수 없소! 시베리아의 인민들이여,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농민의 러시아를 재건합시다!”
“와아아아!”
한때 인민주의자든 분리주의자든 가차 없이 때려잡았던 스톨리핀이지만, 시베리아 정부를 주도하는 사회혁명당 우파와 화해했다.
“우리는 서로를 불신하고 혐오하지요. 나는 당신을 체포하려 했고, 당신도 나를 죽이려 했소. 하지만 하나이자 분리할 수 없는 러시아라는 대의를 위하여, 손을 잡읍시다. 나뿐만 아니라 로마노프 황실도 제헌의회를 따를 겁니다.”
“좋습니다. 적전분열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볼셰비키의 타도와 러시아 재건이라는 대의 앞에서, 분열하지 말고 타협합시다.”
사회혁명당 우파를 대표하여 스톨리핀과 손을 잡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전직 테러조직 수장 보리스 사빈코프였다.
사회혁명당 전투단을 이끌며 황족과 정부 고관들을 암살했던 사빈코프는, 혁명 이후에 국가주의 우익으로 돌아섰다.
임시정부의 육군차관까지 되었으나 실패한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연루되어 실각하여 극동으로 사라졌다가, 내전이 발발하자 복귀했다. 백군 수령 코르닐로프의 극동 대리인이 되어 백군과 시베리아 정부의 통합을 획책하다, 스톨리핀이 복귀하면서 통합을 위해 그와 손을 잡았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사빈코프는 1911년 테러조직을 이끌던 시절에 스톨리핀의 암살을 기도한 바 있었고, 스톨리핀은 사빈코프를 체포해 교수대로 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잡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가 극한에 달한 오월동주(吳越同舟)였다.
스톨리핀과 사빈코프는 니콜라이 2세 처형 이후 동요하던 시베리아 공화국 정부를 장악했다.
백군과의 통합을 부르짖는 ‘연방주의자’들이 독립파들을 대신해서 정권을 장악하니, 시베리아 공화국을 선포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아직 시베리아 공화국이라는 국체는 남았지만, 백군과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황제 폐하의 훈령이 도착했소. 시베리아 정부를 승인하고, 스톨리핀 수상을 지원하라는 명이시오.”
“오오!”
보고를 받은 이선도 스톨리핀에게 힘을 실어 주라는 명을 내렸다.
이선은 시베리아 분리공작을 더 선호했지만, 가능성이 더 큰 세력을 밀어주자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이윽고 시베리아 정부의 공식 지원요청과 함께, 전로한인총회(재러시아 고려인 최고단체)의 보호 요청도 들어왔다.
「현재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으로 인해 20만 동포의 안위가 위태롭습니다. 대한국군을 파병하여 안정과 평화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사전에 협의된 사항이었다. 고려인을 대표하는 최재형과 문창범이 시베리아 정부에 입각한 시점, 아니 그 이전부터 고려인 문제는 대한제국의 러시아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명분이었다.
“대한국 정부는 시베리아 공화국 정부와 전로한인총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베리아의 자주와 평화를 위하여 군사지원에 나선다.”
1919년 8월 14일. 대한제국 국경일인 조선 개국기념절을 맞이하여, 황태자 이진은 ‘군사지원’을 선포했다.
이선의 훈령으로 공식적인 선전포고나 파병조치는 취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그에 준하는 조치를 암시하는 선포였다.
대한제국이 반소 전쟁이라는 오월동주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