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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노동자 대투쟁 (632/812)

46화 노동자 대투쟁

원산 총파업은 단순히 감독관의 구타와 모멸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노동계급의 인내가 이를 계기로 폭발한 것에 가까웠다.

이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귀결이었다.

1900년대의 농지개혁과 자영농 육성, 의학의 발전과 평균수명의 증가는 농촌에서 인구압을 발생시켰다. 젊은 청년들은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 임노동자가 되니, 이들이 노동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1910년대의 본격적인 공업화 정책 이후, 한국은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있었다. 여전히 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이었지만, 노동자 계급이 급증했다. 1918년에 이르면 노동자 인구는 360만에 달했으며, 공장 노동자도 55만이었다.

1919년의 대한제국은 일본과 함께 아시아 신흥 공업국가의 반열에 올랐고, ‘대전경기’는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을 만들었다. 자본가뿐만 아니라 새로이 형성되는 중산층들도 산업사회의 수혜를 누렸다.

하지만 그 수혜를 모두가 누린 건 아니었다.

「방직공장 여공의 삶은 실로 참담합니다. 형편없는 임금은 그마저도 잦은 벌금으로 깎이기 일쑤입니다. 출근이 5분 늦어졌다고 벌금, 점심시간이 길어졌다고 벌금,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졸기라도 하면 욕설과 함께 벌금이 쏟아집니다. 조금이라도 부당함을 호소하면 즉시 해고됩니다.

…… 대개 시골 빈농의 여식들인 이들의 건강과 영양 수준은 좋지 못합니다. 벌어들이는 돈 대부분은 고향으로 송금되기에, 이들은 식대를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한국의 공업화는 단기간에 치고 올라가는 후발주자가 그렇듯이, 국가 주도 하의 자본 투입과 정권- 자본의 유착을 낳았고, 저임금과 대량생산으로 경쟁력을 찾았다.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과도한 노동시간에 시달렸다. 12시간 노동은 예사였고, 정부가 권장한 8시간 노동을 실천하는 기업은 국영 기업 말고는 없었다.

그나마 군수공업이나 중화학공업에 종사하는 숙련노동자들은 대우가 좋았지만, 방직업과 섬유업 등 경공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이나 일용직 남성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심각했다.

“근로자 또한 짐의 신민이요, 국가의 역군이다. 어떠한 차별과 불법행위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이선의 지시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근로기준법을 제정했지만, 현장에서 실천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정부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은 언제나 자본의 편이었다. 설령 황제와 정부가 선의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선은 전국에서 올라오는 방대한 보고서를 읽고 처결했지만, 구중궁궐에 있는 황제가 20세기 초의 열악한 통신 사정과 보고체계로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행정력이 일취월장했다 한들, 최상위에서 국가의 모든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위에 닿는 경우는 없었다. 경제와 산업을 다루는 주무부처인 탁지부와 상공부는 철저하게 국가-자본의 입장이었다. 지방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관료들의 보고서는 대개 긍정적인 내용만 담고 부정적인 내용은 감추기 마련이었다.

「근로역군이여 - 부국강병, 산업입국, 전쟁승리의 그 날까지!」

대전쟁은 한국 공업의 급속한 발달을 낳았고, 동시에 ‘비상조치’들을 정당화했다. 전시법은 전쟁에 반대되는 노동쟁의, 노동조합 결성, 파업은 일체 금지였다. 오직 전쟁승리만이 기준이 되었다.

노동조합은 허용됐지만 오직 국가가 통제하는 어용노조만이 인정됐다. 독자적으로 조직된 노조는 된서리를 맞기 일쑤였다.

애초에 1910년대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좋지 못했다. 그나마 유럽에서는 노동조합이 활성화되고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노동계급의 정당이 있어 노동자 권익보호에 나섰지만, 세계대전의 총력전은 정당과 노동조합마저도 국가에 종속되게 하였다.

대전기 동안 참았던 분노는 1917년부터 폭발하였고, 1919년에 이르면 전 유럽이 파업과 소요사태에 이르렀다. 전시호황 속에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도 노동자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왜 우리만 소외되어야 합니까? 대호황이라고, 모두가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합니다. 모두가 잘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왜 이렇게 배가 고픈가요? 우리가 벌어들이는 부는 다 누구에게 가고 있는 건가요?”

1919년, 종전까지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승전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자, 마침내 한국의 노동계급에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명히 산업화로 한국의 절대적 빈곤은 해결되었지만, 성장 일변도 정책은 상대적 불평등을 낳았다. 인간은 절대적 빈곤 못지않게 상대적 불평등에 분노하기 마련이었다. 노동자들은 호황에서 소외된 현실에 반발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노동자들을 동등하게 대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성지는 우리가 사는 현실까지 닿지 못합니다. 왜? 개화당과 자본가의 개들인 순검과 헌병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 폐하께 직소(直訴)합시다!”

“순검과 헌병 놈들을 몰아내자!”

과거의 조선인이든, 현재의 한국인이든 국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황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노동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의 분노는 자본가, 자본과 결탁한 관료에게 향했다. 특히 순검과 헌병에 대한 분노는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바였다.

갑신경장 이래 공권력을 독점한 순검과 헌병은, 특히 지방에서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경장 이후 확고하게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배치된 순검과 헌병은, 지방 반란과 불만을 확실히 억제하는 효과와 함께 대중의 공포와 불만도 샀다.

분명 한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급진적 근대화의 노정에도 이렇다 할 지방 반란과 유혈투쟁은 없었지만, 마침내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동지들! 우리는 전쟁승리를 위해 한마음으로 단결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정당한 몫을 되찾기 위해 단결합시다. 단결은 우리의 무기입니다!”

“옳소! 단결합시다!”

원산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동조합인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가 주도한 파업에 노동자 3천여 명이 즉각 동참했다

원산총파업은 한국에도 노동자 투쟁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경공업 노동자들의 산발적인 시위에서 숙련 중공업 노동자의 조직된 투쟁으로, 세계혁명의 물결에서 한국이 완전히 무풍지대가 아님을 알리는, 국가에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 * *

“경찰력을 동원해 총파업을 조속히 제압한다.”

정부는 파업 해결에 나섰다. 원산부 경찰력으로는 부족하자, 함경남도 경찰이 총동원되었다. 함흥에 주둔하던 국가헌병대가 원산에 출동하여 공포를 조장하도록 명했다.

“일하기 싫은 놈들은 마음대로 하라고 해라! 각지에서 대체 인력을 투입한다.”

국내외 자본가들로 구성된 원산상공회의소는 총파업에 가담한 노동자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위협했다.

인천과 평양 등지에서 모집된 노동자들로 대체인력을 확보하여 파업을 무너트리려 했으나, 자본가들은 뜻밖의 복병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원산 노동자 동지들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여기며, 파업을 지지하겠소.”

원산노련에 설득된 이주 노동자들은 파업에 동의했다. 공장과 항만은 여전히 중단되었다.

“아니, 이런 웃기는 놈들을 봤나. 조선 놈들이 이렇게 말을 안 들었나?”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외국 노동자들은 다루기 쉽겠지.”

자본가들은 만주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청국 저임금 노동자들을 동원하기로 했지만, 민족적 차별과 계급적 차별을 모두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순순히 한국 자본가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청국 노동자들은 취업거부를 선언했다.

“한국 노동자들의 불행을 이용하여, 우리의 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도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산은 지리적 특성상 러시아 연해주 및 일본 서부의 교류 중심지였다.

사회주의의 영향은 한국보다 연해주에서 훨씬 노출되어 있었고,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연해주 고려인들이 원산에 유입되었다. 이들에게 있어 1917년의 러시아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빛나는 모범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왔습니다! 머지않아 전 유럽이 뒤따를 따를 겁니다. 동양에서도 새로운 시대가 머지않았습니다!”

1919년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노동쟁의에 직면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원산에 기항한 일본 항만 노동자들도 파업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선언했다.

“한국의 동지들이여, 힘내시오! 전 동양의 노동자들이 그대들과 함께하고 있소!”

“고맙소, 동지들!”

원산에 거주하는 소수의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중견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동아시아에서 전례가 없는, 지역과 국가를 넘어선 노동자들의 단결이었다. 1917-19년 세계혁명의 파도가 유라시아를 넘어 태평양까지 밀어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어나라 굶주린 자들이여, 억압받은 민중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 최후의 투쟁에 모두 단결하라! 인터내셔널로 인류는 단결하리라!”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감싼다. 시체가 굳어 차가워질 때까지 피는 깃발을 물들인다!”

국제노동자연맹 인터내셔널을 상징하는 인터내셔널가를 한국어로 번안한 노래, 영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상징하는 ‘적기가(The Red Flag)’를 번안한 노래도 원산에서 울려 퍼졌다.

대다수 한국인 노동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지만, 소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국제노동운동의 상징인 적기를 들고 행진했다.

노동자들이 내뿜는 열기는 8월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웠다.

원산노련은 총파업에 관한 5대 강령을 발표했다.

1, 우리는 결속력으로 대항할 것이요, 결코 완력으로써 맹동하지 않는다.

2. 우리는 금주를 선포하니, 쟁의를 핑계하고 음주하지 않는다.

3. 우리는 항상 규율을 정연하게 하여, 진용을 문란하게 하지 않는다.

4. 식료품 및 기타 생활비를 가급적 절약하여 지구전을 가능하게 한다.

5. 일시 맹동으로 인하여 무의미한 희생을 당치 않도록 한다.

강령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를 뒤엎으려는 투쟁이 아닌 비폭력적 노동쟁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음 직면하는 정부 인사들은, 러시아와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이 한국에도 마침내 상륙했다고 믿게 되었다. 사회주의에 혐오와 공포를 느끼는 개화당 정부는 총파업의 성격을 좌익 폭동으로 간주했다.

내무대신 이규완은 노동절 집회를 추진했다가 소요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된 신한청년단장 여운형을 직접 만났다.

“한때 촉망받던 관료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신세라니, 딱한 일이군.”

“허허, 내무대신 각하께서 직접 심문하신다니 영광일 따름이군요.”

여운형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정부가 여운형에게 여러 차례 회유를 시도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내무대신이 직접 나서기에 이르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신한청년단은 지금 원산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원산노련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통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합니다. 원산노련은 굳이 따지면 생디칼리슴의 영향을 더 받았지요.”

생디칼리슴(Syndicalism)은 노동조합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을 통해 국가를 변혁하자는 운동으로, 이른바 ‘혁명적 조합주의’였다.

“소비에트가 아니라?”

“생디칼리슴은 소비에트 러시아보다는 프랑스에 더 가깝습니다. 기본적으로 원산노련 자체가 자연발생적인 노동조합이지, 중앙에서 명령을 내려 조직하진 않았을 겁니다. 대한에는 노동자들에게 그럴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곳이 없습니다.”

“그대들 신한청년단이 있지 않나.”

이규완의 단언에 여운형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과대평가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지만, 우리도 제발 전국의 노동자들과 관계가 있으면 좋겠군요. 신한청년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황성과 경기의 일부 노조입니다. 대한의 노동운동은 중앙 없이 산업별로, 지역별로 자생적인 형태입니다. 그동안 정부가 어떻게 노조를 탄압했는지는 그 누구보다 각하가 잘 아실 텐데요.”

이규완은 여운형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안 총수로서 노동운동을 옥죄고 탄압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동시에 노동자들에게 계속 당근을 쥐어 줘서 자발적으로 순응하게 만들자고 건의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는 친정부 어용노조를 확실히 밀어줬고, 내무부 산하 노동국에 예산을 보내 노동자 복지체계도 갖추도록 했다.

바로 그렇기에,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대체 그대들이 원하는 건 뭔가?”

“이 역시 잘 아실 텐데요. 보통선거권 부여, 8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도입, 노동자 대우 개선, 공공부조 확대, 어용노조가 아닌 자생적 노동조합 단체교섭권 확립…….”

“너무 일러!”

이규완이 탁자를 치면서 여운형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모든 조치는 정부가 시기를 조절해 시행하고 있네. 다름 아닌 성상께서 추진하시는 바야. 성상께서는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산업입국을 모두 이뤄 내셨네.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도 반드시 이뤄질 거야. 그런데 노동자들은 왜 그렇게 조급하지?”

이규완은 집무실에 걸려 있는 지도를 가리키며 외쳤다.

“대한은 40년 노력 끝에 이제 막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을 뿐이야. 세계질서로 치면 서양 열강이 부르주아지고 대한은 프롤레타리아지. 대한이 부르주아가 되는 게 우선이야! 그런데 이런 엄중한 시기에 계급적 이기주의라니? 계급 분열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네!”

“내무대신 각하.”

여운형이 정색하면서 답했다.

“계급적 이기주의는 모든 부를 독점하려는 자본가들이지요.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조급하다고 하는 건 오만입니다. 빈민촌에 가서 현실을 보십시오. 일용직 지게꾼들이, 방직공장 여공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희망적인 내일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현실을 고쳐야 합니다.”

“자네가 쓴 ≪한국 노동계급의 실태≫는 나도 읽어봤네.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란 없어. 그 번영하는 서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불평등은 산업사회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야. 국가를 위해서,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네.”

“그 불평등을 시정하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은, 희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들으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난 자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국가에 봉직한 사람이야. 40년 전 조선이 어땠는지 아나? 세상에서 가장 허약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어! 그런데 우리가, 성상과 개화당이 국가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어! 그 허약하고 가난한 나라를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열강의 문턱까지 이끌고 왔다고!” 

이규완은 냉정한 공안관료답지 않게 열변을 토했다. 

“뚝섬의 가난하고 무식한 나무꾼이었던 나도 지극한 황은을 입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네. 새로운 시대가 아니었으면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는가? 때가 되면 노동자들에게도 다 수혜가 돌아갈 거야. 그런데 외국의 불순한 사상, 외부세력의 조종을 받아 감히 국가에 반기를 들어?”

이규완 말대로 갑신경장 이후에 태어난 여운형은 그 이전의 조선을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한국의 현실을 피상적인 보고서 위에 살아가는 고급관료들보다 잘 알고 있었고, 세계에 대한 시야도 더 넓었다.

“각하, 국가의 영광이 곧 국민의 영광인 시대는 끝났습니다. 러시아와 유럽의 국민은 이미 이를 깨달았습니다. 대한국민이 뒤를 따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여운형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그 어떤 국가도, 민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집단도 민중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면 오만입니다. 결코 민중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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