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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진실의 시간 (634/812)

48화 진실의 시간

8.22 학살의 정보는 통제되었다. 원산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한 군경은 지역 통제를 실시하고, 도시를 출입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사태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정부관계자뿐이었다. 그런데 정부라고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발포까지 간 건 불행한 일이지만, 덕분에 조속히 파업을 끝낼 수 있었군.”

“사상자 발생으로 문제 될 건 없겠지요?”

“러시아 과격파들의 조종을 받는 좌익 폭도들을 진압한 건 칭송받을 일이지, 문제 될 건 뭐요?”

“파업 가담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황태자 전하의 효유를 전달했고, 시위대에게 발포 전에 세 번이나 경고했다잖소. 경고를 무시한 자들의 자업자득이지.”

정부도 현장 지휘관의 보고에 의존했다. 내무부 경무청 소속 함경남도 치안국, 군무부 국가헌병대 모두 대동소이한 보고를 했다.

「군경은 효유문을 발표하여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폭도들의 경찰서 습격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발포로 대응함.」

20세기 초는 19세기와 비하면 통신수단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지만, 원산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였다. 서울-원산 간에는 경원선 철도와 전신선이 있었지만, 전보에 의존하는 통신은 한계가 있었다.

만약 서울이나 인천, 혹은 평양에서 일이 터졌다면 당장 난리가 났을 터였다. 직통 전화가 깔려 있고, 기자들도 많고, 외교공관이 밀집해 있는 도시들에선 비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산에는 일본과 러시아 영사관만이 있었고, 외교관계 단절로 인해 러시아 영사관은 철수한 상태였다.

그나마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일본 영사관이었지만, 이들도 본국에만 보고했을 뿐 침묵했다. 파업 분쇄와 노동운동 탄압이라면 일본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요컨대 개화당 정부는 자신들이 만든 ‘붉은 위협’이라는 세계관 속에 스스로 갇혀 버린 셈이었다.

「원산 폭동! 러시아 과격파들의 조종을 받는 붉은 폭도, 도시를 장악하고 경찰서 습격 시도!」

「노동해방과 계급혁명 이념으로 물든 극렬 불순세력의 난동!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참사가 대한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국민의 불안감 팽배!」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의 정부가 있다! 정부의 단호한 지도력과 현지 군경의 기민한 조처로 폭동 진압!」

「본지 특별 취재! 붉은 폭도에 점령된 충격의 한 달! 공포에서 벗어나 마침내 안정과 평화를 되찾은 원산 주민들!」

관보와 주요 신문들은 정부 발표를 받아 적기에 바빴다. 노동자들에 의해 불탄 원산상공회의소 사진이 1면에 실리고, 붉은 혁명의 위협이 대한제국에까지 상륙했다고 호도했다. 

개화당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를 극도로 혐오했기에, 정부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상황을 파악한 원산지국의 기자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사를 송고해도, 편집부에서 잘려 나갔다. 설령 기사가 실린다고 해도, 내무부 공보국에서 검열할 터였다.

“빨갱이 놈들, 정말 무시무시하군.”

“도대체 뭐가 불만이래요? 이런 태평성대에.”

“그러게 말이야. 경찰서까지 습격하다니 원.”

“빨갱이들 본성이지. 아라사에서처럼 폭동 조장하는 거 아니겠나.”

“나도 순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번만은 아주 잘했어! 어디 감히 국가에 맞서 혼란을 부추겨?”

당대 여론을 주도하는 건 신문이었다. 신문을 읽는 식자층들은 좌익 폭동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믿었다. 

아무리 근대화가 되었어도 의식까지 금방 바뀌지는 않는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관(官)’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기에, 총파업이니 투쟁이니 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정부와 군경이 원하는 대로, 원산 총파업과 8.22 학살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감출 수는 없었다.

“오, 주여.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원산 인근 덕원에는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트 선교수도회의 수도원이 있었다.

1884년 조선의 종교 자유화 이후 경쟁적으로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가 밀려들어 왔는데, 한국 정부는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서양과의 친선을 위해 선교를 허용했다.

함경남도에는 독일 가톨릭 수도사들이 세운 덕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독일에서 파견된 신부와 수사들은 철저하게 현지화를 시도했고, 한국어를 익히고 전통문화를 습득했다.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 혹은 옥낙안(玉樂安) 신부는 그중에서도 단연 한국어가 유창하고 문화에도 해박했다. 한글을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한문을 익히기 위해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배울 정도였다. 조선의 전통 미술에 심취하여 그림을 수집하고 전국을 순회했다.

대독 선전포고 이후 한국과 독일은 적국이 되었지만, 신부들은 이미 세속을 떠난 사람이었기에 전쟁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신부님, 우리 형제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지상에서 거짓이 승리하고 진실이 패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습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없는 종교만이 진실을 밝힐 수 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안드레아스 신부도 원산을 방문했다가, 그날 벌어진 참상을 똑똑히 보았다. 군경은 외지인이라면 모두 의심하고 감시했지만, 외국인에 신부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몰래 사진을 찍고 진실을 기록했다.

안드레아스는 한국 전체를 사목하는 서울 대교구에 진실을 알리려 했지만, 뮈텔 대주교는 정교분리론에 입각하여 사제들이 현실에 불개입하라고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차라리 완전한 중립이면 좋은데, 대주교는 개화당 정부와 야합했다. 개신교가 서재필과 윤치호 같은 개신교도 정부 인사들과 야합하듯, 뮈텔도 가톨릭에 우호적인 인사와 야합해 선교 지원을 받았다. 현 총리 민영환은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대주교와 관계가 돈독했다. 이러니 대교구에 알려봤자 묵살당할 게 뻔했다.

고심하던 안드레아스는, 뜻밖의 동조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원산에서 벌어진 일은 사회주의 폭동이 아닙니다. 학살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브란스의학교 세균학 교수인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石虎弼)은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사로, 그 역시 한국과 한국인을 깊이 사랑했다.

스페인 독감 국내 방역 위원으로 선임되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스코필드는, 독감이 진정되자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원산 인근 영국인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혈폭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스코필드는 진료를 돕기 위해 원산에 도착했다가, 언론에 보도된 기사와 실상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의사인 스코필드는 외지인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고, 치안국장인 안환이 직접 대면해 침묵 요구를 받았다. 스코필드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안드레아스는 스코필드와 접촉했다. 국적과 종파는 다르지만 두 사람은 인류애로 공명했다.

“닥터, 나는 서원(誓願)에 매인 몸이라 직접 나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닥터라면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진실을 위해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할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 참사의 근원이 된 공장이 영국계 자본이라는 사실에, 내 조국 영국이 이토록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안드레아스는 스코필드의 의지가 굳건함을 믿고, 자신이 찍은 사진과 기록을 넘겼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스코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님이 제게 주신 자료, 그리고 제가 두 눈으로 본 사실을 똑똑히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스코필드는 의료용 가방 안쪽에 자료를 넣고 원산을 떠났다. 출입을 철저히 검열하던 경찰들도, 의료용 가방까지는 샅샅이 뒤지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언론사를 물색했다. 영국 특파원 베델이 한국 자유주의자들과 의기투합하여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만이 주요 언론 중에서 정부의 입김이 덜했다.

역사의 변화로 인해 베델은 1919년까지 살아 있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 이사장이자 한영친선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닥터, 나는 이래저래 한국 정부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기사를 내면 나와 신문사 입장이 어떨지는 짐작하시겠지요.”

“물론 압니다. 하지만 나는 베델 씨의 양심을 믿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영국인으로서 영국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델은 빙긋 웃었다. 과연 그에게는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이 훨씬 중요했다.

“하긴 영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독립을 외치는 인도인과 아일랜드인에게 총을 쏘고 있지요. 비록 내가 인도인과 아일랜드인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도,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한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는 한국이 영국 제국주의와 같은 잘못된 길로 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진실이 승리할 겁니다.”

8월 27일, 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인 ≪코리아데일리뉴스≫에 특보가 실렸다.

「The Massacre of Wonsan(원산의 학살)!」

검열을 피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문판에 실린 특보는, 안드레아스 신부가 찍은 사진과 기록, 의사로서 직접 경험한 스코필드의 고발이 담겼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내무부 공보국에서 정간 (停刊)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기자들이 공보국 관리의 앞을 막아섰다.

“정간! 오늘 자 코리아데일리뉴스는 정간이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미 2쇄까지 인쇄 완료됐고, 우리는 대한국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지킬 겁니다.”

“전시 특별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정간을…….”

“언론자유 보장하라!”

“공보국은 물러가라!”

기자들은 스크럼을 짜고 윤전기 앞에서 버텼다. 공보국 관리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했지만, 베델이 손을 흔들었다.

“코리아데일리뉴스는 영국인인 어니스트 베델이 대주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설마 동맹국인 영국인을 탄압하고, 사유재산을 파괴하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완전히 볼셰비키나 하는 짓이 아닙니까?”

베델의 정론에 공보국 관리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나 하는 짓’이란 말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영국인 자산은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특보는 영문판이란 특성상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없었지만, 재한 외국인과 영어 독해가 가능한 한국 지식인에게 빠르게 번져 나갔다.

생생한 사진과 경험자의 고발이 담긴 특보는 독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죽일 놈들. 비무장으로 행진하는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고, 좌익 폭동이라고 뒤집어씌운 거야?”

“사상자가 극히 적다더니, 보게나. 사망자 40여 명, 부상자 500명 이상!”

“경찰 놈들, 갈 데까지 가는구만.”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은 분개했다.

대중적 분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정계에서 재빠르게 반응했다. 신민당 사무총장 안창호는, 즉시 함남도당을 통해 진상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개화당 35년 통치의 결정적인 균열이 되리라고는 자유주의 지식인이나 안창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경들, 이게 대체 어찌 된 겁니까? 이 보도는 대체 뭡니까?”

대한매일신보 특보를 확인한 이진은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정부 발표와 신문 보도 간에 괴리가 너무나도 컸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부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민영환이 난처해하며 고개를 숙이자, 이규완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이는 해당 신문사의 왜곡보도입니다. 신속히 정간처분을 내렸어야 했는데 영문판이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내무부의 책임을 통감하며 죄를 청합니다.”

내무대신은 원산에서의 발포가 아니라 보도를 막지 못한 것에 죄를 청했다.

“내가 분명히 진압보다 효유를 우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겁니까?”

이진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떠올라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수도 한복판 궁전 앞에서 황제에 청원하다가 학살당한 사람들과, 지방 도시에서 파업 중에 총격을 받은 노동자들의 상황이 같진 않았다.

“당국은 수차례 황태자 전하의 효유를 전하며 자진해산을 요구했지만, 저들이 경찰서 앞까지 몰려와 위협을 했기에, 부득이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병대의 보고도 경찰과 같습니다. 설령 저들 대부분이 순량한 노동자라 할지라도, 모스크바와 결탁한 불순한 세력의 조종을 받는 이상, 진압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진압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이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비록 저들이 불령한 사회주의자들의 조종을 받았다고 해도, 어찌 됐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건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부상자들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하여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체포된 이들은 엄중히 조사하여 죄가 있는 이들은 여죄를 밝혀내고, 죄가 없는 이들은 방면하도록 해야 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저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옳단 누가 그르단 말인가?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부가 옳고 외국계 언론이 틀릴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언제나 그런가?’

이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장차 입헌군주로서 자신은 내각과 관료들의 보고를 받아 정책을 집행해야 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정부 대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국가의 원훈이자 공로자인 그들의 조언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모든 일에 원훈과 각료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네 태도는 실로 훌륭하다. 하지만 군주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의 조언도 의심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언제나 언로는 다양하게 열어 두어라. 결코 신뢰하는 소수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아니 된다.」

이진은 문득 부황의 충고가 떠올랐다. 이 조언이 지금보다 와닿을 수가 없었다. 

‘나만의 사람이 필요하구나. 궁궐에 있는 나의 눈과 귀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해.’

이진은 이선의 눈과 귀가 되고 있는 제국익문사에 대해 피상적으로는 알아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익문사는 황제 직속으로 극비 운영되고 있었다. 

대리청정 중인 이진이 활용할 수 있는 건 황실 직속 경위원이었다. 이진은 은밀히 경위원을 통해 진상파악에 나섰다.

‘만약 대한매일신보가 옳았다면? 언론의 자유도 필요하구나. 공보국 발표와 관영언론만으로는 정보를 확신할 수가 없어.’

이진은 막연히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언론의 자유가, 황태자인 자신에게도 절실하다는 걸 깨달았다. 구중궁궐에 있는 군주를 상대로는 얼마든지 정보통제가 가능했다. 니콜라이 2세도 군주의 기분을 헤아린 편향적인 보고만을 받고 관영 언론만 읽었기에, 최악의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부황께서 대한에 계셨더라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아직 나는 부황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하구나.’

이진은 부친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만약 부친이 당장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국가를 잘 이끌 자신이 없었다. 대한제국에 광무제 이선은 절실히 필요했다.

“성상께서 돌아오시면, 국체를 수호하려는 노력을 부정하시지 않을 것이네.”

“암, 성상과 개화당은 함께 국가를 개혁한 40년 동지인데.”

대신들과 개화당은 오히려 황제의 복귀를 고대했다.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했고, 황제도 동의하리라 생각했다.

황실 기선은 5주간의 항해를 마치고, 9월 초 인천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제 불과 며칠 뒤였다.

항해 중인 이선이 받을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황제가 귀국하여 어떤 결단을 내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진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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