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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개화당의 종언 (641/812)

55화 개화당의 종언

그날 밤, 김옥균은 황제를 단독 알현했다. 늦은 밤에 독대를 청할 수 있는 현직 총리나 제국익문사 독리 이회영을 제외하면, 퇴직한 신료 중에선 김옥균이 유일하게 가능했다.

“고균이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알현을 청한 건 간만이구려. 그래, 어인 일이오?”

이선은 방문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긴히 아뢰올 일이 있사옵니다.”

“그래요, 들어 봅시다.”

김옥균은 지난 반년 간 일본, 중국, 청국 등을 순방한 결과를 보고했다.

일본 총리 하라를 회견하고, 중국의 실력자 단기서, 정통성을 가진 손문 등을 두루 만났다. 그간 가장 공을 들인 건 만주로, 이선의 귀국 직전까지 봉천에 머무르며 청국 외무고문 이완용과 함께 청국과의 새 조약을 감독했다.

“좋소. 경에게 동양의 일을 맡기고 가길 잘했군. 노고가 많았소.”

“신은 성상의 명을 받들었을 뿐입니다.”

이선은 치하하며 김옥균에게 어주(御酒)를 내렸다. 어떻게 운을 뗄까 고심하던 김옥균은 마침내 결심하여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제 대한은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파리에서 서양 열강의 공인을 받았고, 만주는 확고한 대한의 세력권이 되었습니다. 40년 전 가난하고 허약했던 조선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일입니다. 실로 폐하의 위대한 성공(聖功, 거룩한 공적)이라 하겠습니다.”

“허허, 이 어찌 짐 한 사람의 공이라 하겠소? 문무백관과 국민들이 합심하여 이뤄 낸 훈공이지.”

김옥균의 새삼스러운 찬사에 이선도 관례적으로 화답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45년 전. 문익공(박규수), 천죽재(오경석), 대치장(유홍기)이 북촌의 반가(班家) 자제들을 모아 문익공의 사랑방에서 신학문을 가르쳐 주었지요. 문익공이 서거한 후에는 천죽재가, 그 사후에는 대치장이 저희를 이끌며 새로운 시대를 꿈꿨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노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로 개화당의 태동이구려.”

1870년대 초, 오경석과 유홍기가 촉망받는 젊은 인재 홍문관 부교리 김옥균을 끌어들여 박규수의 사랑방으로 데려가면서, 개화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 개화파로 분류되는 인물들 대부분이 바로 이들의 문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때 문익공의 사랑방을 찾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도 모두 늙어 병석에 누워 있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래도 아직 금릉위는 건재하지 않소.”

“예, 금릉위는 형 영교를 따라 일가친척인 문익공의 사랑방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잘생긴 소년이었지요. 일설에는 부마로 간택된 이유가 미남이라 뽑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늙은 모습에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만, 하하.”

“하하, 과연 부마 간택에 외모도 중요하지. 예경공주의 배필을 구할 때에도 인물을 안 볼 수가 없소. 이왕이면 대한 최고의 미남이면 좋겠지. 희도 어느덧 스물을 넘어 혼례를 시켜 주려고 하는데, 오라비인 태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안 한다고 하니.”

조혼을 금지한 대한제국 민법에 따르면 남성은 20세, 여성은 16세 이상부터 혼례를 올릴 수 있었다. 태자의 국혼은 까다롭게 후보를 살피고 있어 황실은 먼저 예경공주 이희의 혼례를 추진했으나, 본인이 고사하여 뒤로 미뤄졌다.

“아, 신이 명을 받들어 청 황실에 국혼을 타진해보았습니다. 청 황실 또한 긍정적입니다.”

“흠. 고려 공민왕 이래 외국인 왕비는 없었으니, 550년만의 일이오. 장차 대한의 황후로서 부족함이 없을지 세심히 살펴야 하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김옥균은 이선의 밀명을 받아 태자 이진과 청국 공주간의 국혼도 알아보고 있었다. 

“새삼 세월이 느껴집니다. 신이 폐하를 처음 뵈었을 때만 해도 홍안의 미청년이셨는데, 어느덧 그 자제께서 혼례를 치르시게 되다니.”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고 하든가, 일흔을 앞둔 김옥균은 새삼 옛 추억에 잠겼다.

“그때가 임오년이었으니, 벌써 37년 전이오. 고균도 그때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는데, 이제 고희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원, 그때의 젊음이 그립구려.”

이선도 술잔을 기울이며 새삼 추억에 빠져들었다. 김옥균이 어찌하여 옛일을 언급하는지, 다음 말이 무엇일지 충분히 예상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옥균의 말을 막진 않았다. 다른 이였으면 벌써 끊고 본론이나 말하라고 했을 터였다. 그만큼 오랜 동지이자 고굉지신이었다.

“신이 훗날 개화당이 될 비밀결사를 처음 이끌게 되었을 때만 해도, 막연히 장대한 목표만을 세웠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귀국하시어 저희를 이끌어 주지 않으셨더라면,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벌써 백골이 되어 땅에 흩뿌려지고, 조선의 미래도 어둡기 짝이 없었을지 모르지요.”

김옥균의 말은 묘하게 예언적이었다.

이선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조선은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가혹한 탄압을 받고, 개화당 인사는 벌써 죽었거나 일제의 부역자가 되었을 터이다. 그중에서도 김옥균은 암살된 후 시체마저 찢겨 나가 조리돌림을 당하는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았었다.

“신이 감히 아뢰옵건데, 개화당은 폐하를 지도자로 받들어 함께 대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금석(홍영식)과 위산(서광범)도, 병석에 누워 있는 구당(유길준)도, 파리에 있는 송재(서재필)도, 그리고 오늘날 권신이라 탄핵받고 있는 금릉위도 모두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김옥균은 지난 일을 상기시키며 간언했다.

“지난 37년간 개화당은 폐하의 고굉이 되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주독립,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 조약개정, 대전승전, 열강입국. 모두 폐하의 명을 받들어 개화당이 수행한 일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과오도 많았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도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야겠지요.”

“고균.”

이선은 마침내 김옥균의 말을 끊었다.

“짐이 금릉위와 그 일파를 토사구팽 한다고 생각하시오? 경도 원산 학살이, 소조의 눈과 귀를 가린 일이 가볍다고 생각하시오?”

“물론 가벼운 일은 아닙니다. 하오나 지난 세월 동안 그들이 대한과 폐하를 위하여 세운 공이 적지 않습니다. 부디 관용을 베푸시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짐이 태종대왕의 선례를 따른다고 해서 그들을 죽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오. 대한은 이미 근대국가인데 어찌 그러겠소?”

이선은 처음부터 박영효 일파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정치적으로 영구히 제거한다면 충분했다.

“자주독립,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 조약개정, 대전승전, 열강입국. 다 맞는 말이오. 개화당 정부에서 이뤄진 일이지. 개화당은 19세기의 시대정신을 빠르게 이끌어 나갔소. 37년 전 우리가 함께한 맹세는 대부분 이뤄 냈소. 그런데 말이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이오.”

이선은 자신과 김옥균의 술잔에 가득 술을 담았다.

“고균, 지난 일을 떠올려 보시오. 탐욕스러운 세도가들,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들, 구습에 사로잡힌 사대부 무리들. 개화당은 이런 무리들을 통렬히 비판하여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정권을 잡았소. 그런데 이들도 처음부터 썩었던가? 아니었소. 사림(士林)이 얼마나 이상에 불타는 선비들이었는지 떠올려 보시오. 경의 가문인 안동 김문도 본래는 충신과 선비의 가문이었소. 그런데 권력을 오래 잡으니 썩어 문드러지게 됐지. 그러니 안동 김문의 일원인 경도 앞장서서 세도가를 비난하고 끌어내린 것이 아닌가?”

기실 개화당은 지배계급 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인사들로 출발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개화당은 집권 35년 만에 초심을 완전히 잃고 말았소. 19세기의 시대정신은 충실히 이해했으나, 새로운 세기의 시대정신하고는 맞지 않소. 원훈, 관료, 군부, 재계가 결탁해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했소. 이들은 자주독립과 열강입국에 만족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팽창하길 원하고,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더 많은 부를 원하지. 국민을 우민으로 여기고, 야당을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지. 틀렸소. 이 모든 게 틀렸단 말이오!”

이선은 술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지금이야 괜찮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대로 10년, 20년 더 간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디까지 폭주할지 짐작도 가지 않소! 열강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제는 세계 최강의 자리도 도전해 봐야겠지. 만주도 모자라서 중국 대륙으로 나가자고 할 것이요, 연해주와 몽골도 모자라서 시베리아로 나가자고 하겠지. 그 끝은 어디겠소?”

20세기의 역사를 아는 이선으로선 이 시점에서 제동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화당 우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 제국주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개화당의 역사적 소임은 다했소. 이제 역사에서 물러날 때가 온 거요.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소. 대한이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길 원했잖소? 고균의 오래전 소원이 이뤄진 거요! 유럽의 자유와 평등을 프랑스가 선도하였듯, 장차 아시아의 자유와 평등은 대한이 선도하길 바라오.”

이선은 근래 떨쳐 일어난 민중에 대한 소회를 김옥균에게 털어놓았다.

“짐 또한 마찬가지요. 선위는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벌인 게 아니오. 외정, 외교와 국방은 계속 짐이 맡을 터이나, 내정은 한발 물러나 후속세대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균은 내 뜻을 이해해 줬으면 하오.”

이어서 이선은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밝혔다.

김옥균은 새삼, ‘광무정권’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급진적인 인물은 광무황제 이선이었음을 깨달았다.

“노신은 삼가 성상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선이 본인의 구상대로 선위의 뜻을 굽히지 않는 상황에서, 전 총리대신 민영환은 선위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다.

바로 자신이 이끌던 내각의 잘못으로 인해, 국가에 분란을 일으키고 황제가 선위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자책했다.

생부 민겸호가 임오년 역적으로 처형당한 이후, 이선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유학까지 다녀오고 관직에 올라 마침내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인 총리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황제의 뜻을 살피지 못하고 오히려 선위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민영환은 자책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선이 노리는 건 박영효와 개화당 우파였고, 탄핵도 그들에게 집중되는 상황이었지만, 민영환은 총리로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오랫동안 고심하던 민영환은 마침내 결심했다.

「신 영환은 이미 37년 전 임오년에 생부의 죄로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인데, 성상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과분한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온데 신의 불충과 어리석음으로 성상과 국가에 괴로움을 끼쳐 드렸으니, 신은 책임을 통감하며 목숨으로 죄를 갚아야 마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지극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3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 대한제국 3천만 동포에게 작별하며 고하노라!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만 배 더욱 분발하여, 의지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충군애국 할지어다. 대한이 만세에 자주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어두운 저승에서라도 기뻐 웃으리다.」

역적 민겸호의 후예로 낙인찍힌 이래, 비록 사면을 받았다 할지라도 언제나 마음에 걸렸던 민영환은 몰래 청산가리를 감춰 두고 있었다.

황제와 국민에게 유서를 남긴 민영환은 준비해 둔 청산가리를 음독했다.

이튿날 아침 가족들이 민영환을 깨우려했을 때, 이미 그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향년 59세. 원역사보다 14년을 더 오래 살았으나, 자결이라는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을사늑약 직후 망국의 대신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한 게 아니었으니, 역설적이나 행복한 죽음이라 할 수 있었다.

“호외요! 호외! 민영환 대감 자결!”

“책임을 통감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민영환의 자결은 조야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총리까지 오른 이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선은 속히 민영환의 자택에 거동하여 직접 조문하고 조령을 내렸다.

“짐이 고 민영환 공의 충정을 어찌 잊겠는가? 고인의 공훈과 충정은 만세에 기억되리라.”

이선은 민영환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자결이 옳은 해결책임이 아님을 강변했다.

“하지만 섣불리 목숨을 끊는 것만이 어찌 충신의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살아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황제가 에둘러 자결이 옳지 않다고 하였음에도, 민영환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울림을 주었다.

원산 학살의 주무부처 대신으로서 누구보다 책임을 통감하는 내무대신 이규완과 군무대신 박유굉도 그를 뒤따르기로 결의했다.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에 보답하고, 국가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의 목숨으로 정부, 군대, 경찰의 책임을 대신하고, 조직을 보위한다.”

민영환이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도 있지만, 그들이 대표하는 개화당 우파, 군부와 경찰 조직 전체에 비난이 집중되는 걸 피하기 위한 결단이기도 했다.

자결을 금한다는 궁내부의 특사가 오기도 전에, 박유굉은 인수인계까지 임시로 업무를 계속 수행하던 군무부의 집무실 문을 걸어 잠궜다.

육군대장 정복을 입고 대훈위서성대훈장 이하 훈장들을 단 채로, 박유굉은 황제의 어진영과 태극기 앞에 거수경례를 했다.

“신, 군무대신 육군대장 칙임관 1등 박유굉, 대원수 폐하께 마지막 경례를 올립니다.”

쾅! 쾅!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 각하! 문을 여십시오! 대원수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황명을 받으십시오!”

부관의 다급한 목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박유굉은 오히려 더 빠른 결단을 내렸다. 그는 황제가 하사한 권총을 뽑아 들어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탕!

한 방의 총성과 함께 대한제국군의 기틀을 닦은 박유굉이 쓰러졌다.

향년 53세. 원역사에서는 1880년대 일본 육사에 입학하여 조선의 군제개혁을 꿈꿨으나, 갑신정변 실패와 일가친척의 연루로 인해 22세 한창 나이로 자결한 비극의 인재였다.

경장의 성공으로,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군사교육을 받은 인재로서 동양에서 으뜸가는 강력한 육군의 기틀을 닦았으나, 그 역시 운명은 피하지 못했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이규완도 자택에서 칙임관에게 하사된 단도를 빼들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대감! 어서 의사를 불러라!”

이번만은 궁내부가 빨랐다. 가슴에 칼을 꽂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규완을 아들과 궁내부 특사가 발견했고, 황급히 달려온 육군병원 외과의가 그를 살려 냈다. 상처가 깊었지만 정확히 찌르진 못해 치명상은 피할 수는 있었다.

이 역시 개화의 수혜였다. 근대의학이 신속히 발전하지 못했더라면, 출혈과다로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민영환에 이어 박유굉의 빈소를 조문한 이선은, 자결 금지령을 내려 같은 일이 없도록 했다. 측근들의 자결 소식을 듣고 개탄하던 박영효는 죽을 기회도 없이 즉각 궁내부로 옮겨져 연금되었다.

이선의 오래 동지들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는 개화당 1세대가 여전히 근대적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옛 유교적 신하이자 ‘지사(志士)’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사법부의 재판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이들의 선택은 ‘급진개화파’라 불리던 개화당 1세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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