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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대륙 진출 (644/812)

58화 대륙 진출

1919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정치개혁이 이뤄지는 동안, 이선은 표면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짐은 당분간 서경에 머물 터이니 태자를 잘 부탁하오.”

때마침 10월은 갑오년 독립전쟁과 관련된 달이었다. 10월 3일은 비공식적인 국경일인 국조개천절(國祖開天節) 혹은 단군절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인 서경 평양부에서 제천 행사가 열렸다.

15일에는 평양전투 승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특히 올해는 독립전쟁 25주년인 데다 세계대전 승전 이후 처음 이뤄지게 되어 성대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선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당분간 평양 흥경궁에 머무르며, 국내의 중대사는 황성의 소조에 맡겼다. 

대신 이선은 북방의 일, 특히 근래 문제가 되고 있는 러시아 내전과 시베리아 문제, 만주와 몽골 문제에 집중했다.

“북방의 일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군.”

“그래도 백군이 승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이 와중에 만주와 몽골은 갈등을 빚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이 필요하네.”

시베리아 개입을 성공리에 진행시키려면 접경지이자 후방인 만주와 몽골의 안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1919년 들어 인위적인 동군연합이었던 대청국이 흔들리고 있었다. 만주의 가한이자 몽골의 칸, 티베트의 전륜성왕이자 회족(위구르)의 보호자인 대청 황제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흔들렸다.

“만주 찬탈자에 맞서 몽골과 티베트는 모두 독립해야 한다!”

특히 독립 열기가 강한 몽골의 반 만주감정이 폭발했다. 몽골 민족주의자들은 청국의 쇠퇴, 중국과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할하(외몽골)-차하르(내몽골)-부랴트(자바이칼)를 연결하는 ‘대몽골’의 부활을 획책했다.

거리상의 위치로 인해 대청국에서 사실상 분리 수순에 들어선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13세도 대몽골의 부활을 지원했다. 내륙아시아 불교 세계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권위는 압도적이었고, 몽골 민족주의자들은 정신적 힘을 얻었다.

“아이신기오로는 대몽골의 한위(汗位)를 찬탈한 만주 침략자일 뿐이다.”

“대몽골의 칸은 오직 보르지긴 가문- 칭기즈칸의 후예만이 될 수 있다!”

몽골의 칸으로 추대된 복드칸, 8대 젭춘담바 후툭투는 엄밀히 말하면 티베트인으로 혈통적 칭기즈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보르지긴 가문이었던 초대 젭춘담바 후툭투의 ‘환생’을 통해 정신적으로 칭기즈칸의 후예가 되었다.

물론 정신적인 힘만으로 독립을 추구할 수는 없다. 이들에게는 무력이 필요했다. 역설적이게도, 몽골을 제국의 영향권으로 여기던 러시아군의 붕괴가 몽골인의 무력 기반이 되었다

“대몽골의 부활은 필연이다. 러시아 차르는 칭기즈칸과 킵자크 칸들의 후예니, 러시아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라시아의 천명은 새로이 확립되어야 한다.”

백군 내에서도 기괴하기로 이름난 이질적 분자, 부랴트계로 바이칼 카자크를 이끄는 그리고리 세묘노프와 그 휘하에서 ‘아시아 기병사단’을 이끄는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고론자인 세묘노프와 운게른은 다른 백군들과도 마찰을 빚었고, 이들을 위험분자로 찍은 이선과 스톨리핀에 의해 백군에서 추방되었다.

그런데 이들을 추종하는 병력은 군사력이 절박하게 필요한 몽골로 향했다. 세묘노프의 부랴트 혈통과 운게른의 광기 넘치는 카리스마는 주변 유목민들을 끌어들이고, 몽골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칭기즈칸의 대몽골을 재건하자! 외몽골, 내몽골, 자바이칼(부랴트), 탄누투바, 신강, 티베트를 잇는 대몽골국 만세!”

세묘노프와 운게른은 대몽골주의에 심취했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타락한’ 러시아 대신에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망상을 품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지원, 백계 러시아군의 합류에 기세가 오른 복드칸 정부는 만주로 향하는 세금을 끊었다. 몽골의 이탈에 분노한 만청 정부는 군대를 파병해 몽골을 복속시키려 했다.

대청국 외무고문 이완용은 대한제국을 대표해 만주와 몽골을 중재하려 하였으나, 몽골의 독립 의사는 확고했다.

“대몽골은 아이신기오로가 찬위한 칸의 지위를 되찾기 전에는, 결코 만주와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기실 몽골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었다. 흔히 ‘만몽’으로 묶인다고는 하지만, 몽골은 여진의 후예인 만주와 달랐다.

몽골 민족주의자들은 1635년 이래 만주 황실이 몽골의 한위(汗位)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굴욕감을 느꼈다.

대청국이 분열할 경우 중국 혹은 러시아에 점령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이들을 단결시켰는데, 러시아가 내전에 휩싸이고 중국이 군벌들로 쪼개진 지금은 그 위험성이 사라졌다.

“대청이 분리되면 이익을 보는 건 중국뿐입니다. 몽골이 독립하면 필연적으로 중국이 넘볼 겁니다. 지금은 단결해야 할 때입니다.”

“중국도 군벌들의 대립으로 산산 조각났는데, 어찌 몽골의 독립을 위협하겠습니까?”

중국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군벌 간의 전쟁과 권력투쟁으로 끊임없이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중국의 대분열은 한국이 안심한 채 만주를 장악하고,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영향권으로 넘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민족자결은 파리강화회의에서 결정된 세계적 대세 아닙니까? 우리도 만주로부터 독립하여 진정한 독립국이 되고 싶습니다.”

“몽골이 만주로부터 분리되더라도, 몽골은 대한제국의 우방으로 남을 겁니다. 몽골인들은 솔롱고스(한국)를 흠모합니다.”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이 1917-19년 사이에 몰락했듯 다민족제국 대청국도 필연적으로 붕괴직전에 놓였다.

몽골은 민족자결주의와 대몽골주의를 내세워 만주로부터의 분리를 추구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몽골을 지지했다. 신강순무 양증신은 중립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정권 수립에 나섰다.

대분열의 상황에 직면한 청국은 한국에 매달렸다.

“한국은 청국의 형제지국이 아닙니까? 저들이 연합을 깨트리는데 지켜만 볼 생각이십니까?”

한국으로서는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일방적으로 청국 편을 들어 몽골과 티베트의 독립 열기를 짓밟자니, 명분도 실리도 부족했다. 몽골과 티베트는 한국이 손을 뻗기에는 너무 멀고 광활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분리를 묵인하자니, 대청국은 붕괴 직전의 상황에 놓일 터였다.

이선이 귀국하기 전 원훈 김옥균이 직접 봉천에 머무르며 만주와 몽골 간의 타협을 추구했지만, 결국 양측은 타협을 거부하고 군사적 대결에 나섰다.

전쟁은 몽골보다는 청 황실의 의지가 더 강했다. 그동안 거듭된 후퇴로 실추된 권위를, 몽골을 격파하고 제압함으로써 되찾길 원한 것이었다.

“몽골 반역자들을 제압하고 대청의 위엄을 다시 떨치자!”

“만주 침략자들을 무찌르고 칭기즈칸의 제국을 재건하자!”

1919년 8월. 내몽골 시린골에서 벌어진 충돌은, 초기에는 만주군의 우세로 전개됐다.

만주군은 대부분 북양군벌 장훈의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으나, 1916년 장훈이 복벽전쟁에 실패한 후 실각했고, 떠오르는 군벌 장작림에 의해 재편성되었다. 장작림은 한국군을 모범으로 삼아 만주군의 근대화에 나서, ‘봉천 신군(新軍)’을 편성했다.

하지만 한국과 손잡고 있는 장작림은, 한국이 원치 않는 몽골과의 전쟁에 자신의 세력인 군대를 동원하고 싶지 않았고, 결국 만주 황실의 금위군이 승리를 호언장담하며 몽골군과 전투에 나섰다.

“칭기즈칸, 대몽골국, 대러시아를 위하여!

“러시아-몽골 제국 만세!”

운게른의 아시아 기마사단이 전투에 개입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비록 광기에 찌들었다고는 해도, 세계대전의 베테랑인 운게른의 기병대를 청국 금위군이 상대해 낼 수 없었다.

만주군은 몽골군보다 2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음에도, 운게른의 기병대에 참담하게 패배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몽골 독립 만세!”

“대몽골국 만세!”

1635년 이래 몽골의 역사적인 승리요, 만주의 역사적인 패배였다.

“아니, 이래서 제가 섣불리 군대를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대체 이 일을 어찌 해결할 생각입니까?”

청국 외무고문 이완용은 만주군의 패배에 격노했다. 이대로 만주와 몽골이 분리되어 버리면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할 판이었다.

“유감스러운 일이나, 반란 진압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대청군의 주력은 아직 건재하지 않소이까? 이들을 동원하면…….”

청국 총리 숙친왕은 장작림의 봉천 신군을 동원하길 원했다. 만약 봉천신군이 나서면, 몽골군은 손쉽게 격파할 자신이 있었다.

“봉천군은 유사시 중국의 침략에 대비하는 부대지, 몽골과 싸우라고 만든 부대가 아닙니다! 만몽 간에 병력을 소모해서 이득을 얻는 건 중국뿐이란 말입니다! 이 작전은 중지, 무조건 중지입니다!”

확전을 원하는 청국 정부를 뜯어말린 이완용은, 몽골에도 전쟁을 계속하면 한국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했다.

「몽골의 독립은 대화로 논의되어야 하며, 만약 이 이상 군사적 대립이 계속된다면, 대한제국은 제2차 한청조약 제4조에 의거하여 현 사태를 전면적인 내란으로 간주, 청국 보호를 위해 군대를 투입하겠소!」

한국의 최후통첩을 전달받은 몽골도 확전을 원하는 운게른을 누르고,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는 답을 보냈다. 

이완용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본국에 촉구했다.

「내정과 군사에 청국의 자율권을 허용한 결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외교와 재정뿐만 아니라, 내정과 군사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모든 영역을 통제해야 합니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원산 학살과 그 여파로 정권이 바뀌고 국내문제 해결에 나서는 상황이었으므로, 만몽 문제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선은 선위 파동을 일으키며 국내의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만몽 문제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얼마 전까지 봉천에 있었던 고균이 보기에, 작금 청국이 대한의 보호 없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시오?”

“신의 생각으로는, 현재 청국은 중국을 상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몽골 분리운동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만약 한국이 청 황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7년 전처럼 신군이 황실을 폐하고 국가장악을 선언하는 사태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장작림이 지금은 우리 강아지이긴 하지만, 단기서가 했던 짓을 반복하게 할 수는 없지. 어찌 됐건 만주에 대한 합법적인 지배권을 가진 건 청 황실뿐이요. 이들을 확실히 움켜잡아야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만주 전역의 세력권을 공인받은 대한제국은, 열강과의 합의대로 청국의 ‘주권’과 청 황실의 ‘존엄’, 청국 영토의 ‘보전’을 존중하는 형태로 만주 장악에 나섰다.

그런데 몽골 분리문제로 청 황실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고 대청국의 존재 자체가 위기에 처하자, 이선은 특단의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청국의 주권, 청 황실의 존엄, 청국 영토의 보전을 모두 존중하는 선에서, 대한이 청국의 실질적인 행정권과 군사권을 모두 장악하도록 하라.」

황제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이완용은 바로 새 협약에 착수했다.

시베리아 파병 이후 만주에는 철도경비대란 명목으로 대한제국군 2개 사단이 주둔했고, 성경 봉천부에도 배치되어 있었다.

“장군은 대한의 지도를 따를 겁니까? 만약 그리한다면, 앞으로 대청의 모든 군권은 장군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하, 저야 한국 황제 폐하와 이대인의 신세를 진 사람인데요.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청군 최대의 무력인 봉천신군을 이끄는 장작림도 새 협약에 찬성했다.

“대사, 이대로 만주와 몽골이 무너지면 곤란합니다. 몽골군은 광기에 찌든 러시아 백군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부전선의 백군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볼셰비키가 백군 토벌을 명분으로 삼아 몽골에 개입하려 들 게 아닙니까? 몽골 다음은 만주겠지요. 예방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으음, 일리가 있습니다.”

김옥균은 주한 열강 외교관들을 설득했다.

억지에 가까운 논리였지만, 이미 대한제국이 시베리아 파병을 통해 ‘반공 성전’에 가담한 대가로, 서양 열강은 한국의 만주 장악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대한이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해도, 재정권은 여전히 미국이 맡게 될 겁니다. 오히려 이제 무제한적으로 만주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겠습니다.”

재무고문을 맡으며 남만주철도와 광산 등에 광범위한 이권을 보유한 미국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보장이 있었다. 도덕적 이상주의를 부르짖는 미국도 이권 보장에 흔쾌히 동의했다.

일본은 떨떠름해 하긴 했지만, 남만주철도와 대련항로 이권을 계속 보장해 주는 형태로 동의를 얻어 냈다.

대내외적으로 판을 짜놓자, 이완용은 청국 정부에 새 협약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친한파인 청국 총리 숙친왕조차도 조약 내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공, 이건 너무하지 않소! 이 조약을 맺으면 대청이 한국의 속국이 되는 거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도 모자라, 몽골 분리주의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니, 대한이 대신하여 보호하겠다는 게 아닙니까. 이대로 만몽회장이 모두 분리되길 원하십니까? 대청 황실의 존엄, 대청국의 주권, 대청의 영토 보전을 위해서라도 이 협약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완용은 청국 정부를 어르고 달랬다.

“이런 협약은 시대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에 역행하는 일이오!”

외무대신 양돈언이 파리강화회의의 명분인 민족자결주의를 들고나오자, 이완용이 현실을 일깨웠다.

“이미 협약에 대해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제 어디에 호소하시겠습니까? 아, 소비에트 러시아는 지지해줄지도 모르겠군요. 그들은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운운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건 황실과 귀족들이라는 걸 명심하시길.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 아실 게 아닙니까?”

이완용의 말대로, 청국은 외교적으로도 고립무원이었다. 유일하게 편을 들어줄 수 있는 건 소비에트 러시아뿐이지만, 이념적으로 상극이었다.

청국 지배층들도 겉으로만 존중을 외치면서 뒤로는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한국에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만약 한국이 청국에서 손을 떼는 날이 온다면, 청국은 산산 조각나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세력권 분할이 이뤄질 가능성이 컸다.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 사이에 끼인 이들로서는 한국은 결국 차악(遮惡)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조약입니다. 청국이 진정으로 문명개화하고 강성해진다면, 대한은 기뻐하며 조약을 스스로 철폐할 것입니다.”

2년 전 2차 한청조약을 맺을 때도 비슷한 소리를 했기에 신뢰성은 없었지만, 청국 정부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좋소. 뜻대로 하시오.”

1919년 10월 15일. 

공교롭게도 평양 전투 25주년이 되는 날, 성경 봉천부에서 한청신협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청 황실의 존엄, 대청국의 주권, 청국 영토의 보전을 존중하고, 속히 청국의 부강을 도모하며, 청국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하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한국 정부는 대표자로서 청국 황제 폐하의궐하(闕下)에 1명의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 High commissioner)을 두되, 고등판무관은 성경(盛京)에 주재하면서 직접 청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

제2조. 청국 정부는 시정(施政) 개선에 관하여 고등판무관의 지도를 받는다.

제3조. 청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결정은 고등판무관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제4조. 청국이 대신을 임명하고 해임시키는 일은 고등판무관의 동의에 의하여 집행한다.

제5조. 청국 정부는 고등판무관이 추천한 외국인을 청국의 관리로 임명한다.

제6조. 청국군의 편제, 이동, 작전은 고등판무관의 동의에 의하여 집행한다.

제7조. 대청국을 구성하는 몽골, 신강, 서장(티베트)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되,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는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이를 확고히 지지한다.

선통 9년 8월 22일, 광무 23년 10월 15일.

대청국 내각총리대신 숙친왕 산기

대한제국 특명전권대사 외무고문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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