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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국혼 문제 (649/812)

63화 국혼 문제

광무 24년(1920) 1월 1일.

다사다난했던 1919년이 끝나고, 1920년대의 첫날이 밝았다.

음력설이 관례적으로 국민적 명절로 남아 정부가 공휴일을 부여했지만, 황실과 정부에서는 양력 원단(元旦)을 새해의 첫날로 기념하였다.

「근하신년! 광무 24년!」

새해를 맞이하여, 황제 이선이 거처하는 서경 흥경궁에서 신년 축연이 열렸다.

작년에 부산에서 열렸던 신년 축연처럼 원훈과 대신들이 모여 성대하게 하지는 않고, 황실 인척들만 모여 신년을 축하하기로 했다.

황성에서 대리청정을 맡고 있던 황태자 이진도 새해 문안을 드리기 위해 평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올해 신년 축연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있었으니, 바로 외국 왕족들이었다.

“삼가 부황 폐하를 뵙사옵니다. 옥체 만안하오신지요?”

“음, 태자 덕분에 무탈하다.”

몇 달 만의 부자간의 재회였다. 선위의 명을 거뒀으나 대리청정을 계속하라고 한 후 이선은 평양에 머물렀고, 국내 정치의 대부분을 태자에게 맡겼다.

그동안 이선은 만주와 국제 문제에 골몰했다. 그렇다고 국내 문제를 완전히 방기한 건 아니라서, 황성과 끊임없이 전화로 소통했다. 전화 덕에 원거리 통치도 가능했다.

“일전에 고뿔에 걸리셨다 들어 소자가 크게 걱정하였사옵니다.”

“감기 정도야 환절기에 늘 있는 일 아니냐.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이선은 얼마 전 감기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곧 털고 일어났다. 이선이 아프단 소식에 이진이 찾아뵙기를 청하였으나, 정사에 집중한 뒤 신년에 만나자고 답을 보냈다.

“대리청정의 대임을 수행함이 어떠한가?”

“실로 무거운 책무이오나, 부황의 가르침을 따라 충실히 이행하고 있사옵니다.”

“하하, 내 가르침이 아니라 네 판단이어야지. 네가 잘하고 있어서 기쁘다.”

이진의 나이 어느덧 만 22세, 세는 나이로는 스물넷이 되었다.

대한국민 상당수는 황태자 이진이 혼례를 올리지 않는 걸 의아해했다.

“그런데 말이야, 소조께선 이미 약관을 넘기셨는데, 왜 여태 혼례를 올리지 않으셨을까?”

“그러게. 예경공주님도 혼기가 찼다고 들었는데.”

“어허, 지엄한 황실의 일에 어디 왈가왈부하는가.”

“아니, 궁금할 수도 있지 않나? 보통 세자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혼인을 했었다고. 열 살이면 혼례를 올리지 않았나.”

“그때와 시대가 변하지 않았나!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전의 조혼을 금지한다는 민법 조항도 모르나?”

“소조와 공주 두 분 모두 이미 그 나이를 넘기셨으니 그렇지.”

“말이 많군. 대조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조선시대만 해도, 세자는 관례적으로 10세를 전후한 시기에 혼례를 올려 15세를 전후한 시기에 합방을 했다. 순친왕 이척도 세자일 때 9세에 혼례를 올렸었다. 그게 유난히 빠른 케이스라고 해도, 15세 이전에는 혼례를 올렸었다.

경장 이후 민법 제정으로 남성 20세, 여성 16세 이하의 조혼 금지가 공식화되었다.

자연히 그 시기는 지나갔지만, 태자 나이 20세가 넘어가자 다들 국혼의 행방을 놓고 궁금해하기에 이르렀다.

“명문가들은 전부 준비하고 있을 거야. 삼간택이 머지않았을 터이니.”

“안동 김문이려나? 대한에 안동 김문만 한 명문도 없는 데다, 김옥균 대감이 김문이니.”

“세도가 시대를 떠올릴 일 있나? 하고 많은 가문 중에 안동 김문이라니. 대원왕께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네.”

“반남 박문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금릉위가 실각하는 바람에 거긴 물 건너갔지.”

“황후 폐하의 친정인 광산 김문이 있지 않나?”

“황태후 폐하, 황후 폐하. 두 번 연속 광산 김문에서 곤전을 배출했으니, 세 번은 아닐 거야.”

호사가들은 어느 가문에서 황태자비를 배출할지 궁금해했다. 명문가에서 여식들 관리에 나선 것도 소문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선의 복안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 * *

“어서 오시오, 왕자.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구려.”

“황공하옵니다, 폐하. 소관이 부친을 대신하여 대한 황제 폐하께 신년 인사를 올립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생도 제복을 입은 청년이 이선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훤칠한 청년의 제복에는 김헌원(金憲原)이란 이름이 적혀 있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였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국인 생도라고 여길 터였다.

“고맙소. 숙친왕께서는 평안하시지요?”

“예,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에 평안합니다.”

청년은 바로 숙친왕의 열한 번째 아들, 아이신기오로 셴위안(愛新覺羅憲原) 혹은 김헌원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은 중국 성을 병행해서 썼고, 아이신기오로 황실은 금(金)씨 성을 병행했다.

특히 유학 갈 때는 아이신기오로 대신 금을 썼는데, 마침 한국에서는 가장 많은 성씨였으니, 자연스럽게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처럼 받아들여졌다.

숙친왕의 21남 17녀 자녀 중에서, 조졸한 6명을 빼고는 모두 근대적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초기에는 주로 미국과 유럽으로 보냈으나, 만주 천도 이후에는 한국과 일본에 집중했다.

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아들도 있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익히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황성의학대학에서 의학을 익히는 아들도 있었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 조정에서 중책을 맡은 숙친왕의 장남 헌장(憲章)처럼, 자식들은 귀국하면 모두 쓰임을 받을 예정이었다.

“대청은 대한의 형제국가요, 숙친왕은 짐에게 있어 형제나 다름없소. 그러니 그대도 짐에게 있어 조카나 마찬가지지.”

“폐하의 지극한 황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이선은 만주 황실 유학생을 극진히 우대했다. 

헌원은 숙친왕의 측실인 동가씨(佟佳氏, 퉁갸 하라) 소생으로, 일찌감치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올해 졸업 후에는 시종무관으로의 배정이 확정되어 있었다.

한국군 의무복무를 마친 후에는, 만주로 돌아가 만주군의 중추가 될 터였다. 대한제국군 시종무관 출신의 철저한 친한파 만주군 장교였다.

“폐하, 제 여동생들이옵니다. 어서 인사 올리거라.”

“소녀, 삼가 대한 황제 폐하께 문후 여쭙니다.”

묘령의 여인이 이선과 이진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한국명은 김현사(金顯瑡)라고 등록되어 있으나, 이 역시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셴시였다.

숙친왕의 열째딸이자, 헌원의 동복동생이었다.

“반갑소, 공주. 학업은 잘되어 갑니까?”

“예, 소녀가 비록 어리석으나, 훌륭한 교수진과 학우들의 도움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숙친왕은 당대에는 드물게도, 딸이라고 고등교육에서 배제하진 않았으니, 여성 전문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한국과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현사는 만주 명문가들과 재만 한인 상류층 여식들이 다니는 여순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숙명여자전문대학(淑明女學專門大學)에 입학했다.

숙명여전의 설립자는 황태후 김씨로, 여성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황후가 황태후와 의기투합하여 광무 10년에 설립한 학교였다. 모친의 뜻을 받아들인 이영은 흔쾌히 영친왕부의 재산을 재단에 기증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고등교육기관인 이화여전과 함께 숙명여전은 당대 한국 여성이 다닐 수 있는 최상의 학교였고, 고등교육까지 신경을 쓸 수 있는 개화된 명문가 여식들이 주로 입학했다.

현사는 유학 온 지 1년 정도 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한국어를 익힌 덕에 곧잘 언어를 구사했다.

“공주 옆의 어린 아가씨는 누구시오?”

“열넷째이옵니다. 현재 일본에 유학 중이온데, 방학을 맞이하여 대한을 여행하고 싶다 하여 초청하였습니다.”

“소녀, 삼가 대한 황제 폐하께 문후 여쭙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나이에 비해 품위 있는 태도로 예를 올렸다.

“호오, 공주는 일본에 유학 중이라면서 한국어도 할 줄 아시오?”

“부친께서 일본은 동양의 선진국이오, 대한은 대청의 형제지국이니, 어릴 적부터 두 언어를 반드시 익혀 두라고 하셨습니다.”

“오, 갸륵하구려. 공주의 휘는 무엇이오?”

“아이신기오로 셴위, 일본에서는 진비후이란 이름을 쓰고 있사옵니다.”

이선은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얘가 바로 가와시마 요시코구나.’

원역사에서 ‘이스턴 주얼(Eastern Jewel, 동양의 보석)’ 혹은 희대의 요녀로 불린 숙친왕의 14번째 딸. 아이신기오로 셴위(顯玗, 현우), 혹은 진비후이(金璧輝, 김벽휘), 혹은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

역사의 변화로 인해 숙친왕이 일본에 만몽 독립을 호소하는 일은 없어, 일본의 만몽진출론자인 가와시마 나니와의 양녀로 들어가는 일도 없어졌지만, 부친의 뜻대로 어릴 적부터 일본으로 유학가게 되었다.

이제 갓 열넷이 된 현우는 어렸지만, 후대에 명성이 자자한 미모의 싹이 보이고 있었다.

‘요시코의 지랄 맞은 성격은 워낙 유명한데. 뭐, 역사가 바뀌었으니, 그 성격이 그대로 가진 않겠지. 얘가 진의 처제가 된다 해도, 특별히 상관없는 일이고. 애초에 형제자매가 셀 수 없이 많은데 하나하나 따지려면 한도 끝도 없지.’

이선이 황태자비로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은 김현사, 즉 아이신기오로 셴시였다.

이선은 김옥균과 이완용을 통해 숙친왕의 여러 딸 중 성품, 자질, 용모 등을 살폈다.

미혼인 7녀, 9녀, 10녀가 후보군으로 올랐다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게 10녀 현사였다.

작년에 현사가 한국으로 유학 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 사전에 내정된 바나 마찬가지였다.

‘측실 소생인 건 큰 문제가 없지. 어차피 정실 소생은 이미 다 나이가 많으니.’

정실인 혁사리씨(赫舍里氏, 허셔리 하라) 소생의 자식들은 이미 다 혼례를 치른 상태였다.

헌원과 현사의 모친인 동가씨도 만주 대성에 속하는 명문이었다.

“왕자, 내가 알기로 외가가 되는 가문이 만주팔기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라고 들었소만.”

“예, 저희 외가인 퉁갸 하라는, 만주팔기 양황기(鑲黃旗)로서, 대대로 비빈과 대신을 배출했사옵니다. 성조 강희황제의 모후이신 효강장황후, 강희황제의 황후이신 효의인황후, 선종 도광황제의 황후이신 효신성황후 모두 퉁갸 하라 출신이십니다.”

이선의 물음에 헌원이 자부심을 담아 화답했다. 비록 측실이요 서자라고는 하지만, 동가씨는 여러 황후를 배출한 명문가이니만큼, 정실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오, 천고일제(千古一帝)인 강희황제의 외가가 바로 동가씨였구려. 강희황제께서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성군이시니, 짐 역시 강희황제를 진심으로 숭상하오. 강희황제는 짐의 모범이시오.”

물론 강희제가 객관적으로도 성군으로 평가받지만, 한국 황제가 직접 극찬을 하니 만주 황실의 일원들로서는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로 대한과 대청, 한국과 만주는 너무나도 가까운 형제요.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 천명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실 때, 청해군 이지란이 고황제의 의형제로서 큰 공을 세웠소. 청해군의 본명은 퉁두란, 즉 쿠툰라르티무르지요. 그리고 청해군의 종형제가 누군지 아시오?”

이진은 500년 전 일을 끄집어내자, 헌원이 화답했다.

“퉁두란 공의 종형제가 곧 우리 조조(肇祖) 원황제이시니, 대청 태조 천명황제의 6대조가 되십니다.”

이지란의 육촌이 건주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孟特穆, 맹특목)로, 바로 누르하치의 6대조였다. 

맹특목은 이성계의 봉신이기도 했으니, 훗날 조선이 ‘조선의 신하였던 건주위 오랑캐’가 대청 황제로 군림하는 걸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가 흘러 조선의 봉신이었던 건주위가 대청 황제가 되어 조선의 상국이 되었다가, 다시 역사가 바뀌어 대한제국이 대청국의 보호자가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역사의 역설이었다.

“이처럼 우리 두 가문의 근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한 형제나 다름없소. 이제 다시 하나로 힘을 합치게 되었으니, 짐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한창 역사를 회고하던 이선은, 아들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소조의 생각은 어떠한가?”

“소자의 생각 또한 부황과 같사옵니다.”

조용히 경청만 하고 있던 이진은 부황의 뜻과 같음을 천명했다.

“공주의 나이가 올해 어찌 되오?”

“광서 28년, 임인년 생이옵니다. 새해가 되면 열아홉이 되옵니다.”

“호오, 그렇다면 소조와는 다섯 살 차이고, 정친왕과는 동갑이로군.”

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아홉이라면 딱 좋을 나이고, 이진과의 나이 차이도 적당했다.

‘저 여인이 장차 내 부인이 된단 말인가.’

이진은 곁눈질로 현사를 훑어보았다. 북방계 여인답게 동양인치곤 키도 크고, 체형도 날씬했다.

분명히 조선인하고는 느낌이 다르지만, 동양계 미인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국혼은 한청 두 나라, 한만 협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부황의 뜻을 따라야겠지.’

이진은 이미 부황의 뜻대로, 만주 공주와의 결혼을 내심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묘하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정략결혼이라서 싫다는 건 아니었다. 그건 처음부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나라건, 왕족은 정략결혼을 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내키지 않는 건, 쇠락해 가는 만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실망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이진은 1913년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실로 대제국이란 이런 느낌이었다.

비록 4년 뒤에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때의 기억은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았다.

이진은 재작년에 특사로 만주를 방문한 바 있었다. 숙친왕과 청 황실은 한국 태자를 극진히 환대했다. 이진은 숙친왕의 환대에 감사를 표했지만, 만주의 낙후한 현실에 내심 실망한 터였다.

똑같이 쇠망해 가는 제국이더라도, 화려했던 러시아제국에 비하면 만청은 얼마나 낙후하단 말인가.

‘숙친왕은 좋은 사람 같지만, 니콜라이 황제랑 비교하면 훨씬 격이 떨어지지. 측실 소생인 공주도, 러시아제국의 황녀들과 비교하면…….’

이진은 자연히 러시아와 청국, 니콜라이 2세와 숙친왕, 러시아 여대공들과 숙친왕가 공주들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의 압승이었다.

‘나는 황제의 적장자인데, 상대는 청국 친왕의 서녀라니!’

아무리 모친이 만주 명문가 출신이라 해도, 황제의 적장자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이진으로서는 현사가 측실 소생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선통제의 여동생은 너무 어리고, 숙친왕의 적녀는 이진보다 연상이라 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내키지 않았다.

‘제국의 황후로는 타티야나 공주 같은 여인이 적합한데.’

어차피 외국인과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진은 동갑내기 타티야나 여대공을 택하고 싶었다. 출신으로 보나, 품격으로 보나, 미모로 보나 그만한 여인이 없었다.

평상시라면 종교 문제 때문에라도 러시아에서도 허락하지 않을 일이나, 지금 그녀는 망명자 신세가 아닌가. 가련한 처지에 놓인 그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하지만 그건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일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부황이 허락한다고 쳐도, 황실과 국민이 결사반대할 일이었다.

망국의 공주인 건 둘째치고, 조선인 정서에 백인 중전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마르가리타의 사례가 있다곤 하지만 그건 ‘비공식적인 관계’지, 만약 공식적으로 책봉이라도 하려 했다면, 위대한 성군으로 숭앙받는 이선이라고 해도 엄청난 반대에 직면하고 말 터였다.

‘대한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있나. 부황의 뜻을 따를 수밖에.’

이진은 자신의 생각은 아예 입 밖으로도 내지 않고, 지레 포기한 채 체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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