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피로 물든 땅 (655/812)

69화 피로 물든 땅

콰앙! 콰앙!

타다다다다다당!

격렬한 포화와 함께 기관총 탄환 쏟아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후퇴하지 마라!”

“최후까지 싸워라! 어머니 러시아를 위하여!”

“빨갱이들에게 신성한 도시를 내주지 마라!”

장교들은 거듭 전투를 독려했지만, 이미 사기가 떨어진 백군 의용군 병사들은 전선을 이탈했다. 이제 도시 사수가 불가능하다는 건 눈앞에 보였다.

“각하! 적군의 공세가 돈바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키예프를 포기하고 돈바스로 퇴각하라는 남러시아군 총사령부의 명령입니다.”

“알겠네. 즉시 철수하겠네.”

1920년 2월. 백군은 적군(赤軍, 붉은 군대)의 총반격에 키예프(키이우)를 포기하고 퇴각에 나섰다.

4개월 전, 승리자로서 이 도시에 입성했을 때와는 정반대였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지 않았나?’

고려인 백군 장교 표트르 최 대위는 키예프를 떠나며 패배를 곱씹었다.

1919년 10월 31일, 백군 남러시아군은 적군을 격파하고 키예프를 함락했다.

그보다 하루 전날, 적군의 공세를 피해 서부로 퇴각했던 우크라이나 공화국군이 한발 먼저 도심에 진입해 청황색 국기를 내걸었다.

백군은 소비에트의 적이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도 소비에트를 적으로 여긴다. 그럼 공동의 적에 맞선 투쟁이 있었는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다.

“당장 저 흉측한 깃발을 끌어 내려! 대러시아의 쌍두독수리를 게양하라!”

백군이 ‘흉측하다’라고 규정한 건 소비에트의 상징인 적기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청황색 국기도 마찬가지였다.

백군 사령부는 결코 우크라이나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의 눈에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는 볼셰비키 못지않은 ‘악질 반역자들’이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독립을 주도하는 세력은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즉 ‘좌파’들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러시아주의를 내건 백군 사령부에 구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의 자치안은 ‘하나이자 분리될 수 없는 러시아’를 무너트리는 공작이었고, 소비에트 정부의 자치 공화국 기획도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는 존재한 바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빨갱이 놈들이 분리주의를 부추겨서 일을 키운 것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다!”

소비에트 정부도 농업과 공업의 중심지인 우크라이나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명목상 우크라이나 민족을 인정하고 연방 내의 자치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백군 사령부는 우크라이나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지역에는 러시아의 일부인 ‘소러시아(말로로시야, 우크라이나 서북부)’와 ‘신러시아(노보로시야, 우크라이나 동남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대러시아주의를 신봉하는 러시아 우익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었고, 1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아집이었다.

“러시아의 적인 분리주의자들을 처단하라!

‘적의 적은 아군’이란 개념도 없었다. 대러시아에 맞서면 모두 적이었다.

압도적인 백군의 공세 앞에, 우크라이나군은 하루 만에 키예프를 포기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대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한다!”

1919년까지는 백군의 명백한 우위였다. 연합국의 지원, 충분한 무기, 장교단의 질적 우위.

남러시아군 총사령부는 1920년 4월 부활절까지 모스크바를 수복하고, 성 바실리 대성당에서 부활절 예배를 지내리라고 명했다.

겨울에 무리하게 진행된 공세는, 마침내 쿠르스크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오룔을 함락, 얼어붙은 우파(Ufa)강을 넘어 툴라(Tula)까지 진격했다.

툴라는 제국 시절부터 조병창이 있는 주요 공업도시이자 모스크바에서 불과 193km 지점이었다. 러시아같이 넓은 나라에서 이는 지척과도 가까웠다.

소비에트 정부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며 모스크바 포기와 수도 재이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백군의 눈에는 크렘린과 성 바실리 성당의 아름다운 지붕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공세가 지나치게 확장되었다는 연합군 군사고문단의 조언은, 승리가 임박했다고 믿는 백군 사령부에 의해 묵살되었다.

“우리는 결코 교회를 더럽힌 무신론자 볼셰비키를 용서하지 않는다! 부활절에 성 바실리 성당에서 테 데움(찬미가)을 부르리라!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제3의 로마를 행진하자! 주님과 조국의 이름으로! 하나이자 분리될 수 없는 러시아 만세!”

“만세!”

하지만 그게 백군의 최대 진격선이었다. 

모스크바 함락을 목표로 지나치게 치고 올라온 백군은 측면과 후방에서 너무 많은 약점을 보였다.

“귀족, 지주, 자본가, 장군, 온갖 반혁명 분자들이 차르의 왕관을 되살리기 위해 모스크바로 진격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박해하고 학살하며, 혁명의 모든 성과를 무위로 돌리려 한다. 혁명과 공화국을 수호하자! 소비에트 공화국 만세!”

“만세!”

소비에트 국방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열정적인 연설과 조직력으로 적군을 강화했다.

소비에트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장교단을 받아들여 신생 적군의 지휘부를 구축했고, 총동원령으로 수백만 명의 적군을 편성했다. 여전히 러시아 주요 산업지대를 통제하고 있는 소비에트 정부는 막대한 병력을 편성할 자원이 있었다.

적군 장교단의 80% 이상이 제국군 출신이었는데,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정치위원이 파견되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우려와 달리, 백군과 내통해서 배신하는 지휘관은 거의 없었다.

동부전선에서 맹활약하며 백군을 우랄 산맥 동쪽으로 밀어낸 미하일 투하쳅스키, 모스크바 방어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등은 모두 전직 제국군 장교였다.

해가 바뀌고 1920년 1월, 예고로프가 지휘하는 적군 제8군은 백군의 노출된 측면을 강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백군의 기나긴 패주가 시작되었다. 1919년이 백군에게 축복의 해였다면, 1920년은 저주받은 해였다. 겨울의 극심한 추위 속에서 백군의 총퇴각이 이뤄졌다.

백군을 추격해 온 적군은 2월 하순에 키예프를 재탈환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적군의 반격은 우크라이나 동부, 유조프카(도네츠크)와 돈바스에 집중되었다. 대규모 전투의 연속이었다.

* * *

패퇴하는 백군을 향해 불길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졌다.

“빨갱이들이 300만 대군을 동원했다더라.”

“이대로 가면 전멸이다.”

“대체 사령부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만약 적군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나?”

“인민의 적이라고 총살당하겠지, 제기랄!”

전러시아 임시정부, 즉 백군 정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패배가 임박했다는 공포와 불안감이 덮치고 있었다. 

공포와 불안감은 엉뚱한 화풀이 대상을 찾았다.

“이게 다 유대인 때문이다. 유대인이 러시아를 망치고 있다. 유대인을 죽여 러시아를 구하자!”

파멸적인 논리였지만, 이는 완전히 엉뚱한 돌출이 아니었다.

20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반유대주의가 강한 나라는 러시아제국, 그중에서도 남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일대였다.

이 지역에는 제정 러시아의 정책으로 많은 유대인이 이주했고, 기존의 거주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고질적인 종교적 반유대주의, 경제적 갈등,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제정 정부의 은근한 부추김과 방조, ‘검은 백인단’으로 대표되는 극우 민족주의 단체의 발흥, 각종 요인으로 인해 이미 혁명 이전부터 주기적인 포그롬(유대인 박해)이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혁명 이후에는 반유대주의는 더 심각해졌다. 백군은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신봉했다.

“오늘날 소비에트를 주도하는 인사들을 보라! 트로츠키, 마르토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베르들로프, 라데크, 소콜니코프, 요페, 이런 작자들의 공통점이 뭔가?”

“유대인!”

“그렇다! 유대인이다! 애초에 마르크시즘 자체가 유대인 마르크스가 창조한 이론 아닌가? 유대인이 세계에 독을 풀고, 러시아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유대인 음모론을 부추기기에 좋은 환경이 나올 정도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유대인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거대한 음모론의 일환이 아니었다. 유대인이 여러 민족 중 가장 교육을 잘 받은 민족인데 반하여, 제정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반유대주의 정책을 쓰고 있었다. 유대인은 토지 소유와 대학 진학과도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차별받았다.

좌절한 지식 엘리트는 흔히 급진 좌파가 된다. 당대를 풍미하던 급진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였고, 러시아의 급진적 인텔리겐치아는 그쪽으로 향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인의 혁명 참여 인구 대비 비율이 높았던 것은, 이 역시 교육은 잘 받았으나 러시아인 관료와 발트 독일계 지주에 밀려 불평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을 죽여 러시아를 구하자!」

이 기괴한 구호는, 백군의 공식적인 구호인 ‘하나이자 분리할 수 없는 러시아’와 달리 비공식적인 프로파간다였다.

1919년 가을 우크라이나에 진입하면서, 백군은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을 벌였다.

“유대인을 죽여 러시아를 구하자!”

“유대인 인민위원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스톨리핀 총리를 죽인 배후에는 모스크바가 있다. 즉, 유대인이 우리의 지도자를 죽인 것이다!”

백군이 키예프로 진입했을 당시는, 공교롭게도 스톨리핀이 암살당한 직후였다.

스톨리핀을 암살한건 중국인이었음에도, 백군 정부가 배후를 모스크바에 돌림에 따라, 엉뚱하게도 유대인이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중지하라! 사령부에서는 명백히 유대인 학살을 금지했다!”

“하지만 저들은 볼셰비키의 앞잡이 유대인인뎁쇼.”

“증거가 있나?”

“유대인이라는 게 증거입죠.”

극동 출신 고려인 표트르 최 대위는 백군의 반유대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소수민족 출신임에도 출세했고, 러시아 장병들하고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세계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왜 그렇게 유대인을 미워하나?”

“대위님도 정교도라면 잘 아실 텐데요. 유대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놈들 아닙니까?”

‘?? 그렇게 따지면 예수도 유대 태생 아닌가?’

이름만 교적에 걸어 둔 표트르로서는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기독교도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태생부터 글러 먹은 이교도들인데, 볼셰비키의 앞잡이가 돼서 정교회를 박해하고 있잖습니까.”

“정훈장교님도 유대인이 이 모든 악행의 배후라고 했습니다.”

백군에는 장교와 사병 가릴 것 없이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다.

백군 사령부는 공식적으로 유대인 박해를 금지했다. 하지만 그건 유대인의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었다.

“서방 연합국 친구들이 유대인 학살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싫어한단 말일세! 그들의 지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멈추라고!”

“서방 놈들이 유대인 눈치를 보는 걸 보면, 역시 유대인이 배후에서 암약하는 게 틀림없어.”

“아무튼 유대인 문제로 서방 연합국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도록 하게!”

놀랍게도, 백군 사령부에서도 유대인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키예프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무시무시한 학살이 벌어졌다.

특히 유대교회와 랍비에게 살육이 집중되었다. 정작 이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한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탄압받고 있었고, 농민 반란군인 ‘녹군’의 습격을 당해 학살당했다.

랍비들은 백군을 ‘해방자’로 환영하였으나, 돌아온 건 끔찍한 학살이었다.

「1. 힘은 곧 정의요 진정한 권력이다.

 2. 언론을 통해 민중의 사고방식을 지배한다.

 3. 우리는 경제력으로 세계를 장악한다.

 4. 우리는 혼란을 조장하고, 물질주의로 신앙을 대체시킨다. ……」

20세기의 악명 높은 위서(僞書), 유대인의 세계정복 음모론을 설파한 ≪시온의정서≫는 사실 오흐라나, 즉 러시아 내무부 질서공안국의 작품이었다.

오흐라나는 러일전쟁 직전 혁명의 위기가 촉발되자, 유대인이 배후에서 세계정복을 조장하고 있다는 위서를 퍼뜨려 국민의 분노를 돌리려 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유대인은 배후에서 국제금융을 조종했고, 세계를 파괴하기 위한 전쟁도 조종했고, 러시아를 파괴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도 조종했다.

러일전쟁 당시 유대계 미국 거물 금융가인 제이콥 쉬프가 일본의 전시공채를 구입해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자, 음모론은 사실처럼 보이게 됐다.

“보라! 유대인은 역시 신성한 러시아의 적이다!”

하지만 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반유대주의 조장, 특히 1903년 키시네프 유대인 학살에 분개한 쉬프가 러시아의 적인 일본에 전비를 댔다. 순서가 반대였던 것이다.

“트로츠키가 1917년 혁명 직전에 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건, 유대-프리메이슨 금융 자본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에서 반란을 조장하기 위함이었다. 트로츠키의 배후에는 유대-프리메이슨이 있다!”

특히 유대계 우크라이나 태생 트로츠키가 적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백군을 격퇴하면서, 백군의 반유대주의는 절정에 달했다.

정작 트로츠키 본인은 유대인이란 정체성이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이디시어를 구사하고 종교적 성향을 지닌 동포들을 비판했다. 애초에 트로츠키는 국경이나 민족성을 거부하는 세계주의적 국제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반대파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유대인 혈통이었다.

백군 프로파간다에서 트로츠키는 졸지에 유대-마르크스주의 수장이자, 서구 유대-프리메이슨의 금융지원을 받아, 유대인의 세계정복을 꿈꾸는 괴물의 상징이 되었다.

백군 상당수는 프로파간다는 정말로 믿어 버렸다. 전황이 악화될수록 이들의 광기는 더욱 커져 갔다.

“볼셰비키는 귀족, 자본가, 지주, 사제를 학살한다. 하지만 이들의 학살 명단에서 유일하게 빠지는 부류가 있다. 바로 유대인이다.”

혁명 이후 유대인의 적군 가담도 자기실현적 예언이었다. 제정 러시아의 반유대주의, 백군과 녹군의 유대인 학살에 맞서 적군에 들어가는 유대인의 수가 늘어났다.

물론 살육은 적군도 저질렀다. 내전이 가혹해지면서 소비에트도 강경파가 득세했고, 반혁명에 맞서는 정보기관 ‘체카(Cheka)’가 등장했다. 

적군의 숙청은 계급적 요소가 중요했다. 이들은 주로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귀족, 자본가, 지주를 숙청했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원칙적으로 유대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에, ‘유대인 지주’는 극히 드물었다. 유대인은 곧 자본가일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러시아에서 유대인 자본가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유대인 귀족’이란 형용모순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계급의 적’으로 분류될 유대인이 적었다.

물론 트로츠키의 부친처럼 우크라이나에서 성공한 유대인 부농의 사례도 있었지만, 유대인 부농은 역설적으로 농민 반란군, 녹군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도 유대인 학살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지만, 자칭 녹군 ‘아타만’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반유대주의는 뿌리 깊은 것으로, 우크라이나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카자크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의 1648년 봉기 당시에도 유대인 학살이 수반되었다.

일부 농민들에게 있어 유대인은 곧 ‘그리스도를 못 박은 배신자, 고리대금업자, 착취자, 볼셰비키’였다.

백군이 진주하기 전까지, 유대인 학살을 벌이던 건 바로 이들이었다.

하지만 더 체계적인 무장을 갖춘 백군이 학살을 벌이자, 훨씬 치명적인 공격이 이뤄졌다.

“우리가 이대로 퇴각하면 고삐 풀린 유대인들이 동포들을 학살할 것이다. 유대인들을 정리하고 철수한다.”

퇴각하는 백군은 진격할 때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다.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

반대로 진주하는 적군은 백군 낙오병들을 총살하고, 교수대에 매달았다.

1919-20년,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에는 피로 피를 씻는 살육이 벌어졌다.

실로, 피로 물든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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