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두 개의 조국 (657/812)

71화 두 개의 조국

내전은 구 러시아제국을 여러 조각으로 갈라놓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양극단화 되었다.

대한제국의 중요한 출병 명분이었던 ‘재러시아 동포의 보호’, 즉 ‘보호의 대상’인 고려인(재러시아 한인)들은 내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연해주, 아무르주, 자바이칼 주 등 바이칼 동부의 극동지방 인구는 제정의 적극적인 이주정책으로 20여 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 러시아의 주민들은 극동 이주를 꺼렸고, 극동지방의 인구는 300만 내외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고려인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뒤를 잇는 극동 제3의 민족으로, 특히 연해주에선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러시아 국적을 받고 살아가는 인구가 15만, 한국 국적을 지닌 채 상인이나 계절노동자 등으로 극동지방에 합법적으로 일시 체류하는 인원을 합치면 20만을 넘겼다.

“고려인은 성실하고, 교육열이 뛰어나며, 적응력도 좋다. 특히 쌀농사 기술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극동 미개간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우방국 한국과의 우호 관계에도 중요한 가교를 하고 있으며, 러시아제국에 충성스럽다. 고려인은 극동, 아니 제국 전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소수민족이다.”

제정 러시아에서 고려인에 대한 평가는 호평 일색이었다. 다민족제국 러시아에서 성공적인 소수민족으로, 극동의 파수꾼이라고 치켜세워 줬다.

이는 다분히 변화한 역사에서 비롯된 산물이었다.

대한제국 황제 이선이 조선으로 돌아가 권력을 잡기 전, 차르의 대리인으로 연해주에 체류하면서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했고, 고려인은 한민족 전체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의 수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선이 조선으로 떠나며 지목한 후계자 최재형은 동포 사회를 현명하게 이끌었고, 고려인은 성실성과 높은 교육열로 빠르게 이민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그로부터 40여 년, 고려인은 러시아 전체로 보면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극동 연해주에서는 주류민족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대전쟁이 발발하자 고려인은 러시아 국민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기간 동안 장교 200여 명, 사병 7천여 명이 참전하여, 인구 대비 높은 참전율을 보여 줬다.

고려인 1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강했지만, 2세가 되면 러시아인이라는 정체성도 확립되었다. 

즉, 이들은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있었다.

“우리의 뿌리는 한국에 있지만, 또한 우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러시아인이기도 하다. 동포들이여, 러시아를 수호하는 데 함께하자!”

김인수 장군이나, 최재형처럼 러시아에서 성공한 고려인들은 대부분 백군의 편을 들었다.

연합국에 속하는 한국의 백군 지지도 이들의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대전쟁과 내전을 통해 고려인의 충성심과 분투를 입증하면, 장차 새로운 러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약소국이었다가 열강의 반열에 들어선 한국의 영향력도 전에 보다 더 커질 터이니, 고려인의 존재는 더욱 중요해질 터였다.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을 노동자에게! 민족 간의 자유와 평등! 소수민족의 자치! 동지들! 인민의 대표자, 소비에트를 수호합시다!”

무산계급에 속하는 러시아인들 대부분이 소비에트에 열광하는 것처럼, 고려인도 예외는 없었다.

자영농이 많은 극동지역 특성상 토지개혁 이슈는 유럽처럼 폭발적이지 않았지만, 고려인들 내부에도 빈부격차는 있었으니, 자기 소유의 토지를 얻지 못하고 소작농이나 노동자로 일하는 고려인 청년들은 소비에트의 개혁에 혹했다.

특히 젊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와 혁명에 열광했다. 소비에트는 낡고 봉건적인 사회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약속했다.

거들먹거리는 귀족, 관료, 장군, 지주, 자본가 대신에 헌신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 학생, 소수민족이 우대받는 세상을 상상했다.

그 결과, 적잖은 고려인들도 소비에트에 가담했고, 극동에 백군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산야로 들어가 파르티잔이 되어 투쟁하는 길을 택했다.

“계급 해방, 민족 해방, 여성 해방을 위하여! 동지들, 우리가 지금 흘리는 피땀이 새로운 세상의 거름이 될 것입니다!”

“오오, 알렉산드라 킴 동지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철의 여인인가!”

파르티잔 중에는 드물지만 여성도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명성을 떨치는 이는 고려인 2세 알렉산드라 김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백군 장성 빅토르 김(김인수)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여교사로 근무하던 중 1906년 혁명을 경험하고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고, 대전쟁기에는 우랄 일대에 징용된 고려인 노동자들의 통역관을 맡으며 러시아 사회의 모순을 절감했다.

4월 혁명 이후 김알렉산드라는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우랄지역 위원장으로 훗날 소비에트 정부의 서기장이 되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에 발탁되어 모스크바의 여성노동위원회에서도 근무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 동지를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하며, 반혁명세력과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극동 소비에트를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한다.」

내전 직전 김알렉산드라는 극동 소비에트 수호 임무를 띠고 하바롭스크에 파견됐다.

소수민족 여성으로서 당 지도자가 된 김알렉산드라는, 특히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이 극동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점령하자 체포대상 1순위가 되었으나, 고려인 동지들의 보호로 체포 직전 가까스로 아무르 강을 건너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극동 파르티잔 정치위원이 된 김알렉산드라는, 소비에트 정부에 참여한 대표적인 고려인이 되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었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그러했듯, 고려인도 동포 간에 총을 겨누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 * *

“동포들끼리 싸워서는 안 되네. 우리가 새로운 터전에서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노력해 왔나. 예전에도 그러했듯, 우리는 단결해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네.”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유혈사태가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노력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에 이주한 지 어언 50년, 올해 환갑인 최재형은 군납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극동에서 손꼽히는 거부(巨富)가 되었다. 고려인 사회를 넘어, 극동 정재계에서 최재형은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재형은 번 돈을 아낌없이 써서 동포들에게 베풀었다. 특히 후학을 양성하는 데 중점을 기울였고, 수많은 2세대 고려인 청년들이 최재형의 장학금을 받아 고등교육까지 진학했다.

그런데 그렇게 양성한 젊은 인재들이 혁명과 내전에 휘말려,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으니 최재형으로선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중립인척 하지 마시오! 선생은 시베리아 반혁명정부에서 재무차관이란 요직도 맡지 않았소?”

반대파들은 최재형의 위치를 비난했다. 단명으로 끝난 시베리아 정부에서 최재형은 재무차관을 맡은 바 있었고, 시베리아 정부가 해산하고 성립된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임시두마에서도 연해주를 대표하는 의원이 되었다.

위치만 놓고 보면, 최재형은 내전에서 명백하게 백군의 편에 서 있었다.

“결코 자리를 탐내서가 아니다. 누군가는 고려인을 대표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의무를 방기하지 않겠다.”

최재형은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서, 고려인이 내전의 폭력에 휘말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인구가 희박한 극동에서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학살과 폭력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럼에도, 내전의 광풍은 극동에도 밀어닥쳤다. 도시와 철도를 통제하는 백군과 농촌과 산야를 지배하는 적군 파르티잔 사이에서는 피로 피를 씻는 보복전이 이어졌다.

“내가 이 친구는 잘 아오. 내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던, 성실하고 똑똑한 친구요. 전선에서 붉은 물이 들어 적군에 가담했다곤 하지만, 젊은 만큼 얼마든지 갱생의 여지가 있소. 부디 선처를 베풀어 주시오.”

“원, 의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극형은 면하겠습니다만, 빨갱이는 쉽게 바뀌지 않는 법입니다.”

“어떻게든 전향을 받아 내겠소. 내 부탁을 들어준 대가는 적지 않게 치러 드리리다.”

최재형은 백군에게 사로잡힌 고려인 적군 포로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원으로서의 권위, 넓은 인맥, 많은 부로 백군 장교와 관리들을 설득했다.

“전쟁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해 온 이들을 향해 먹을 것과 일자리를 제공해 주게.”

“하지만 이번 분기 적자가 너무 심해서…….”

“상관없네. 돈은 언제든지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다시 구할 수 없는 거야.”

대전쟁에 이어 내전이 발발하면서 최재형의 자선사업은 더욱 커져 갔다.

혹자는 ‘군수산업으로 돈 벌면서, 전쟁으로 번 돈을 전재민(戰災民)을 위해 쓴다는 건 모순 아니냐?’라는 비난을 했지만, 최재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1920년의 어느 봄날,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대한제국 총영사 김하석은 최재형을 찾아 소식을 전했다.

“선생, 좋은 소식입니다. 남부전선에서 싸우는 백군 장교단 중에서 극동 출신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오오, 정말이오? 그렇다는 건…….”

“고려인 장교들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지요. 빅토르 김 장군이나 표트르 최 중령처럼 유능한 장교들이 개죽음을 당할 일 없이.”

“아아, 물론 그 누구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페챠 (표트르)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외다. 그 친구는 내 대자(代子)거든. 만약 머나먼 타지에서 전사했더라면, 그 친구 부친을 볼 면목이 없소이다.”

최재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은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 젊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최의 세례명은 바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표트르가 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최재형의 후원이 있었던 덕이었다.

“대한국 정부에서 전함을 파견해 그들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싣고 올 겁니다.”

“대한국 정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외다. 이 늙은이는 지난 40년 동안 황제 폐하로부터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소이다. 죽어서도 그 은혜는 다 갚지 못할 거외다.”

최재형은 새삼 이선의 은혜를 칭송했다.

노비 출신인 청년을 발탁하여 연해주 동포사회의 지도자를 맡기고, 한러관계의 가교 역할을 맡겨 오늘날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단연 이선의 후원 덕이 컸다.

최재형 자신은 모를 일이지만, 그는 변화한 역사의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원역사의 최재형은 이미 이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연해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항일의식이 강한 고려인 지도자들의 말살을 원했고, 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추천될 만큼 항일 거물이었던 최재형은 1순위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성상께서도 선생의 충심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실로 관후장자(寬厚長者)니, 동포사회를 넘어 연해주의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시지요.”

“실로 과분하신 말씀이시오. 이 늙은이는 그저 맡은 바 의무를 다하려고 할 뿐이외다.”

“겸손하실 것 없습니다. 선생께선 그럴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김하석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선생께서는 사업을 하니까, 세상에는 공짜란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비록 사회주의자들은 그걸 이해 못 하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으음.”

“브랑겔 장군이 병력 하나가 부족한 상황에서, 극동 출신 장교단을 보내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극동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전쟁을 이어 나가길 원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대한국이 이를 지원해 주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역시 그렇구려.”

“하지만 전러시아 임시정부가 사실상 파산 수순에 들어간 건 사실입니다. 백군에 의한 러시아 통일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반대 상황만 남았지요. 전러시아의 적화(赤化). 이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휴우, 물론 그래야겠지요.”

아무리 중립적으로 노력해도, 자본가이자 백군 정부에 참여한 최재형은 소비에트 치하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죽는 건 두렵지 않았으나, 자식들에게 ‘인민의 적’ 일족이란 빨간 딱지를 붙이고 살게 할 수는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기존의 파병 인원을 두 배로 늘리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명분이 필요하지요.”

“명분이라면…….”

“첫째, 러시아 임시정부의 지원 요청, 이건 확보했습니다. 둘째,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제국주의가 빼앗은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 이건 우리 정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셋째, 재러시아 한인을 비롯한 극동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에 보호를 요청한다. 우리 정부가 선생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바로 셋째입니다. 선생께서는 연해주를 대표하는 분이니까요.”

최재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리해 보면, 결국 자신이 러시아 임시정부를 대신할 극동 정부의 필두에 서라는 말이었다.

그는 자리를 탐낸 적은 없었다. 그를 움직였던 건 의무감이었다. 동포들이 새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과 새로운 고향인 러시아, 두 개의 조국에 모두 도움이 되는 것.

이 선택이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는 확신이 없었다. 독이 든 성배였다. 

하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결국 누군가에게 그 제한은 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맡는 게 나았다.

“알겠소이다. 대신 조건이 있소이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재러시아 한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건 이상, 우리 동포 중에 소비에트 정부와 파르티잔에 참여한 이들도 그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외다. 투항을 유도해야 하오. 극동에서 적군을 물리치려면, 이들에게는 관대한 처분을 부탁드리외다.”

“과연 선생은 관대하십니다. 하지만 사면한다고 빨갱이들이 돌아설까요?”

“나는 민족주의자외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연은 이념보다 강하다고 믿소이다.”

가혹한 시대의 파고를 넘기려면, 소수민족인 고려인은 한때 분열했을지라도 다시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 그래야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최재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관후장자다운 말이로군. 알겠네, 그의 제안대로 하겠다고 답하게.”

이선은 흔쾌히 최재형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결국 구색 맞추기이긴 해도,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20세기의 전쟁은 현실이 제국주의라 할지라도, 명분만은 민족자결을 운운해야 한다.

고려인 동포의 보호, 극동의 안정, 러시아 제국주의의 후퇴.

이를 토대로, 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3가지 안을 놓고 협의하여 최후통첩을 보낼 생각이었다.

1안. 1860년 북경 조약의 철회, 즉 연해주의 분리독립 인정. 

2안. 1858년 애훈(아이훈) 조약의 철회, 즉 스타노보이 산맥(외흥안령) 이남 아무르·연해주의 분리.

3안. 바이칼 동부 전 지역, 자바이칼·아무르·연해주 3주의 분리. 

‘중국에서 청국을 분리해 내듯, 러시아에서 극동을 분리해 낸다.’

내전의 격화와 국제전은, 이선으로 하여금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우호 대신에 분리주의를 도모하게 했다.

어차피 적으로 돌려야 한다면 철저히 해야 한다.

중화제국이 여러 개로 쪼개진 것처럼, 러시아제국도 분리를 면치 못하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