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타이가에서 영국의 바다까지 (662/812)

76화 타이가에서 영국의 바다까지

폴란드군의 공세는, 결과적으로 백군에게도 구원이 되었다. 폴란드는 백군의 패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군이 완승을 거두길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1920년 6월, 돈-쿠반 전선의 남러시아 백군은 치명적인 참패를 당했다. 백군의 본거지인 예카테리노다르(크라스노다르)가 함락되고, 잔존 병력은 항구도시 노보로시스크로 패주했다.

6월 하순, 백군 6만여 명이 노보로시스크에 적군에 포위되어 궤멸당하기 직전, 콜차크 제독이 지휘하는 러시아 흑해함대와 보스포루스 주둔 연합군 함대가 해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명줄을 잡은 백군 장병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질서를 지켜가며 승선하라!”

일부 카자크 부대가 교외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는 동안, 백군은 가까스로 해상철수에 성공했다.

중화기와 대포 등 대부분의 중장비는 버리고, 병사들을 하나라도 더 태워서 백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크림반도로 퇴각했다. 그나마 해상전력이 우세했기에 병력 대다수는 지켜 낼 수 있었다.

“모스크바 공세를 무리하게 추진한 사령부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책임지고 사임하겠소.”

참담한 실패로 끝난 모스크바 공세를 주도한 데니킨 대장이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백군 장성 중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검은 남작’ 브랑겔 중장이 남러시아군 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았다.

브랑겔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지휘권을 이어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바로 폴란드군의 우크라이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백군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폴란드와 적군이 싸우는 동안, 우리는 체제를 재정비한다. 그동안의 실수를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된다.”

브랑겔은 과거 농지개혁을 이끌었던 스톨리핀 내각의 농업장관에게 행정을 맡기고, 자신은 군사업무에만 집중했다.

농민들이 백군에 가장 거부감을 느꼈던 부분을 바로잡아, 소비에트의 토지개혁을 승인하고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를 인정했다.

군사독재나 다름없었던 남러시아 총사령부를 제헌의회 산하의 부대라고 선포, 장차 공화국을 존중할 것이라고도 약속했다.

대러시아주의도 반성하여,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진격하는 폴란드군을 향한 구애의 손짓이었다.

백군 최후의 희망, ‘검은 남작’이 이끄는 백군은 마지막 투쟁에 돌입했다.

한편, 소비에트 적군은 명백히 허를 찔렸다.

폴란드의 전면 공격에 대한 첩보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모스크바는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

“폴란드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머지않아, 폴란드가 휴전을 깨고 우크라이나를 향해 진격해 올 것 같습니다.”

“어디 와 보라고 하시오. 인민의 바다에 빠져 죽을 터이니. 영웅적인 붉은 군대는 백군을 격파하였듯, 폴란드군도 무찌를 것이오.”

“걱정 마시오. 남러시아 백군을 흑해로 밀어 넣을 터이니. 8월에는 서부전선에서도 진격할 수 있을 것이오.”

“그 기세를 타 바르샤바를 넘어 독일까지 진격하리라! 어차피 독일 혁명을 위해서라면, 폴란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합니다. 서방의 앞잡이 폴란드와 일전을 벌여야 합니다!”

적군은 남부전선은 승전 직전이었고, 동부전선도 협상 단계였다. 서부전선도 승리하리라 믿었다.

“독립한 지 2년도 안 된 신생국 폴란드가 러시아를 상대로 총공세를 펼친다는 건 가당치도 않지.”

러시아제국을 거부한 소비에트 혁명가들이지만, 이들 역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 대하여 자신도 모르게 얕보는 시선이 있었다.

이들은 폴란드가 공세를 펼치면, 오히려 역공으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폴란드군의 총공세가 개시됐습니다!”

“폴란드군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개전 2주도 안 되어 키예프(키이우)가 함락되자, 소비에트 정부는 당황했다.

“대체 이 무슨 추태요? 우리의 붉은 군대는 뭘 하고 있소?”

1919년 총동원령 이후 새로 징집된 농촌 출신 병사들은 전차나 전투기를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전투기가 하늘에서 기총을 쏘고, 전차가 평야를 돌진하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퇴각했다. 전선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비록 퇴각을 거듭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후퇴입니다. 전선이 재정비되는 대로 반격을 개시하겠습니다.”

키예프 함락 책임을 지고 적군 사령부도 교체되었다. 신임 총사령관으로 전직 제국군 대령이자 동부전선의 승리자인 세르게이 카메네프가 임명되고, 적군의 젊은 명장으로 떠오른 일명 ‘붉은 나폴레옹’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서부전선군의 지휘권을 잡았다.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승리에 도취되어, 서부전선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붉은 군대는 벨라루스를 돌파하여 폴란드 본토로 진입, 적의 심장부를 타격할 것입니다.”

신임 총사령부는 반격을 장담했다.

폴란드군이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틈을 타, 북쪽의 벨라루스로 진격하여 폴란드 본토를 강타한다는 전략이었다.

개전 초기의 혼란은 시간이 지나자 잠잠해졌고, 무엇보다 남러시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적군의 주력이 우크라이나로 재배치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랄산맥 동쪽의 동부전선 병력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급거 서쪽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질의 측면에서는 폴란드가 우월해도, 병력의 양이란 측면에서는 애초에 폴란드가 러시아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서방 제국주의의 앞잡이,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에 마수를 뻗으며 침입했다!”

“폴란드 귀족과 지주들은 과거에 그랬듯이, 우크라이나에 지주제를 복권하려고 한다!”

“노동자 농민들이여, 사회주의 조국을 수호하자!”

“러시아의 충실한 애국자들이여, 붉은 군대로!”

소비에트 정부는 내전 이후로 처음으로 계급전쟁이 아닌 ‘조국수호전쟁’을 내걸었다.

폴란드라는 오랜 역사적 숙적의 공세는,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에 부정적이었던 ‘애국주의자’들의 태도도 바꿨다.

대표적으로 적군과 백군 모두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내전에서 중립을 지켰던, 전 총사령관 브루실로프 대장이 있었다.

브루실로프 자신은 소비에트 정부에 부정적이었으나, 아들은 적군 기병연대장으로 복무했고, 아들의 영향과 폴란드의 침공은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

「전러시아의 장교들에게! 누가 인민과 함께 러시아의 대지를 지켰는가? 소비에트 정부다. 누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를 수호하고 있는가? 소비에트 정부다.

…… 이제 쌍두독수리와 삼색기를 잊고 적기 아래 단결해야 한다. 이는 모든 애국적 러시아 장교의 의무다. 계급과 사상의 차이를 잊고, 모든 러시아인은 조국 수호를 위해 붉은 군대에 입대하자!」

페트로그라드 전투의 승리자였던 브루실로프의 명성은 아직도 자자했다. 러시아 전국의 장교에게 호소하는 브루실로프의 연설문은, 백군에 복무 중이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고 있던 장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으음, 브루실로프 장군께서 그리 선택하셨다면.”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빼앗아가는 상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소비에트 정부는 브루실로프의 ‘전향’을 크게 기뻐했다. 60대 후반의 고령으로 인해 전선의 지휘권은 잡지 않았지만, 국방인민위원 트로츠키의 특별 보좌이자 기병총감의 지위를 맡겼다.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 폴란드 귀족과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브랑겔의 반혁명 백군은 반드시 궤멸될 것이다!”

남러시아군 사령관을 이어받은 브랑겔이 적군 프로파간다의 타겟이 되었다.

백군 프로파간다가 ‘붉은 유령’ 트로츠키에게 집중된다면, 새로운 적군 프로파간다는 ‘검은 남작’ 브랑겔에게 집중되었다.

「백군과 검은 남작이

차르의 옥좌를 다시 준비하려 한다.

그러나 타이가에서 영국의 바다까지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지 않은가!

붉은 군대여, 전진하라!

혁명군사위원회가 그대를 전장으로 부른다.

타이가에서 영국의 바다까지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지 않은가!」

새로운 군가,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가 전선과 도시에서 울려 퍼졌다.

“폴란드를 격파하고, 독일로 가는 길을 연다! 세계혁명 만세!”

1920년 여름, 붉은 군대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목표는 내전의 승리를 넘어, 유럽으로의 진군이었다.

1793년 혁명 프랑스가 전유럽에 군주제를 타도하는 혁명을 확산하길 원했듯, 1920년 혁명 러시아는 전유럽에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혁명이 확산되길 원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세계혁명’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른바 ‘혁명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는 서부전선에 총결집했다.

이를 위해서 동부전선, 극동은 더욱 소비에트 정부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동양 제국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특사의 태도 따위를 문제 삼다니요. 분명히 협상을 질질 끌면서, 점령을 이어 나가려는 겁니다. 동양에서도 혁명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동지들, 우리는 동시에 모든 전선에서 승리할 수 없소. 일단 지금은 폴란드와 브랑겔 일파를 격파하고, 유럽 혁명에 집중해야 할 때요. 이미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이니 더는 문제 삼지 마시오!”

한국이 특사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전권대사를 파견하라는 요구를 하자, 강경파들은 반발했다.

하지만 울리야노프는 이러한 태도를 ‘좌익 모험주의’라고 규정하고, 한국의 요구대로 고위급 인사를 극동으로 파견했다.

차관격인 외무 부(副)인민위원 레프 카라한(Lev Karakhan)이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아르메니아 출신 사회민주노동당원 카라한은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동양 전문가로 통했고, 주로 아시아 문제를 담당했다.

1920년 초, 카라한은 「중국 인민과 남북 두 중국 정부에 보내는 제언」, 이른바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다.

분열된 중국 북양정부와 호법정부, 더 나아가 중국 인민을 향한 소비에트 정부의 선언이었다.

과거 러시아 제국주의가 중국에 강요한 일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의화단전쟁의 배상금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사실 러시아가 청국에 강요한 조약들은 오늘날 중화민국의 강역이 아닌 청국의 강역에 집중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포기한 건 천진의 러시아 조계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천진 러시아 조계는 카라한 선언을 거부하고 백군 지지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이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912년 조약에 의거 청국이 진 채무의 대부분은 중화민국이 계승했고, 이는 역대 민국 정부에게 굉장한 부담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먼저 포기하겠다고 나섰다.

일본의 산동 점령 문제로 중국은 서양 열강에게 크게 실망한 상태였고, 러시아가 제국주의적 이득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하니 중국 각계의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혁명 러시아는 제국주의자들과 확실히 다르군.”

“중국의 분할 음모에 맞서 의지할 나라는 러시아뿐이다.”

손문과 국민당은 카라한 선언을 반겼으나, 북양군벌정권은 무시했다. 일본과 밀접한 관계인 안휘파 정권은 반소 태세를 분명히 했다.

1920년 7월, 중국은 권력을 잡고 있는 단기서의 휘파와 이에 반발하는 직례파 간의 ‘안직전쟁’으로 다시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으므로,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관심 밖이었다.

러시아 내전은 소비에트라는 강력한 구심점이라도 있었으나, 중국 내전은 어느 군벌이 이겨도 희망이 없는, 끝없는 유혈투쟁의 반복이었다.

극동으로 떠나기 전, 임무를 설명받은 카라한이 울리야노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동지, 한국과 협상이 타결된다 할지라도, 이리된다면 극동 공화국이 한국의 괴뢰국이 될 가능성이 없잖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 한국이 계속 핑계를 대면서 군대를 연해주에 뭉갤 수도 있고, 제헌의회에서 선출되는 민주공화국이니까 인민의 투표 여하에 따라 야당이 될 수도 있고.”

카라한의 지적에 울리야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극동은 노동자의 수가 적고,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대개 자영농이지요. 1917년 제헌의회 선거에서도 극동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우세했습니다. 물론 그 후로 정세가 많이 달라지긴 했습니다. 백군의 가혹한 통치에 시달린 농민들이 우리에게 표를 던져줄 가능성이 큽니다만, 승리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동지의 분석은 타당하오. 뭐, 극동에서 단독 여당이 될 필요도 없소. 임시정부에 가담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도 백군을 주도하던 군부에 학을 뗐을 테니까. 현재의 독일 공화국처럼, 민주공화국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면 충분하오.”

“예, 알겠습니다.”

“물론…….”

순간 울리야노프는 씩 웃더니, 문득 독일어로 언어를 바꿔 말했다. 

“Es muss demokratisch aussehen, aber wir müssen alles in der Hand haben(모든 것이 민주적으로 보이게 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통제해야 하오)!”

* * *

대한제국, 서경 평양부.

“카라한이 소비에트 전권대표라. 저들이 진지하게 협상에 응할 의사가 있단 말이군.”

카라한 선언의 장본인을 파견한다는 건, 대한제국으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선은 김규식을 한청 양국을 대표하는 전권대표로 임명하고, 카라한과 협상하도록 했다.

“카라한 본인이 러시아 제국주의가 중국에 강요한 조약을 철폐한다고 하였으니, 같은 논리가 청국에도 적용되어야지. 동청철도 권리 포기, 더 나아가 아이훈조약과 북경조약의 부정.”

물론 카라한 선언은 문자 그대로 선언적인 의미에 가까우니, 정말로 아이훈조약과 북경조약을 폐기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청국을 대리하여 동양의 평화를 추진하는’ 한국으로서는 내걸 수 있는 명분이었다.

“폐하. 이 논리대로라면 두 조약으로 할양된 영토, 즉 외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의 아무르주와 연해주 두 주만을 극동 공화국의 영토로 주장함이 타당합니다.”

“짐도 명분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대한이 통제할 수 있는 최대 한계는 외흥안령까지라고 생각하오. 군부는 만주 방어를 위해선 철도 중심지인 치타와 자바이칼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군부의 주장은 과도합니다. 자바이칼은 너무 돌출되어 있어 유사시 방어하기도 어렵습니다.”

문득 이선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소비에트도 자발적으로 나서 자바이칼까지 극동 공화국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저들이 영토를 그냥 내주려 할 리는 없을 터인데?”

“신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인구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오. 연해주만 놓고 보면, 인구 대비 한인(고려인)의 비율이 거의 20%에 달하오. 아무르주까지 포함해도 두 자리 비율을 유지하지. 하지만 한인이 거주하지 않는 자바이칼을 추가하면 6%로 떨어진단 말이오. 저들로선 영토 내에 한인의 비율을 최소화해서, 연해주 분리공작을 막으려는 거겠지.”

이선은 김규식을 향해 씩 웃었다.

“극동 공화국의 독립은 관철되어야 하오. 러시아도 대한도 아닌 자주독립국으로. 단, 실질적으로 우리가 지배해야 하지. 구체적으로는…….”

소비에트가 극동의 ‘실질적 통제’를 원한다면, 대한제국은 ‘실질적 지배’를 원했다.

결국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외교의 장에서 결판이 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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