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극동 공화국
조약 체결을 결정한 이선은, 바로 기반 단속에 들어갔다.
정부와 정당은 이진과 이상설에게 맡기고, 이선은 군부의 통제에 나섰다. 황명으로 즉시 군무대신 이동휘를 흥경궁으로 불러들였다.
“성재(誠齋, 이동휘의 호), 짐이 듣기로 소비에트와 조약 체결하는 데 군부 내에서 이견(異見)이 있다던데.”
“아니옵니다. 대원수 폐하께옵서 결정하시는 일에 누가 감히 이견을 내겠습니까?”
이동휘가 정색하며 고개를 숙이자, 이선이 씩 웃었다.
“아니, 어떤 조직이든 다양한 의견이 있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한 사람만의 의견과 결정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지나치게 경직된 조직이지. 이견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없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조약을 맺는 건 정치의 역할이고,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군인은 맡은바 명령만 수행할 뿐입니다.”
본래 조선이란 나라는 문민통제를 넘어 철저한 문관우위 사회였다. 갑신경장으로 무관이 문관과 동등한 반열에 들어섰고, 독립전쟁 승전 이후에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고는 하나, 문치(文治)의 기풍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파벌을 형성했다는 혐의로 비판받은 박유굉도 군부를 움직였다기보다는, 그 자신이 개화파 원로의 일원으로서 박영효가 이끄는 팽창주의 파벌에 가담한 것에 더 가까웠다.
박유굉의 실각을 본 후임자 이동휘로서는 자연히 몸을 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각에서는 군부를 대표해 여러 의견을 내지만, 황제나 총리가 결정을 내리면 복종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좋은 말이오. 그래서 짐이 경을 군무대신의 중책을 맡긴 거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구주대전에 이어 시베리아 개입에 관여한 군부 인사들이 조약에 반발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피를 흘려 가며 싸웠으니까.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많은 영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포기하지? 이런 생각도 들 거요. 대전쟁과 내전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러시아에 비하면, 대한은 이득만 누려 온 셈이니까.”
“…….”
“그렇기에 이 지점에서 협상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거요. 대한이 더 큰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기 전에. 아무리 내전으로 혼란하고 약해졌다고는 하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요. 단기전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라도, 장기전의 늪에 빠지는 순간 끝장이오. 일본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소.”
이선은 이동휘가 아니라, 군부 전체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실로 지당하신 하명이십니다.”
“짐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것이 군인의 주된 사명이라고 생각하오. 경과 참모총장이 짐의 뜻에 따라 군부를 확실히 이끌어 주리라 믿고 있소. 조약이 체결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시베리아 파병군을 연해주로 철수시키시오. 그 과정에서 적군과 불필요한 갈등이 없어야 할 것이오.”
이동휘는 거수경례하며 명을 받들었다.
“예, 대원수 폐하! 신은 삼가 지엄하신 황명을 받잡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군부를 이끄는 제2세대 ‘3대장’, 즉 야전군 사령관 홍범도, 군무대신 이동휘, 참모총장 노백린.
홍범도는 야전지휘관으로서는 탁월했지만 정무능력은 떨어졌고, 군 서열상 차기 군무대신으로 가장 유력했지만 본인이 한계를 느끼고 고사했다. 대신 제1야전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
이동휘는 야전지휘관으로서는 홍범도보다 부족해도 정무능력, 행정능력은 장성 중 발군이었다. 정치 감각도 밝았는데, 정치군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서방의 문민통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노백린은 지휘관으로서도 훌륭했고,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답게 참모로서의 역량이 탁월했다. 공군이 미래의 주역이 되리라 확신할 정도로 신기술과 군사이론에도 정통했다.
이선이 위관장교 시절부터 직접 발탁하여 중임을 맡긴 인사들이 군부의 중핵이 된 것이었다.
7월 31일은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암살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평양 유일의 정교회 성당에서는 망명 러시아인들이 참석하는 추모 예배가 열렸다.
이선은 이안과 함께 추모 예배에 참석했다.
다만 종교 예식까지는 참여하지 않고, 별도의 좌석에서 참관했다. 유교를 숭상하는 대한제국 황제로서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참석에 정치적 해석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어디까지나 오랜 벗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선을 그었다.
“전러시아인의 황제 니콜라이 2세께서는, 신의 은총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전러시아를 다스렸으나……, 배신자와 반역자, 무신론자와 사회주의자, 무지하고 과격한 무리에 의해 박해받으셨으니…….”
황족과 망명 귀족들이 참여한 추모식이니만큼, 고인은 마치 순교한 성인처럼 떠받들어졌다.
성찬식까지 예식이 모두 끝난 후,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니콜라이의 자녀들을 위로했다.
“1주기가 되니 고인에 대하여 새삼 추모의 감정이 떠오릅니다. 짐과 고인은 실로 오랜 벗이었소. 고인이 짐에게 생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한 바가 그대들의 안전과 평화였소.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리 살 수 있는 건 모두 황제 폐하의 은덕입니다.”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새삼 동정의 감정이 들었다. 부모를 잃고 머나먼 땅에서 망명자로 살아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알렉세이는 거동조차 어려운 처지가 되어 부축을 받아야만 일어설 수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 만세!”
“차르의 형제이자 벗이시여, 정통 차르를 보우해 주소서!”
“부디 정통 러시아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소비에트와의 협상은 안 됩니다, 폐하!”
망명 귀족들이 이선을 향해 만세를 외치며 애원했다. 이선은 4남매를 대할 때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들을 향해선 웃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외교는 전적으로 정부에게 달린 일, 여러분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대한제국은 자유를 중시하는 나라로서, 짐과 한국 정부는 망명자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새로 성립될 극동공화국 정부 역시 민주공화국으로서 모든 국민의 권리를 존중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폐, 폐하!”
“즉, 여러분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망명자로 살아가느냐, 극동의 국민으로서 살아가느냐, 이 모든 걸 거부하고 제3국으로 떠나느냐. 물론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주장하는 정통 러시아군에 합류해서 장렬히 싸우는 방법도 있겠지요.”
이선은 다분히 빈정거리고 있었다.
망명자라 보호는 해 주고 있다만, 이선은 고깝기 짝이 없었다. 망명지에서 보호받으면서 정통 놀이하지 말고, 불만이면 백군에 합류해 나가서 싸우다 죽든가, 살고 싶으면 지침을 따를 일이었다.
황제의 단호한 어조에 망명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추모 예배가 끝난 후, 이선은 4남매를 흥경궁으로 초청했다.
“태자를 통해 그대들의 걱정을 들을 수 있었소. 당연히 걱정이 되겠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소비에트는 부모의 원수니까. 결코 그런 자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고 싶지 않겠지.”
“…….”
“여러분의 부모님, 내게는 벗이 되는 그분들이 지금 가장 염려하고 있는 건, 자녀의 안위라 생각하오. 나는 이미 맹세하였소. 그대들은 내 조카나 다름없고, 나와 내 자식들은 그대들의 안전을 반드시 지킬 것이오. 그렇지 않으냐, 정친왕?”
“예, 폐하. 소자도 반드시, 죽는 날까지 대공들의 안전을 보위하겠습니다.”
이선과 이안의 다짐에 4남매는 감격하여 얼굴이 상기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올가 여대공도 곧 그대들과 재회할 수 있을 거요. 그대들이 원한다면 연해주로 이주해도 좋소. 새 극동 공화국 정부는 그대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할 것이오.”
백군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종군하던 올가는, 협상이 본격화되자 한국군의 보호를 받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머물렀다.
“단, 내 생각으로는 올가 여대공이 이곳으로 오는 게 좋겠소. 아직 극동의 정세는 완전히 평화롭지 못하니까. 당분간 한국에서 머무르며 추이를 관망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하오.”
“예, 그게 좋겠습니다.”
4남매 입장에선 맏이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기쁠 일이었다.
“그대들이 차르의 자녀들이자, 러시아 황실의 정통을 계승했기에, 막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는 걸 알고 있소. 자리에 욕심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아오. 나 역시 왕의 아들인데 어찌 모르겠소? 위기에 처한 국가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소.”
일부 제정복고파들은, 알렉세이를 ‘정통 차르 알렉세이 2세’라 선포하고, 제정을 복고하길 희망했다.
하지만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백군 내에서도 제정 복고는 소수파였다. 자매들도 차르 알렉세이 운운은 반대했다. 병약한 알렉세이를 위해서라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차르의 자녀들은 막중한 의무감에 시달렸다.
그들을 향해 제정복고파의 기대가 쏠린 건 둘째 치고, 그들 눈에 ‘무신론자에 의해 멸망해 가는 신성한 러시아’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맏이 올가는 백군 소속으로 투쟁했고, 망명 중인 대공들도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한국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지금의 러시아는 그대들이 알던 러시아가 아니오. 부디 정치는 하지 마시오. 그대들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은 내려놓으시오. 자녀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부모님의 뜻이라 생각하오. 내가 그 뜻을 이어받겠소.”
이선의 간곡한 당부에, 4남매는 고개를 숙였다.
순간, 감정이 풍부한 아나스타샤가 눈물을 흘렸다.
“왜, 왜 울고 그래? 황제 폐하께서 계신데.”
“죄송해요. 부모님 생각이 나서…….”
아나스타샤에게서 시작된 눈물에 자매들이 모두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알렉세이는 남자라고 끝끝내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그 역시 표정은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눈물을 멈추고도 여전히 슬픈 기색인 그들을 이안이 풀어 주려고 노력했다. 이안의 노력 덕인지, 그들은 결국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선도 모처럼 밝게 웃었다.
* * *
8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치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한 임시두마(의회)는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해산을 선언했다.
“전러시아 임시정부는 역사적 의의를 다하였으므로……. 이에 극동 인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정부를 선언하는 바이다.”
“누구 마음대로! 사회혁명당 놈들, 분리주의자 놈들! 러시아를 빨갱이들에게 팔아먹으려는 속셈이냐!”
“군부의 무능하고 가혹한 통치가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소. 이제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때요!”
백군 강경파들은 전러시아 정부의 해산에 격렬히 반대했으나, 한국과 연합국의 지지를 받는 임시두마는 해산을 강행했다.
임시두마는 연해주 젬스트보(지방자치조직)와 결합하여, <극동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이는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의 <극동 공화국 임시위원회>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즉, 자바이칼에서는 소비에트-볼셰비키가 주도하는 극동 공화국이, 연해주에서는 두마-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극동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는 차후 통합될 극동 공화국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었다.
“동지들, 극동 공화국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입니다. 우리는 당면한 유럽 혁명을 완수하고, 아시아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극동 공화국은 완충국으로서, 동양 평화의 중요한 축이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인 극동은 주변국과 경제적으로 연결하게 될 것이며, 특히 연해주와 대한의 관계는 두터워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최선입니다.”
모스크바와 서울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이어진 끝에, 소비에트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는 8월 15일 하얼빈 조약을 확정하기로 합의했다.
“즉각적으로 휴전하고, 백군과 파르티잔은 각자 무기를 내려놓는다. 한국군은 1920년 12월까지 연해주로 철수를 완료한다. 외국군의 완전한 철수는 2년의 유예를 둔다. 1921년 1월에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한다. 극동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이며, 자본주의 경제를 확립한다.”
상호간 합의와 휴전 결정에 따라, 극동에서 이어지던 총성은 멈췄다.
한국군의 압력을 받은 백군, 소비에트의 명령을 받은 파르티잔은 일단 무기를 내려놓았다.
일부 지휘관들이 명령에 반발해 숲속으로 들어가 투쟁을 이어 갈 것을 선언했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자바이칼과 아무르에 주둔하던 한국군은 8월 하순부터 연해주를 향해 철수를 시작했다.
2년 유예기간 동안, 한국군은 계속 연해주에 주둔하며 고려인과 구 백군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한 터였다.
연해주에 병력이 집중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로 이어지는 철도 구간에는 한국군 부대들이 촘촘히 형성되었다.
소비에트-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자바이칼과 두마-사회혁명당이 주도하는 연해주 간에 협상이 이어졌다.
“극동 공화국의 수도는 교통의 요충지인 자바이칼 치타가 되어야 합니다.”
“극동 공화국의 수도는 당연히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가 되어야지요. 치타에 비하면 블라디보스토크는 2배는 큰 도시입니다. 국제적 교류도 많고.”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리적으로 완전히 치우쳐져 있지 않습니까!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어렵습니다!”
“페트로그라드도 지리적으로 치우쳐져 있었지만 수도로 잘만 기능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제2의 페트로그라드로 육성해야 합니다.”
“명분은 좋구려. 연해주 주둔 외국군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뭐, 뭐요? 그러는 당신들은 모스크바의 앞잡이 아닌가!”
“모스크바의 앞잡이? 서울과 도쿄, 런던과 파리의 앞잡이인 당신들이 할 말인가!”
자바이칼과 연해주 사이에서는 극동의 주도권을 놓고 시작부터 대립이 전개됐다.
중도좌파 사회혁명당뿐만 아니라, 러시아 우익진영은 연해주를 러시아 최후의 자유지대라고 여겼으므로, 순순히 주도권을 넘겨 줄 생각이 없었다.
격렬한 논의 끝에, 일단 치타를 제헌의회 소집지로 결정하고, 1921년 선거와 의회 소집 후에 수도와 각종 문제를 확정하기로 미뤘다.
그때까지, 일단은 자바이칼-아무르-연해주에서 각각의 의회가 통치권을 발휘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극동 공화국은 일종의 실험국가다. 여러 민족이, 여러 계급이, 좌익과 우익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실험국가. 아시아 유일의 민주공화국이 되기도 하겠군.’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자처한 필리핀 공화국은 미국의 괴뢰국으로 전락해 토호들 간에 이권대립이 이어지는 유사 민주공화국이었다.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은 명목상 인구 4억 세계 최대의 민주공화국이었으나, 군벌들의 분열과 항쟁으로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로 회귀하고 있었다.
‘이 실험이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켜봐야지.’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로 만들어진 완충국의 한계로 인해 제대로 국가가 돌아갈지나 의문이었지만, 이선은 가급적 이 실험이 성공하기를 희망했다.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는 것보단, 한국과 경제적으로 연결되는 민주공화국과 국경을 접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물론, 연해주를 향한 한국 자본의 침투는 계속 이어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