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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제4의 제국 (673/812)

87화 제4의 제국

그 무렵, 블라디보스토크.

1920년은 마침 블라디보스토크 건설 60주년이었다. ‘동방을 정복하라’라는 의미처럼, 야심 차게 출범한 도시였다.

유라시아 동쪽 끝의 이 항구가 백군 최후의 보루가 된 상태였다.

‘멘셰비키’, 즉 비(非)볼셰비키 좌익에서 우익 제정복고파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정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삼았다.

연해주는 명목상 신생 극동 공화국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중도파가 주도하는 연해주 젬스트보(자치의회)가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통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모스크바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백계 망명자들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권력에 맞서 정당화할 이론을 구상했으니,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전경을 보라. 아름다운 만(灣)이 보이지 않는가? 극동의 정복자인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백작은 금각만이라고 명명했다. 금각만을 나온 선박은 해협을 지난다. 그 해협의 이름은 바로 동(東)보스포루스 해협이다. 해협을 지나면, 표트르 대제만에 진입한다.”

아이훈 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인 총독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는 항구를 향해 깊숙이 들어온 만 이름을 ‘금각만(졸로토이로크)’이라고 명명했다.

총독의 이름을 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반도와 루스키 섬을 가르는 해협의 이름은 동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명명되었다. 그 서쪽의 만 이름은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이는 모든 동방정교회의 숙원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의식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금각만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따온, 즉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렇다. 이곳이야말로 새로운 콘스탄티노플, 동방의 차리그라드(황제의 도시)다.”

4세기 천도 이래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노바 로마(새로운 로마)’, 즉 제2의 로마였다.

1453년 동로마제국 멸망 이후 북방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부상했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마지막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와 혼인하였고, 정교회의 수호자이자 로마의 후예를 자처했다.

이후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가 되었다. 제3의 로마는 러시아제국의 통치 이념의 핵심이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굴복시키고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표트르 대제나, 본래 독일 출신인 예카테리나 대제도 제3의 로마를 내세우며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이며 남하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그 도시,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 무슬림에게 정복된 이후에도, 정교회는 살아남아 모스크바에서 정통을 이었다. 비록 모스크바가 무신론자에게 정복되었으나,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살아남아 정통을 계승하리라. 새로운 콘스탄티노플, 동방의 모스크바가 될 블라디보스토크가 제4의 로마가 되어야 한다!”

로마-콘스탄티노플-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로 계승되는 제4의 로마.

이들에 따르면 1600년 사이에 로마가 멀고 먼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이른 셈이었다.

기실 백계 망명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공론(空論)에 불과했으나, 이들에게는 최후의 믿음이었다.

시공간의 착오로 보이는 ‘제4의 로마’ 외에도 새로운 담론이 등장했다.

때마침 백계 망명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동안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 부르며 혐오하던 관점을 벗어나 유목민족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이른바 ‘유라시아주의’ 담론의 등장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이가 언어학자이자 민족학자인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Nikolai S. Trubetskoi) 공작이었다.

“유럽인들은 러시아인을 스키타이인이라 경멸한다. 그동안 우리는 유목민의 피를 이어받은 걸 부끄러워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스키타이, 튀르크, 몽골의 피가 흐른다. 우리는 유럽의 변방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계승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학교가 유라시아 담론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1899년 니콜라이 2세의 명으로 개교한 ‘동양학연구소’는 1920년 극동 공화국의 선포와 함께 ‘국립극동대학교’로 격상되었다.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그리고리 포드스타빈(Grigorii V. Podstavin)은 러시아 한국학의 개척자로, 서양 최초의 한국학과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포드스타빈은 러시아 최고의 한국 전문가이자, 재러 한인(고려인) 사회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친우였다.

한국어와 한국사에 정통한 포드스타빈은 발해사 연구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발해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공통점을 찾고자 했다.

때마침 등장한 유라시아주의 담론은 극동만의 특수성을 부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제4의 로마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제4의 제국이라면, 그건 스키타이와 튀르크와 몽골의 뒤를 잇는 제국이어야 한다. 극동은 러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새로운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스키타이-튀르크(하자르·폴로베츠)-몽골제국(주치울루스)-러시아제국(‘하얀 칸’)으로 계승되는 제4의 유라시아제국.

상당수 러시아인이 열광하는 ‘제4의 로마’와 달리 ‘제4의 제국’은 일부 지식인들 외에는 영향력이 없었으나, 연해주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쪽이 더 흥미롭게 여겨졌다.

“대한의 정통성은 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이어진다. 연해주는 옛 발해의 영토이자, 우리 동포들의 터전이요, 러시아의 새로운 중심지다. 새 극동 국가는 두 나라의 연대 위에서 이뤄질 것이다.”

과거에는 조선인들이 러시아제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백계 러시아인들이 대한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 극동에 자유주의-자본주의 완충국을 원하는 대한제국 입장에선, 유럽 러시아와 분리되는 극동의 특수한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이론이라도 좋았다.

제4의 로마든, 제4의 유라시아제국이든 말이다.

두 이론은 모두, 공히 백계 러시아의 상징적 존재인 로마노프 왕가의 대공들이 엮이게 되었다.

* * *

대한제국 함경북도 청진.

두만강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혁명 이전부터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살았는데, 개중에는 조선과 러시아 수교 직후부터 정착한 이도 있었다.

시베리아에 유배된 폴란드 정치범에서, 완화군 이선에게 발탁되어 연해주 고려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가 조선에 정착하게 된 미하일(미하우) 얀코프스키의 저택이 청진에 있었다.

미하일은 군마 납품과 연해주 국경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고, 청진 일대에 넓은 토지를 얻어 ‘노비나’라고 명명한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했다.

한참 어린 사촌누이 마르가리타가 한국으로 이주한 이후, 얀코프스키 가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이 무렵에는 미하일은 늙어 아들 유리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주었다.

폴란드인의 정체성이 강했던 1세대와 달리, 2세대인 유리는 러시아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오히려 절반은 러시아인, 절반은 한국인의 정체성이 생겼다. 

계급적인 측면에서 봐도, 연해주에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얀코프스키 가문으로선 사회주의 정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리 얀코프스키는 백군 운동을 지지했고, 재정적인 후원을 보냈다. 백계 망명자들에게는 피난처를 알선해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청진으로 거처를 옮긴 올가 대공녀가 임시로 머무는 거처도 바로 노비나, 즉 얀코프스키 가문의 영지였다.

“내 집인 것처럼 편히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대공 전하.”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차르의 압제에 저항하다 시베리아로 추방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차르의 딸을 환영한다는 건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흘러 있었다.

“손님이 전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누구신가요?”

“접니다, 올가 니콜라예브나 대공 전하.”

잘생긴 외모의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여대공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청년은 바로 펠릭스 유수포프(Felix F. Yusupov) 공작으로, 러시아 최고 부자 가문의 후계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조카사위였다.

“펠릭스! 언제 한국에 왔나요?”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드미트리 대공이 하도 와 달라고 성화를 내서.”

“그럼 알렉세이와 내 아우들을 만났나요?”

“예, 서울과 평양에 들렀다가 오는 길입니다. 다들 평안하십니다.”

본래 올가는 유수포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교계의 총아이자, 여장을 즐긴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꽃미남인 펠릭스 공작의 경박한 태도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올가가 싫어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수포프가 절친한 벗인 드미트리 대공과 함께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를 끌어내리려는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는 사실이었다.

1917년 4월 혁명의 성공으로 쿠데타는 계획 단계에서 무너졌지만, 정작 쿠데타 주모자인 키릴 대공과 드미트리 대공, 유수포프 공작 등은 재빨리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군 경력을 이어 나갔다.

이들 입장에서는 ‘구국의 결단’이었을지 몰라도, 차르의 자녀들 입장에서는 배신이었다.

“그렇군요. 이 먼 곳에서 만나니 반갑네요.”

그러나 그것도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는 모두 볼셰비키를 피해 망명한 처지였다. 드미트리와도 화해했는데, 유수포프와도 못할 게 없었다.

“저도 여기까지 오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운명이란 건 알 수가 없군요.”

“공작의 활약상에 대해선 들었어요. 독일 점령군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던데.”

“뭐, 제가 협조한 건 맞지만 직접 던진 건 아니지요.”

유수포프 가문은 러시아 곳곳, 특히 크림반도에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18년 러시아 공화국 선포 이후 유수포프는 퇴역하여 크림반도의 영지로 낙향했는데, 얼마 후 독일군이 우크라이나와 크림으로 진격해 점령했다.

이때 러시아 귀족 중 일부가 공화국에 반대해 독일의 괴뢰정권에 부역했고, 유수포프도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수포프는 신생 러시아 공화국 정보부, 옛 사회혁명당 테러조직과 내통하고 있었다.

독일 점령군 사령관인 아이히호른 원수가 유수포프 저택을 방문했을 때, 사회혁명당 요원이 원수에게 폭탄을 던져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유수포프는 독일군의 검거를 피해 여장을 한 채로 유유히 배를 타고 탈출에 성공했고, 신생 공화국 정부에서도 영웅 대접을 받게 되었다.

“공작은 공화국에서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제가 러시아를 위해 일하고 싶어도, 사회주의자들의 통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더군요. 토지와 자산은 모두 잃고, 귀중품만 들고 나왔습니다. 영국 군함을 타고 프랑스로 망명했죠.”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토지 몰수가 실현되었다. 막대한 토지와 자산을 보유한 유수포프 가문도 몰수의 대상이 되었다. 유수포프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아무튼, 제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의 이야기가 중요하지요.”

“타냐의 일을 공작도 알고 있나요?”

“드미트리의 부탁을 받아 제가 평양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대리인 역할을 했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유수포프 공작부인은 니콜라이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였으므로, 그도 황실의 일원이었다.

“한국 황태자 전하께서 타냐와 혼인을 원한다는 게 확실한 건가요?”

“한국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제안하신 거니까, 확실하지요.”

“하느님 맙소사.”

올가는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타냐는 뭐라고 하던가요?”

“가문의 맏이, 즉 올가 니콜라예브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바보 같긴! 결혼은 본인이 하는 건데. 본인의 뜻이 제일 중요하지.”

올가는 둘째 동생의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성격을 잘 알았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언제나 부모님의 뜻을 따랐고, 망명한 후에는 맏언니의 뜻을 따르려 했다.

“전하.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 일은 단순히 결혼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 간의 혼인이지요. 황태자 전하는 장차 한국의 제위를 이을 분입니다. 즉, 타냐 여대공이 차기 황후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나도 알아요. 그러니 더 당황스럽다는 거지요. 러시아 여대공이 타국 왕실에 시집을 간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동양 왕실하고는 전례가 없었으니.”

유수포프가 씩 웃었다.

“전하, 아주 전례가 없는 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제 혈통도 타타르인의 후예 아닙니까.”

유수포프 가문은 17세기에 정교회로 개종하고 모스크바의 신하가 된 노가이 왕가(킵차크 칸국의 지배자)의 후손으로, 14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 칸의 후예였다.

“지금 농담해요? 공작의 가문은 러시아에 귀화한 지 벌써 300년은 되었잖아요. 하지만 이왕가는 러시아와 무관한 동양의 가문이라고요.”

“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한국 황제 폐하께서는 러시아제국의 공작이셨습니다. 약 40년 전, 1881년에 말이지요.”

“…… 그렇군요. 증조부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고 공작에 봉해졌지요.”

유수포프가 문득 옛일을 상기시키자, 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국 황제께서는 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셨잖아요.”

“그 과정이 중요하지요. 한국 황제께서 왕자 시절, 러시아로 망명했던 건 잘 아실 겁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막아 공작으로 봉해졌지요. 그때 페테르부르크의 명문가들은 이선 공작에게 큰 관심을 보였어요. 저희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펠릭스의 어머니 지나이다는 유수포프 가문의 장녀로, 막대한 부와 미모를 지닌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각광받았다. 결국 행운의 사나이는 기병장교였던 펠릭스의 부친 수마로코프-엘스톤 백작이 되었다.

하지만 왕족 사위를 얻고 싶었던 지나이다의 부친 유수포프 공작은 실망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양에서 온 왕자가 차르의 구원자로 떠오르자, 둘째 딸의 사윗감으로 염두에 두었다.

“외조부께서는 이선 공작과 이모님의 혼인을 생각하셨지요. 공교롭게도 그 이모님의 이름도 타티야나였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올가는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선 공작께선 의무를 더 중시하는 분이셨지요. 부와 사랑보다는 의무와 권력에 더 관심이 많으셨고. 혼사는 엎어졌지만, 그래도 유수포프 가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외조부께서 브라노벨의 바쿠 유전을 투자할 때 함께했었지요. 공동으로 경영하는 사업도 있었고.”

이선은 러시아를 떠난 후에도 유수포프 가문과 친분을 유지했고, 브라노벨의 바쿠 유전을 포함한 각종 사업의 투자에 공동으로 참여했었다.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이선 공작은 왕가의 갈등을 피해 온 망명자의 신분이었습니다. 러시아 차르의 힘을 얻어, 연해주에 와서 동포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권좌에 올랐죠. 뭔가 떠오르는 바가 없으십니까?”

“…… 지금 우리 처지와 비슷한 점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이선 공작은 연해주를 기반으로 귀국하여 제국을 건설했지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국 황제가 로마노프 왕가의 힘을 빌렸듯이, 우리도 한국 왕가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제4의 로마든, 제4의 제국이든, 우리는 연해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국혼이 이를 보증해 줄 겁니다.”

유수포프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올가는 여전히 주저가 되었다.

“타냐가 동양 왕가에서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요?”

“여기 얀코프스키 가문이 역사의 산증인 아니겠습니까.”

얀코프스키 가문은 ‘파란양’ 마르가리타의 일족이었다.

“하지만 얀코프스카 여사하고는 상황이 다른…….”

“물론 다르지요. 이쪽은 정식 국혼이니까.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한국 황제께서는 이 나라의 절대적 권력자라는 겁니다. 그 어떤 반대로부터도, 타냐를 보호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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