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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하늘의 뜻 (683/812)

97화 하늘의 뜻

유언장을 살피던 이선은 이척에게 물었다.

“순친왕은 어제문(御製文)의 내용을 아는가?”

“아니옵니다. 태상황께서 부득이한 상황에 대비하여 제게 위치를 알려 주시고, 유고 시 성상께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그럼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내 차분히 읽고 나서 태상황께 아뢸 일이 있네.”

이선의 말을 들은 태상황이 오른손을 들어 나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이척은 예를 표하고 대조전 밖으로 물러났다.

「대원왕께서 내게 이르시길, 성상이 경진년(1880) 이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하시었다. 본래 알던 완화군 선과 너무 달라졌다는 말씀이셨다.

선이 원래 총명했다고는 하나, 청국과 아라사로 갑자기 떠날 정도로 모험심이 넘치는 성품은 아니었다. 아라사에서 돌아온 임오년에는 더욱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 열다섯에 동서고금의 역사와 정세를 꿰고 있으며, 정치적 경륜도 놀라울 정도로 기민했다. 도대체 무슨 경험을 했기에 이렇게 변화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선은 마치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한 듯 대책을 세우고 기민하게 행동했다.

선의 총명함과 기민함이 사직을 구원하고 국가를 보위하였으니, 이유야 어찌 됐건 크게 만족하였다. 비록 개화당 일파가 추진하는 급진적인 개혁이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였다지만, 선을 굳게 믿고 대임을 위임하였다.

마침내 청국을 격파하여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칭제건원하여 국위를 사방에 떨쳤으니 어찌 여한이 있겠는가.

대원왕은 훙서를 앞두고 깊이 생각하기를, 이는 도저히 사람의 일이 아니며 하늘의 뜻이 이뤄진 것이다.

감히 추측하건대, 아마도 경진년에 하늘의 기이한 뜻으로, 선은 앞날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유언장을 읽던 이선은 뜻밖이었다.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괴력난신’을 배척하던 대원군이었다. 냉철한 현실주의자 대원군은 점술이니 예언이니 하는 걸 싫어했다. 대원군 앞에서 누군가 진지하게 앞날을 예언한다고 하면, 대원군이 즐기던 농담이 아닌 바에야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화하여 마치 모든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대처하는 이선의 존재는 도저히 유교적 합리성으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대원군도 결국 전근대의 사람이었다. 대원군은 천명, 하늘의 명을 읽고자 했다. 손자의 변화는 조선을 중흥하라는 하늘의 뜻이었다. 손자에게 심안(心眼)이 생겨 미래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니, 모든 변화가 납득이 되었다.

「대원왕은 내게 거듭 말씀하시었다.

단을 높이 쌓아 천자의 지위에 오르고 만대를 이을 왕업을 이룩하였으니, 황제는 천명을 받든 존재다. 선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천명이 선을 통해 구현되었다면, 우리가 구구히 논해 봐야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다.

내가 왕업을 계승할 운명을 타고났기에 왕이 된 것처럼, 선은 천명을 계승할 운명이 타고났기에 황제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도 마음을 내려놓고 천명이 지상에서 이뤄지는 일을 지켜봐 달라고 하셨다. 천명의 계승자가 후손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참으로 기이한 말이라, 나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대원왕이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죽음을 앞둔 노인과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겠노라 하고 따랐다.

그러자 대원왕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이제 편히 갈 수 있겠다고 하시었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이 아들에게 행한 잘못이 많으니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하시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린 민중전에게도. 이는 오직 국가와 사직을 위한 일이었으며, 부득이한 결단이었으나 사죄하고 싶다고.

아버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자식이 아닌 권력의 도구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서 부친이라기보다는 두려운 정적이었다. 그랬던 아버님이 죽음을 앞두고 내게 용서를 구하셨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결국 혈연의 정이 권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내 아들에게 있어 나 역시 부친이라기보다는 정적이었다는 것을. 나와 대원왕의 불행했던 역사를 더는 반복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그리 생각하니 오랜 미움과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나는 대원왕의 뜻을 받아들이고, 나 역시 대원왕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을 용서를 빌었다. ……」

‘두 분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그랬었단 말인가. 결국 죽음 앞에서 혈연보다 더 강한 건 없구나. 조부께서 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다 하시고, 부친과 화해하시게 되어 다행이다. 조부께서 그리 말씀하셨기에 부친도 마음을 돌리셨구나.’

이선은 태상황의 기나긴 세 번째 유언장을 읽으며, 조부와 부친의 진심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아들과 손자를 생각하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진심을 깨닫게 되어 화해를 결심한 아버지.

이선도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네가 정말로 하늘의 뜻을 받아 앞날을 예견하게 되었다는 대원왕의 말씀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나는 을미년(1895)에 너와 독대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아들에게 대의멸친(大義滅親)과도 같은 말을 듣고 치욕에 떨었다.

하지만 곰곰이 그때의 대화를 곱씹어 보니, 너는 내가 계속 집정했다면 벌어졌을 일을 예견하듯이 말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찌 그리도 생생하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니, 너는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견하듯이 움직였다. 멀리서는 임오년에서부터 가까이로는 구주대전(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내가 왕위에 있던 시절,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들였다. 점쟁이가 예언하기를, 장차 조선은 칭제건원하여 중화의 천명을 계승할 거라 하였다. 놀랍게도 참으로 그리되었다. 그 복사(卜師)는 미래를 예견하는 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말로 너는 천시(天時)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단 말이냐? 나는 너무나도 궁금하다. 무엇이 너를 바꾸었는지, 너를 통해 이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는지. 과연 천명이란 존재하는지. 이를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더 여한이 있으랴?」

이선은 유언장을 다 읽고 태상황을 쳐다보았다. 태상황은 이선을 향해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쾌차하셔야지요. 올해 만수성절은 부황의 고희이니만큼 성대하게 준비하고자 합니다. 진의 국혼도 아직 이루지 못했거늘, 어찌 이리 급히 떠나려 하십니까.”

“어어, 으으으.”

언어능력을 상실한 태상황은 눈을 깜빡이며 이해할 수 없는 음절만 반복했다.

뜻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선은 대략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태상황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유언의 답을 듣고 싶어 했다.

“부황께서 남기신 세 개의 어제문 중, 첫 번째는 공식적인 유고로서 발표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제게 남기신 유언으로서 모두 태상황의 뜻을 받들어 진행하겠습니다.”

태상황은 거듭 눈을 깜빡이다 오른손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마지막 질문의 답을 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선은 고심했다. 자신에게 미래의 기억이 있다는 것, 21세기에서 살던 인간이 19세기를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그 누군가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도.

그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고, 설명해도 상대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자께서도 그 옛날에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소자 또한 어찌 다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자는 언제나 합리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미신을 싫어했던 대원군과 달리, 태상황은 성리학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점술이나 예언 같은 걸 좋아했다. 점쟁이를 가까이 두고 종종 점을 치거나 굿판을 벌이곤 했다.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이선은 그 정반대에 있었으나, 자신의 경험은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대원군의 말처럼 ‘천명’이라면, 납득할 수 있을까.

“하오나 대원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경진년에 열병을 앓은 이후, 소자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날을 예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100년 뒤의 미래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이게 만약 대원왕의 말씀대로 천명이라면, 하늘의 뜻인 것이겠지요.”

이선은 고심 끝에, 이 시대를 살아간 지 어언 40년 만에 처음으로 비밀을 이야기했다.

죽어 가는 부친에게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언어능력을 상실한 이가 누군가에게 말을 전할 수도 없을 터였다.

“저는 본래 경진년 그해에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운명을 바꾸기 위해 청국으로 떠났습니다. 30년 뒤에는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국운을 바꾸기 위해 대비해야 했습니다. 제 모든 행동은 미래를 예견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이선은 차분히, 그가 아는 기억 속에서 1880년부터 1919년까지 전개되었을 역사를 간략히 요약해서 전했다.

“…….”

듣기만 할뿐 대답을 할 수 없는 태상황의 표정은 점차 혼란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선의 말은 그만큼 생생했다. 도저히 순간적으로 창작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광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아는 아들은 독선적일지언정 결코 미치지는 않았다.

“제가 본 미래에서는, 부황께서 망국의 군주라고 100년이 지나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황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식민지의 노예로 억압받는 암울한 세상이 아닌, 자주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현재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원역사에서, 1921년 1월은 암울한 시기였다.

조선은 여전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혀 있었다.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거둔 승리는, 일본군이 보복으로 간도에서 저지른 참혹한 학살로 빛을 바래게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투쟁의 방편을 놓고 격렬한 논쟁 끝에 분열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가장 격렬한 투쟁의 시기는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선과 동지들이 만들어낸 조선-대한제국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부황께서는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격동의 시기에 재위했던 조선 26대 군주로 기억되겠지요. 조선인들도 망국노로 살지 않을 겁니다. 당당한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겁니다. 이를 위해 부황의 권력을 빼앗게 되었으니, 자식 된 도리로서는 송구하오나 하늘이 제게 내린 의무를 충실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자 인민의 뜻이요, 천명이겠지요.”

이선은 천명이라는 추상적인, 그러나 동양 세계에서는 가장 확고한 믿음으로 설명을 마무리했다.

순간 태상황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의사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선은 부황의 눈물을 보면서 복잡한 심정이었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한 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태상황이 다시 오른손을 들어 아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이선이 다가갔다. 태상황은 아들을 향해 오른손을 계속 뻗었다. 이선은 그 손을 받잡았다.

“어어, 으으으, 어우우우.”

태상황은 무언가 계속 말을 하고 싶어 했으나, 야속하게도 출혈을 일으킨 뇌는 언어를 조합하지 못하게 했다. 아들의 말을 이해하는 인지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입에서 언어가 나오지 않았다.

“태상황 폐하, 맹세하겠습니다. 열성조의 유업을 잇고, 대한의 왕업이 만대에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의 국위가 사방에 떨치고, 모든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부디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선도 언젠가는, 제게 주어진 의무를 다한 후에, 조부와 부황의 뒤를 따라 가겠습니다.”

태상황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이선의 손을 꽉 잡았다. 눈은 쉴 새 없이 깜빡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비록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부자간의 진심은 통했다.

결국 피는 물보다 진하고, 혈연의 정은 권력보다 강한 것이었다.

이선이 마지막 맹세를 고한 후, 태상황의 증세는 거듭 악화되었다.

1월 21일, 이 날은 공교롭게도 태상황이 즉위한 지 꼭 57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의료진의 진단에, 황태후 이하 모든 황실 인사들은 차례대로 대조전으로 들어가 태상황과 석별을 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상황 폐하, 소손은 속히 왕실의 대통을 잇고 국가를 튼튼히 하겠습니다.”

“으으으.”

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태상황은 오른손을 뻗어 손자를 격려했다.

태자 이진에 이어 정친왕 이안과 예친왕 이은이 들어가자, 태상황은 뜻밖에도 혼혈이라 터부시했던 안에게도 격려의 손길을 보냈다. 결국 핏줄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의친왕 이강과 영친왕 이영이 아들 우와 연을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 혼혈이라 탐탁지 않아했던 연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아버지로서의 마지막 애정을 보였다.

본래 효성이 깊었던 이영은 말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황귀비 마마 듭시옵니다.”

오랫동안 완화궁에 은둔하며 공식행사를 회피해 왔던 황귀비, 즉 영보당 이씨도 지아비의 죽음에 작별을 고하고자 창덕궁에 왔다.

“주상 전하!”

황귀비는 태상황을 향해 옛 호칭으로 불렀다. 과거 50년 전에, 서로를 사랑했던 시절의 호칭으로.

태상황은 말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한때 사랑했던 여인, 소년 이형의 첫사랑이었다.

태상황보다도 연상인 황귀비는 어언 70대 후반, 주름진 얼굴에 백발의 머리는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형은 문득 그녀에게서 옛 모습을 떠올렸다.

“부디 편히 가십시오. 신첩도 머지않아 전하를 뒤따르겠습니다.”

“어어, 으으으.”

“비록 전하와 신첩이 오랫동안 멀리하였다고는 하나,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드님이 있습니다.”

민비가 이척을 낳은 후에 버림받았던 영보당이었다. 왕자를 낳았는데도 빈호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였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선이 해외로 떠난 뒤, 돌아와 권좌에 올랐다. 영보당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지만, 그녀는 오히려 처신을 조심히 하며 완화궁에 은거했다. 권좌에 오른 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완화군의 법적 모친은 새 중전 김씨였고, 중전에게 효성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아들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문안인사조차 찾아오는 것도 꺼릴 정도로 은둔했다.

황실의 공식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만 종종 찾을 뿐이었다.

“비록 그 아드님이 제가 알던 선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 뱃속에서 낳은 아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드님이 있기에 신첩도 이 질긴 목숨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순간 태상황의 눈이 번쩍 커졌다. 알고 있었냐는 눈빛이었다. 

“저는 그 아이의 어미입니다. 열두 살까지 늘 함께했었지요.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경진년 이후의 선은 제가 알던 아들 선이 아닙니다.”

“…….”

황귀비 역시 자신의 숨겨 두었던 속내를 밝히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었다. 죽어 가는 지아비에게만 밝히는 속내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귀의한 부처님의 뜻일지도 모르겠지요. 혹은 하늘의 뜻일지도. 그렇다면 한낱 사람인 제가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황귀비는 해탈한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신첩은 영문을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그로 인해 아드님이 대업을 이뤘다면 상관없는 일입니다. 전하와 신첩은 위대한 황제의 부모로 기억될 것입니다. 신첩은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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