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고종 태황제
태상황과 황귀비의 마지막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작별을 고한 황귀비가 대조전을 나오며 비틀거리자, 이선이 직접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머님.”
“나는 괜찮소.”
“두루 평안하신지요. 제가 아들 노릇을 제대로 못 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오. 황상은 만백성의 어버이인데, 어찌 사가(私家)의 사내들과 똑같겠소.”
이선이 생모에게 아들 노릇을 제대로 못 하는 건 사실이었다. 기실 법적 모친이 황태후 김씨이기도 했고, 태상황도 법적 모친인 신정왕후(조대비)에게 효도했지 생모인 부대부인에게는 소홀했었다.
군주로서는 왕실 종법(宗法)상의 모친이 더 중요하지, 생모는 엄밀히 말하면 남이나 다름없었다.
황귀비도 군주가 된 아들을 배려해, 공적(公的) 활동을 일체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할 뿐이었다.
“건강하십시오, 어머님. 비록 아버님이 손자를 못 보고 가실지라도, 어머님께서는 장수하시어 손자를 축복해 주십시오.”
“인명은 제천인데, 내 어찌 장수를 장담하겠소. 나야말로 살 만큼 살았는데 하늘이 계속 수(壽)를 허락하시는구려. 아들이 천명을 이은 황제가 된 덕이려나.”
황귀비는 하나뿐인 아들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게 하늘의 뜻이라면 사람은 따를 뿐이었다. 왕실에서 배척받던 아들이 가장 존귀한 군주,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얼굴이 많이 초췌하구려.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는 거요? 오래전부터 일에만 몰두하니 걱정이 많소.”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뿐, 건강합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이선은 태상황의 발병 이후 이틀째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자연히 피로감이 얼굴에 어려 있었다.
“황상이야말로 건강하시오. 나야 살 만큼 살았소만, 황상은 이제 지천명을 넘겼을 뿐이잖소. 국가와 가족을 위해 건강해야만 합니다.”
“예, 그래야지요. 어머님의 당부를 잊지 않겠습니다. 만수무강하십시오.”
아들의 손을 잡으며 건강을 기원한 황귀비는, 황태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나이로 치면 자식뻘인 황태후지만, 내명부의 서열은 분명했다.
황태후도 황귀비를 향해 정중히 답례했다. 비록 황제의 법적 모친은 황태후라고는 하지만, 황귀비를 황제의 생모로서 존중했다.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궁내부 내장원경(內藏院卿)까지 올랐다 은퇴하여, 다시 예전처럼 완화궁의 집사로 복귀한 안영흠이 황귀비를 모셨다.
“안 공, 어머님을 잘 부탁하리다.”
“예, 폐하.”
“경이 만년에도 노고가 많소.”
“신은 늙어 죽을 때까지 완화궁의 사람입니다.”
집사 안영흠과 무사 장무영은 이선의 오랜 가신(家臣)이었다. 장무영은 은퇴한 후 경무청 검술사범이 되어 후학을 양성했다. 안영흠은 차관급인 내장원경까지, 장무영은 호위대장과 경위원 총관까지 올랐으니 가신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1월 21일, 대한(大寒)의 추위에도 직계 황족들 대부분은 태상황 붕어(崩御)에 대비하여 대조전 옆 전각인 경훈각에 머무르며 날을 지새우고 있었다.
비록 선위한 지 24년이라고는 하나, 태상황은 황실의 큰 어른으로서 존중받았다. 장성한 자식만 4남 1녀요, 그 슬하의 손자들까지도 모두 태상황의 후예였다.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 선왕 철종에게는 법적으로 9촌이요 혈연적으로는 17촌이나 될 정도로 왕실의 방계였던 이재황(이형)이었다.
하지만 34년이나 재위에 있었고, 이후 왕위를 계승할 이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니 가히 조선왕실의 중시조(中始祖)라 할 수 있었다.
“으음…….”
고통을 줄여 주는 모르핀을 맞고 잠든 태상황은 옛 광경의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57년 전인 1864년 1월 21일(음력 계해년 12월 8일)은 소년 이재황이 창덕궁으로 입궐해 왕위에 오른 날이었다.
방계 왕족인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재황이 왕통을 계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만큼 왕실의 혈연이 귀했고, 흥선군과 조대비의 막후교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이재황, 아니 이형은 제왕학을 익혔다. 10년간의 수렴청정,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거치며 통치를 준비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으니, 부자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1차전은 군주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중전과 처가 여흥 민문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이형의 승리였다. 대원군은 강제로 은퇴하여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이후 이형은 10년간 친정을 하며, 나름대로 의욕적인 통치에 나섰다.
하지만 대원군의 최대 실책인 당백전이라는 악성 화폐의 청산에 발목 잡혀 뭘 제대로 해 볼 수가 없었다. 이형 자신도 경제에 무지했고, 처족과 측근의 부정부패가 심화되면서 재정은 파탄에 접어들었다.
통상거부정책을 썼던 대원군과 달리, 강화도조약 이후 의욕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는 했으나, 이 역시 본격적인 근대화라기보다는 주먹구구에 가까운 임기응변이었다.
재정파탄, 부정부패, 개화정책의 실패는 임오군란이라는 폭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군대와 도성 빈민이 궁궐을 점령하고, 대신을 살해하고 중전까지 시해하려 한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결국, 권력다툼의 2차전은 대원군의 승리로 끝났다. 바로 이형의 장남인 이선이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청군의 개입은 무마되었다.
이형은 불과 나이 서른에 이름뿐인 군주로 남게 되었다.
개화당의 지도자로 추대된 이선은, 갑신경장 이후에는 조부조차 제치고 실질적인 통치에 나섰다.
모든 통치의 명령은 군주 이형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집행되었지만, 실권은 이선과 개화당에 있었다.
나름 열심히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화에 공감한 이형이었지만, 개화정책의 성과는 이선이 금세 압도했다. 이형의 통치 10년과 이선과 개화당 통치 10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형의 통치 10년은 임오군란이라는 파탄으로 끝났지만, 개화당 통치 10년은 옛 상국인 청나라를 격파하고 자주독립을 완수했다.
그 와중에 권력을 되찾아보겠다고 청나라에 밀서를 보냈던 이형은, 그나마 지키고 있던 왕위에서마저도 내려와야 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광무제 이선의 제국은 이전의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권력과 왕위를 빼앗은 아들에게 깊은 분노와 질시를 느꼈던 이형은, 강대하고 번영하는 조선의 변화를 지켜보며 점차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비록 자신이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아들이 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약소국에서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제는 아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천명을 계승하여 국위를 떨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이제 갈 때가 되었도다…….’
죽음을 앞두고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고 하던데, 태상황은 정말로 옛일이 주마등처럼 흐르자 죽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죽기 직전 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비록 말은 나오지 못해도 의식은 뚜렷했기에, 이선이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천명으로 미래를 보고 왔다. 미래를 보고 왔기에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정녕 그렇다면 그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었다. 바로 천명이었다.
‘하늘이 내 아들을 선택했단 말인가!’
그 자신으로서는 일본에 멸망당해 망국의 군주로서 100년이 지나도 지탄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사실이 아니라 이선의 허언(虛言)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만약 그럴 운명을 아들이 바꿨다면, 참으로 천행이었다.
후대에도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망국의 군주가 아닌, 제국을 창건한 위대한 황제의 아버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테니까.
“태상황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시의(侍醫)의 말에 이선과 직계 황족들은 속히 대조전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회광반조(廻光返照)라도 일어난 듯, 태상황은 오른손을 뻗어 천장을 가리켰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하늘의 뜻, 천명을 받아 내 아들이 천자에 올랐도다! 이제 나도 하늘의 명을 받아 돌아가노라!’
태상황의 손짓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으나, 말로는 표현되지 못했다.
“으으…, 어우우우…….”
“태상황 폐하!”
이선이 죽어 가는 부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뻗은 오른손을 맞잡았다.
‘그래, 내 아들 선아. 이왕지사 이리되었으니, 네가 조선왕조 아니 대한국의 천년대계를 완성하길 바라노라! 나는 너를 믿고 하늘로 돌아가겠다!’
“아아, 아아아…….”
하지만 야속한 뇌의 타격은 언어를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의미 없는 음절만 띄엄띄엄 나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선은 그 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손을 붙잡고 다짐했다.
“부황이시여, 소자와 후손들이 열성조의 유업을 계승하여, 대한의 국위를 만대에 빛내고 만백성을 지키겠습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펴 주소서.”
마지막 맹세를 들은 태상황은 더는 여한이 없다는 듯, 최후의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태상황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다 눈을 감았다.
독일인 시의 분쉬 박사가 태상황의 명맥을 살폈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태의원 전의가 고개를 숙이며 황공해했다.
“승하하셨습니다.”
“태상황 폐하!”
“부황 폐하!”
이선과 황족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상위복! 상위복! 상위복!”
태상황을 가까이 모시던 마지막 대전내관(大殿內官)이 황색 곤룡포를 들고 지붕 위에서 북쪽을 향해 세 번 상위복(上位復)을 외쳤다. 세상을 떠난 군주의 영혼이 되돌아오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광무 25년 1월 21일 오후 6시, 조선왕조 제26대 군주 이형은 재위 34년, 선위 24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붕어(崩御)했다. 향년 70세, 만 68세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 * *
「태상황께서 광무 25년 1월 21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붕어하시었다. 아,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장자이자 왕통을 계승한 짐은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칙령으로 태상황의 국장(國葬)을 명한다. 7일간 정조시(停朝市)를 하고 가무음곡(歌舞音曲)을 금한다.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을 대조전으로 한다. 빈전도감(殯殿都監)은 대행황제의 국장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정조시란 애도를 표하기 위해 관청은 공무를 보지 않고, 시장은 철시함을 의미한다. 이 기간에는 춤과 노래도 금지되었다.
“신은 삼가 황명을 받들어 대행황제의 국장을 엄수하겠나이다.”
전례를 따라 빈전도감이 설치되고, 태상황을 모신 노신(老臣) 중에 최고 원로인 전 참정대신 김윤식이 빈전도감 총호사(摠護使)로 임명됐다. 총호사는 빈전・국장・산릉 세 도감의 도제조(都提調)로, 상장(喪葬)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 다스렸다.
1835년생, 87세의 김윤식은 당대로는 놀랍도록 장수하고 있었다. 정통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이자 동도서기론을 주창한 1세대 개화파로서, 김윤식은 이선의 명을 받들어 조선의 전통과 대한제국의 변혁이 조화된 새로운 국장 예식을 준비했다.
사흘째 되는 날, 이선은 성복(成服)일을 맞이하여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빈전인 대조전에서 망곡(望哭)했다.
이선은 유교국가의 군주이자 장남으로서 효성을 다할 의무가 있었다. 그 나름대로 생전에 최선을 다해 모셨다. 부모에 대한 효도라기보다는 퇴위한 선왕에 대한 배려에 더 가까웠지만, 그 누구도 이선을 불효라고 비판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자신의 속내로 말할 것 같으면, 상주(喪主)에게 막중한 의무를 부여하는 유교적 장례의식을 보다 현대적인 장례예법으로 바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전통을 단숨에 파괴할 수는 없었다. 대행황제의 국상은 관례를 따라 진행하되, 완전히 옛 방식을 답습하진 않을 터였다.
이선은 생전에 새로운 장례법을 제정하여 자신의 사후에는 간소하게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대행황제의 공덕을 높이 받들어, 묘호와 시호, 전호와 능호를 정하고자 한다.”
이선의 명을 받든 궁내부에서 묘호와 시호, 전호와 능호 망단자(望單子)를 서계하였다.
“대행황제의 묘호 망단자를 고종(高宗)과 신종(神宗), 경종(敬宗)으로 서계합니다.”
“기초를 확립하고 표준을 세우는 것을 ‘고(高)’라 하니, 대행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데 타당하다.”
그렇게 이형은 사후에 고종이 되었다. 역사는 그를 고종으로 기록하게 될 터였다.
“시호는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로 서계합니다.”
“아뢴대로 하라.”
“전호는 효덕(孝德)으로, 능호는 홍릉(洪陵)으로 서계합니다.”
“수망(首望)대로 하라.”
생전의 존호까지 더해져, 고종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약칭 고종 태황제로 묘호와 시호가 확정되었다.
살아서는 황제가 된 적이 없이 바로 태상황이 되었으나, 죽어서는 대한제국의 황제로 추숭(追崇)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대행대왕의 국상에는 다섯 달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 이는 간소한 장례와 국경일의 경축을 명하신 태황제의 유훈에 어긋나는 일이니, 국경일인 계천기원절 이전에 국장을 마침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에 길일을 받들어 모시고자 합니다.”
“그 뜻이 꼭 짐의 뜻과도 같다. 길일은 언제로 삼겠는가?”
“음력 신유년 2월 2일, 광무 25년 3월 11일을 길일로 서계합니다.”
“좋다. 수망대로 하라.”
전례에 따르면 국상에는 5개월간의 기나긴 절차를 필요로 했지만, 태상황의 뜻과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절차를 50일로 단축했다.
이는 전례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제국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기 위한 일로 반포되었다.
광무 25년 3월 11일.
고종 태황제의 국장이 엄수되었다.
상주인 황제 이선이 상복 차림으로 상여 행렬의 필두에 섰다. 그 뒤를 황태자 이진, 순친왕 이척을 비롯한 황족들이 따랐다.
23년 전 대원왕의 장례를 전범(典範)으로 삼아, 거의 같은 형식을 취했다. 다만 황제의 예를 갖추기 위해 규모가 훨씬 성대해졌다.
제복 차림의 근위보병대가 행렬의 선두에 서고, 뒤이어 군악대가 슬픈 장송곡을 연주하며 행진했다. 근위기병대가 행렬을 호위하고, 포병대는 조포(弔砲)를 쏴서 조의를 표했다.
전통 복장 차림의 상여꾼은 상여 소리를 비가(悲歌)로 부르고, 곡궁인(哭宮人)들은 너울을 쓰고 고개를 숙인 채 행진했다.
현재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보여 주듯, 전통과 근대가 뒤섞인 국장이었다.
“태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전국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흰 상복을 입고 대로에 도열, 절을 하며 애도했다.
이미 근대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됐지만, 여전히 향촌의 유림들은 옛 성리학을 고수했다.
이들에게 있어 34년간 재위했던 고종은 마지막 전통의 군주였다. 유생들은 전국에서 올라와 마지막 전통의 조선 군주를 향해 예를 다했다.
동시에, 전통의 조선도 최후를 고했다.
울며 곡하는 유생들의 하얀 상복 행렬은, 놀라운 광경이었으되 한 시대의 영원한 퇴조를 의미했다.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아니라, 한 시대의 영원한 끝을 애도하고 있었다.
이제 오롯이 새로운 국가, 광무제 이선과 3천만 대한국민이 함께 다스리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나라, 대한제국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종태황제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전례 없는 변혁의 시대를 맞이한 군주였다.
평시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가 될 자격이 있었으나, 위기의 시대에는 최악의 군주였다.
역사의 변화 덕에, 망국의 군주가 아닌 제국을 창건한 황제의 부황으로서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는 이형을 망국의 군주이자 패배자가 아닌, 왕조의 중시조이자 승리자 고종태황제로서 기억하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