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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유교 흉내 내기 (686/812)

100화 유교 흉내 내기

기실 절반은 진짜 몸이 안 좋기도 했고, 절반은 이선의 꾀병이었다.

하필 국상 기간이 한겨울이기도 했고, 가뜩이나 나이 들어가며 겨울에 약한데 상주로 무리하다 보니 자연히 몸이 안 좋아졌다.

여기에 만성적인 불면증에 식사를 줄이니, 초췌해지고 안색이 정말 안 좋아 보였다. 마치 삼년상의 의무를 다하다 건강이 악화된 것처럼 보였다.

“육선(肉膳, 고기반찬)을 드시옵소서, 폐하.”

“대신들이 권하여 수라상에 오르기는 하였다마는, 상주로서 심상 기간에 고기를 먹으려니 마음이 미어진다. 차마 먹을 수가 없노라.”

이선은 간만에 보는 고기반찬에 속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근엄한 어조로 사양했다.

궁내부 직원들은 황제의 거부에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맸다. 황후와 태자가 고기반찬을 올리라고 신신당부한 터였다.

“됐다, 이만 물리도록 하라.”

“예, 폐하.”

이선은 비빔밥과 국만 입에 대고 나머지는 퇴했다. 궁내부는 머리를 조아리며 상을 치웠다.

‘감질나지만 조금만 더 참아야지.’

이선은 상주이자 왕통을 계승한 장자로서 효자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 자신은 문무백관과 만백성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지만,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부왕을 끌어내린 것도 사실이었다. 승하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무시하는 모양새를 보일 수는 없었다.

충효(忠孝)를 제일의 가치로 치는 국가에서, 국가원수인 황제가 대놓고 효도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자신의 건강을 담보로 삼아 여론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생각이었다.

황제의 병환 소식에 국민은 우려했다.

“걱정일세, 황제 폐하께서 병환이시라니.”

“궁내부 발표에 따르면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는데?”

“이런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황제 폐하께서 지금껏 아프다고 하신 적 있는가? 더욱이 국상을 치르는 와중에 아프시다니, 상주의 도리로 병환조차 참고 넘어가시려는 게 아닌가.”

“뭐, 그럼 정말 큰일이 아닌가?”

“폐하의 용안이 안 좋으시니, 태자 전하와 대신들이 고기를 권하는데도 심상 기간에는 차마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하셨다더군.”

“과연 효자이시네. 태황제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여 매일 조석(朝夕)으로 곡을 하신다더니.”

“효성을 다 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이러다 성상의 병환이 악화된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된단 말인가?”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지! 없어야 하고말고.”

“하여튼 삼년상이 상주 잡는구만.”

“줄초상이란 말이 괜히 있겠나?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진작부터 삼년상을 지양하라고 칙령을 내리셨던 거야.”

“뭐 까놓고 말해서 유림들이야 삼년상 치르다 죽어도 상관없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지존이신데 케케묵은 예법을 따르다 건강을 해치셔야 되겠나?”

국민의 대부분은 황제가 삼년상을 지키다 건강이 나빠지느니, 차라리 안 지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화한 데다, 황제마저 건강을 해치는 삼년상이 과도한 예법이라는 데 대부분 동조했다.

“황상, 부디 육선을 드십시오. 이래서야 정말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됩니다.”

결국, 황실의 큰 어른인 황태후 김씨가 나서 설득했다.

“태후 폐하, 소자가 상주이자 자식된 도리로 어찌 심상의 원칙을 깨겠습니까.”

“황상께서는 일개 사대부와 다릅니다. 만백성의 어버이신데, 어찌 예법에 얽매여 나라의 큰일을 저버리려고 하십니까?”

명문 유학자 가문의 여식으로서 유교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황태후지만, 삼년상을 고집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소조(小朝)가 청정을 대리하고 있사오니, 소자는 상주의 의무를 다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정작 태자도 부황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상의 용안을 뵐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건강은 심려치 마십시오. 제 안색이 그런 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그럴 뿐입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침수(寢睡)를 잘 들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선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오래된 일이지요. 나라의 일에 대해 생각이 너무 많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리라 생각합니다마는, 그래도 근래는 더 심한 것 같아 걱정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오나, 소자가 술을 즐겨 마시는 건 단순히 애주가라서가 아닙니다. 밤에 술 한 잔을 마시면 마음의 오랜 병이 낫는 것 같고, 그나마 수면을 취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온데 상주로서 어찌 예전처럼 술을 마시겠습니까.”

이선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이선은 과다한 업무를 처리하는 데다, 늘 생각이 많아 만성 불면증이었다. 제대로 된 수면제도 없는 시대에 그나마 술이 졸음을 불러일으켰다.

기실 이선이 평소에 커피나 차를 많이 마셔 카페인 중독이라는 걸 감안하면, 밤에 자기 전에 술을 마시는 건 의학적으로 보면 수명 깎아 먹는 일이었다.

이선도 이를 인지하고는 있어서, 밤마다 술을 마시긴 해도 결코 적정량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째 금주하려니 슬슬 금단증상이 오고 있었다. 근래 잠을 더 못 자는 건 술을 못 마셔서 그러는 것 같았다.

“걱정입니다. 나는 황상에게 사사로이 어미가 됩니다. 자식이 이토록 힘들어하는데 어미가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선보다 겨우 한 살 많기는 했지만, 황태후는 법적으로 이선의 모친이었다.

“황상의 침수에 도움이 된다면, 상중에 술 한잔 마신다고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육선도 드십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황상의 건강입니다. 부디 이 어미의 말을 따라 주십시오.”

“송구한 일이오나, 황태후께옵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선은 마침내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였다.

황실의 큰 어른이자 상을 당한 미망인인 황태후가 허락했다는데, 감히 뭐라고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어버이십니다. 막중한 국정을 맡고 계신 폐하께서 어찌 삼년상까지 따를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소제가 감히 삼년상을 대신하겠습니다.”

황태후가 다녀간 후, 순친왕 이척이 나서서 삼년상의 의무를 대신하겠다고 자처했다.

이척은 네 아들 중에서 고종의 유일한 효자였으므로, 진심으로 삼년상을 치를 생각이 있었다.

“그대의 효심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대가 삼년상을 치르겠다고 하면 멋모르는 자들이 헛된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네.”

문제는, 정통성 문제로 비화될 여지가 있었다. 이척은 스스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한때 왕세자였고, 태황제의 삼년상을 대신하겠다는 건 왕통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보일 수가 있었다.

물론 이선은 그런 의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척이 참 효자야. 그나마 우리 형제 중에 전통적인 의미의 효자 한 명은 있어서 다행이구만.’

이척은 권력에 대한 야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마치 존재가 없는 사람처럼 처신했다.

통치에 대해선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유교 예법에 대해서는 정통했으므로, 이선은 군주로서 해야 할 유교 의례의 대부분을 순친왕부에 맡긴 터였다. 삼년상도 이선이 지내는 것보단 이척이 지내는 게 더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걱정 말게. 누가 뭐라 하든 짐은 그대의 효심을 믿네. 태황제께서도 그대의 효심을 기꺼이 반기실 게야. 우리의 의무를 반씩 나누세나. 조석곡전은 그대에게 맡기겠네. 삭망전은 계속 내가 하도록 하지. 심상은 철저히 지킬 필요는 없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태후가 술과 육식은 허락한 데 이어, 이척이 삼년상을 대리하겠다고 나선 덕분에, 이선의 상주로서 의무는 대부분 해방되었다.

그날 밤, 이선은 모처럼 해방된 기분으로 와인 한 잔을 마시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 *

‘국상으로 느낀 바가 많다. 문명개화 40년에도 여전히 이 나라는 유교가 지배적이구나.’

이선은 여전히 유교가 한국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

종교 자유화 조치 이후 아무리 기독교가 개화파 지식인의 새로운 종교로 떠올라 총리(서재필)와 부총리(윤치호), 외무대신(이승만), 내무대신(안창호) 등을 배출했다지만 전체 인구로 치면 극소수였다.

동학과 농민운동이 결합하면서 농민들 사이에서는 천도교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지만, 여전히 전체 인구의 10% 정도인 소수파였다.

종교 자유화 이후에는 오히려 전통 종교인 불교가 국민의 다수가 믿는 주류 종교로 떠올랐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당 지도부가 불교 신자이자 후원자라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고, 숭유억불 체제에서 억압받던 불교는 빠르게 주류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종교가 성장해도, 유교의 절대적 위치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조선은 500년 유교국가였다. 유림과 옛 양반들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국민은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불교와 천도교의 성장도 유교와 대립해서가 아니라, 충효라는 유교적 가치를 교리에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불교의 평등정신을 받아들였던 김옥균도 본질적으로는 유학자였고, 유자이자 불자였다. 천도교를 대표하는 전봉준도 마찬가지였다.

불교와 천도교도 유교 못지않게 충군애국을 외쳤다. 개화당과 밀착한 한국 불교는 ‘호국불교’를 외치며 충군애국을 정당화했고, 만주의 ‘북방개척운동’을 이끈 천도교는 더욱 민족주의 색채가 짙었다.

기독교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으니, 기독교가 서양 제국주의 진출의 첨병이듯 한국에서는 ‘문명개화’의 첨병 노릇을 하며 만주 진출을 정당화했다.

‘현세대는 유교 가치가 절대적인 세대니 당분간은 유교의 원칙을 따르더라도, 새로운 세대가 완전히 주류로 떠오르면 분위기가 바뀌겠지.’

어릴 적부터 근대화의 영향을 받게 된 도시의 1880년대생, 근대화의 속도가 느린 향촌도 1900년대생부터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문명개화’는 완전한 시대정신이었고, 20세기 중반이 되면 자연히 유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통치의 측면에서 볼 때 유교 논리가 유용하긴 하지. 이번 기회를 활용해야겠어.’

이선은 현실 정치가였고, 종교든 이념이든 정치적으로 유용하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었다.

국상을 통해 여전히 유교가 대세인 걸 새삼 확인한 이상, 이선의 머리에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국상에 헌신하는 황실의 면면을 보면서, 특히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건 영친왕비 전하이시다. 금발에 초록 눈의 아름다운 서양 여인이 상복으로 소복(素服)을 입고 국상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색적이면서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근래 황족 중에서도 단연 대중의 주목을 끌고 있는 건 영친왕비 아나스타샤 브론스카야, 한국명 ‘이서아(李西娅)’였다.

영친왕 일가가 귀국한 후, 태황제의 적자인 영친왕 이영이 서양 여인과 결혼한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여론은 점차 반전되었다.

“내 이름은 이서아고, 나는 한국인입니다.”

이아나스타샤, 아니 이서아는 철저하게 한국 황실의 규범을 따랐다.

아나스타샤란 이름이 한국인들 귀에는 익지 않았으므로, 이영이 지어 준 한국 이름을 썼다.

‘아나스타시야’를 한자로 음역한 ‘아납사탑서아(阿纳斯塔西娅)’의 마지막 두 글자에서 땄지만, 한국에서 러시아를 일컫는 아라사(俄羅斯) 혹은 노서아(露西亞)를 연상시켜 대중의 귀에 쉽게 각인되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아버지의 국상을 맞이하자, 이서아는 서양식으로 검은색 양장을 입는 대신 소복을 입었다. 금발에 하얀 피부의 여인이 하얀색 상복을 입으니 더욱 눈에 띄었다.

빠르게 전통 왕실 예법을 익힌 이서아는, 시어머니인 황태후에게 효성을 다했다.

「영친왕비는 실로 현모양처이시니, 태황제의 국상을 애도하고, 황태후께 효성을 다하며, 지아비에게 헌신하고, 아들을 사랑으로 키우시니…….」

당사자인 이영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이선 자신도 전통적인 ‘현모양처’ 프레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교적 가치가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선전이었다.

“미안하지만 부인이 도와주시오. 태자의 국혼을 성사시키려면 당신이 모범이 되어 주어야 하오.”

“태자 전하와 여대공 전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게요.”

이서아의 효부-현모양처 프레임은 이진과 타티야나의 국혼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친왕인 남편과 이를 계승할 아들을 위해 한국 황실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시조카와 옛 공주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평생 서양 기독교 문화권에 살았던 사람이 동양 유교 문화권, 그것도 복잡한 황실의 예법을 따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서아는 최선을 다했다.

“영친왕비는 효부(孝婦)시더군. 다시 봤어.”

“아아, 서양인이라고 효성의 도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네.”

“서양인은 죄다 기독교도에 무군무부(無君無父)인 줄 알았는데, 내 편견이었네.”

“어찌 서양인이라고 도리를 모르겠는가? 단지 우리와 문화가 다른 것뿐이네.”

“음, 대한의 예의가 마침내 서양인조차 감화한 것인가.”

효성을 다하는 서양인 며느리, 현모양처 프레임은 기성세대에게도 효과적인 선전이 되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 현숙(賢淑)하기까지 하다니.”

“아아, 서양 여인이 아름답다곤 하지만 영친왕비만큼 아름다운 분은 보지 못했네.”

“황실의 경사일세. 영친왕 전하께서 복 받으셨구만.”

문명개화의 영향으로 서양을 동경하게 된 젊은 세대는 오히려 백인 친왕비를 환영했다.

20세기 초는 아직 서양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시대였고, 동양인들도 서양의 ‘우월함’을 내면화했다. 서양인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황제와 ‘파란양’의 관계, 서재필이 미국 여인과 결혼하고도 총리라는 직위까지 오른 건 사람들의 편견을 깨트렸다.

외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적인 관점에서 봐도 이서아는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외모의 서양 여성이 출신을 떠나 ‘한국인’으로서 충실히 법도를 따르고 있으니, 대중은 자연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여론이 긍정적이라는 걸 확인한 이선은, 다음 전략으로 들어갔다.

망명 후에도 세상 밖과 교류를 차단하며 조용히 지내게 하던, 로마노프 황녀들을 언론에 공개하도록 했다.

「대제국을 다스리던 황제의 귀한 따님들인 아라사 공주님들은 대한에서 어떤 삶을 살고 계시는지, 본보가 특별히 황실의 허락을 받아 보도한다.」

「비록 서양에는 삼년상의 예법은 존재하지 않으나, 돌아가신 부모를 기리는 건 다르지 않다. 하물며 아라사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는 반란으로 제위를 잃고, 과격파 역적들에 의해 시해되셨으니 그 충격은 말할 것조차 없으리라.」

「네 분의 공주께서는 언제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초상화를 품에 안고, 애도의 마음을 놓지 않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본 기자도 자연히 숙연해져, 깊이 숭상하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차녀이신 타티야나 공주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며, 환후가 편찮으신 알렉세이 대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참으로 효녀이자, 훌륭한 누이셨다. 아, 효성과 우애가 어찌 동양만의 법도라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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