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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적과 흑 (690/812)

104화 적과 흑

유럽 러시아에서 내전이 사실상 종결될 무렵, 극동 러시아에는 새로운 독립국이 등장했다.

1921년 1월, 바이칼호에서 태평양까지 이르는 극동 3주(자바이칼, 아무르, 연해주)에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농민 좌파연합 183석,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92석, 농민 우파연합 44석,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연합 41석, 부랴트-몽골당 13석, 입헌민주당 8석, 한인(고려인)민주당 6석, 기타…….」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좌익의 승리였다.

극동은 스톨리핀이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특별히 공을 들여 자영농을 육성한 지역으로, 우익의 지지율이 높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백군 정부의 무능력하고 잔혹한 통치는 농민들의 마음을 돌려 놨다.

백군 계열은 제헌의회 선거 자체를 보이콧 했고, 대신 연해주 젬스트보(지방의회) 장악에 주력했다.

극동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은 좌익성향 농민연합과 연대하여 다수당이 됐고, 정부를 구성했다.

볼세비키는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연합에도 각료직을 제안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범좌파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다당제, 권력 분립, 시민의 권리와 자유 및 법의 지배. 법 앞에 모든 시민은 평등하며, 종교, 언론, 양심, 표현의 자유, 노동조합의 창설을 보장.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 경제, 사유재산 인정, 국유화는 기간산업에 제한적으로 실시, 자본가의 기업과 은행 소유 허용.

미국 헌법을 모범으로 한 연방제, 소수민족의 권익과 자결권의 보장. 자바이칼주의 부랴트인과 연해주의 고려인은 별도의 자치주를 허용.」

제헌의회 의원들이 수도 치타에 모여 두 달 동안 논의 끝에, 4월 27일 극동 공화국 헌법이 공표됐다.

헌법 내용만 놓고 보면, 1787년 미국 헌법과 1918년 러시아 제헌헌법을 모범으로 한, 흠잡을 데 없는 자유주의 연방제 민주공화국이었다.

“자유로운 인민의 국가, 극동 공화국 만세!”

신생 극동 공화국은 표면적으로 동아시아 유일의 민주공화국으로 자리 잡았다.

민주공화국을 자처하는 중화민국은 군벌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고, 필리핀 공화국은 사실상 미국의 괴뢰국이자 친미 토호들의 복마전이니, 극동 공화국이 그렇게 자부할 여지는 충분했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말이다.

“말이 좋아 민주공화국이지, 결국 볼셰비키가 승리하지 않았나? 볼셰비키 러시아에서도 결국 제헌의회를 무너트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지 않았나. 극동 공화국도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의 전철을 똑같이 밟을 것 같은데?”

“미국식 연방제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 모스크바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이겠지.”

새 미국 행정부는 극동 공화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소비에트에 유화적이었던 윌슨과 달리, 우드는 볼셰비키를 노골적으로 불신했다.

“극동 공화국이 일본의 이권을 보장해 준다면 승인할 의사가 있다. 러시아 정부가 승인했던 오호츠크해의 일본인 어업권 보장, 영해와 아무르강의 일본 선박 자유항행, 자원을 탐사하고 개발할 권리.”

사할린 대안(對岸), 연해주 북부에 계속 군대를 주둔하며 버티고 있는 일본은 노골적으로 이권을 요구했다. 이권을 내줘야만 철수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대한제국은 소비에트 정부가 하얼빈 조약만 준수한다면, 극동 공화국을 승인할 의사가 있다.”

한국은 하얼빈 조약의 준수를 내세우며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신생 공화국에 대한 한국의 불신은 정권 수립 직후부터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

“수반부터 주요 각료까지 대부분 볼셰비키 출신 아닌가.”

“극동의 국군이라는 인민혁명군도 결국 극동 적군과 파르티잔을 새로 재편성한 게 아닌가.”

주석(국가원수)부터 각료회의 의장(총리), 주요 각료진은 대부분 볼셰비키 당원으로 채워졌고, 신생 국군인 ‘인민혁명군(NRA)’은 붉은 군대와 파르티잔이 재편되어 간판만 갈아 끼운 군대였다.

초대 국방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바실리 블류헤르(Vasily K. Blyukher)도 내전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붉은 군대 지휘관 출신이었다.

“아무리 봐도 모스크바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이 맞는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 해도,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정부인 건 사실입니다. 저들이 먼저 조약을 위반한 게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단순히 시간벌기가 아닌지 의심스럽군.”

의심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대한제국 정부는 ‘백계 피난민의 망명’을 허용했다.

남러시아군을 태운 흑해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수에즈로 향하자, 주독 소련 대표부는 주독 한국 대사 조한민을 향해 격렬히 항의했다. 양국 간 외교관계는 공식적으로 단절되어 있어 베를린의 조한민을 통해서 소통했다.

“백군 잔당들의 망명을 허용하다니요? 이건 명백히 하르빈 조약 11조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인도적 차원에서 피난민들의 망명을 허용한 겁니다만.”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마십시오. 저들은 무장한 백군, 극우 반동세력이란 말입니다!”

소비에트 대표 라데크는 조약문을 치켜들고 항의했다.

「11. 한국은 백군, 특히 극우 반동세력에 대한 지원을 배제. 소비에트는 파르티잔, 특히 극단적 세력에 대한 지원을 배제. 극동지역 백군과 파르티잔은 순차적으로 무장해제.」

“그렇다면 우리도 항의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귀국 정부가 먼저 11조를 위반했잖습니까?”

“뭘 위반했다는 겁니까?”

“소위 인민혁명군이 노농적군의 연속이라는 걸 모르는 줄 압니까? 파르티잔을 무장 해제하기는커녕, 인민혁명군의 정식부대로 편입했잖습니까! 적색테러를 일삼던 극좌 아나키스트 부대까지도! 이래서야 연해주에 사는 백계 주민들과 한인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조한민의 반박에 라데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극동 공화국 정부는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되었고, 국군을 편성할 권리도 그들에게 있습니다.”

“치타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다는 건 우리도 다 압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그렇다는 증거를 갖고 오십시오.”

“블류헤르 장군은 적기 훈장을 받은 소비에트 영웅이잖습니까? 이래도 모스크바의 지휘를 받는 게 아닙니까?”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신생국가를 보호하려면, 유능한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외부의 침략이라니, 꼭 대한제국을 가리키는 것 같군요.”

“그렇게 들렸다면, 그게 사실 아닙니까?”

언쟁이 끊이지 않자, 조한민이 강력히 경고했다.

“나는 러시아에서 근무했던 외교관으로서, 진심으로 한소 양국의 우호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물론 한국 내에도 전쟁을 원하는 호전적인 자들이 있습니다만, 황제 폐하와 정부는 그들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귀국도 똑바로 제어해야 할 겁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선 작은 불씨 하나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 * *

한국과 연합국이 소비에트를 불신하듯, 소비에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연합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나마 모스크바에서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전쟁 중이라 관심이 그쪽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극동 공화국은 ‘한국과 일본, 그 배후에 있는 영국과 미국’을 의심했다.

“저들은 어떻게든 연해주를 병탄하려는 속셈이다. 언제 전쟁을 도발할지 모르니 대비를 확실히 하도록.”

신생 인민혁명군은 극동지역 적군뿐만 아니라, 백군에 맞서던 범좌익계열 파르티잔도 죄 끌어모아 군대로 편성했다.

사회주의 계열 파르티잔은 순순히 볼셰비키 중앙당의 통제를 받았지만, 문제는 아나키즘 계열 파르티잔이었다.

아나키즘 파르티잔은 백군과 외국군은 물론이요, 이를 통제하려 드는 소비에트 정치위원도 적대했다.

“백군과 목숨 걸고 싸운 건 우린데, 모스크바가 우리한테 뭘 해 줬다고 간섭하려 드느냐?”

“극동 혁명전쟁을 시작하려는 판에, 모스크바의 배신자들은 제국주의 침략자와 야합을 하다니!”

일부는 소비에트의 이름을 팔아 자의적인 보복행위를 벌이고 있으니, 철의 규율과 중앙집권화를 중시하는 볼셰비키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미친 극좌 모험주의자 놈들! 이놈들은 파괴가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좌익소아병 환자들이다. 어찌 보면 백군보다 더 위험한 놈들이야.”

내전 기간 동안 적색 사회주의자와 흑색 아나키스트의 동맹이 백군을 상대로는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소비에트 적군과 마흐노의 흑군이 동맹을 맺고 함께 백군을 무찔렀다.

하지만 1921년 초 백군이 패퇴하고, 아나키즘의 대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이 78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그동안 노혁명가를 존중하는 시늉을 보였던 볼셰비키의 태도가 바뀌었다.

적군은 백군 격파 후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하는 마흐노의 흑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흑군도 소비에트 통치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제1인터내셔널 시기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대립으로부터 비롯된, 마르크시즘과 아나키즘의 뿌리 깊은 대립이 마침내 폭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아나키스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크로포트킨 동지 사후에 아나키스트 검거가 시작됐고, 마흐노 동지의 흑군을 공격하고 있다고 한다.”

“배신자 놈들!”

“볼셰비키는 미국-일본-한국 제국주의 세력과 야합하여, 극동 공화국이라는 근본도 없는 자본주의 잡탕국가를 만들었다. 혁명을 원하는 인민에 명백한 배신이다!”

“볼셰비키는 인민을, 혁명을 배신했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볼셰비키 정치위원이 차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귀족, 부르주아지, 제국주의 침략자, 볼셰비키 정치위원을 모두 타도하자!”

극동 아나키스트 파르티잔으로 구성된, 오호츠크 전선 인민혁명군 제4여단이 폭발했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상징인 적기를 끌어내리고, 검은색 깃발을 더해 아나키즘의 상징인 흑기를 게양했다.

“동지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냐? 여단장 동지, 뭘 하고 있는 거요!”

볼셰비키 당원인 여단 정치위원이 기겁하여 달려왔지만, 파르티잔 지휘관 출신 여단장 야코프 트랴피친(Yakov Tryapitsyn)이 총구를 들이댔다.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다. 혁명의 배신자인 볼셰비키를 처단한다!”

탕! 

정치위원을 즉결처분한 트랴피친은 부대원 앞에서 선언했다.

“우린 모든 반동분자와 제국주의를 일소할 것이다. 우리가 먼저 나서면, 인민이 쇠사슬을 끊기 위해 일어서리라. 가장 먼저, 니콜라옙스크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반동분자들을 척살하자! 세계혁명 만세!”

“세계혁명 만세!”

인민혁명군 제4여단, 아니 ‘흑색 반란군’ 병력 4천여 명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무르강 하류, 오호츠크해의 항구도시 니콜라옙스크로 진격했다.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 한국군은 고려인이 주로 거주하는 연해주 남서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철도선에 집중했다. 일본군은 연해주 북동부, 하바롭스크에서 니콜라옙스크로 이어지는 아무르강 하류 일대에 집중했다.

특히 사할린 맞은편으로 일본의 무역과 어업 전진기지인 니콜라옙스크는 1919년부터 일본군이 점령 중이었다.

“빨갱이와 내통하는 러시아 놈들은 모조리 처단해도 좋다. 저들에게 확실히 패전국민 대우를 해 줘라.”

일본군의 지역 통치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의 참혹한 기억으로 러시아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고, 점령지에서 분풀이를 했다.

파르티잔 토벌이란 명목으로 민간인에 대한 살인, 강간, 방화, 파괴가 빈번하게 벌어졌다.

특히 백인에 대한 인종적 열등감을 느끼던 일본군은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이 빈번했다. 성폭행 사건이 하도 많이 발생하자, 마침내 일본군 사령부에서도 금지 명령을 내렸다. 딱히 점령지 여성 인권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부대 내에 성병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빨갱이라면 이를 가는 백군 장교들도 일본군의 가혹한 행위에 경악했지만, 일본군과 손잡은 아무르 카자크 사령관 칼미코프는 부하들에게 오히려 일본을 본받으라고 했다.

“저 노란 원숭이들이 역겹긴 하지만, 한 가지 배울 만한 점은 있다. 빨갱이들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연해주 북부, 아무르강 하류 일대에서 일본군과 백군은 잔혹한 백색테러를 일삼았다.

역으로 그러면 그럴수록, 파르티잔에 가담하는 농민의 수가 많아졌고, 이들도 가혹한 보복을 했다.

오호츠크 전선을 담당하던 파르티잔 지휘관 트랴피친은 러시아 제국군 소위 출신으로,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던 2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잔혹함이란 측면에서 그를 따라갈 파르티잔 지휘관은 드물었다.

트랴피친 부대는 극동 공화국 수립에 격렬히 반대했었다. 이들은 일본군과 백군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기 전까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제어로 일단 물러서긴 했지만, 고삐가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자, 복수의 시간이다. 침략자와 반동을 죽여라!”

극동 공화국 수립 후, 정부의 압력으로 일본군도 서서히 철수를 개시했다. 이 무렵 니콜라옙스크에 주둔하는 일본군은 14사단 산하 1개 대대 약 400여 명이었다.

도시에 접근한 흑색 반란군은 항복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뭐야, 저 미친놈들은? 지금 빨갱이들과 휴전 중 아니었나?”

“병력이 아군의 10배는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르강은 5월까지 얼어붙어 있어, 하바롭스크에 주둔하는 부대가 오려면 한참 시간이 필요했다. 바다도 얼어서 가라후토(사할린)에서 당장 지원군이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 지원군조차 없는 오지의 상황에 직면한 일본군은 고립무원이었다.

“소좌, 항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리석은 놈! 천황 폐하의 육군이 저런 빨갱이 비적들에게 항복한단 말이냐! 비적들이 전술에 대해 무엇을 알겠나? 병력이 부족하다면 비책으로 승리할 뿐이다!”

일본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밤을 틈타 선제기습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은 부대의 궤멸이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2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흑색 반란군의 분노가 폭발했다.

“도시의 일본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침략자들은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니콜라옙스크에 입성한 흑색 반란군은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항복 여부와 상관없이 모조리 총살당했다. 일본 영사 이하 500여 명에 달하는 일본 거류민들은 목숨을 구걸했지만, 일본인이라고 하면 민간인도 예외가 없었다.

“침략자에 빌붙어서 인민의 고혈을 짠 놈들이다. 모조리 숙청하라.”

“여자와 아이들은 어찌할까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반혁명분자들이 우리 노동자와 농민들을 죽일 때는 자비를 베풀었던가? 16세 이상의 남자들은 자발적으로 왔다고 판단하고 모두 죽여라.”

도시를 완전히 점령한 흑색 반란군의 학살은 일본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얀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렸던 자본의 수호자들, 피에 굶주린 제국주의의 수호자들은 자비를 기대하지 말라. 동지들, 기억하시오. 일한 자만이 먹을 것이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백색테러에 이은 적색테러, 그리고 흑색테러.

피로 피를 씻는, 끔찍한 학살극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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