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아무르 임시정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 공화국 선포 이후, 연해주도 극동 공화국을 구성하는 3주의 하나가 되었다.
미국식 연방제 헌법을 채택하면서 연해주에도 주정부가 수립되었다. 주정부는 제헌의회 다수당인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이 이끌었으나, 주의회(젬스트보)에는 중도파와 구 백군계 우파가 상당수를 차지했다.
연해주의 볼셰비키 정부는 인기가 없었다. 극동 공화국은 주요 도시만 형식적으로 통제할 뿐이었다.
백군의 가혹한 통치에 질려 내전 종식을 희망하며 극동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에 표를 던져 줬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극동 지역 농민들은 스톨리핀 농지개혁의 수혜를 입기도 했고, 무엇보다 경제가 최악이었다.
화폐 평가 절하, 산업 및 무역 침체, 금융 위기, 더 나아가 식량 위기가 닥치면서 극동 공화국에 대한 불만이 공공연히 쏟아졌다.
“이미 러시아를 파탄 낸 볼셰비키가 뭐 여기라곤 다르겠소? 유럽 러시아에선 대기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사유재산권을 존중하고 자본주의 혼합경제를 한다곤 하지만, 언제 태도가 바뀔지 모르지.”
“치타는 모스크바의 괴뢰니까, 뭐.”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백군 망명자들이 집결한 곳이었고, 독자적인 반(反)볼셰비키 단체가 형성됐다. 이른바 ‘극동 비(非)사회주의 인구 대표대회’가 공공연히 활동을 개시했다.
약 3만의 백군 극동군 잔당이, 비록 한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지만 연해주 남부에 존재했다.
극동 공화국 입장에선 참으로 성가신 존재였으나, 백군을 보호하는 한국군과 일본군의 주둔으로 인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동지들, 볼셰비키의 압제에서 조국을 해방시킬 때가 되었소. 극동군이 봉기의 신호탄을 쏠 겁니다.”
극동 쿠데타 계획이 구상되었다.
러일전쟁 시기 전선에서 복무하고, 대전쟁 시기 브루실로프 장군의 참모장으로서 활약했던 미하일 디테리히스(Mikhail K. Diterikhs) 중장이 쿠데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시베리아군 사령관, 백군 동부전선 사령관을 역임했던 디테리히스는 초기에 성공적인 공세를 이룩했으나, 동부전선의 패퇴를 막을 순 없었다. 동부전선에서 패퇴한 이후에는 하얼빈으로 망명했다가 얼마 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반역자, 무신론자 볼셰비키에 맞서는 성전은 끝나지 않았다.”
디테리히스는 백군 내에서도 강경한 왕당파이자 독실한 정교회 신자로, 다른 장군들과 달리 로마노프 왕조 복원에 찬성하는 왕당파였다.
그가 생각하는 합법적인 제국의 후계자인 알렉세이 대공과 여대공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을 찾은 바도 있었다. 소비에트와 타협한 ‘하르빈의 배신(조약)’에도 불구하고, 차르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한국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한국이 디테리히스와 접촉해 연해주 백군 쿠데타를 지원할 의사를 밝히자, 로마노프 왕조 복원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당장 로마노프 왕조를 복원한다는 건 무립니다. 새 정부는 어디까지나 소비에트 통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연립정부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군사독재는 안 됩니다. 통치는 민간정부가 맡아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차르와 로마노프 왕가에 충성하지만, 소비에트와 싸울 수 있다면 어떠한 깃발 아래서도 따를 용의가 있소.”
가칭 ‘연(沿)아무르 임시정부’안에 합의한 백군 잔당과 중도-우익 정치세력은, 1921년 6월 25일 디테리히스 장군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유 러시아를 위하여! 공격!”
25일 아침, 연해주정부의 청사가 일단의 군인들에 의해 포위됐다. 극동 인민혁명군은 국가정치보호국(정치경찰) 건물에서 저항했지만 봉기군은 야포를 발사해 굴복시켰다.
“장군, 적의 저항이 무력화됐습니다.”
“좋아, 수고했네.”
전 남러시아군 소장 빅토르 김(김인수)은 봉기군을 이끌고 주청사를 점령했다.
주청사에 극동 공화국 깃발이 끌어내려지고, 러시아를 상징하는 백청적 삼색기가 게양되었다.
이윽고 상륙부대가 예인된 바지선을 타고 상륙해 항구와 항만시설을 점령했다. 이들은 두만강변에 주둔하던 백군 극동군과 태평양함대의 잔당이었다.
“오늘 안으로 시가지를 장악한다. 서둘러라, 동지들!”
전 남러시아군 중령 표트르 최도 봉기군을 이끌고 시가지 장악에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고향인 그로선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작년에 지옥과도 같던 남러시아 전선을 떠나 대한제국 전함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하얼빈 조약으로 극동의 백군은 무장해제되었다. 예비역 신분으로 쉬고 있던 그는 결국 쿠데타 제의에 가담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 군대가 천직이었다.
쿠데타의 배후에는 한국이 있고, 그와 같은 한국계 러시아인(고려인)이 새 정부와 군부에서 중책을 맡으리라 예상되었다. 표트르의 대부(代父)인 최재형도 입각을 제안받았다.
연해주의 인민혁명군은 취약한 데다,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유혈 교전은 거의 없었다.
한나절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주요 지역, 기차역, 전신 사무소, 우체국, 주립은행, 주의회, 군 지휘본부가 봉기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연해주의 인민은 소비에트 정권의 괴뢰인 극동 공화국에서의 독립을 선언하는 바이다!”
이튿날, 소집된 연해주의회는 극동 공화국에서 분리 독립을 선포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롭스크에서도 잇달아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는 명백한 반동 쿠데타다. 인민혁명군은 속히 출동하여 진압하라!”
“배후에 제국주의 세력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속히 반란을 진압해 개입 여지를 없애야 한다.”
치타의 극동 공화국 정부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경악, 즉시 진압 명령을 내렸다.
극동 제2의 도시이자 아무르강의 전략적 요충지인 하바롭스크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극동 노농적군과 파르티잔을 재편한 신생 인민혁명군은 교전경험이 많은 병력을 보유했고, 쿠데타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 하바롭스크 도심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연해주 주둔 한국군이 개입했다.
“연해주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치안의 안정과 연해주 거주 한국인들의 보호를 위해 대한제국군은 특수군사작전에 돌입한다.”
“전군, 진격!”
6월 27일, 지난 이틀간 중립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던 한국군이 주둔지를 나서 무력개입에 나섰다.
연해주 전역에서 5만의 한국군이 개입하자, 분쟁의 추는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인민혁명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아무르강을 건너 퇴각해야 했다.
양측 모두 사상자는 많지 않았으나, 인민혁명군은 아무르강 도하 과정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도 니콜라옙스크에 증파하고, 일본 함대와 해군육전대는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를 점령하여 오호츠크해의 주요 항구를 장악했다.
단 며칠 사이에, 아무르강 이남 연해주의 주요 도시가 모두 백군과 후원세력에 의해 재점령되었다.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는 러시아제국과 러시아민주연방공화국의 정통을 계승하며, 그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권력 보유기관이자 비(非)정파 기관이다.”
새로 선포된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는 러시아제국과 민주연방공화국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다.
‘연해주(Primorye)’ 대신 ‘연아무르(Priamurye)’란 이름을 선택, 연해주뿐만 아니라 아무르주도 극동 공화국에서의 분리를 꾀했다.
프리아무리예는 영어로 트란스아무르(Transamur)’로 번역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미국 영사관은 ‘트란스아무르의 자유 투쟁’과 한국군의 ‘특수군사작전(Special military operation)’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극동 공화국으로부터의 연해주의 분리, 소비에트 체제 철폐, 전러시아 제헌의회 소집,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완수를 선언한다.”
임시정부는 지역 권력기관과 사법체계를 구성할 때 러시아제국 법전과 민주연방공화국 제헌헌법을 참조하면서도, 백군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화조치를 취했다.
1일 8시간 노동이 유지되고, 노동조합 활동이 허용됐다. 자영농에게 유리한 스톨리핀 농업개혁 완수를 선언하고, 적군이든 백군이든 가장 큰 원성을 샀던 농민으로부터의 징발행위를 일체 금했다.
“남러시아군과 흑해함대의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 편입을 허용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영토를 지키는 근간이 될 것입니다.”
쿠데타를 이끈 디테리히스는 임시정부 군사령관 지위만 맡았고, 저명한 자유주의 경제학자 표트르 스투르베(Pyotr B. Struve)가 임시정부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본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당선언문을 썼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스투르베는 일찌감치 자유주의로 전향했고, 입헌민주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옛 동지들인 사회주의자들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스투르베는 백군에 가담, 남러시아 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다. 남러시아군의 극동행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 먼저 왔다가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극동을 향해 항해 중인 6만의 남러시아군과 흑해함대는 신생 아무르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편입되었고, 이들이 대 소비에트 투쟁의 주력이 될 터였다.
“자유 러시아 만세! 자유 아무르 만세!”
“만세! 만세!”
재건된 백군 극동군이 ‘해방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 사열을 하자, 백계 주민들이 환호를 보내며 만세를 외쳤다.
본래 스톨리핀이 총독으로 재임하며 기반을 닦았던 극동인 데다, 소비에트 통치를 피해 온 백계 난민들이 최후의 희망으로 모여든 블라디보스토크였던 만큼 환호가 더 컸다.
“제정, 연방공화국, 소비에트, 백군 정부, 극동 공화국, 아무르 정부. 4년 사이에 대체 몇 번째 정권교체냐.”
“누가 집권해도 상관없으니 식량이나 제대로 공급되었으면 좋겠군.”
기실 주민들 대부분은 적군이든 백군이든 누가 되도 좋으니 빨리 내전을 끝내고 안정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들은 ‘정통 러시아의 수복’같은 거창한 주장 따위는 알 바 아니었고,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고 경제가 전쟁 이전으로 회복된다면 충분했다.
“군주주의자에, 자유주의자에, 인민주의자에, 전직 사회주의자에, 좌익에서 극우까지. 좋게 말하면 대연정이고 나쁘게 말하면 잡탕이구만. 이 정권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소?”
“10만 가까운 병력에 함대까지 확보했으니 당분간은 버틸 만합니다만, 그 외에는 솔직히 열강의 지원 여부에 달려 있지요.”
아무르 임시정부는 한국의 군사적 지원, 일본과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있어야만 지속이 가능했다.
장차 극동 공화국, 아니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체제 경쟁’에 나서야 하는데, 인구 100만가량의 연해주는 전체 러시아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했다.
러시아 수복이라는 헛된 이념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일단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게 중요했다.
* * *
“대한제국 정부는 아무르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지지한다.”
대한제국은 아무르 임시정부를 지탱하는 큰 힘이었다. 임시정부 인사들도 그걸 알기에, 백군 출신이라 할지라도 대러시아주의를 주장하진 못했다.
고려인은 약 20만으로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의 뒤를 잇는 연해주 제3의 민족이었고, 임시정부도 이들을 배려해야 했다.
“우리의 터전인 연해주를 지키기 위해, 동포들이여,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단결합시다!”
고려인을 대표하는 최재형이 재무장관, 문창범이 교통장관으로 입각하여 재정과 교통을 맡았다.
재정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고, 철도와 항만에 의존하는 극동의 특성상 교통도 중요했다.
핵심 요직 두 자리를 고려인이 맡을 정도로, 그 비중이 적지 않았다.
김인수 소장도 극동군 제2사단의 지휘를 맡아 군부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우리는 귀국을 믿습니다. 귀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현실을 이해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당장 식량과 군수품이 급할 터이니, 당분간 무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원산항과 청진항에서 식량과 군수품을 싣고 떠난 선박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했다. 함경북도 경흥에서도 거대한 무리의 소 떼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넘어갔다.
내전의 장기화로 러시아 전역에서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연해주는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았지만 식량 수급이 최우선 과제였다.
봉쇄로 고통받는 본토에 비해 ‘자유무역’을 내세운 연해주의 장점은 외국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한국은 백군을 재무장하고 식량과 군수품을 지원해 주는 대신, 실질적으로 연해주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과 인접한 연해주, 20만 한인 동포가 거주하는 연해주의 보호와 안정을 위하여 국군은 특수군사작전에 돌입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 내전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하여 소비에트 정부와 조약을 체결, 독립국 극동 공화국의 수립을 인정했으나, 소비에트의 기만책이라는 게 점차 분명해졌다.
치타 정권은 모스크바의 조종을 받는 위성국이며, 소위 인민혁명군은 적군을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인혁군의 극렬 과격한 분자들은 민간인 살상을 일삼고 한인들마저 학살하니, 대한제국 정부는 부득이하게 주민의 보호를 위하여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군은 아무르 임시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아, 백군과 함께 신속히 연해주에서 적군을 몰아내고, 특수군사작전의 1단계를 성공리에 완수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아무르 임시정부를 극동 러시아를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미합중국, 일본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공화국과 함께 극동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특수군사작전’을 알리는 정부의 공식 성명이 발표되자, 한국 전역에서 환호의 물결이 쳤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동양 평화의 수호자 대한국군 만세!”
단기간에 연해주 전역을 확보했다는 승전보에 고무된 국민은, 황성광장에 모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대고구려와 대발해의 후예인 대한국 만세!”
“발해의 고토인 연해주를 사수하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평양에서는 더욱 큰 대중 집회가 열렸다. 민족주의자들은 ‘발해의 옛 영토를 수복’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연해주가 절대 대한의 점령지나 괴뢰정권처럼 보이게 하면 안 된다. 정통정부를 지향하는 만큼 명망 있는 백계 러시아 인사들을 내세워 정부를 구성하고, 이들이 모든 걸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적군과의 대결에 앞장서서 피를 흘리는 것도 백군이 되어야지, 국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선은 아무르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의 위성국 역할을 할지라도, 표면적으로는 독립국으로 기능하며 소비에트를 막는 방패막이 되길 바랐다.
한국이 원역사의 일본처럼 지나치게 영토적 야욕을 보인다면 미국이 견제하려 들 터였다.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입장으로선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극동 공화국, 아니 소비에트 정부가 반격에 나설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지요?”
“물론 대비해야지. 하지만 저들은 동쪽 끝 연해주에 집중할 여유가 없을 걸세.”
“역시, 폴란드와의 전쟁 때문이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극동 공화국을 향해 또 다른 공세가 있을 걸세. 먼저 그걸 견뎌 내야 하겠지.”
이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