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기근의 흑기사
「우리는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러시아가 러시아를 이겼기 때문이다.」
「모스크바는 능욕당하고 구둣발에 짓밟혔다. 그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줄 것인가? 또 다른 끔찍한 모욕과 군인들의 군홧발?」
「나는 과연 승리를 믿고 있는가? 후방에서는 무지와 뇌물과 도둑질이 판을 친다. 전선에서는 무지와 용맹과 약탈이 위세를 떨친다. …… 우리는 그렇게 날뛰게 될 것이다. 탐욕에 눈먼 어두운 마음으로 모스크바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또 어린양이 셋째 봉인을 떼었을 때에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외치는 것을 나는 들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보라, 그것은 검은 말이었다. 또 그 위에 탄 자는 자기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다. (요한계시록 6:6)」
-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 ≪검은 말≫
전직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 러시아 애국주의로 전향한 혁명가이자 작가 보리스 사빈코프.
사빈코프는 과거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인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대공과 내무대신 플레베를 폭살했던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수장이었다.
사빈코프는 내전기에 백군에 가담했다. 과거 인민주의 테러조직의 수장이 백군으로 전향한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으나, 그는 이미 내전 과정에서 볼셰비키와의 투쟁에도 무자비한 능력을 발휘했다.
국제사회주의에 맞설 인민주의와 애국주의를 고양하고, 체카에 맞설 정보조직을 창설하여 맞섰다.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내무차관,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사절단,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여했던 사빈코프가 극동으로 돌아와 아무르 임시정부의 내무장관이 되었다.
사빈코프는 이미 프랑스 및 폴란드와 손을 잡은 경력이 있는 만큼, 한국과 손잡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단지 조건은 하나였다.
“극동이 볼셰비키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다면, 입각을 받아들이지요.”
그동안 사빈코프는 백군의 실패요인과 적군의 승리요인을 분석해 왔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왜 적군은 승리하고 백군은 패배했는가? 저들은 농민에게 토지를 약속했지만, 우린 주저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주저하지 않고 옛 동지라 해도 총알을 날렸지만, 우린 이합집산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수백만의 농민을 군대로 동원하는 동안, 우리는 수십만을 모으는 것조차 벅찼기 때문이다.”
토지분배를 외치는 볼셰비키를 무찌르려면 농민들에게 할 수 있는 양보를 모두 해야 했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귀족과 군부를 경멸했고, 소비에트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볼셰비키와의 투쟁은 무자비해야 한다. 동시에 인민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인민의 지지만이 승리로의 길이다.”
사빈코프는 연해주에서 유리한 환경을 발견했다. 이주자와 자영농 중심으로 편성된 사회는, 진취적이면서도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볼셰비키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오. 저들은 지금은 토지분배를 실시했지만,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도식대로 협동농장을 도입할 것이오. 농민들이여, 국가에게 토지를 헌납하고 국가의 소작농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 국가에 소속된 농민이 되려면 대체 뭣 때문에 농사를 짓는단 말이오?”
사빈코프는 반(反)볼셰비키 프로파간다의 명수이기도 했다. 농민에게 있어 토지 소유권만큼 민감한 문제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볼셰비키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새로 건설하는 국가는, 지주가 없을 것입니다. 국가도 지주가 될 수 없습니다.”
사빈코프는 신국가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대토지 소유주 없이 균일한 자영농 중심으로 건설된 사회는 군대와 국가의 근간이 될 것이다. 이 사회에는 결코 착취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국가, 국민, 군대는 한 사람의 지도자- ‘보즈드( (Vozhd, 수령)’의 지도를 받는다. 보즈드는 차르도, 수상도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키는 절대적 지도자다.
1920년대 유럽에 태동하고 있는 파시즘과 러시아 인민주의를 결합시킨 기묘한 사상에, 백군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무르 임시정부의 공식 입장과 관계없는 사빈코프 개인의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를 흥미롭게 여기는 이가 있었다.
연해주 주둔 한국군 특전대 지휘관, 아무르 임시정부 군사고문관 김좌진 부령이었다.
“대한과 아무르는 이제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땅에서 정통 러시아가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귀국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아무르 정부는 한국의 ‘후원’, 즉 보호를 받는 게 심리적으로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적군의 공세에 대비해야 합니다. 아무르강을 건너 먼저 선제공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토를 서쪽으로 최대한 넓혀야 합니다.”
백군 지휘부의 요청에 연해주 주둔 한국군 사령관 유동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닙니다. 연해주의 방어를 굳히고 안정적으로 정부를 건설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공격하지 않더라도, 볼셰비키가 러시아 최후의 백군인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유럽 정세를 잘 아는 사빈코프가 말을 이었다.
“소비에트에 그럴 여유가 없을 겁니다. 폴란드와의 전쟁에다, 러시아 중부의 기근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녹군이라 불리는 농민반란도 잇달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극동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지요.”
“내무장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공세를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필요 없습니다.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극동 공화국도 제 코가 석 자일 겁니다.”
“무슨 계획이라도?”
“곧 몽골군이 자바이칼을 공격할 겁니다. 인민혁명군은 이쪽에 집중해야겠지요.”
유동열은 지도에서 몽골과 바로 그 북쪽의 자바이칼-부랴트 지구를 가리켰다.
* * *
1921년 7월, 몽골 초원.
“부랴트의 우리 형제들이 해방의 날을 고대하고 있도다! 칭기즈칸의 대몽골을 재건하자, 동지들!”
“와아아아아아!”
몽골군 제1기병군단이 사령관의 연설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몽골군’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사령관과 장교단은 대부분 러시아인이었다. 병사들도 몽골인, 부랴트인, 만주인, 티베트인, 타타르인, 튀르크인, 카자크, 러시아인이 섞여 있었다.
사령관의 이름은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Roman von Ungern-Sternberg) 남작, 전 러시아 제국군 기병장교였다.
부랴트계인 바이칼 카자크 지휘관 그리고리 세묘노프와 아시아 기병사단장 운게른은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고론자로, 이들을 위험분자로 찍은 이선과 스톨리핀에 의해 백군에서 추방되었다.
세묘노프와 운게른을 추종하는 병력은 군사력이 절박하게 필요한 몽골로 향했다. 세묘노프의 부랴트 혈통과 운게른의 광기 넘치는 카리스마는 주변 유목민들을 끌어들이고, 몽골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운게른의 기병사단은 만주-몽골 분쟁에서 몽골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할하 몽골(외몽골)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하는 차하르 몽골(내몽골) 왕공들의 반란도 진압했다.
신생 몽골의 영웅으로 떠오른 운게른은, 몽골의 칸 복드칸으로부터 ‘호쇼이 친왕(和碩親王)’의 작위와 몽골군 사령관직을 받았다. 운게른은 옛 상관 세묘노프를 밀어내고 지휘권을 독점했다.
몽골식 장포에 러시아군 계급장과 훈장을 달고, 몽골제 기병도와 러시아제 권총을 찬 운게른의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동서화합을 내세운 운게른은 몽골인들이 믿는 티베트 불교로 개종하고, 결혼도 만주족 귀족 여인과 했다.
러시아인으로서 몽골의 친왕이 된 운게른은 점차 몽골 왕공들이 주창하던 대몽골주의에 심취했다. 외몽골, 내몽골, 자바이칼(부랴트), 탄누투바, 신강, 티베트를 잇는 칭기즈칸의 대몽골국을 재건하겠다는 망상을 품게 되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의 봉신이었다. 러시아는 몽골 덕에 유라시아를 제패할 수 있었다. 러시아와 몽골의 통합은 운명이다.”
운게른은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진 않았지만, 킵자크 칸국을 건설한 바투칸의 후예를 자처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칭기즈칸은 누구인가?
칭기즈칸의 정신적 후계자인 복드칸인가?
“달라이 라마의 전언에 따르면, 한국 황제야말로 새로운 전륜성왕이자 칭기즈칸의 재래다. 이선은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만주를 정복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한국으로 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 황제는 로마노프 왕조와 함께 빨갱이들을 깨부수고 유라시아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그 선봉장이 되겠다.”
달라이 라마의 보좌관 승려 도르지예프, 부랴트인 사이비 의사 바드마예프와 친밀한 관계가 된 운게른은 ‘전언’을 믿게 되었다.
이선이야말로 전륜성왕이자 칭기즈칸의 재래요, 차르의 자녀들이 한국으로 피신한 것은 운명이라고.
로마노프 왕조의 충신이자 바투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운게른은 대몽골-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해 알렉세이 대공에게 바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로마노프 왕조의 보호자’인 한국 황제가 흔쾌히 지지해 주리라 믿으며, 거듭 한국과 접촉하며 러브콜을 보냈으나, 정작 이선의 반응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저 미치광이에게는 어떠한 지원도, 어떠한 약속도 하지 말 것.」
운게른에게는 야속하게도, 이선은 그를 외면했다. 심지어 소비에트 정부와 타협해 극동 공화국 수립을 인정하고, 몽골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운게른의 부대가 극동 공화국군과 교전하는 것도 금지했다.
“배신자! 어찌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저버리고, 빨갱이들과 타협을 한단 말인가! 정녕 눈앞의 이익만 따지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배신감과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운게른은, 자신만의 성전에 돌입했다.
백군 사령부가 빼돌린 금괴 11톤을 운게른이 다시 빼앗아 군비 확충에 쓰고, 명목상 청국령일 뿐 사실상 독립국인 신강군벌 양정신과 패권을 다투는가 하면, 몽골 고원 너머 중국 군벌과도 교전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전쟁에 미친 남작이었다.
1921년 여름, 소비에트와의 성전을 고대해 마지 않던 운게른에게,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한국군이 연해주에서 ‘특수군사작전’을 실시하고, 몽골에도 극동 공화국령 자바이칼 공격을 제안했다.
몽골 정부 입장에서 자바이칼의 부랴트인들은 대몽골로 통합되어야 할 형제들이었고, 소비에트와의 일전을 원하던 운게른으로선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 드디어 한국 황제가 정신을 차렸구나! 대몽골-유라시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잊으면 안 되지!”
운게른은 이선의 ‘개심’을 열렬히 환영했다.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성전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동안 수준 떨어지는 놈들과 교전을 벌이는 것도 지긋지긋했소. 우리의 적은 볼셰비키란 말이오. 볼셰비키를 죽이게 해 준다면 뭐든 다 하겠소!”
“작전 목표는 어디까지나 자바이칼 주,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와 치타입니다. 명분은 부랴트인의 해방과 몽골 통합.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주청 한국 판무관 김규식을 만나 극동 공화국에 대한 교전을 허락받은 운게른은, 7월초 휘하의 몽골 기병군단을 이끌고 ‘성전’을 개시했다.
“대몽골의 전사에게 자비란 없다! 볼셰비키 빨갱이들을 모조리 죽여라! 대몽골과 로마노프 왕조의 재건을 위하여!”
극동 공화국, 아니 소비에트 정부로서는 참으로 광기 넘치는 적의 침공이었다.
* * *
소비에트 러시아, 모스크바.
유럽 러시아 최후의 백군이 크림반도에서 패퇴하면서, 내전은 종식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와 지속되는 전쟁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나키스트 흑군과의 투쟁, 중부 러시아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대규모 농민반란이 더 위협적이었다.
극동에서 벌어진 백군 쿠데타와 연해주 점령은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미치광이 남작이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도, 부차적인 전선에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전쟁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가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볼가강 일대에 기근이 심각합니다. 기근의 영향을 받는 인구가 1천만 이상입니다.”
전쟁의 적기사와 질병의 백기사에 이어, 기근의 흑기사가 러시아에 암운을 드리었다.
1914년부터 4년간 지속된 대전쟁,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내전. 7년간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러시아의 경제는 파탄 상태에 이르렀고, 도시와 농촌은 붕괴 위기에 놓였다.
내전기간 동안 모든 세력 – 적군, 백군, 흑군, 분리주의 세력 가릴 것 없이, 농민으로부터 식량을 징발해 군대를 운용하고 지지자를 먹여 살렸다. 농민들은 식량 생산을 줄여 저항했고, 암시장에 팔기 위해 식량을 숨겼다.
하늘조차 도와주지 않았다. 2년 연속 가뭄이 지속되었고, 수확량은 최악으로 떨어졌다.
1921년 봄 백군이 패퇴하면서 소비에트 정부는 징발정책을 폐기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대거 받아들인 ‘신경제정책’을 도입했으나, 식량 위기와 기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름에 이르자 비축 식량은 모두 소진되었고, 대규모 기아가 유럽 러시아를 덮쳤다.
“이대로 가면 기근이 확산되어 파멸적인 위기에 봉착할 겁니다. 자본주의 국가에 구호를 요청해야 합니다.”
“혁명을 파괴할 궁리만 하는 제국주의 세력에게 구걸하잔 말입니까?”
“혁명도, 전쟁도, 건강한 노동자와 농민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 늦다간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린 백군보다 더 위협적인 기아라는 적에 직면해 있습니다. 농민반란의 규모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기아를 방치했다간 소비에트 정부의 권력기반 그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겁니다!”
기아 위기에 직면한 러시아에서, 혁명과 전쟁보다 당장 시급한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격렬한 논쟁 끝에, 소비에트 정부는 미국 구호청(American Relief Administration)에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구호청은 중동부 유럽의 기근, 특히 소비에트와 전쟁 중인 폴란드의 기아를 퇴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미국의 식량 지원이 없었더라면, 폴란드에서도 기아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미국 우드 행정부는 소비에트에 부정적이었지만, 구호청은 인도적 차원에서 러시아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밀리에 소비에트 외무부와 미국 구호청 간에 협상이 진행됐다.
“극동 문제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거기까지 손 쓸 여지가 없소. 극동 공화국 동지들에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제안하는 바이오.”
울리야노프는 당장 극동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극동에 대한 침략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물론 침략에는 방어해야겠지. 극동 인민혁명군의 전력은 자바이칼을 향해 공세를 퍼붓는 몽골군과 미치광이 운게른을 막는 데 집중하시오. 아무르강 이남의 한국군과 백군 잔당이 먼저 도발하기 전에는, 연해주 문제는 일단 뒤로 미뤄 둡시다.”
미국의 인도적 지원을 받아야 할 상황인 소비에트 정부는, ‘미국이 배후조종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과 백군 잔당의 연해주 쿠데타’를 일단은 묵인해 줄 생각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백군이나 외국군보다 더 무서운 ‘기근의 흑기사’, 기아라는 적을 만나게 되었다.
형체는 없지만, 인간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