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휴전과 분단
대기근은 심각한 문제였다. 러시아는 제정 시기에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었고, 30년 전 1891-92년의 기근도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고 제정의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1891년의 기근이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세계의 모든 정직한 국민에게. 오랜 전쟁으로 우리의 국토는 황폐화되었습니다. 빵과 약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저명한 작가 막심 고리키(Maxim Gorky)가 대표가 되어 미국과 유럽에 식량 지원을 호소했다.
북극 탐험가이자 국제연맹 난민 고등판무관 프리티오프 난센(Fridtjof Nansen)이 호소에 응답하여 러시아 구호위원회를 결성하고, 국제연맹과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지원해야 합니다. 이건 인류의 비극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인도적 위기에 공감하는 건 아니었다. 반공주의자들은 공공연히 비판했다.
“굶주림과 볼셰비즘 중에 뭐가 더 위험합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빨갱이들을 굶겨 죽여서 파멸하게 내버려 둬야 합니다.”
“기아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생각입니까? 특히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아무 죄 없는 어린이 수백만 명이 죽게 내버려 둔다면, 우리가 그러고도 문명사회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난센의 호소에 국제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버트 후버가 이끄는 미국 구호청은 빠르게 대응하여, 1921년 8월 라트비아 리가에서 소비에트 정부와 식량 구호를 합의했다. 당장 9월부터 식량을 실은 선박이 페트로그라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매일 1백만 명의 어린이에게 식량을 제공한다는 목표였다.
‘인종, 신념 또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미국 구호청은 소비에트 정부의 동의를 얻어 자율권을 갖고 식량 구호를 실시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비극을 지켜만 볼 수 없으며, 특히 기아의 위기에 처한 어린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우리는 식량 지원을 정치적 무기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주권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기아와 전쟁, 두 가지를 모두 대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와 주변국 정부에 호소합니다. 즉시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촉구합니다.”
역사의 변화로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국제정치에 적극 개입하게 된 미국은, 식량 구호를 계기로 러시아 내전과 국제전의 종식을 압박했다.
중부 벨라루스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전투를 벌이던 폴란드에도 압력을 가해, 폴란드와 소비에트 정부 간에 휴전을 맺도록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양국은 휴전에 동의했다. 국경은 차후의 조약에서 확정하기로 하고, 민스크-지토미르-빈니차를 잇는 현재의 전선에서 휴전선이 형성됐다.
“지금 중요한 건 신경제정책을 안착하고, 농민과 노동자들을 굶주림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일단 ‘숨 돌리기’에 동의했다. 7년간의 기나긴 전쟁으로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고, 붕괴 직전에 놓인 경제를 재건하는 게 급선무였다.
다만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흑군과 러시아 중남부의 녹군, 투르키스탄(중앙아시아)의 무슬림 반군에 대한 공격은 지속되었다. 이들은 반란군으로 규정되었고, 이들을 지원하는 외국 세력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극동이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극동 백군 잔당이야말로 거슬리기 짝이 없었으나, 이들의 배후에는 한국, 일본, 미국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다.
「극동 공화국의 동지들에게 - 연해주 해방을 위해서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는 동지들의 의견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지금 우리가 동양 제국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외교적으로 극동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타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저들이 끝까지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인민의 바다에 빠져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극동 인민혁명군은 아무르 전선에서 방어를 유지하되, 자바이칼 전선에서는 운게른과 몽골군의 공세에 대응하여, 몽골의 동지들과 함께 반혁명 정권을 전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인내해야 할 시기입니다, 동지들. 몇 년 내에 우리에게 유리한 정세가 도래하리라 생각합니다. 충분히 힘을 축적한 후에, 연해주의 마지막 백비군 잔당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 인민위원협의회.」
* * *
대한제국, 황성.
“극동 공화국이 평화회담에 응했습니다. 10월에 대련에서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음. 미국의 압력이 효과가 있었던 걸 보면, 과연 기아 문제가 심각한가 보군.”
극동 공화국, 아니 그들의 배후에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휴전에 동의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연해주 탈환을 위해 한국, 더 나아가 일본 및 미국과 대립한다는 선택지를 택하기가 어려웠다. 당분간 미국에서 막대한 식량 지원을 받게 된 소비에트가, 미국의 신경이 거슬릴 연해주 탈환이라는 군사적 도박을 감행할 여유가 없었다.
미국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영사관을 통해 ‘법적으로는(De jure)’ 아니지만, ‘사실상(De facto)’ 아무르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이윽고 영사관 보호를 명목으로 필리핀에서 차출한 해병대 1개 중대를 주둔시켰다. 이는 사실상의 정권 승인을 넘어 외교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본도 연해주의 상업적 이권을 받는 조건으로 아무르 임시정부를 사실상 승인하기로 했다. 군부는 독자적인 작전을 희망했으나, 문민정부는 군부를 제어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해의 항구도시를 점령하는 선에서 추가파병을 멈췄다.
“연해주의 식량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게. 아무르 임시정부가 존속하려면 무엇보다 주민을 잘 먹여야 해. 우리가 연해주에 개입한 이상 그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네.”
“예, 폐하.”
“아무르 임시정부가 존속하고, 연해주가 사실상 대한의 세력권으로 승인받은 이상, 우리도 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네. 판무관은 군무대신과 함께 극동 정부와 협상에 나서도록.”
“삼가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1921년 10월 초순, 청국령 대련. 사실상 한국이 지배 중인 대련에서 평화회담이 개최됐다.
“극동 공화국 정부는 불법적인 쿠데타를 감행한 아무르 반혁명 정권을 결코 인정할 수 없으며, 이들을 후원하여 군사적 점령을 단행한 한국 정부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아무르 정부의 분리는 의회에 의해 합법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니콜라옙스크에서 발생한 인민혁명군 제4여단의 학살에 깊은 분노를 느끼며, 주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개입하였을 뿐입니다.”
“학살을 저지른 자들은 반란군입니다. 이들은 정부가 파견한 정치위원도 사살한 반역자들입니다. 인민혁명군은 반란군을 토벌하여 범죄자들을 처단했습니다.”
학살극을 벌인 극동 흑색 반란군은 인민혁명군의 추격을 받아 토벌되었다. 사령관 트랴피친 이하 지휘관 5인은 현장에서 총살당했고, 병사들은 노동교화소로 끌려가 수감되었다.
“중요한 건 그들이 인민혁명군 소속이었다는 거지요. 우리 국민 수백 명이 학살당했는데, 우리 정부와 군대가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던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언제 철수하겠다는 말입니까?”
“연해주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우리는 아무르 임시정부의 정식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정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도 귀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한국과 극동 간의 회담은 공전(空轉)을 반복하다가, 결국 이동휘의 통첩으로 이어졌다.
“귀국이 원하는 게 평화입니까, 전쟁입니까? 귀국이 아무르 정부를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도 귀국을 법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거니까요. 하지만 사실상 승인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아무르 이남에서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만약 전쟁을 원한다면, 우리도 부득이하게 응전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사실상 최후통첩을 받은 극동 사절단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인지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지원할 여유가 없다는 걸 밝혔고, 충돌하지 말라는 지령까지 내렸다. 명목상 독립국이지 사실상 위성국인 극동 공화국은 본국의 지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백군 도당들이 아무르 이북으로 공격하려는 걸 귀국이 통제할 수 있다면, 우리도 아무르 이남에서 파르티잔 투쟁을 멈추겠습니다.”
“물론 그리하겠습니다.”
“캬흐타를 점령하고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로 공세를 퍼붓는 운게른의 몽골군은 어찌할 겁니까? 우리는 결코 이들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한다고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연히 귀국은 국토를 방위할 권리가 있지요.”
한국이 목표를 달성한 후 극동 공화국과 다시 회담을 추진하자, 운게른은 더욱 분노하여 자바이칼 영내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몽골족의 ‘형제민족’이라는 부랴트족차도 학을 떼고 인민혁명군에 협조할 정도였다.
“우리는 미치광이 침략자를 무찌르고 우르가(울란바토르)로 반격할 겁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몽골은 대청국의 일원이고, 대한제국은 대청국의 영토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되면 우리로선 묵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운게른의 침략을 격퇴하는 건 좋지만, 몽골 영내로 진입하여 ‘혁명(정권 교체)’을 시도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럼 운게른이 몽골로 도망쳐서 계속 극동을 침략할 준비를 하도록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
“뭐, 그럴 수야 없지요. 그는 지금껏 계속 승리했기에 몽골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부랴트 해방에 실패한다면 권위가 크게 실추될 겁니다. 그리되면 몽골인들이 러시아 군인, 그것도 정신 나간 군인의 모험을 원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실각을 암시하는 김규식의 말에 극동 사절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 침략자를 섬멸할 겁니다.”
“그리하십시오. 만약 운게른이 도망쳐 오면, 재갈을 확실히 물리지요.”
운게른은 이성과 전략이 아닌 광기와 즉흥성으로 움직이는 인물이고, 한국으로서도 운게른과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은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하르빈 조약이 이미 휴지 조각이 됐으니, 우리는 성문화된 별도의 조약을 맺을 생각이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상호 간에 휴전, 사실상의 묵인만 이뤄진다면 말이지요.”
10월 20일, 한국과 극동의 회담은 공식적으로 결렬되었다.
하지만 상호 간에 비공식적 휴전에 합의했고, ‘법적으로는(De jure) 아니지만, 사실상(De facto)’ 아무르강을 경계로 극동을 분단하는 걸 인정했다.
이로써 극동에 다시 평화가 도래했지만, 영구한 평화를 의미하는 게 아닌 일시적 휴전이었다.
* * *
아무르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는 제4의 로마요, 연해주는 정통 러시아 최후의 보루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땅을 지킨다.”
사실상 정권으로 승인받은 아무르 임시정부는, 마침내 극동에 도달한 남러시아군과 흑해함대를 흡수하여 10만 병력과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극동군 사령관 디테히리스 중장, 남러시아군 사령관 브랑겔 중장, 해군총사령관 콜차크 대장이 군부의 ‘3두’를 구축하여 소비에트에 대한 보복과 러시아 수복을 천명했지만, 후원자인 한국의 압력으로 휴전상태의 유지에 동의했다.
임시정부의 민간 정치인들은 피난민을 안착시키고, 식량을 공급하고, 토지개혁의 완수를 다짐하며 안정적인 정권 수립에 노력을 다했다.
“하늘에 한국 항공대가 출현했습니다!”
“오오.”
블라디보스토크 상공에 청진 비행장에서 이륙한 대한육군항공대 제1항공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시정부의 군사령관들은 거수경례하며 항공단을 맞이했다.
백군은 항공대가 소멸한 상황이고, 공업기반이 취약한 연해주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능력도 없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항공대의 주력인 최신형 ‘이무’ 중폭격기는 러시아 중폭격기 일리야 무로메츠를 기반으로 만들었고, 군무부 기술고문으로 신형 전투기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도 러시아인 이고르 시코르스키였다.
백계 망명자인 시고르스키는 아무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한국은 항공대를 보내 연해주의 육지뿐만 아니라 하늘도 한국군이 보호한다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과거에는 조선과 한인이 러시아의 호의에 기대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백계 러시아인이 한국의 호의에 기대는 역전의 상황이었다.
“비록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많이 낙후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연해주는 우리의 정신을 지킬 수 있는 보루이자 새로운 조국이 될 수 있습니다. 동포들이여, 자유의 땅으로 갑시다!”
소비에트 통치를 피해 망명하는 백계 러시아인들은 이제 프랑스나 독일이 아닌 극동으로 향했다.
러시아 ‘은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들, 파리로 망명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미국으로 망명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이 잇달아 연해주를 방문해 공연했다.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트라빈스키와 라흐마니노프는 파리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지만, 프로코피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 극동에 재건된 마린스키 교향악단을 이끌었다. 그를 따라 젊고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모여들었다.
새로운 사회를 약속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20세기 초 전 세계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과 찬탄을 안겨 주었지만,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익숙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는 버티기 어려운 체제였다.
사회주의 혁명에 공감했던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조차도, 내전기에 점차 억압이 거세지는 소비에트 통치를 피해 이주를 개시했다.
문학에는 니콜라이 구밀료프-안나 아흐마토바 부부,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지나이다 기피우스 부부, 이반 부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미하일 불가코프, 마리나 츠베타에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등 당대와 미래에 쟁쟁한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미술에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세대, 혁명에 공감하며 아방가르드 예술을 설파했던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갈, 카지미르 말레비치, 나탈리아 곤차로바 등도 결국 러시아를 떠나 극동으로 향했다.
이들 중 일부는 다시 파리와 베를린으로 떠나게 되지만, 상당수가 극동 잔류를 선택하고 연해주에서 새로운 예술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역사의 변화가 만들어 낸 ‘극동의 은세대’였다.
“자유를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라. 짐이 그들의 후원자가 되겠다.”
‘학문과 예술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는 대한제국 황제’ 이선은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망명자들의 극동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과학자와 발명가, 철학자와 인문학자들도 속속 극동에 합류했다.
이들은 이선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예술 활동과 학문적 연구를 지속했고, 낙후되었던 극동 러시아에 지적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극동과 인접한 대한제국에도 초빙되어, 한국에 발전된 학문과 새로운 예술 사조를 전파했다.
황성과 평양에서는 러시아발 신학문과 예술의 바람이 불었고,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새로운 청년 지식인 세대가 성장했다.
1920년대, 역사의 변화가 만들어 낸 동서양의 지적 결합이자 대한제국의 지적 전환점이었다.